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탑에 갇혀 고인물-488화 (487/740)

488화 답을 보여주다

자신을 징벌해 달라며 달려드는 괴물을 본 적이 있는가.

누군가 그 경험이 어떤지 물어본다면 난 이렇게 말할 것이다.

“그냥 알아서 나가 뒈져! 나한테 달라붙지 말고!”

어디 용암 안으로 들어가든지 우주 밖으로 나가든지 하면 될 것이지, 왜 생판 남인 나한테 이러는 거냐고.

하다못해 진짜 상대할 수 있는 놈이면 쓱싹해 버리면 그만인데, 이놈은 그것도 안 된다.

공격 하나하나가 치명적으로 다가온다.

그 와중에 어이가 없는 게 있다면.

“안 된다! 난 죽고 싶지 않, 나 스스로 죽는 것은 아무런 징벌도 되지 않는다!”

“미친놈이 제대로 걸렸네.”

죽여 달라고 발광을 해대지만 속마음은 그렇지 않다.

생명에 대한 의지가 가득하다 못해 철철 넘치는구만.

어쩐지 죄책감까지는 이해가 됐는데 변명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게 무슨 소린가 했다.

이런 뜻이었네. 자신의 죄를 벌해 달라 소리치지만 실제로는 자신을 죽이기 힘든 사람한테 저러고 있는 거다.

그러면서 이번에도 죽지 못했다며 죄책감에 시달리겠지. 속으로는 안도하면서 말이다.

‘이 자식, 계약의 문으로 넘어오려는 것도 그 때문 아니야?’

멸망한 차원에 혼자 덩그러니 있으면 뭐 하겠나. 굶어 죽든 차원이 붕괴하든 하지 않았을까.

그래서 그나마 멀쩡한 이곳으로 넘어오려는 거고.

말로는 나를 찾아온 거라고 하지만 이미 녀석에 대한 신뢰를 잃었다.

말하는 거랑 생각이 딴판이니 정신머리가 제정신일 리도 없고.

-콰아아앙!

놈이 팔을 휘두르자 강력한 풍압과 함께 일대가 일그러진다.

정면으로 맞서길 포기하고 옆으로 몸을 던졌다. 바람에 밀려 한 바퀴를 구르며 검을 고쳐 잡았다.

이미 수차례 검을 휘둘렀다. 몸이 뭐로 된 건지 생채기 내는 것도 쉽지 않다. 충격에 손아귀가 찢어질 것 같은 건 덤이고.

“그에에.”

“아. 이미 찢어졌구나?”

덕춘이가 날 핥는 걸 보니 이미 찢어진 모양. 검 손잡이 사이로 핏물이 묻어 있는 게 진작 터졌나 보다. 정신없어서 모르고 있었네.

그래도 한 가지 다행인 점이 있다면.

‘공격이 안 통하는 건 아니야.’

혼돈 수치가 충족됐기 때문인지 공격은 제대로 들어가고 있다. 문제는 녀석이 말도 안 되게 단단하다는 것과.

‘더 강한 공격이 필요해.’

지금 수준으로는 놈을 꺾을 만한 파괴력이 나오지 않는다는 것.

이상하다. 단순히 내가 혼돈의 파편에 비해 약하다는 걸 인정하기 싫다는 말이 아니다.

이건 뭐랄까.

‘뭔가 놈에게 치명적인 일격을 가하는 것 자체가 규칙에 어긋나는 느낌이야.’

앞뒤가 안 맞는 말이다. 공격이 제대로 들어가는데 치명적인 일격은 불가능하다는 말.

객관적으로 봤을 때 내 공격이 약한 것도 아니다.

이미 몇 가지 스킬은 MAX 레벨에 도달했다. 그러지 않더라도 주력으로 쓰는 스킬들은 대부분 10+레벨이고.

일반적인 스킬로는 오를 수 있는 최대치에 도달했다는 것. 에이션트 몬스터한테도 통하는 화력을 가지고 있다.

