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3화 용사
고개를 돌리자 까마귀 한 마리와 눈이 마주쳤다.
숲에 까마귀가 있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니다.
다만.
[페밀리어(AAA) Lv.10]
-동물이나 크리쳐와 감각을 공유합니다.
-말똥말똥 쳐다보는 눈 너머에는 누가 있을까요?
이런 마법이 걸린 동물이라면 말이 달라지지.
저 녀석을 통해 나를 바라보고 있는 게 누구일까. 난 안력을 더 하며 권능을 강화했고.
-츠즈즈즈즛!
따끔한 통증과 함께 추가적인 정보가 떠올랐다.
SSS급에 달하는 권능. 상대방이 직접적으로 보이는 건 아니지만 이렇게 감각이 공유되어 있다면 또 다르지.
[펠리츠]
-87층의 NPC.
-무너진 마탑의 출신…….
희미하지만 나를 염탐하고 있는 자의 정보가 드러나기 시작했고.
“까아아악!”
-푸드드드득!
놈 또한 그걸 느꼈는지 까마귀가 날아올랐다.
근처에 있던 까마귀들도 일제히 날아올라 뒤섞였으니 잡기는 힘들 거 같다.
그래도 뭐.
[오로라 빔(S) Lv.10+]
-찌유우우우우웅!
없애는 건 가능하니까.
빠르게 쏘아져 나간 오로라 빔이 까마귀 떼를 날려 버렸다.
감각이 연결되어 있다고 했으니 녀석도 꽤 아프지 않을까?
그러게 음흉하게 몰래 훔쳐보면 쓰나.
“으, 으으.”
“아.”
오로라 빔을 쏜 것을 본 꼬맹이 바일이 겁에 질린 표정으로 몸을 떤다.
나야 자주 사용해서 무감각해진 감이 있지만 S급 스킬이 흔한 건 아니다. 따지고 보면 엄청 강한 거지.
‘주변에 있는 놈들이 워낙 괴물 같아서 평범해 보일 뿐.’
다른 일반인이 봤을 때는 압도적인 무언가로 느껴졌을 거다.
나도 탑에 들어오기 전에는 뷰튜브로 S급 스킬을 사용하는 모습을 보며 감탄하기 바빴으니까.
산도 무너트릴 거 같은 기세, 휩쓸려 나가는 몬스터. 헌터의 가치가 높은 지금 얼마나 매력적인가.
피식, 웃음이 났다.
‘난리가 나겠네.’
오래지 않아 오징혁을 포함한 연합 사람들이 밖으로 나갈 테니까.
밖에 있는 사람들이 어떤 반응을 보일까 궁금하기는 하다. 나야 밖으로 나갈 수 없으니 알 방법이 없지만.
혼자 한가한 생각을 하는 타이밍.
“아, 아저씨 마법사였어요? 죄송합니다! 목숨만 살려 주세요!”
바일이 바닥에 엎드렸다.
산적들 팔다리가 부러질 때도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왜 이러지? 마법사라는 말에 더 기겁하는 거 같은데.
그러고 보니.
“저놈도 마탑 어쩌고 했던 거 같은데.”
까마귀가 날아가던 곳을 흘낏 쳐다봤다.
많은 정보를 알아낸 건 아니다. 확인한 정보는 2개.
펠리츠라는 NPC라는 것과 무너진 마탑 출신이라는 것.
마탑이 무엇이냐. 흔히 판타지에 나오는 마법사들의 집합체다.
탑에 엮여 있는 세계가 워낙 많다 보니 판타지 배경을 가진 곳도 제법 있어서 이상하지는 않다. 내가 겪어 본 곳도 몇 군데 있고.
그보다…….
“내 정체를 알아차렸구나.”
“히익! 전 아무것도 보지 못했습니다! 땅에 머리를 처박고 있었어요!”
목소리를 깔고 나무라자 베일이 손으로 머리를 감싸며 변명을 해 댔다.
