소설리스트

탑에 갇혀 고인물-495화 (494/740)

495화 데르카

바이사와의 대화가 시작되고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

-똑똑

노크 소리와 함께 시종이 들어왔다.

들어오라는 말도 없었는데 문이 열리자 바이사의 표정이 구겨졌지만, 진땀을 흘리는 시종 뒤에 선 인물을 보자니 끄응, 하는 신음과 함께 자리에서 일어선다.

“무슨 용무로 오셨소, 데르카.”

난 입을 다문 채 상대방을 바라봤다.

데르카. 바르사가 가장 먼저 입에 담은 인물이었다. 동시에 그가 이곳으로 오게 된 이유기도 하고.

‘마족으로 의심되는 자라고 했던가.’

무너진 마탑은 간단하게 말해 그거였다. 마족을 찾아 죽이는 흑마법사들의 대척점.

어째서 무너진 탑이냐.

‘흑마법사들이 마족을 불러들이기 전, 가장 먼저 없앤 마탑이라 했었지.’

직접적으로 그렇게 말한 건 아니다. 그가 말한 걸 토대로 정리한 거지.

그만큼 흑마법사 입장에서는 가장 경계했던 집단이기도 하다. 마족을 경계하고 흑마법사만큼이나 마족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이들이니까.

흑마법사가 날뛴 게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먼 과거에도 그랬었고 그때 끝내 흑마법사들을 물리쳤던 대마법사가 무너진 마탑의 뿌리라고 했으니.

“손님이 있다 해서 들렀네. 아무래도 시기가 시기인 만큼 외부인을 함부로 불러들이는 건 좋지 않으니 말이야.”

“내 개인적인 손님이오. 영주님의 총애를 받는 건 알지만 무례하군.”

“영주성 내부에 들이는 모든 이는 내 손을 거치니 이를 무시한 바이사 자네 또한 무례하군.”

신경전이 살벌하다.

내가 본 바이사도 상당한 실력자인 듯했는데 눈앞에 있는 데르카라는 인물도 만만한 놈은 아닌 듯했다.

날카롭거나 위협적인 기세는 따로 보이지 않았으나 쉬이 접근하기 힘든 아우라가 풍긴다.

타고난 건가, 아니면 다른 힘이 있는 건가.

확인해 보면 되겠지.

난 권능을 사용했고.

[SSS급 권능, 별을 주시하는 눈이 발휘됩니다.]

[SSS급 권능, 밤하늘에 숨은 자가 몸을 숨깁니다.]

오호라.

녀석의 권능이 반응했다. 밤하늘에 숨은 자라.

-츠즈즈즈즛

눈에 보이지 않는 스파크가 튀어 오르며 두 권능이 격돌한다.

동급의 권능. 이름을 봤을 때부터 예상한 대로 자신의 정보를 숨기는 힘을 가진 거 같다.

이런 적은 현자를 만났을 때 이후로 처음인 거 같은데.

다만 상성이 좋지 않다.

[SSS급 권능, 별을 주시하는 눈이 밤하늘을 꿰뚫어 봅니다!]

권능에는 이름이 붙는다. 아무런 의미 없이 그냥 붙는 것은 아니고 각 능력이 지닌 바를 은유적으로, 혹은 직접적으로 나타낸다.

그런 의미에서 놈의 권능은 내가 가진 것을 상대로는 제 성능을 발휘하기 힘들었으나.

“뭐, 되었다. 그동안 네가 꾸미던 일은 파악했으니. 영주님을 중독시키고 영지를 빼앗으려는 악독한 계획은 밝혀진 지 오래. 오늘 흑마도의 일축을 끊겠다. 바이사를 생포하고 그의 수하를 죽여라!”

그보다 빨리 놈이 움직였다.

사방에서 느껴지는 기척. 무장을 한 무리가 문을 부수며 난입했다.

갑옷을 입고 검을 빼 들었으며 검기를 뽑아 올리고 있었으니.

