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탑에 갇혀 고인물-491화 (490/740)

491화 나가는 자

쁘징 연합에서 밖으로 나갈 사람들이 정해졌다.

의외의 일은 아니었다.

“바깥세상이 걱정되는 이가 한둘은 아니지.”

나야 아니지만 밖에 가족이나 연인이 있는 경우는 허다했다.

대격변을 겪고, 이후에 사회가 안정되고 나서도 게이트 관리를 제대로 하지 못하거나 예기치 못한 사고를 당해 인생 홀로 남은 이들도 많긴 하지만.

그래서 그럴까. 가족이나 자신이 믿는 사람과의 관계는 더욱 끈끈해진 감이 있다.

어찌 될지 모르는 세상, 진심으로 기댈 사람은 많지 않으니까.

특히나 어린아이를 제외한다면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 모두는 끔찍한 재앙을 겪었던 이들.

한 번 겪었기 때문일까 나날이 악화되는 상황에 다들 나름의 대비를 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한들 탑에 오르지 못한 이들이 준비할 수 있는 건 한계가 있다.

결국 극단적인 상황, 소중한 것을 지킬 수 있는 건 스스로의 무력뿐이니까.

그래서인지 의외로 밖으로 나가길 희망한 사람들이 제법 있었고, 명단에는 내가 아는 이름도 몇몇 섞여 있었다.

먼저.

“이상옥, 최영미, 고대진, 김서균.”

30층대에서 만났던 이들이었다. 한 팀이 되어 끈질기게 공격을 해 오던 대형 길드를 물리쳤었지.

지금도 커뮤니티에서 활동하는 게 보였다. 당시 서로 잡다한 이야기를 할 때가 있었는데 다들 친인척이 밖에 있다고 했다.

이상옥의 경우에는 나처럼 고아긴 했지만 기다리는 사람이 있다고.

오래 만난 연인이 있다고 했던가. 혼인 이야기를 몇 번 주고받았다 했던 것도 같고. 하긴 신경 쓰일 거다.

탑에 들어온 이상 갑자기 증발한 거나 마찬가지니까. 살았는지 죽었는지, 말없이 떠났는지 아무도 모른다. 무작정 기다리는 것도 한계가 있을 거고.

여기까지는 오케이. 다들 70층대 중반까지 올랐으니 밖에 나가서 맞고 다니지는 않겠지.

그 외에 40~60층대까지 골고루 섞인 인원이 8명 정도 추가로 나간다. 이유야 다양하기는 한데 더 높이 올라가기 힘들다 판단해 이런 결정을 내린 이들도 있었다.

대부분 같은 층에서 계속해서 고꾸라지다 여분의 코인이 남지 않은 이들. 마지막으로 시기를 맞춰 도전해 보고 실패하면 자동으로 밖으로 나가게 되는 형식으로 진행된다 한다.

여기까지야 그렇다 치는데 눈에 띄는 인물들이 있었으니.

“김소담이 나갈 줄은 몰랐는데?”

30층대에서 다른 이들과 팀을 이룰 수 있도록 도움을 준 사람이자, 메카닉이라는 대량 학살에 특화되어 있는 권능.

지금은 이유는 모르겠지만 오징혁과 연인 사이다. 어쩌다 그렇게 됐는지는 모르겠지만 개인 사정이란 게 있으니까 넘어가자.

뭐가 됐든 밖에 나간다면 엄청난 반향이 일 거다. 김소담은 나와 같은 층까지 올랐으니까. 70층대만 해도 기존에 없던 경지인데 86층 클리어면 말 다 했지.

그리고 김소담이 나간다는 것은…….

“오징혁도 같이 나가는군.”

의외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오징혁이 밖으로 나갈 줄이야. 등반하는 데 욕심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말이지.

궁금하면 물어보면 그만. 녀석은 모르겠지만 멤버들을 제외하고 나와 친추가 되어 있는 몇 안 되는 영광을 누리고 있는 게 놈이다.

[쁘띠공듀]: 오징- 스퀴드! 어맛! 더러웟!

[오지혁_산군]: 개 같은 녀석이 다짜고짜 시비를 거는군. 제발 가다가 벼락이나 맞아라.

[쁘띠공듀]: 우웅? 전 벼락 맞아도 안 죽는걸용?

[오지혁_산군]: 그럼 똥통에 빠지는 게 좋겠군. 그 안이라면 역겨운 말투도 못할 테니.

마침 쉬고 있었는지 반응이 바로 온다. 그야 그렇겠지. 나처럼 대기실에 있을 거다.

[쁘띠공듀]: 이번에 밖으러 나간다면서용?

[오지혁_산군]: 이준석이 이야기했나 보군. 맞다.

[쁘띠공듀]: 의외네여… 구차하고 징글맞게 탑에서 뻐기면서 등반할 줄 알았는뎁.

악연으로 엮이기는 했지만 녀석이 등반에 임하는 자세는 진지하다. 처세술도 나름 있는 편이고.

그러지 않았다면 대형 길드 소속에서 배신하고 첩자짓 하다가 상위층까지 올라오지는 못했겠지.

