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4화 신성마법사
용사라, 용사.
‘이걸 육성으로 듣게 되는군.’
왤까, 왜 내가 부끄럽지?
나보고 무지개 용사라고 불렀던 녀석들도 속으로는 부끄러워했을까?
잠깐 기대해 봤지만 그럴 거 같지는 않다. 신나서 너도나도 그런 식으로 불렀었으니까.
탑을 등반하면서 쓸데없이 별명만 많아진 기분이다. 그중 멋진 이름이 단 하나도 없는 게 슬프지만.
아무튼.
“좀 더 자세히 이야기해 봐.”
용사라는 존재가 이번 시나리오의 열쇠가 될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이름부터가 기대할 만하잖아? 위기 속 영웅이 등장한다는 말도 있고. 검과 마법이 난무하는 판타지 배경인 만큼 실존한다 하더라도 이상할 게 없다.
“저도 산구석에 박혀 있는 처지라 자세한 건 모릅니다만 서부에서 몬스터에 의해 점령당했던 왕국을 수복했다고 했습니다. 흑마법사들을 소탕한 것도 유명한 일화지요.”
왕국 수복이야 그렇다 치고.
‘흑마법이라.’
내가 경청하자 살짝 신이 났는지 산적 두목이 헛기침을 몇 번 하고는 말을 쏟아냈다.
대략적으로 정리하자면.
‘혼란을 틈타 흑마법사가 마계를 열었고, 이유는 알 수 없으나 마탑 몇 곳도 그곳에 붙은 상태라는 거군.’
어째서 마법사의 인식이 개판인지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이해가 안 되네. 가뜩이나 망하기 딱 좋은 상황에서 왜 마계를 연 걸까.
짐작 가는 게 없는 건 아니다.
‘숭배자들.’
이쪽 차원 숭배자들의 정체가 흑마법사라고 생각하면 앞뒤가 맞는다.
놈들 입장에서는 멸망이 빠르게 다가오면 올수록 탑에 들어가 NPC라는 이름으로 영생을 빨리 얻을 수 있으니.
진짜 영생은 아니지만. NPC도 목 잘리면 죽는다.
“그리고 이건 확실한 건 아닙니다만 최근 영지에서 마족이 등장했다는 소문도 돌고 있습니다.”
몇 번째 마계인지는 모르겠지만 이곳에서는 악마들을 마족이라고 부르는 것 같다.
내가 아는 악마들과도 성향이 살짝 다른지 살육을 일삼는다는 거 같고.
‘어떻게 보면 내가 만난 악마들이 특이한 걸지도 모르겠군.’
어찌 됐든 호전적인 성향이 강한 종족이라.
킬더레스도 탑에 와서 만났으니까 친근한 거지 다른 차원에서 만났으면 재앙이었을 거다.
침공당한 천계 입장에서도 마찬가지일 거고. 상황에 따라 다르다 이거지. 뭐, 이야기 들은 결과 이곳에 있는 마족들은 한참 선을 넘은 거 같지만.
오케이. 대략적인 정보는 다 모았다. 산채에 들어온 건 잘한 일이었다. 쓸모없으면 어쩌나 했는데 이 정도면 뽑아 먹을 건 다 뽑아 먹었지.
구태여 더 어울릴 필요는 없을 거 같다. 상황이 별로면 한동안 이곳에서 죽치고 있으려고 했는데.
“그래, 잘 알았다. 볼일은 다 봤으니 이만 가지.”
슬슬 자리에서 일어서던 난 우뚝 멈춰섰다.
얼른 안 가냐는 표정으로 날 살피던 산적 두목이 눈알을 굴린다.
“하나만 더, 혹시 무너진 마탑이라고 아나?”
“무너진 마탑이라, 그건 잘 모르겠습니다.”
“모르면 말고.”
미련 없이 등을 돌렸다. 날 지켜보던 NPC 펠리츠가 무너진 마탑 출신이라길래 물어본 거뿐이라서.
가볍게 손을 흔들고 산채를 떴다. 날 습격했던 놈들의 위치도 알려 줬으니 알아서 잘 구하든 할 거다.
“마, 마법사님.”
“음?”
산길을 따라 이동하는데 바일이 날 붙잡았다.
“무너진 마탑 말인데요. 어쩌면 아는 사람이 있을지도 몰라요.”
산적 두목이랑 했던 이야기를 엿들은 건가.
“바이사라는 사람인데 타카르 영주님의 식객으로 있는 마법사예요. 제가 그쪽 영지 소속이라 이야기를 좀 들었어요. 무너진 마탑 출신이라고.”
“그렇군, 고맙다.”
“아닙니다!”
-팅
“정보값이라고 생각해.”
보물 주머니에서 금붙이 하나를 꺼내 녀석에게 튕겨 줬다.
이쪽 화폐가 뭔지는 모르겠지만 금은 쓰겠지. 값이 어떨지는 모르겠지만.
헤벌쭉 입을 벌리는 걸 보니 여기서도 금은 비싼 거 같다.
감사하다며 허리를 숙여 대는 녀석을 뒤로 한 채 발걸음을 옮겼다.