효과 좋네.
아무래도 이곳 세계에서 마법사라는 존재는 좀 특별한 거 같았다.
신분이 높은 건지 아니면 악명이 높은 건지는 모르겠지만. 반응으로 봐서는 후자에 가까울 것 같다.
뭐든 상관없다. 그저 이곳에 있는 동안에는 마법사라는 신분을 쓰면 좋겠다고 생각한 거뿐이니까.
어느 정도 맞는 말이기도 하고. 스킬도 마법이랑 비슷한 부분이 많아서.
괜히 마법 무효화 스킬이 있는 게 아니다. 마법형 스킬로 분류되는 것들이 진짜로 있어서 작동하는 거지.
“죽어야 마땅하나 이번에는 넘어가도록 하지. 하지만 분명히 기억해야 할 거다.”
스윽. 무릎을 굽히며 엎드려 있는 녀석을 들어 올렸다.
강제로 눈높이가 맞춰진 바일을 향해 상큼한 미소를 지었다.
“허튼짓을 하다 걸리면 나의 실험체가 되는 거야. 어쩌면 개구리나 쥐로 만들지도 모르지.”
바일의 눈동자가 덕춘이에게 갔다 돌아온다.
불만스러운지 덕춘이가 뒷목을 꼬집는다. 아야야, 왜 그러냐. 개구리가 다 같은 개구린가. 우리 존엄하고 존귀하신 덕춘 님은 영물님인데.
“그에에.”
작게 한숨을 내쉰 덕춘이의 머리를 살짝 긁어 주고 베일을 일으켜 세웠다.
스타트가 깔끔하지는 않지만 일단 만났으니 산적들이라도 이용해 먹어야겠다.
“본거지로 안내해.”
“알겠습니다. 저, 그럼 삼촌들은?”
“흐음, 잠시 놔두면 되겠지.”
[디그(AAA) Lv.10]
-쿠르르르르릉!
바닥에 굴러다니는 산적놈들이 있는 곳에 디그를 사용했다.
제법 넓은 규모로 구덩이가 생긴다. 저걸 구덩이라고 불러도 될지는 모르겠지만.
넓이도 넓이지만 깊이도 대충 5미터는 돼서. 멀쩡한 몸이라도 올라오기 쉽지 않을 높인데, 팔다리 어디 하나는 부러진 지금이야 자력으로 탈출하는 건 불가능하겠지.
개개인으로 보면 아무런 위협도 안 되지만 도망치게 놔둘 생각은 없다.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나에 대해 떠들면 내 위치가 노출되니까.
당장 까마귀도 그렇고, 내게 호감을 지닌 인물이 올 수도 있지만 반대로 숭배자나 악감정을 가진 녀석이 올 수도 있어서 말이지.
‘펠리츠라는 녀석은 어떤 쪽일지 모르겠군.’
시간이 지나면 알게 되겠지.
툭. 바일의 등을 쳤다. 턱을 까딱이자 빠르게 고개를 끄덕인 녀석이 산적들의 본거지로 안내를 시작했다.
* * *
산적이라는 게 원래 직업적으로 따로 있다기보다는 먹고 살기 힘들어서 강도가 된 이들이 많다 보니 체계적으로 돌아가는 일이 별로 없다.
농부나 노예, 범죄자 혹은 천대받는 직업을 가진 이들이 뭉쳐 있는 경우도 허다해서 규율이나 군기가 없는 경우도 많고.
바일이 속해 있던 산적단도 비슷했다. 들고 있는 낡아 빠진 무기를 쟁기로 바꾸면 평범한 농부로 보일 만한 이들이었다.
다르게 말하면 일반인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딱 저기 앞에 있는 3명만 빼고 말이지.
“으으으으.”
“빌어먹을. 마법사가 대체 왜 여기에.”
“우리를 어떻게 하려는 거냐.”
바닥에 엎어져 빌빌거리고 있는 3명이 이 산채의 주인이다.
