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3화 다 꺼내 봐
그런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사람이 떳떳하지 못하거나 감추고 싶은 게 있을 때 어떻게 행동하는가.
보통은 숨기 마련이었고, 그게 아니더라도 다른 사람과 대화하지 않고 구석에 찌그러져 있고 싶을 때가 있다.
나도 그런 적이 아예 없다고는 말 못 하겠고. 대격변 이후에는 누구나 한 번쯤은 겪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살기 위해 몰래 옆에 있던 사람을 밀쳐 몬스터의 이목을 끌었다든가, 먹을 것을 아끼기 위해 당장 굶주린 이들에게 매몰차게 대했다든가 하는 그런 것들.
크든 작든 가혹한 환경에서 사람이 얼마나 이기적이고 냉정해질 수 있는지 배웠던 시기였다.
물론 그 와중에도 빛나는 사람들도 있기는 했으나.
‘대부분 단명했지.’
그래서 그런가. 조금은 비겁하고 어떻게 보면 이기적인, 그렇다고 완전히 인간성을 버리지는 않은 사람들이 살아남은 거 같다. 인간성이 아예 개판이면 그건 그것대로 배척의 대상이라.
정령계와 요정계가 합쳐져 난장판인 이곳, 프렉탈 파크. 말도 안 나오는 환경을 보고 있자니 어릴 적 기억이 떠오르는 것 같다.
아무튼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숨는 것에도 약간의 패턴이 있더라고.”
켕기는 게 있는 사람은 어떤 곳에 숨을까? 최대한 사람들이 안 보이는 곳?
그럴 수도 있다. 내가 생각하기에는 아니지만.
트러블이라는 게 대부분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벌어지는 일 아니던가. 다르게 말하면 사이코패스나 소시오패스가 아니라면 사람에 대한 애착이 있다는 거다.
그것을 표현하는 방법이 간혹 범죄행위로 연결되기도 한다는 게 문제지.
굳이 그게 아니더라도 신경 쓰이는 대상이 있다면 눈으로 감시하거나 보고 싶어 하기 마련이다.
예로 들어서 이렇게.
-콰직!
“크하아악!”
완만한 언덕에 발을 박아 넣었다. 땅을 파고 흙으로 덮어 위장한 안식처. 내 발에 맞은 놈이 비명을 질렀다.
사람들이 몰려 있는 계약의 문이 보이는 위치, 몰래 지켜보다가 사람들 사이에 끼어들 수도 있고, 다른 이들이 오면 미리 볼 수도 있는 곳이다.
위장 수준이 제법이라 초인에 다다른 사람들도 찬찬히 살피지 않으면 지나쳐 갈 정도였지만 내게는 안 된다.
“핥짝아.”
“오케이.”
발에 힘을 줘 땅속에 박혀 있는 녀석이 도망치지 못하게 고정했고, 그사이 핥짝이가 물건을 꺼냈으니.
[압축(S) Lv.10+]
-꾸드드드득
“크흐으윽! 놔라!”
저주받은 장비로 놈을 구속했다. 볼 때마다 느끼지만 핥짝이가 사용하는 스킬들도 쓸데가 많단 말이지.
속으로 잡생각을 하는 동안에도 핥짝이의 손은 신속했고.
“자꾸 움직이면 어디 하나는 나간다. 알겠냐, 짜식아?”
“이 정도로 내가, 아아아악!”
이내 팔다리까지 완벽히 구속했다. 지금 잡은 숭배자 또한 초인의 경지에 오른 녀석이라 어지간한 등급의 아이템은 힘으로 부술 수도 있겠지만 이건 좀 다르다.
“냥펀도 참 대단해. 이런 걸 팔 생각을 하고.”
“나도 싸게 사들이고 있으니 좋지 뭐.”
저주를 받아 강제 착용시킬 수 있는 건 물론이고, 구속 부위가 날카로워 억지로 힘을 줘 움직였다가는 손목이든 발목이든 잘리게 생겼다.
흡사 못 움직이는 고문을 하려고 만든 물건 같아 보이기도 한다. 실상은 만들다 실패한 장비지만 개똥도 약에 쓴다지 않았던가.
이런 식으로 재활용하면 얼마나 좋아. 나도 장비 만들다가 실패하면 핥짝이한테 팔아야지.
그거야 나중에 천천히 한다 치고.
“남은 놈들은 어디에 있지?”
카메라 스킬로 녀석의 얼굴을 찍은 뒤 다른 숭배자의 위치를 물었다.
입을 뻐끔거리던 녀석이 고개를 흔든다.
“모, 모른다.”
“저런, 안됐네.”
-푸욱
망설임 없이 검으로 심장을 찔렀다. 영혼 찢기로 찔렀으니 죽는 건 당연. 놈이 믿기지 않는다는 눈으로 날 바라보더니 가루가 되어 사라졌다.
코인이 남아 있으려나. 상위층에서도 죽으면 안전지대로 가는지 잘 모르겠다. 상위층부터는 기존과는 규칙이 좀 달랐어서. 챕터랑 시나리오 사이에 대기실도 따로 있고.
“커뮤니티에 사진 올리면서 안전지대에서 살아나면 구금하고 챕터에서 만나면 조지라고 말해면 되겠다. 부탁해.”
“네가 직접 말… 에휴, 됐다.”