* * *
내가 향한 곳은 타카르 영지라 불리는 곳이었다.
산채가 있던 곳 근방의 마을에 들러 대략적인 준비를 하고 바로 떠난 결과, 이틀 만에 들어설 수 있었다.
이곳을 가장 우선적으로 온 이유가 있다.
“마족과 무너진 마탑. 위치도 용사가 있다는 서쪽으로 가는 길이야.”
딱딱 맞아 떨어진다고 해야 하나?
우선순위로 따진다면 용사는 후순위다. 소문은 무성한데 정작 실속있는 정보는 별로 없어서.
아무래도 거리가 떨어져 있다 보니 소식이 늦는 거 같다.
‘사람들이 과장이 심한 느낌도 있고.’
분위기를 봤을 때 여기는 중세 시대와 비슷했다. 연락망이 제대로 갖춰져 있지도 않다는 것.
끽해야 전령이나 전서구를 날리는 수준이다. 규모가 있는 영지는 마법사들이 있어 통신 구슬로 연락을 주고받는다고는 하는데 그것도 지금은 쉽지 않다.
흑마법사들이 활개를 치면서 마법사에 대한 신뢰가 많이 떨어져서. 은밀한 정보를 주고받기 좋다는 건 반대로 흑마법사 쪽에 들어가서는 안 될 정보가 넘어갈 수도 있다는 뜻이었다.
“여긴 사람들 안색이 괜찮네.”
허름한 로브로 몸을 가린 채 거리를 훑었다.
이곳까지 오면서 지나친 마을은 삭막한 분위기였는데 나름 영주가 머무는 곳이라 그런지 다들 일상생활을 하고 있다.
하기야 이런 곳까지 문을 걸어 잠그고 있다면 망했다고 봐야지.
문제는 영주성에 어떻게 들어가냐는 건데.
‘치안이 괜찮은 시대에서도 신원 불명인 사람이 찾아가면 경계하기 마련인데 지금은 말할 것도 없지.’
심지어 여긴 신분제 사회다. 출신도 명확하지 않은데 신분도 증명할 게 없다.
이곳, 타카르 영지를 관리하고 있는 이는 남작 작위를 가지고 있다고 했던가. 비교적 낮은 작위기는 하나 명백한 귀족.
어째 시나리오 진행할 때마다 신분이 없는 거 같아.
“쯧.”
작게 혀를 찼다. 뭐, 이건 투정이고 계획은 있다. 통할지는 모르겠지만.
당당한 걸음으로 영주성으로 향했다.
“정지. 무슨 용무로 온 것이냐.”
정문을 지키고 있던 병사가 창을 겨누며 날 멈춰 세운다.
행색이 초라해서 그런지 말이 짧다. 내가 이래서 옷을 화려하게 입을까도 생각해 봤는데 계획 때문에 그러지는 못했다.
“바이사를 만나러 왔습니다. 무너진 마탑의 펠리츠라고 하면 아실 겁니다.”
“바이사 님을?”
잠시 미간을 찌푸린 병사가 옆에 서 있는 부사수에게 눈짓하자 안으로 뛰어들어간다.
다행히 산적 꼬맹이가 말했던 정보가 거짓은 아니었던 모양.
신분이 없으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어쩌긴 가짜라도 신분을 만들어야지.
마침 내게는 적당한 소스도 있고 말이야.
“그, 혹시 마법사십니까?”
“당연히 그렇겠죠?”
“크흠, 실례가 많았습니다.”
마법사에 대한 인식이 시궁창이라 그런가 말투가 공손해진다. 마음 같아서는 스킬로 뭐라도 하나 보여 주고 싶은데 파이어나 워터는 폼이 안 나고, 다른 걸 쓰자니 등급이 높아 간단히 보여 줄 만한 게 아니다.
병사도 굳이 눈으로 확인하려던 건 아닌지 슬쩍 시선을 돌리며 부사수가 오기를 기다렸고.
“안으로 모시랍니다.”
“들어가시지요.”
얼마 지나지 않아 돌아온 부사수의 말에 직접 안으로 안내해 줬다.
영주성이라기에 어떤 곳일까 궁금했는데 의외로 평범하다. 넓고 나름 웅장한 맛이 있기는 했지만 화려함과는 거리가 있었다.
좋게 말하면 담백했고 나쁘게 말하면 심심한 모습.
저택 입구까지 안내해 준 병사가 고개를 살짝 숙이고 떠나고, 시종을 따라 안으로 들어가자 접객실로 보이는 공간에 한 노인이 앉아 있는 게 보였다.
“나가 있게.”
저 노인이 바이사라는 마법사인가. 그의 말에 시종이 공손하게 허리를 굽히며 문을 닫는다.
아무래도 이 양반도 여기서 힘 좀 쓰나 본데.
[사일러스(S) Lv.10]
시종이 나가자마자 바이사가 마법을 쓴다.
망설임 없이 후드를 벗었다. 사일러스를 쓴 순간부터 이미 내 정체는 탄로 났다고 봐야지. 같은 무너진 마탑 출신인데 얼굴을 못 알아볼 리도 없고.