일단은 중립 NPC. 특이한 점이 있다면 다들 검에 기운을 불어넣을 줄 안다는 것.
내가 가지고 있는 이세계 스킬, 검강과 비슷한 느낌이다.
검기라고 불러야 하나. 본인들 입으로는 오러 블레이드니 뭐니 하는 거 같지만.
사실 스킬이라기보다는 기술에 가까운 느낌이었다.
‘알리오스도 비슷했지.’
사실상 스킬이 아니라 본인 노력으로 만든 힘이었으니까. 이게 나중에 스킬북으로 따로 옮겨지면 스킬로 분류되는 거고.
스킬이라는 게 참 신기하다. 스킬북이라는 게 어떤 식으로 만들어지는 건지도 모르겠고.
뭐, 아예 모르는 건 아니고.
‘대충 멸망해서 탑에 종속된 세계의 기술들이 스킬로 바뀌어서 돌아다니는 거겠지.’
다른 아이템이 그런 것처럼 말이다.
권능도 비슷한 느낌이다. 탈모맨이 킬더레스의 계승자가 되면서 얻은 권능, 두 세계의 지배자 역시 킬더레스의 업적과 관련된 것이었으니.
만약 우리 세계도 멸망해서 탑에 종속된다면 어떨까. 나와 관련된 권능도 잘하면 생기지 않을까.
무지개 폭탄마라던가, 커뮤니티의 쁘띠공듀 같은.
“으으.”
상상만 해도 소름 끼친다. 역시 세상은 망하면 안 된다.
또 하나 탑을 공략해야 하는 이유를 찾은 난 산적 두목을 발끝으로 밀었다.
“엄살 그만 부리고 일어나라. 진짜 어디 한 곳 으깨 버리기 전에.”
“이런 잔혹한, 마법사면서 검까지 쓰다니. 마검사는 전설 속에서나 존재하는 줄 알았는데.”
“말이 많아. 확 씨, 그냥.”
손을 쓱 들어 올리자 움찔한 녀석이 조용히 무릎을 꿇고 앉는다.
산채에 들어오고 가장 먼저 한 것이 놈들을 제압한 거다. 산적이라는 놈들이 말로 한다고 곱게 따르지는 않을 테니까.
바일이 나를 마법서라고 소개하자마자 다 같이 무기를 들고 덤벼들었다.
뭐라고 했더라.
‘잡히면 곱게 죽지는 못한다! 인간으로 죽고 싶으면 목숨 걸고 덤벼!’
이런 식으로 말했던 거 같은데. 이 세계 마법사에 대한 평가를 바로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하여튼 간에.
“부상자 수습하라 하고 너희는 날 따라온다. 오늘부터 이곳은 내가 차지할 생각이니까.”
내가 그나마 몸이 멀쩡한 산적들에게 턱을 까딱이자 쭈뼛거리며 발을 옮긴다.
“참, 혹시나 도망치면 안 좋은 일이 벌어질 테니 실수로라도 시도하지 말도록. 이미 너희 몸에 폭탄 마법을 심어 두었다. 이런 식으로 말이지.”
-따악
손가락을 튕기자 멀리 떨어져 있던 작업대가 폭발했다.
시한폭탄.
아까 전투를 치르며 슬쩍 심어 뒀다.
꿀꺽. 침 삼키는 소리가 들린다.
두려운 눈으로 자신의 몸을 더듬던 산적 하나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재빠르게 달려갔다.
“절대, 절대 도망치지 않겠습니다!”
“그래. 열심히 하고.”
다른 산적들의 안색도 창백하다. 자신의 목숨이 내게 달려 있다는 걸 인지했다는 거겠지.
물론 거짓말이었지만. 놈들 몸에는 설치하지 않았다.
나도 그렇게까지 악독하지는 않다. 그저 말 좀 잘 듣게 협박 살짝 섞어 준거지.
“좋아. 너희가 이곳 우두머리라고 했던가.”