“기사?”

“드디어 본색을 드러내는구나, 데르카!”

뭔 상황인지 알아차리기도 전에 기사들이 검을 휘둘렀다.

바이사 또한 가만히 있지 않고 마법을 사용했으나.

-챙강!

마나가 모이기가 무섭게 데르카가 난입했다.

그의 손에 들린 검이 시커멓게 물들더니 허공에 뭉치던 마나를 깨트렸다.

아마 마법을 못 쓰게 만드는 아이템이 아닐까 싶은데.

“이거 곤란하네.”

“그에에.”

당장 나도 이쪽을 상대해야 했다.

나를 향해 검을 휘두르는 기사가 다섯. 문밖을 보니 병사로 보이는 이들이 퇴로를 막고 있었다.

날을 잘못 잡았나. 아니면 외부인이 들어왔다는 걸 듣자마자 등반가라고 생각해 일을 벌인 건가.

어느 쪽이든 좋은 상황은 아니었다.

-카아아아앙!

거칠게 혼돈검을 뽑아 기사의 검을 쳐 냈다. 힘에서 밀릴 줄은 몰랐는지 기사의 얼굴에 당혹감이 깃들었고.

“죽이면 일이 커지겠지?”

-빠각!

놈에게 파고들며 몸을 낮췄다. 그대로 발을 내밀어 녀석의 발목을 밟아 부러트리자 갑옷의 무게를 이기지 못한 기사가 자빠졌다.

일단 한 놈.

“예사 놈이 아니다! 방심하지 마라!”

“데르카 님의 말이 맞았군! 사악한 흑마도와 손을 잡다니 부끄러운 줄 알아라!”

남은 기사들이 기세를 끓어 올린다.

삽시간에 신체 능력이 올라간 이들이 더욱 빠르고 촘촘하게 포위망을 좁혀 온다.

푸르게 빛나는 검기. 산적 두목도 검기를 사용하기는 했지만 훨씬 색이 짙다. 일렁거리지도 않고 검신의 형태를 온전히 유지하고 있었으니 꽤 수준급이 아닐까 싶다.

잘됐네.

“편하게 때려도 되겠어.”

잘못 맞아도 즉사하지는 않겠지.

목을 노리고 들어오는 검을 몸을 비틀어 피한 뒤 왼손으로 검을 붙잡았다.

상대가 입꼬리를 올린다.

“멍청한 녀석, 맨손으로 검기를…….”

-콰득

[강철의 의지(S) Lv.10+]

[강체强體(S) Lv.10+]

[물리 공격 내성(S) Lv.10+]

[마법 무효화(S) Lv.10+]

“맨손이 뭐.”

검기고 나발이고 그동안 더한 것도 겪어 봤다. 스킬이 발동되는 동시에 나 역시 마력을 움직여 손에 힘을 줬으니 놈의 검기로 손가락이 잘려나갈 일은 없었고.

“이익!”

[달라붙기(S) Lv.10+]

급하게 검을 빼려는 녀석의 검을 더욱 세게 붙잡아 당겼다.

그와 동시에 버프 다이스.

[2]

[통증 증가]

타격당한 대상이 느끼는 통증을 배가시키는 버프.

대미지가 더 들어간다거나 하는 건 아니지만.

-콰앙!

“크하아악!”

맞는 입장에서는 말이 다르지.

힘껏 내지른 주먹에 코가 뭉개진 기사가 뒤로 나뒹군다. 눈이 뒤집힌 게 진짜 아픈 모양. 코가 아프기는 하지.

이걸로 둘. 남은 건 3명 정도인데.

“왜들 그리 서 있어? 빨리 끝내야지.”

“도대체 어디서 이런 괴물이.”

“크윽!”

처음 들어왔을 때의 기세는 어디 가고 주춤거리며 경계를 하고 있었다.

흘낏, 바이사 쪽을 바라봤다.

