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탑에 갇혀 고인물-486화 (485/740)

486화 계약의 문으로

몸과 머리가 분리된 유헤다가 바닥에 쓰러진다.

이 공격 한 번을 위해 연기 좀 했다. 아무래도 방심한 상태일 때 공격하는 게 성공 확률이 높아서.

예상은 적중했고, 설마 그 많던 성물이 한 번에 무력화될지는 몰랐는지 유헤다의 반응이 늦었다.

평소였다면 피했을지도 몰랐으나 이번에는 아니었다.

“그러게 적당히 까불었어야지.”

[데몬 스피어(S) Lv.10+]

-콰아아아악!

마기를 듬뿍 담아 녀석의 머리와 몸통을 완전히 없애 버렸다.

머리가 잘리기는 했으나 이놈 또한 골드 등급이자 다른 천사들을 이끄는 지배자 중 하나다.

방심하지 말자. 저러다가 또 어떤 일을 벌일지 아무도 알 수 없다. 구사일생처럼 한 번 버티는 능력을 쓸 수도 있었고, 영혼만 빠져나와 다른 육체로 전이할 수도 있었다.

세상에는 수많은 스킬과 권능이 있는 법. 무슨 일이 벌어져도 이상하지 않으니 과하리만큼 경계해도 나쁠 건 없었다.

“후우.”

확실한 마무리를 지은 난 뒤를 돌아봤다.

예상보다 빠르게 유헤다를 잡았다. 제대로 한 게 맞을까 불안감이 느껴졌지만 그것도 뒤편을 바라보니 곧 사라졌다.

유헤다가 죽으면서 축복을 잃은 천사들이 다시 고꾸라졌으니까.

불멸을 잃은 천사들은 그저 몸 좀 튼튼한 장작더미. 프로네의 불길이 놈들을 집어삼켰다.

저항하는 이들도 있었으나 그리 오래지 않아 진압되었다.

“깔끔하네.”

운이 좋다고 해야 하나. 내게 성물 약탈자 칭호가 없었다면 꽤 피곤한 싸움이 됐을 거다. 상성이 좋았다고 말하는 게 맞다.

녀석이 방심한 덕분이기도 하고.

참 이상하단 말이야. 숭배자 놈들도 나한테 당한 게 얼만데 아직도 건방을 떨고 방심을 하지?

이게 다 자신은 다른 멍청이보다 나을 거라는 자만에서 오는 거다. 이래서 사람들이 겸손할 줄 알아야 한다고 말하는 건가.

아무튼…….

“이 녀석 골드 등급 맞아? 너무 쉽게 간 거 같은데?”

“맞긴 할 거야. 권능으로도 살펴봤으니까.”

전투하면서 놈에 대한 정보도 확인했고, 스킬과 권능을 사용하는 것도 봤다.

나도 그렇지만 핥짝이도 의심이 참 많단 말이지. 마음에 든다. 그러니까 여기 있는 거지.

확신을 담아 말하자 핥짝이도 별다른 말 없이 고개를 끄덕인다.

유헤다가 데리고 왔던 천사들은 전멸. 숭배자들끼리는 커넥션이 있다. 지금쯤 유헤다가 당했다는 소식이 전해졌을 거다.

[데이본드가 당신을 보며 사납게 미소 짓습니다.]

[윗분들의 분노가 당신에게 향할 것임을 예고합니다.]

“반응 빠르네.”

“저놈들은 어째 맨날 같은 소리만 하는 거 같다. 누가 보면 찾아오는 줄 알겠어. 층에 박혀서 못 나오는 것들이.”

핥짝이의 팩트를 듣기라도 한 건지 더 이상의 메시지는 없었다.

그나저나 윗분들이라.

‘역시 골드 등급은 중간 관리자 정도야.’

각 종족을 이끌 만한 힘을 가지고 있어 부려먹기 좋은 놈들이라고 해야 할까.

과연 다이아 등급에 도달한 녀석들은 어떤 놈들일지 면상 좀 봐 보고 싶다.

그러기 위해서는 90층대에 진입해야겠지.

뚜둑. 몸을 풀었다. 긴장했던 것보다 빠르게 처리하기는 했지만 전투를 진행하며 대미지와 피로가 쌓였다.

이제는 익숙하다만 아직 해야 할 일이 남아 있어서.

유헤다는 어디까지나 나를 방해하기 위해 찾아온 거다. 챕터와는 큰 관련이 없는 녀석이라는 것.

우리가 진짜 해결해야 하는 대상은 계약의 문.

“프로네, 지옥과 멸망한 차원. 두 차원 모두 과거에도 연결된 곳이었나?”

“이렇게 동시에 연결되지는 않았지만 그렇긴 하다. 정확히 말하면 그런 곳이 있었어.”

“지옥이 먼저 열렸었지. 끔찍한 족속들이야.”

프로네와 카트란스가 지옥과 연결된 문을 보며 혐오스러운 표정을 짓는다.

“그때는 어떻게 막았지?”

“막은 경우가 있던가, 카트란스?”