다른 어지간한 NPC도 싸워서 이길 자신이 있다. 당장 골드 등급에 해당하는 숭배자도 잡지 않았던가.

여기까지 생각해 봤을 때 가능성은 두 가지.

‘진짜 아직 약한 게 맞든지 아니면 저 망할 혼돈 때문에 뭔가가 어그러졌든지.’

어쩌면 둘 다일 수도 있고.

S급을 뛰어넘는 스킬이 필요하다. 권능은 이미 SSS급에 달했으나 아직 스킬은 S급을 넘어서지 못하고 있으니까.

스킬이 가지고 있는 태생적인 한계. 지금 가지고 있는 거로는 안 된다.

스킬로 안 된다면 스킬을 넘어설 기술이 필요한데.

‘쉽지는 않지.’

내가 알고 있는 NPC 중에서도 스킬이 아닌 자신의 기술과 힘으로 초인적인 힘을 발휘한 건 알리오스가 유일하다.

릴카랑 킬더레스도 99층까지 올랐으나 릴카는 차원 상인으로 활동하며 엄청난 장비발을 자랑했고 킬더레스는 종족값 자체가 다르다.

스킬을 떠나 종족 특성을 잘 활용했다는 뜻. 물론 그것도 기술이라면 기술이지만 나랑은 관계없는 일이다. 난 악마가 아니라 인간이니까.

“델버튼처럼 꼼수가 통할 거 같지도 않은데.”

그나마 델버튼은 도박으로 이루어져 있어 내기라도 할 수 있었다만 이 녀석은 건드릴 구석이 없다.

죄책감? 멘탈 공격이라도 해야 하는 걸까. 그러기에는 녀석에 대해 아는 게 아무것도 없다.

변명은 말할 것도 없고. 누가 변명을 잘하나 대결할 건 아니지 않은가.

-스으으.

이어지는 생각을 멈추고 자세를 낮추었다.

당장 해법이 떠오르지 않는다면 전투에 집중하는 편이 맞았다.

녀석의 특징을 찾아낼 것이다. 혼돈이란 정해진 게 없는 법. 나야 정신 멀쩡한 사람이라 비교적 순수한 혼돈 그 자체를 쓰고 있다만.

‘놈들은 다르지.’

재앙은 자기만의 법칙이나 상식을 벗어난 힘을 보이고는 했고 혼돈의 파편은…….

-끼아아아아악!

놈들을 이루고 있는 성질이 반영된 힘을 발휘한다.

델버튼이 역병의 안개를 내뿜는 것과 마찬가지.

스쿠룬타가 팔을 휘두르자 비명과도 같은 소리와 함께 충격파가 전해진다.

“흡!”

전신에 힘을 주며 버텼다.

몇 차례 격돌한 것으로 알아차린 정보. 놈의 공격은 불안정하다.

공격 방식이 서투르다는 뜻이 아니다. 매우 거칠고 어디로 튀어 나갈지 모른다는 말.

당장 지금도 그렇다.

앞으로 검을 내밀자 충격파가 멋대로 튕겨 나간다. 날아오는 각도와는 전혀 맞지 않는 방향.

발작하듯 튀어 오르는 힘의 여파에 오른쪽 어깨 갑주에 불똥이 튄다.

좋게 말하면 변칙성 있는 공격이었고 나쁘게 말하면.

‘놈도 제대로 통제하고 있지 못해.’

나한테는 좋은 소식인가.

한 가지 분명한 건 이거다.

“으그그그극! 그때는 어쩔 수 없다지 않았느냐! 난 그저, 그저 그 자리에 없었을 뿐이다!”

헛것을 보는지 머리를 감싼 스쿠룬타가 팔을 내저었다.

허공 어딘가로 날아가는 충격파가 더욱 거세게 튀어 오르며 일대를 헤집었다.

놈의 정신 상태가 안 좋을수록, 놈이 발작할수록 더 강하고 통제 불가능한 일격이 날아간다.

