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4화 같이 덤비지?
숭배자. 나와 척을 진 집단이자, NPC가 아닌 등반가 중에도 놈들의 편에 붙은 놈이 있을 정도로 위험한 세력이었다.
적어도 그들이 겉으로 드러낸 목표 중 하나는 탑의 건재함이다. 대체 왜 이런 집단에 정신이 팔려서 가담하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만큼 숭배자들이 달콤한 대가를 내준다는 거겠지.
당장 내 손에 잡힌 녀석 또한 그랬다. 몸은 구속했으니 무장해제를 하는 건 당연. 소지품도 검사해 수상한 것을 찾아보았고 그 결과.
“쓸 만한 물건이 많군.”
“그걸 다 털어 가다니, 빌어먹을.”
“억울한 소리 하지 마. 누가 보면 진짜 다 털어 가는 줄 알겠다. 인벤토리에 숨겨 둔 물건도 있을 거면서.”
따악, 놈의 머리통을 때렸다.
나라도 인벤토리에 넣어 둔 물건은 어쩌지 못한다. 그리고 중요한 물건은 대부분 인벤토리에 넣어 두지. 분실할 걱정이 없으니까.
‘등반가나 헌터가 죽으면 인벤토리에 있던 물건은 어디로 가는 거려나. 탑이 다시 가져가나?’
인벤토리라는 것도 따지고 보면 권능 중 하나. 시스템에 의해 탑이 선물한 것과 마찬가지니 그러지 않을까 싶다.
탑을 오르면서 얻은 물건 중에는 과거 누군가가 인벤토리에 넣어 뒀던 물건이 섞여 있을지도 모르지.
아케인 젬도 그렇고, 펠라인 세트도 그렇고 그럴듯한 가설이다.
중요한 건 이게 아니고.
“80층대에 올랐음에도 실버 등급이라.”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잔챙이였나. 그래도 80층대 중반까지 올랐으면 어지간한 NPC는 힘으로 꺾을 만한 수준인데.
흐음, 그렇지도 않은가.
80층대까지 올랐다고는 하나 이 녀석과 나의 전투력은 격차가 꽤 심하다.
나야 남들보다 구르면서 위로 올라왔고 옆에 있는 핥짝이도 비슷하다.
반면에 이 녀석은 숭배자로 전향하여 지원을 받았으니 날로 먹은 감이 없지 않아 있지.
남의 힘을 이용해 등반한 만큼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체감상 느껴지는 것도 실버 등급 녀석들이랑 비슷하기도 하고.
-빠각
놈이 가지고 있던 숭배자 패를 부쉈다. 이건 아무런 의미가 없었으나 다른 것들은 좀 달랐다.
상점에서는 구할 수 없는 포션이나 아이템이 있기도 했고, 권능으로 살펴보다 누가 짜 맞추기라도 한 것처럼 시너지를 낼 수 있는 스킬들을 가지고 있었다.
우연이라기에는 누군가의 의도가 들어간 듯 보이는 스킬 세트. 이 또한 숭배자들이 지원이랍시고 보내 준 스킬북을 익힌 덕이었다.
게다가…….
“신기하네.”
녀석이 가지고 있던 수정 구슬이 눈에 걸렸으니, 다른 숭배자의 상태를 확인할 수 있는 장치였다.
엄청난 기능을 자랑하지는 않는다. 기껏해야 같은 층에 있는 이들의 위치와 건강 상태를 체크하는 정도?
이게 있어서 서로 협력할 수 있던 모양이다.
빼앗은 아티팩트로 확인한바 내가 잡고 있는 녀석을 제외한 다른 등반가 숭배자의 신호가 잡히지 않는다.
루키 그룹이든 요정 클럽이든 이미 남은 잔당을 잡아 해치웠다는 뜻이겠지.
커뮤니티도 없이 어떻게 상황 파악을 한 건 납득했다. 남은 건 하나.
“윗놈들의 지시를 어떻게 받지?”
“그, 그건.”
녀석이 망설인다. 이게 망설일 일인가? 말하기 싫으면 말아야지. 어차피 위로 올라가면 다른 숭배자가 있을 거다.
핥짝이도 비슷한 생각인지 냅다 녀석의 머리통을 때렸다.
“얌마, 말할 거 있으면 속 쉬원하게 불어. 버틴다고 숭배자들이 너 챙겨 줄 거 같아?”
“너희는 모른다. 이곳에서의 죽음은 진짜 죽는 것이 아니야. 머지않아 세상이 멸망하면 난 이곳으로 다시 들어온단 뜻이지. 그때 오늘의 일로 처벌받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에휴, 이걸 멍청하다고 해야 할지 모자라다고 할지.”
둘 다 비슷한 뜻 아닌가? 멍청이나 모지리나 거기서 거기지.
“그래. 네 말이 다 맞다 치자. 그런데 탑이고 뭐고 돌아오는 것도 네가 밖에서 멀쩡히 살아 있을 때의 이야기겠지?”
“당연한 소릴. 서, 설마?”