길드에 대한 복수도 있고, 강해지겠다는 야망도 있는 놈이다.

[오지혁_산군]: 네놈이 알 건 아니다. 후우, 됐군. 어차피 너랑 대화할 일도 이제 없으니.

[쁘띠공듀]: 아.쉬.워.요? (찡긋☆)

[오지혁_산군]: 크하아아아악! 개 같은 자식! 아가리를 @@@@!

한참을 필터링을 대동한 욕설을 내뱉은 녀석이 툭 하고 말을 했다.

[오지혁_산군]: 사정이 있다. 거래도 했고.

그래도 마지막이라 이건가 놈도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말재주가 있는 녀석이 아니라 이것저것 사족이 붙기는 했지만 대충 요약하자면 이거다.

일단 김소담이 밖에 나가려고 해서 같이 나가는 것도 있고…….

‘이준석과 거래를 했다라.’

밖에 나가서 연합 사람들이 활동하려면 나름 얼굴 팔린 녀석이 필요하다.

특히나 우리가 하려는 일 중 하나가 대형 길드와 정부가 가짜 공략법을 뿌렸다는 것을 알리는 거기도 하고.

그런 의미에서 80층대 중후반에 오른 오지혁이 제격이었다. 무력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대형 길드인 산군 출신이다.

루키가 되지는 못했지만 나름 이름을 알리기도 했고 말이지. 총대를 메고 대중에게 나서겠다는 뜻이다.

물론 쉽지 않은 일이다. 이준석의 형이 당했던 것처럼 길드에서 보낸 사냥개들이 덤벼들 거고, 온갖 언론 플레이와 정치적인 방해가 들어올 테니까.

다르게 말하면 암살 순위 1위.

이준석이 거래를 한 것도 이 때문이겠지. 여러모로 지금 녀석이 나가는 게 적기였고, 길드에 원한이 있는 녀석 또한 대가를 받았으니.

‘산군을 달라라.’

어차피 대형 길드가 탈탈 털리면 빈집이나 마찬가지. 그때는 어떻게든 힘을 써서 넘길 수 있을 거다.

솔직한 심정을 말하면 산군에 무슨 미련이 남아 저러는 건지는 모르겠다. 그저 자신을 엿 먹인 길드를 집어삼키는 형태로 복수하려는 걸까.

어쩌면 산군을 기반으로 자신의 야망을 실현시키려는 걸지도 모르겠고.

대화를 마치기 전 오징혁이 마지막으로 했던 말이 기억에 남는다.

-[오지혁_산군]: 난 정점에 설 것이다. 그게 꼭 탑이 아니라도 괜찮겠지. 이쪽은 미친놈들이 너무 많아… 쯧.

“정점이라.”

그 정점이라는 게 산군 길드의 장이 되겠다는 뜻은 아닐 거다. 원하는 게 무엇이든 잘됐으면 좋겠다. 악연도 인연이라고 나름 미운 정이 붙어서.

개인적인 감상은 이 정도고. 아직 문제가 남아 있다. 녀석이 의도한 바는 아니겠지만 탑 내부에서도 오징혁이 가지는 위치가 남다른지라.

[쁘띠공듀]: 그럼 루키 그룹과는 직접적으로 연락하기 힘들어지겠네요… 쥬륵…….

연합 사람 중에 루키 그룹과 엮여 있는 건 그 녀석뿐이다.

나도 꽤 상위층까지 올라오기는 했지만 아직 나보다 위에 있는 이들이 꽤 있다.

그리 많은 것 같지만 대충 세어 봐도 10명 가까이는 있을 거다. 숭배자들이 전면으로 나서고 있는 타이밍, 그들과의 협력이 필요하다.

내가 한 걱정을 이준석이라고 안 했을까. 얼마 지나지 않아 연락이 왔으니.

[이준석]: 그 부분은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 같습니다. 최근 연합에 들어온 이가 있거든요.

[이준석]: 루키 그룹 일원과 아는 사이라고 합니다. 앞으로는 그 사람이 연락을 해 줄 건데…….

[이준석]: 빠르게 탑을 오르고 있으니 언젠가 만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얼마 전에 80층 초반을 돌파했다고 들었거든요.

“루키 그룹이랑 아는 사람이 더 있다고?”

가늘게 눈을 떴다. 그럴 사람이 있나. 물론 80층대를 돌파했다는 것만 해도 대단한 일이기는 하지만 루키 그룹의 관심을 끌 정도냐고 묻는다면 애매하다.

애초에 놈들은 대형 길드가 제대로 터를 잡기도 전에 탑을 오른 이들.

살짝 차이는 있지만 대형 길드장이 1세대 헌터라고 하면 그들은 1.5세대나 2세대쯤 된다. 그런 놈들이랑 아는 사이일 수가 있나?

의문이 드는 타이밍. 이준석이 추가적인 메시지를 보내 왔고.

“아.”

난 작게 감탄했다.

나도 아는 사람이다.

* * *

대기실. 그곳에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정령계와 요정계가 합쳐진 세계, 프렉탈 파크를 클리어하고 올라온 이들.

그 중심에 서 있는 건 두 사람.