지금까지 내가 버틸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

오롯이 내게 집중하지 못하고 이따금씩 헛소리를 하며 본인이 보는 환상을 향해 공격을 날려 댔다.

일대일로 싸우는 나야 땡큐다만.

‘저런 놈이 지구에 떨어지면 노답이겠는데.’

어쩔 수 없는 적이 마구잡이로 헤집고 다니면 일대가 파괴되는 건 금방이었다.

그뿐일까 녀석의 근처에 있는 것만으로도 머릿속에서 과거의 기억이 뜬금없이 튀어나온다.

그것도 내가 저지른 실수와 잘못들이.

[정신 보호(SSS) Lv.10+]

물론 나야 정신적인 공격은 면역에 가까워서 상관없다만 다른 사람들은 어떨까.

어쩐지 녀석을 마주하자마자 정신 보호가 활성화되더라니.

전장에서 흐트러지는 정신은 독이나 마찬가지. 날뛰는 혼돈의 파편과 죄책감에 제대로 된 전투를 하지 못하는 헌터.

저런 놈이 날뛰니 세상이 망하지. 정신체에 가까운 정령과 요정은 특히나 더 치명적일 거다.

역시 이대로는 답이 없다. 놈이 아직 환상에 시달릴 때 탈출해야 하나.

계약의 문도 따지고 보면 일종의 다른 차원과 연결된 통로. 어떻게 타락 천사의 검으로 경계를 끊어 버리면 놈을 가둘 수 있지 않을까?

굳이 정면 대결을 고집할 이유가 전혀 없다.

애초에 안으로 들어온 이유도 꼭 싸우기 위해서라기보다는 혹시나 모를 정보를 얻기 위함이었다.

하필 미친놈을 만나서 이번에는 꽝이지만.

“탈출하자.”

“그에에.”

판단을 내린 난 발을 박찼다. 생각을 했으면 행동으로 옮길 차례. 놈이 아직 정신을 못 차렸을 때가 기회다.

처음부터 전력으로.

[무지개다리(S)]

-촤아아아아악!

내가 들어왔던 곳을 향해 무지개다리를 뻗었다.

빠르게 이동하며 힐끔 뒤를 살폈고.

“어딜 가느냐!”

“이씨. 바로 눈치채네.”

득달같이 달려오는 스쿠룬타를 볼 수 있었다.

그치? 아무리 정신 나간 녀석이라도 눈앞에서 대놓고 탈출하는 건 말이 안 되지?

-콰앙! 쾅! 쾅!

미친놈처럼 팔을 휘두르며 무지개다리로 타오르는 녀석. 그때마다 충격으로 무지개다리가 흔들린다.

이동 중에는 파괴 불가 옵션이 붙었음에도 무너지지는 않을까 우려스러울 정도다.

정작 진짜 우려해야 할 건.

“저 녀석 왜 이렇게 빨라!”

“나를 버리지 마라! 넌 갈 수 없다!”

무지개다리를 타고 달려오는 녀석. 그 속도가 말이 안 된다.

나랑 싸울 때만 하더라도 저 정도 속도는 아니었던 거 같은데. 그동안 힘을 숨긴 건가? 그건 아니다. 그럴 이유가 전혀 없으니까.

그런 내 의문에 답이라도 주려는 걸까.

[혼돈의 파편, 스쿠룬타가 징벌자를 향해 질주합니다.]

“이런 거였나.”

영악한 녀석 같으니. 날 보자마자 빛이니 뭐니 하면서 대상으로 지정하더니 추적하기 위함이었던 건가.

아직까지는 거리가 있지만 그것도 곧 따라잡힐 거다. 반면 계약의 문까지는 거리가 남아 있다.

차원의 경계선을 잘라 낼 수 있다면 다행이지만 만약 실패한다면?

그동안 잘라 낸 경계선은 어디까지나 작은 부분들. 지금처럼 차원과 차원이 연결된 곳을 끊은 적은 없다.