“글세, 거의 무한에 가까운 경우의 수가 있어서. 내 기억에는 있긴 했다.”

잠시 입을 다물었던 프로네가 물었고, 한참을 생각하던 카트란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네. 정령계와 요정계가 합쳐지면서 두 세계는 끝없이 분열하고 있다.

좋게 말하면 무한히 분열하는 세계 중 하나라도 살아남는다면 멸망을 피해 다른 차원으로 넘어갈 수 있다는 거였고, 나쁘게 말하면 세계가 완전히 불안정해졌다는 것이기도 했다.

가볍게 입술을 씹었다.

‘근처에 있던 차원과 엮여서 망한다라.’

생각보다 그런 경우가 여러 번 있던 거 같다. 지금 이곳은 유독 심한 편이고. 요정계와 중앙계뿐만 아니라 다른 차원과도 엮여 있는 곳이니까.

천계와 마계도 비슷하지. 연옥계도 그렇게 생겨난 곳이었으니.

여기서 알 수 있는 것 한 가지.

‘멸망이 다가와도 다른 세계와 엮이는 건 안 돼.’

같이 망하면 망했지 멸망에서 벗어나는 꼴을 못 봤다.

이 부분은 앞으로 겪을 시나리오에서도 명심할 내용이다. 한 가지 더 궁금한 것이 있다면…….

“지구도 인접한 다른 세계가 있는지 모르겠군.”

지금까지 별일 없었으니 없을 거 같기는 하다만 확실한 건 아무도 모르는 거라서.

이거야 내가 어떻게 알 방도가 없으니 접어 두자. 대신 지금은 다른 차원과 연결된 통로를 끊는 것에 집중하자.

-우우우우우우웅!

다른 상위 헌터들이 분발해 주고는 있으나 여전히 계약의 문은 열려 있다.

“지옥과의 연결은 막대한 희생을 치르고 끊어 내었으나 멸망한 차원은 끝내 막지 못했다.”

“계약은 상호 협약으로 이루어지는 것. 우리의 강요로 인해 열렸지만 저곳에서도 응답한 이가 있다는 것이지. 굳이 사람이 아니어도 상관없다.”

그니까 간단히 요약하자면.

“저쪽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말이네? 계약에 응답한 사람을 찾든 관련된 물건을 찾든 해야 하고?”

“그렇지.”

어째서 이들이 혼돈의 파편을 막지 못하고 멸망했는지 알 거 같다.

멸망한 차원에서 계약에 반응한 존재가 누구겠는가. 저기, 차원을 넘어 이곳으로 오려는 혼돈의 파편이지.

이거 제대로 한 방 먹었네. 그래도 한 가지 위안이 되는 것이 있다면…….

‘적어도 80층대에서 혼돈의 파편과 정면 대결할 일은 없어.’

내가 많은 것을 비튼 거인계에서도 진짜 혼돈의 파편과 싸우지는 않았으니까.

개판으로 치닫고 있는 이곳에 혼돈의 파편이 직접 모습을 드러내지는 않을 거다. 만약 모습을 드러낸다면…….

‘거기서 챕터가 마무리될 것이고.’

적어도 지금까지 봐 왔던 시나리오는 그렇다. 공략 불가로 판정해서 챕터를 끝내겠지.

그런 관점에서 봤을 때, 진짜 놈을 막아 낼 방법이 없다면 지금 당장 끝났어도 이상하지 않다. 그렇다는 건.

“분명 우리가 눈치채지 못한 공략법이 있는 거야.”

그게 아니면 설명되지 않는다.

가능성을 살펴보자. 지금 이곳에서 혼돈의 파편을 붙잡고라도 있을 가능성을 가진 사람은 누구인가.

핥짝이? 프로네? 카트란스? 다른 멤버들?

일단 다른 멤버들은 안 된다. 지금도 지옥에서 밀려 나오는 괴물들을 상대하느라 정신이 없다. 저기서 탈모맨이나 냥펀, 다른 상위 헌터를 빼내 온다면 속절없이 밀릴 가능성이 크다.

그렇다면 핥짝이는…….

“핥짝아, 지금 혼돈 수치 몇 점이냐?”

“대충 70점대? 정확히는 모르겠는데 아마 80점은 안 됐을 거야.”

혼돈 수치라는 게 스테이터스처럼 표시되는 게 아니다 보니 측정하기가 애매하긴 하다.

좋게 봐야 80점 정도라는 건데. 상당히 높은 수치기는 하지만.

‘그걸로는 부족해.’

100점은 되어야 혼돈의 파편에게 대미지라도 제대로 줄 수 있다.

다른 적이었다면 데리고 갔겠지만 이번에는 예외다. 나와 달리 핥짝이의 코인은 한정적이고, 혼돈의 파편은 너무 위험하니까.

그렇다면 남은 건…….

“프로네, 카트란스. 저곳에 들어간 적이 있나?”

“정확히는 모르겠군.”

“불가하다. 시스템적으로 막혀 있지.”