“짜증 나는 얼굴을 보고 있자니 구토가 치미는군.”

“오빠, 자꾸 그런다?”

“…구토가 나쁜 점만 있지는 않지. 속이 편해질 수도 있는 것이고, 으음.”

나를 보며 얼굴을 구긴 오징혁의 옆구리를 찌르는 김소담. 바로 말을 바꾸는 꼴을 보자니 절로 고개가 저어진다.

저거 저, 원래 저런 놈이 아니었는데.

오히려 잘된 건가. 처음 봤을 때는 악착같이 날 추적해 오면서 사람 곤란하게 만드는 재주가 있었으니. 성질도 더럽고.

‘성질은 여전히 더러운가.’

아무튼.

이 자리에 모인 이유는 하나.

“우리에게 남은 코인은 없다. 밖으로 나가기 전 최대한 빠르게 위로 오르다 죽는 순간 밖으로 나갈 생각이다.”

“너무 딱딱한 이야기는 이쯤 하고 다들 고마워요!”

이들이 밖에 나간다는 소식을 듣고 축하해 주러 왔다.

축하할 일이 맞나 싶기도 하지만, 이곳에 모인 상위 헌터 대부분이 탑에 오래 고여 있던 이들이라 부러운 기색이 역력했다.

밖에 나가서 도움이 되라며 선물들도 가득 쥐여 줬고. 등급이 높은 장비라든가 스킬북이라든가. 소중히 아끼고 있던 영약을 주는 이도 있었고, 밖에 나가서 도움이 될 만한 사람을 알려 주기도 했다.

따지고 보면 이들과 오지혁과의 인연은 없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였지만.

“나가면 부탁한 거 잊지 말아 주게, 크흠!”

“밖에서도 건강하고, 이번 신세는 잊지 않지.”

“아까도 말했지만 내 형이 노원에 있었는데 말이야.”

이들에게도 밖에 소중한 사람들이 있었다.

선물을 주며 편지를 전해 달라는 경우도 있었고, 혹시나 사는 데 도움이 될까 물건을 전달해 달라고 부탁하는 이도 있었다.

등급이 높은 아이템은 밖에서 돈이 되니까. 이런 식으로라도 밖에 있을 친인척들에게 도움을 주고 싶은 거겠지.

인벤토리도 있고 아공간 아이템도 있으니 물건이 많아도 들고 갈 걱정은 없고.

“누누히 말하지만 죽었거나 행적이 묘연하면 전하지 못할 수도 있다.”

“최선을 다해서 찾아볼게요!”

“으억!”

다시 한번 오지혁의 옆구리를 찌른 김소담이 애써 시무룩해진 사람들을 달랬고.

“야.”

“뭐냐, 무지개.”

“받아라.”

나 또한 녀석에게 선물을 하나 건넸다. 김소담한테는 아까 전해 줬다.

수상한 눈빛으로 내가 건넨 박스를 받는 녀석.

“나가서 고생 좀 한다며. 일할 때 도움이 될 만한 자료랑 몇 가지 좀 넣었다.”

“폭탄은 아니겠지?”

“날 뭘로 보고.”

성격이 유해졌나 농담 좀 하네. 피식 웃으며 어깨를 으쓱이는 타이밍.

“하긴 저 녀석이면 그럴 수도 있어.”

“우우, 사악한 공블아이. 마지막 순간까지 사고를 치려궁.”

“그래도 죽지는 않을걸?”

멤버들이 이상한 소리를 한다. 어째선지 마그마 요정이나 다른 녀석들도 세상 쓰레기 같은 표정으로 날 바라보고.

어쩌다 내 이미지가 이렇게 됐지?

“열어 봐라.”

“작기는 하지만 아공간 아이템이군.”

슬쩍 김소담을 뒤로 물리고 조심스럽게 상자를 연 녀석이 눈썹을 꿈틀거린다.

“내가 만든 물약이랑 스킬북 몇 개 넣었다. 옵션 괜찮게 달린 장비도 털어 넣었고. 포션은 탑에서도 못 구하는 물약이니까 나름 쓸 만할 거야.”

스킬 합성을 하고 남은 스킬북이 몇 개 있다, 많지는 않지만. 남은 것 중 그나마 쓸 만한 것들로 골라 넣었다.

A급도 몇 개 있으니 꽤 돈이 될 거다. 장비 제작으로 만든 장비는 물론이고, 엄선해서 고른 포션도 여유 되는 대로 넣었다.

“히익! 저런 악마! 맛없어 포션도 있다니.”

냥펀이 기겁했지만 살포시 무시했다. 꼭 봐도 그런 것만 보냐. 생명수라든가 마기를 올려 주는 포션도 있구만.

어찌 됐든 연합을 위해 나가는 녀석인 만큼 챙겨 주고 싶은 게 있었다.

“잘 쓰지.”

“그래.”

짤막하지만 감사 인사를 받은 건 처음이군.

그럼…….

“슬슬 가 볼까. 막바지 스퍼트 뛰어야지.”

하늘을 올려다봤다.

[대기 시간 종료]

[87층에 진입합니다.]

-파아아아아앗

우리 밑으로 전송 마법진이 펼쳐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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