되면 다행이지만, 작업하는 중간 부하를 이기지 못한 검이 부러질 가능성도 있고. 어찌 됐든 타락한 천사의 검은 A급 장비.

낮은 등급은 아니었으나 내구도를 신경 쓰지 않고 사용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후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꼬였네. 밖은 여전히 지옥을 막으려고 분발 중이겠지?

이놈을 데리고 나갈 수는 없다. 그렇다면.

“덕춘아, 부탁한다.”

“그에에.”

인벤토리에서 타락한 천사의 검을 꺼내 덕춘이에게 건넸다.

혀로 손잡이를 잡은 녀석의 등을 한 번 쓰다듬고.

“넌 나랑 가는 거고 자식아.”

-콰아아아아앙!

파이어 밤을 터트려 스쿠룬타에게 쇄도했다. 기습적으로 이어진 돌진. 놈 또한 내가 이럴지는 몰랐는지 대처하지 못했고.

“끝까지 한번 가보자. 네가 원하는 대로 말이지!”

“으흐흐. 좋다! 좋구나!”

나와 스쿠룬타는 무지개다리 밑으로 추락했다.

내가 녀석을 잡고 있는 사이 덕춘이가 차원의 경계를 잘라 낼 것이다.

[SSS급 권능, 굴하지 않는 검귀가 빛납니다.]

[검강]

밑으로 떨어지며 혼돈검을 휘둘렀다. 전신의 혼돈을 뽑아내며 거칠게!

급격히 운용한 혼돈의 기운에 격통이 밀려왔고.

[혼돈이 감돕니다.]

[이블아이의 혼돈검이 반응합니다!]

그 덕분일까, 지금까지 단단하기만 했던 혼돈검에 검은 아지랑이가 피어올랐다.

시커멓고 기분 나쁜 기운. 동시에 혼돈의 파편과 비슷한 무언가.

익숙하지 않은 혼돈을 운용했기 때문일까 속이 울렁거렸지만 상관없다.

-촤아아아악!

“크하아압!”

처음으로 내 공격에 맞은 녀석이 핏줄기를 뿜었다.

너무나 짙어 붉은색인지 검은색인지 구분되지 않는 피. 얼굴에 묻은 피를 핥았다.

썩은 맛이 난다.

그런데 왤까.

[혼돈 수치 +1점]

달달한 것도 같은 건.

-뻐어어어억!

희미하게 웃기가 무섭게 놈이 발길질했다.

갑옷이 우그러들며 뒤로 튕겨 나갔다. 바닥을 몇 번이나 구른 후에야 멈출 수 있었다.

“우엑!”

순간적으로 갑옷이 찌그러지면서 내상을 입었는지 피가 울컥 올라온다.

갈비뼈도 몇 개 나간 거 같은데?

반쯤은 반사적으로 포션을 꺼내 입에 부었다. 갑옷 역시 자체 수복으로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왔고.

“너, 너너! 오오. 이런.”

저 멀리 가슴에 생긴 상흔을 보며 호들갑 떠는 스쿠룬타가 눈에 들어왔다.

하여간 엄살은. 피 좀 뿜어져 나왔다 뿐이지 얕은 상처다. 생채기라고 부를 정도는 아니지만 전투에 전혀 지장 없을 정도의 상처.

그건 그거고.

‘아까는 뭐였지?’

내가 가진 혼돈을 쥐어 짜냈을 때의 공격. 그전까지와는 전혀 다른 반응을 보이는 스쿠룬타.

이거 아무래도.

“혼돈이 답이 맞는 거 같은데?”

그런 내게 정답을 알려 주고 싶은 건가.

[행운 스텟이 반응합니다!]

[SSS급 권능, 별을 주시하는 눈이 발휘됩니다.]

메시지창이 떠올랐고.

“호오.”

[SSS급 권능, 스킬 조합이 모습을 드러냅니다.]

권능 중 하나가 멋대로 발동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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