“비교적 자유롭기는 하나 어디까지나 층은 등반가를 위해 마련해 놓은 것. 우리가 멋대로 어쩔 수 없다.”

혹시나 싶어 기대해 봤지만 역시 안 되는 건가.

첫 번째 챕터 때 같이 던전에 들어갔어서 가능할 줄 알았는데. 어쩔 수 없지. 말마따나 NPC는 행동 반경에 제약이 있으니까.

그렇다는 건 결국에…….

“나 혼자 들어가야겠군.”

“그에에.”

자기도 있다며 뺨을 툭툭 치는 덕춘이. 그치, 같이 갈 사람은 없어도 같이 갈 개구리는 있지.

“야야, 너 혼자 들어가려고? 그러다 객사하는 거야. 같이 가, 인마.”

“안 돼. 혼돈의 파편이 어떤 놈인지는 너도 대충은 알잖아.”

핥짝이가 함께하겠다고 했지만 단호히 거절했다.

혼자 가기 쫄린다고 사지로 몰 수는 없는 일. 핥짝이가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었으나 난 진지했다.

“거인계 델버튼 기억 나지? 완전한 혼돈의 파편이 되지 않은 녀석이 그 정도야.”

“아니까 더 그러는 거 아니야. 그동안 쉽게 올랐던 적 없잖아. 어떻게든 되겠지.”

마음은 고맙다. 하지만 아직까지 멤버들은 혼돈의 파편을 제대로 마주한 적이 없다. 놈들의 무서움을 모른다.

기껏해야 70층에서 혼돈의 파편 열화판을 상대해 본 게 전부.

유일하게 직접 마주한 건 나 혼자. 프램버그에서 만난 델버튼. 그 인연이 여기까지 이어질 줄은 몰랐으나 중요한 건 이거다.

‘99층까지 올랐던 이들도 어쩌지 못하고 결국 멸망하게 만든 원인이 그놈들이야.’

릴카, 킬더레스, 알리오스 그리고…….

‘펠라인.’

내가 착용하고 있는 장비의 주인. 동시에 릴카와 킬더레스와 함께 활동했던 존재.

생각해 보면 조합부터가 기묘하다. 릴카는 대림원 소속이었다가 재앙에 의해 차원의 경계선으로 쫓겨났으며, 킬더레스는 천계와 마계를 지배했던 악마다.

당연하게도 이들이 활동한 곳은 천계도 마계도 수인들이 있던 세계도 아니다. 돌고 돌아 하나로 모인 세계는 어디인가. 아마 그곳이 펠라인이 있던 세계 같은데.

“후우.”

고개를 흔들며 집중했다.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다. 당장 해결해야 할 것들이 있다.

“저쪽도 지금 상태로는 안 돼. 도움이 필요하다고.”

지옥과 연결된 곳을 가리켰다. 아비규환. 어디서 온 건지 정령계와 요정계에서 온 녀석들도 합류해 있다.

그럼에도 밀려 들어오는 놈들을 처리하는 게 쉽지 않았으며, 괴물 사이를 뚫고 안에 들어가 계약에 반응한 대상을 해치우는 건 더 어려운 일이었다.

“저쪽을 맡아 줘. 걱정 말고. 나 혼돈 수치 이미 최소 200점은 넘었을걸?”

솔직히 말하면 100점이 넘었다고 제대로 된 뭔가를 할 수 있다는 것도 확실치 않다. 아직까지 해 본 적 없으니까. 그저 그럴 거라 가정할 뿐.

애초에 100층에 오르기 위해 필요한 게 혼돈 수치 100점 아니었던가. 그 역할이 무엇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100층에 올랐었던 NPC는 존재하지 않으니.

다만…….

‘오필리아.’

노블 나이트를 이끌고 있는 여인. 그녀라면 알지도 모르겠다. 그녀가 사용하던 무기의 설명에 이런 말이 적혀 있었으니까.

제6 천계의 대천사, 벨루악이 사용하던 검. 멸망을 극복한 세계의 흔적이라고.

게다가 하나 더.

‘혼돈의 파편.’

델버튼과의 대화를 기억하고 있다.

이제 와서는 확신에 가깝다. 혼돈의 파편은 100층까지 올랐던 이들이다. 결과는 그리 좋지 않았지만 NPC도 알지 못하는 무언가를 알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는 말.

그것을 위해서라도 난 저곳에 들어가야 한다.

다른 등반가와 달리 내게 있어서 100층은 반드시 가야 할 곳이니까.

“갔다가 아니다 싶으면 바로 나올 거야.”

“으으. 이 씨, 네 마음대로 해.”

답답한지 헬멧을 두드리던 핥짝이가 손을 내저었다.

“살아만 와라.”

피식, 웃음을 흘렸다. 은근히 사람들 챙긴다니까.

팔을 휘적이며 돌아섰다.

“당연하지.”

난 탑에서만큼은 얼마든지 살아난다.

지옥과 연결된 곳은 이들한테 맡긴다. 그러니 나는…….

‘멸망한 차원으로 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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