“누가 건방지게 펠리츠의 이름을 팔아먹나 궁금해서 불렀다.”
“미안하게 됐습니다. 안에 들어오고 싶은데 방법이 마땅치 않아서.”
“펠리츠와는 어떤 관계지?”
“깊은 인연은 아니죠. 저어어어기, 산적들 있는 곳에서 잠깐 마주쳤달까.”
거짓말은 아니다. 얼굴은 못 봤지만.
산적이라는 말에 바이사가 눈살을 찌푸린다. 펠리츠가 산적들이 있는 곳에 있다는 건 알고 있는 눈치.
“설마 펠리츠에게 위해를 끼친 것은 아니겠지.”
“서로 연락을 하지는 않았나 보네요?”
이미 연락이 갔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따로 연락망은 없는 거 같다.
그건 그거고.
[SSS급 권능, 별을 주시하는 눈이 발휘됩니다.]
-츠즈즈즈즛
바이사를 향해 권능을 발휘했다.
뭐가 됐든 간에 같은 무너진 마탑 출신이니 뭐라도 건질 게 있지 않을까.
[바이사]
-중립 NPC.
-무너진 마탑 출신입니다.
-NPC, 펠리츠의 스승!
‘스승이라.’
일단 숭배자는 아니군. 중립 NPC니까.
내가 잠시 말을 하지 않고 있자 그의 기세가 올라온다.
마력이 끓어 올리며 유형화되었으니 압박감이 상당하다.
“내 물음에 답을 잘해야 할 것이야.”
노기를 띤 음색. 다른 건 몰라도 제자인 펠리츠를 아끼는 건 알겠다.
나도 싸우려고 온 건 아니라서 양손을 들었다.
“솔직하게 말씀드리죠. 펠리츠랑은 잘 모릅니다. 그저 페밀리어로 엿보고 있길래 관심이 좀 생긴 정도? 듣자 하니 같은 마탑 소속이라길래 뭐 하는 사람인가 궁금해서 와 봤죠.”
“소속은 어떻게 알아냈지?”
“그건 영업 비밀이라 말하기 좀 그렇네요.”
[권능, 진실의 추(SS)가 기웁니다.]
[진실]
잠시 날 노려보던 바이사가 기세를 거두었다.
호오. 진실을 확인하는 권능이 있는 건가? 세상 편리하군.
“하긴, 내 제자가 어디 가서 험한 꼴 볼 인물은 아니지. 잠시 실례했군. 그 애가 호기심이 많아서 말이야.”
뭐가 됐든 날 감시했던 건 사실. 그게 호기심일지 어떤 걸지는 봐야 아는 거다.
대충 오해가 풀렸는지 그가 의자에 등을 기댄다.
“그대도 마법사인가 보군? 페밀리어를 눈치챌 정도면 말이지.”
“어디 가서 맞고 다니지 않을 정도는 됩니다.”
“허허! 마법을 맞지 않으려고 배우는 사람이 있나. 어째 제자 녀석이랑 비슷한 말을 하는군. 펠리츠가 그러다 머리통을 많이 맞았지.”
때렸다는 거잖아. 속으로 고개를 저었다.
분위기는 한층 누그러졌으니 슬슬 본론으로 들어가자.
이번 챕터는 한 가지 특이점이 있다. 다른 건 아니고…….
‘아직까지 챕터 이름이 안 나왔어.’
각 시나리오를 진행할 때마다 챕터 제목이 뜨는 건 제각각이었지만 그래도 첫 번째 챕터 정도는 시작과 동시에 알려 주는 편이다.
이번에는 그러지 않았고. 이유가 있을 거다. 지금까지 겪어본바 이럴 경우는 보통…….
‘챕터 제목이 공략에 직접적인 영향을 줄 때.’
그러니 아마 끝날 때쯤 돼서야 제목이 떠오를 가능성이 높다.
힌트가 없으니 난 예상되는 대로 멸망을 막을 준비를 해야 하는 거고.
그런 의미에서 지금 내가 가장 경계해야 할 대상은 명확했다.
“흑마법사에 대해 이야기를 좀 하고 싶군요.”
숭배자로 판단되는 이들, 흑마법사. 그리고 그들이 계약해 불러냈다는 존재.
“이곳에 마족이 나타났다는 소식, 혹시 들으셨습니까?”
파아아아앗!
난 신성력을 퍼트리며 그렇게 이야기했고.
“…자네 신성 마법사였군.”
잠시 얼굴을 굳혔던 바이사가 푹 한숨을 내쉬었다.
“하긴, 그러니 무너진 마탑을 운운하며 모습을 드러냈겠지. 맞네, 이곳에 마족이 있네.”
뭔가 오해를 한 거 같지만 굳이 지적하지는 않았다.
편한 대로 생각해 주면 나야 좋지. 아무래도 신성 마법사라는 건 마족을 잡는 이를 뜻하는 게 아닌가 싶다.
나도 마족이라길래 의도적으로 신성력을 뿜은 거긴 했다.
어쨌든 흐름은 좋은 쪽으로 흘러가고 있으니.
“그럼 정보 좀 공유해 주실까요?”
좀 더 깊게 들어가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