“저, 정확히는 이쪽이 우두머리고 전 옆에 보조를 해주는 사람입니다요.”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두머리라는 말에 옆에 있던 두 명이 덩치 큰 사내를 가리켰다.
배신감 어린 표정으로 산적 두목이 입을 벌렸지만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대충 두목, 오른팔, 왼팔로 부르도록 하지.”
산채 내부로 자리를 옮긴 난 적당히 명칭을 정해 줬다.
이들에게서 뽑을 수 있는 정보는 뽑고 영 쓸모없다 생각되면 버리고 갈 생각이다.
알아내야 할 정보는 몇 개 없다.
우선…….
“강력한 몬스터나 영물, 이상한 법칙으로 사람들을 혼란에 빠트려 죽이는 뭔가에 대해 들어봤어?”
이곳 상태를 확인했다.
게이트와 재앙. 그 외에 에이션트 몬스터와 같은 것들.
일단 혼돈의 파편은 제외했다. 80층대에서는 놈들이 전면으로 나서지는 않으니까. 특히나 첫 번째 챕터에서는 더더욱.
뭔 소린가 싶어 날 물끄러미 바라보던 녀석이 더듬거리며 입을 열었다.
“어어, 그 아시겠지만 요 몇 년간 몬스터도 그렇고 마물도 그렇고 난리지 않습니까. 저희도 고향 잃고 떠돌다 이러고 있는 처지고요.”
놈들 입장에서는 당연한 사실을 모르고 있으니 이상하게 여기는 것이 당연하다.
“오랜 시간 동안 은둔하고 있다 밖으로 나오니 세상이 뒤집혀 있어 물어봤다.”
“혹시 어느 마탑 출신인지 여쭈어 봐도 될는지?”
산적 두목의 물음에 지그시 놈을 바라봤다.
“죄, 죄송합니다! 이놈의 입이 방정을!”
알아서 머리를 박고 사죄하는 녀석. 말할 게 궁할 때는 침묵하는 게 답일 수도 있지.
사실 나도 이쪽에 무슨 마탑이 있는지 아는 게 없다.
손을 내저으며 설명을 계속하라고 재촉했고.
“으음, 저희 중에도 다른 지방에서 온 이들이 있어 어느 정도 소식을 들은 것이 있는데…….”
놈이 두서없이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한참을 들으며 머리로 정리를 했으니.
‘이상하군.’
한 가지 의문이 들었다.
우선 게이트가 터진 건 얼마 되지 않았다. 본격적으로 멸망이 가속된 지 기껏해야 2년 정도?
수많은 왕국이 무너졌고, 때를 틈타 마계와 연결된 곳에서 마족들과 마물들도 튀어나왔다고 한다.
게이트도 여럿 터져 피해가 막심하다던가.
그동안 겪었던 80층대랑은 완전히 다른 양상이다.
거인계도 그렇고 정령계도 그렇고 종족값이 높거나 환경 자체가 극한이라 게이트로 인한 피해는 별 게 없었으니까.
오히려 멸망에 다가간 것은 그보다 높은 차원의 문제. 혼돈의 파편이나 차원의 균열 같은 것이었다.
반면 이곳은 몬스터를 상대하는 것만 해도 벅찬 듯했다.
굳이 따지자면 70층대에서 겪은 차원과 비슷한 상황이라고 해야 하나. 이게 이상한 거다.
‘80층대는 멸망에서 벗어나려는 세계.’
비록 멸망했으나 극복 가능성이 있는 곳이라는 거다.
지금 들은 것만 봐서는 전혀 그럴 거 같지 않은데. 미간을 찌푸리며 생각에 잠긴 사이에도 산적 두목의 말은 이어져 나갔고.
“수복 작업이 한창이라고 합니다. 신탁을 받은 용사가 등장했다는 소문이 있습니다.”
“오호라.”
난 작게 감탄했다.
맞네. 판타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