“이 짓거리 하면 네 얼굴이 안 팔리겠니? 너한테 당한 녀석들도 있을 거야. 그게 아니더라도 연합 사람들한테 신상 털리는 건 금방이고. 감당돼?”
녀석이 입을 다문다. 그렇겠지. 뭐가 됐든 살고 싶어서 숭배자에게 붙은 인간이다.
“협조하면 얼굴은 안 찍을게. 약속.”
핥짝이가 나직이 말했고 이내 침을 삼킨 녀석이 입을 열었다.
입이 싼 녀석이네. 삶에 대한 의지가 커서 그런가.
“숭배자 집단에 들어가고 소속에 들어가면 몇 가지 혜택이 주어지지.”
“소속?”
“숭배자 내부에도 세력이 나뉜다는 건 알고 있을 텐데.”
알다마다. 데이본드나 유헤다와 같이 골드 등급 중에 파벌을 만든 이들이 존재한다.
아직 내가 모르는 녀석도 있을 거고.
“파벌에 들어가면 더 많은 혜택이 주어진다. 물론 그만큼 해야 하는 일도 늘어나지만 그만한 가치가 있다.”
녀석이 그동안 받았던 혜택을 줄줄이 읊는다. 장비나 아티팩트와 같은 물질적인 지원은 물론이고, 숨겨져 있는 유적에 관한 정보도 몇 개 받았단다.
그뿐일까, 곳곳에 숨겨져 있는 숭배자의 도움을 받아 등반이나 퀘스트를 수행할 때도 비교적 쉽게 넘어갈 수 있었다고.
상위층에 올라와서는 그런 경향이 더 강했다. 다른 곳에 비해 숭배자들이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으니까.
이렇게까지만 보면 좋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만.
‘쓸모가 없군.’
장비야 초반에나 좋은 물건 구하기 힘든 거지 조금만 위로 올라가도 그럭저럭 쓸 만한 것들을 얻을 수 있다.
퀘스트야 본인 영역이고, 숭배자가 아닌 NPC들이 주는 퀘스트가 훨씬 많다. 굳이 제약을 걸 필요가 없다는 것.
상위층도 마찬가지. 숭배자들의 정책을 봤을 때, 대단한 도움을 줬을 리가 있나. 챕터가 망할 때까지 구석에 박아 두는 게 전부겠지.
그러니까 층에 비해 별 볼 일 없는 힘을 가지고 있는 거다, 이 녀석은.
내가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는지도 모르고 녀석은 열심히 떠들며 찬양을 해 댔고.
“윗분들을 섬기면 하나의 라인이 생긴다. 이를 통해 은총을 받기도 하며 계시를 받기도 하지.”
녀석이 목 뒤를 보인다.
파아아앗!
그동안 보이지 않았던 문양이 드러나며 빛을 뿜는다.
“…바로 이렇게!”
비명과도 같은 소리를 내뱉은 녀석이 앞으로 고꾸라진다.
문양을 중심으로 놈의 몸이 무너졌고 그것을 매개로 그려진 피의 마법진이 활성화됐으니.
“공블아이, 이건…….”
“맞아, 그 녀석인 거 같아.”
나와 핥짝이는 익숙한 느낌을 받을 수 있었다.
신성력. 그것도 기분이 나쁠 정도로 농도 짙은 신성력이었다.
아무리 온화한 성격의 에너지라도 밀집되면 난폭해지는 법.
-사아아아아
마법의 매개물이 되어 바스라지는 숭배자 위로, 한 존재가 떠올랐다.
중성적인 얼굴에 얇은 체형. 등 뒤로 뻗은 한 쌍의 날개는 황금색으로 반짝였고, 머리 위로 떠오른 천사링 또한 황금이었다.
천사링에 탁한 뭔가가 섞여 있다는 게 포인트라면 포인트.
녀석의 정체를 파악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숭배자. 천사. 이번 시나리오와 연결된 천계.
‘유헤다.’
-카가가가가각!
다짜고짜 검을 휘둘렀다. 적이 확실한 이상 가만히 구경만 할 생각은 없다.
기습적으로 내지른 검이었건만 쉴드에 막혔다.
아쉬워라. 각도는 좋았는데. 쉴드만 아니었어도 목에 생채기 정도는 넣지 않았을까.
입맛을 다시며 검을 회수하면서도 유헤다를 노려보며 빈틈을 노렸다. 핥짝이 또한 전투를 위해 거리를 벌렸으니.
가만히 눈을 감고 있던 유헤다가 천천히 눈을 떴다.
투명하게 빛나는 금안이 번뜩인다. 반쯤 감긴 듯하면서도 상대방을 꿰뚫는 듯한 눈빛.
항상 말로만, 녀석이 보내는 메시지로만 알고 있었는데 실체를 보니 기분이 색달랐다 뭐랄까…….
‘완전히 압도적이지는 않아.’
이미 거인계에서 골드 등급을 만나 봤기 때문일까.