“빠져나갈 수 있을 거라 생각했나!”

“함정을 파다니, 이런 고얀!”

그리 좋아 보이지는 않는다.

마법을 파훼하는 무기 때문인지 제대로 된 마법을 사용하지도 못한 채 도망치기 급급하다.

그나마 시전 속도가 빠른 마법들로 간신히 버티고는 있지만 얼마나 버틸지는 모르겠고.

‘일부러 방에 있을 때 덤빈 거구만.’

탁 트여 있는 곳이었다면 어떻게든 거리를 벌린 뒤 도망칠 수 있었을 테니까.

아무래도 내가 찾아온 타이밍이 안 좋았던 거 같다. 그 증거로 나보다는 바이사 쪽을 신경 쓰고 있고.

만약 내가 등반가라는 걸 알고 있었다면 나부터 노렸겠지. 물론 나를 경계하고 있지 않은 건 아니다.

시선을 바이사에게 가 있지만 감각을 넓게 펼쳐 나를 주시하고 있다는 게 느껴졌으니까.

빠르게 바이사를 제압하고 나를 노리겠다는 거 같다.

“모르겠다. 어차피 일 꼬인 거 좀 더 막 나가지 뭐.”

선빵 쳐 놓고 자비를 바라면 안 되는 거니까.

-파아앙!

기사들을 향해 돌진하려는 듯 페이크를 준 뒤 몸을 돌려 데르카를 향해 도약했다.

“이, 이런!”

“잡아라!”

뒤늦게 기사들이 날 쫓으려 했으나.

[파이어 밤(SSS) Lv.1]

-콰아아아아아앙!

거대한 폭발과 함께 저 멀리 튕겨 나갔다.

강력한 화력에 접객실이 박살 나고, 열기와 충격파로 인해 벽이 무너져 내린다.

이 순간만큼은 바이사와 데르카 역시 공세를 멈추고 방어에 힘썼으니.

-구구구구구

천장이 내려앉으며 난장판이 된 공간 밖으로 빠져나온 바이사와 데르카가 나를 바라봤다.

“어, 건물을 좀 대충 지었네.”

민망하게 머리를 긁적였다.

그래도 최대한 약하게 터트린다고 터트린 건데 이렇게 될 줄은 몰랐지.

원래 계획은 폭발로 기사들을 밀어내고 데르카를 공격하는 거였다. 방 자체를 날려 버리는 게 아니라.

파이어 밤이 SSS급에 이르더니 상상 이상으로 강한 파괴력을 보였다.

다행히 건물 자체가 무너지지는 않았다. 잘된 일이지. 안 그랬으면 건물 안에 있던 무고한 사람들도 죽었을 테니까.

시스템으로 만들어진 사람들이란 건 알지만 찝찝한 것도 있고, 그랬다가는 뒷수습이 힘들어진다.

그런 나를 보며 바이사와 데르카가 침을 삼킨다.

“신성 마법사인 건 알았지만 이 정도 수준일 줄이야.”

“…신성 마법사? 제길. 하지만 신성력은 느껴지지 않았는데.”

그야 그렇겠지. 신성력만 있었을 때는 은연중에 신성력을 풍기고는 했는데 마기도 같이 얻으면서 중화됐다.

그나저나 저렇게 반응한다는 건.

“마족 맞네.”

그럼 상대하기 더 쉽지.

[러브 앤 피스(S) Lv.10+]

-파아아아앗!

몸에 신성력을 둘렀다. 순간 뿜어져 나온 새하얀 광채에 데르카의 얼굴이 잔뜩 구겨졌고.

“교단까지 끌어들였을 줄은 몰랐군. 인정하지. 여간내기가 아니구나, 바이사.”

쩌적.

데르카의 피부가 갈라졌다.

번데기를 벗어던지고 본래의 모습을 되찾으려는 걸까.

“나야 좋지!”

번데기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 자고로 곤충도 변태를 한 후가 가장 약한 법이다. 외피가 마르지 않아서 물렁하거든.

그게 아니더라도 변신 도중에 받는 공격이 취약하다는 건 상식.

[일렉트릭 쇼크(SS) Lv.1]

-콰과과과광!

러브 앤 피스로 신성력을 잔뜩 넣어 전격을 내뿜었다.

SS등급에 오른 뇌전이 번개처럼 떨어진다. 언제 어떤 식으로 도주할지 모르니 감전 효과가 있는 공격을 하자는 판단이었고.

-파지지지지지직!

“크하아아아악!”

미처 자리를 피하지 못한 녀석이 번개에 적중당했다.

마족이라고는 하지만 따지고 보면 악마의 일종, 신성력에 취약하다.

시커먼 연기와 함께 몸을 비튼 녀석의 눈이 붉게 달아오른다.

화났네.

-구구구구구궁

그 와중에 변신이 끝났는지 인간의 모습을 벗어던진 녀석이 거대한 덩치를 드러냈다.

시커먼 털로 뒤덮인 몸. 역관절 다리와 말의 머리를 단 데르카가 한 손에 쥔 곡도로 나를 가리켰다.

아까와는 비교할 수 없는 살의와 마기가 쏟아지자 검은 바람이 사방으로 나부낀다.

마기 특유의 거칠고 난폭한 기운에 바이사가 얼굴을 구겼고, 우리를 향해 달려오던 기사와 병사들마저도 두려움에 뒷걸음질 쳤다.

“1군단장의 네 번째 만인장, 데르카의 이름으로 네놈의 사지를 찢어 버리겠다.”

“오, 변신하니까 목소리도 바뀌네?”

아까는 좀 높은 목소리였는데 지금은 동굴 목소리다. 웅웅 울리는 게 울대를 쳐 주고 싶어.

기세야 살벌하다만.

“만인장이면 만인장이지 네 번째는 또 뭐냐. 그리고 어? 1군단장이 누군데. 나 그런 녀석 몰라!”

“네 이노옴!”

그럴싸하게 말하려거든 알아듣는 이야기를 했어야지.

만인장은 뭐야. 백인장 진화 천인장, 진진화하면 만인장 이런 건가.

1군단장이라고 해도 어떤 놈인지 알아야 아는 척이라도 하지.

작게 한숨을 내쉬는 것도 잠시. 놈이 거대한 곡도를 휘둘렀다.

놈의 덩치도 작은 게 아닌데 본인 몸통만 한 곡도를 내밀자 시야가 막히는 기분이다.

[디그(AAA) Lv.10]

-쿠르르르릉

발밑으로 구덩이를 파냈다. 밑으로 떨어진 내 위로 곡도가 지나갔고.

“주변에 피해 끼치기 싫으니 단둘이 하자고.”

[어스 월(AAA) Lv.10]

[땅굴 이동(S) Lv.10+]

-콰드드드드득!

난 놈이 있던 위치에 삼중으로 흙의 벽을 만들며 땅굴 이동으로 파고들었다.

이윽고 위로 올라왔을 때는.

“간이 경기장치고는 꽤 괜찮지?”

넓은 공간, 높게 치솟은 벽이 무대가 되어 우리를 감싸고 있었다.

과장 좀 보태서 콜로세움이랑 비슷한 느낌이 아닐까?

그런 의미에서.

“한번 해 보고 싶던 게 있단 말이지.”

[집착하는 망령(S) Lv.10+]

[데몬 스피어(S) Lv.10+]

-끼아아아아악!

“둘이 한번 싸워 봐라.”

난 비명과 함께 등장한 망령에게 데몬 스피어를 쥐어 줬다.

예전부터 궁금하더라고. 이런 식으로도 사용할 수 있는지.

“끼아악?”

얼떨결에 마기의 창을 잡은 더덕이 먹이, 아니지. 나의 투사, 망령에게 명령했다.

“가서 무찔러라, 망령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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