그곳에서도 다른 거인 숭배자들을 이끄는 놈과 싸워 보지 않았던가. 물론 중간에 혼돈의 파편으로 변하고 있던 델버튼을 상대하느라 제대로 맞붙지는 못했다. 마무리도 델버튼이 했었고.
자세한 전력은 알지 못한다는 이야기. 그럼에도…….
‘할 수 있을 거 같다.’
그때보다 난 더 강해졌고 상황도 더 나았다. 체력이 떨어지지도 않았으며 나를 방해할 다른 적들도 없다. 핥짝이도 옆에 있고.
무엇보다 유헤다의 종족은 천사. 이미 여러 번 상대했을뿐더러 내게도 상당한 양의 신성력과 마기가 있다.
게다가 하나 더.
“반갑구나. 내 친히 너희를 징벌하기 위해 이 자리에 섰…….”
“핥짝아! 프로네! 카트란스! 이놈을 없애야 해! 안 그러면 이번 챕터는 망한다! 지옥이니 멸망한 차원이니 그쪽은 다른 사람한테 맡기고 여기부터 처리해야 해!”
우리 옆에는 상위 정령인 프로네와 카트란스도 있다.
프로네가 도와줄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카트란스는 그럴 의지가 있어 보였고.
“허어, 숭배자들이 있는 건 알고 있었지만 천사 중에도 있는 줄은 몰랐군. 좋다! 내 한 몸 힘을 보태 주마!”
“난 싸우기 귀찮…….”
“그래. 싸우기 싫으면 하지 마. 같은 상위 정령이라도 힘의 차이는 있고, 아무래도 번개가 좀 더 강한 속성일 수도 있으니까 무리 안 해도 돼.”
“무슨 소리! 저런 반짝이보다 불의 정령인 내가 더 뛰어난 것을 여지껏 모르느냐!”
슬쩍 한번 긁어 주니 프로네도 싸움에 동참했다.
시작은 핥짝이.
[해제(S) Lv.MAX]
-콰아아아아아앙!
유헤다가 뭐라 말을 끝마치기도 전에 압축 구슬을 날리더니 그대로 해제해 버린다.
가공할 만한 반발력과 함께 일대가 터져 시야가 가려졌고.
“번개와 천둥! 징벌이라고 했는가! 진정한 천벌이 뭔지 보여 주마!”
“한창 활동할 때 인간들은 나를 보며 지옥불이라 불렀지. 타락한 천사인 네게는 이쪽이 어울릴 거 같구나!”
그곳을 향해 카트란스의 벼락과 프로네의 불길이 떨어졌다.
순간적으로 눈을 가렸다. 섬광과 함께 휘몰아치는 강력한 힘!
탑을 올랐던 상위 정령의 힘을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한 번에 몰아치는 파괴적인 일격은 상대가 누구든 없애 버릴 위력을 갖추고 있었으나.
-우웅, 우우우우웅
“이거 웃기는군. 내가 언제 혼자 왔다고 했느냐. 버러지 같은 등반가와 퇴물 정령들아.”
일대에 순백의 마법진이 수십 개 떠올랐다.
먼지가 걷힌 공간. 금이 간 쉴드 속, 유헤다가 입꼬리를 올린다.
마법진 위로 하나둘 솟아오르는 전투 천사. 뾰족한 다리와 갑옷을 입은 채 신성하게 빛나는 검을 움켜쥔 이들이 살기를 내뿜는다.
은색 날개를 가진 이들과 유헤다보다는 연하지만 황금색 날개를 지닌 이들.
보나마나 실버 등급과 골드 등급의 숭배자들이었고.
“그나마 은혜를 베풀어 마지막 말 정도는 들어 주려 했거늘 그러기에는 너무 건방지다. 이 자리에서 죽어라.”
“유헤다 님을 위하여!”
“저 간악한 존재들을 멸하라!”
유헤다가 손짓하는 것으로 놈들이 달려들기 시작했다.
나 또한 검을 고쳐 쥐며 발을 박찼다.
녀석 혼자 덤비는 거? 기대도 안 했다. 그동안 숭배자들과 싸운 기간이 있는데. 별것도 아닌 놈들이 우르르 몰려오는 건 익숙했다.
게다가.
“재밌네. 아직도 실버 등급이 남아 있다니.”
-콰아아아아악!
“크하아아악!”
“아아아악!”
실버 등급쯤은 이제 아무렇지도 않다. 수십 명이 달려들든 수백 명이 달려들든 처리할 자신이 있었고.
“잔챙이는 꺼져!”
핥짝이 역시 공격을 했으니 실버 등급 녀석들은 제대로 된 전투도 하지 못한 채 리타이어.
옆에서 기습적으로 들어오는 숭배자의 허리를 베어 내며 유헤다에게 오로라 빔을 쏘아 냈다.
가볍게 머리를 꺾어 피해 내는 녀석. 아직 여유롭네?
“그렇게 구경만 하다가는 금방 죽을 텐데.”
까딱. 손가락을 움직였다.
“그나마 살 가능성 높게 지금부터 같이 덤비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