딱한 표정으로 날 훑어본 핥짝이가 커뮤니티를 조작하더니 숭배자가 있던 곳을 흘낏 살폈다.
“역시 공블공블, 가차가 없어.”
“저런 놈들 붙잡고 늘어져 봤자 좋은 거 없다고. 떳떳하지 못한 놈들이야 무슨 말을 하든 신빙성이 없지.”
“하지만 떳떳하지 못한 건 커뮤니티의 너였고. 깔깔!”
갑자기 팩트로 때리네? 비겁한 녀석 같으니.
부들거려 봤자 신나는 건 핥짝이다. 검을 회수하고 고개를 들었다. 스타트가 좋다. 벌써 한 명 잡았으니.
이제 숭배자는 기껏해야 4명 남았고, 계약의 문 근처는 이미 다 둘러봤다.
2명씩 짝을 이루어 놈들을 쫓는 중. 요정계가 연결된 부근은 요정 클럽이 살펴보기로 했다. 녀석들은 3챕터 전까지는 요정계에서 활동했으니 그쪽은 잘 알겠지.
오징혁을 비롯한 루키 그룹도 나름 짐작 가는 곳이 있는지 움직였고, 나와 핥짝이도 방향을 정했다. 우리에게는 가이드를 해 줄 존재도 있었으니까.
“불쟁이랑 같이 다니게 될 줄은 몰랐는데.”
“반짝이랑 움직이는 것도 오랜만이구나.”
첫 번째 챕터부터 나와 함께 했던 불의 상급 정령 프로네와 마찬가지로 핥짝이와 함께 있었다는 번개의 상급 정령 카트란스.
이들만큼 정령계에 잘 아는 이가 있을까. 그뿐이랴.
“화끈하게 손보는 것이 마음에 드는구나, 등반가여. 나도 힘을 내보도록 하마!”
“평소처럼 한다는 것 아니냐.”
“흥을 내겠다는 것이잖느냐, 하여간 불쟁이란. 쯧.”
“오호, 자꾸 그러니 나도 타오르는 수가 있다.”
“그리해라. 누가 말렸더냐!”
불의 정령과 번개의 정령. 양쪽 모두 파괴적이라고 손꼽히는 속성이다.
의도치는 않았지만 강력한 아군이 있다는 것. 비교적 얌전했던 프로네도 카트란스와 붙여 놓으니 활발해진 느낌이다.
슬쩍 자극하면 힘을 보태 줄 거 같다.
“우선 저쪽으로 가 보지. 몸을 숨기기에 좋은 장소가 몇 있다.”
잠시 카트란스와 투닥거리던 프로네가 한쪽을 가리켰다. 불의 영역 가장자리, 일렁이는 것에 비해 열기가 높지 않아 제법 괜찮은 곳이다.
우선 저쪽부터 먼저 뒤져 보자. 발걸음을 옮겼다.
* * *
이번 일이 벌어지며 몇 가지 의문점이 생겼다.
숭배자들이 처음으로 등반가를 이용해 조직적인 방해를 했으니까.
주목해야 할 건 크게 2개.
첫 번째, 등반가 숭배자들은 다른 NPC 숭배자들과 어떤 식으로 접촉하고 연락을 취하는 걸까.
NPC들끼리는 서로의 커낵션이 있다고 들었다. 그들이야 탑에 종속된 존재니 그러려니 넘어갈 수 있지만 등반가는 아니니까.
갈매기와 같은 연락을 취하는 걸지도 모르겠다. 접촉 방법도 어떤 식으로 이루어지는지 모르겠고.
‘지금까지 만나 온 등반가 숭배자들 모두 꽤 높은 층에서 발견되었어.’
멀리서 지켜보다 어느 정도 재능이 있고, 위로 올라가고 싶은 욕망이 있는 사람을 골라서 꼬드기기라도 한 걸지도 모르겠다.
다음으로 두 번째는…….
등반가 숭배자는 다른 숭배자와 연락을 한다는 것.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서로 아군 식별은 해야 하니까.
특히나 상위 헌터쯤 되면 커뮤니티도 비공개 방을 만들어서 사용할 수 있으니 더 편하게 할 수 있겠지.
당장 이번 일도 조직적으로 이루어진 일이다.
숭배자 상위 세력에서 명령이 떨어지고 이들끼리 규합해 타이밍을 맞춰 행동하지 않았던가. 그리고 지금은…….
“젠장! 곱게 잡힐 거 같아! 다른 놈들처럼 쉽게 잡히진 않을 거다. 적어도 네놈 팔 하나는 잘라 주마!”
봐라. 그새 소문이 돌았는지 나를 보자마자 숭배자가 거품을 물고 달려든다.
지금까지 내가 잡은 숭배자는 2명. 모두 깔끔하게 죽였다. 오지혁이 있는 루키 그룹도 1명인가 발견해서 바로 처리했다던대. 그 소식을 들은 거겠지.
이상하지 않은가. 죽은 녀석이랑 어떻게 연락을 했지? 코인이 있어도 부활하는 데는 시간이 걸린다. 부활하고 제정신으로 돌아오기까지도 텀이 있고.
이 부분은 짚고 넘어가야 할 거 같다.
“네가 한 짓이 있는데 그럼 아무 일도 없을 줄 알았냐? 이거 웃기는 애네.”
이번에는 내가 나설 것도 없이 핥짝이가 나섰다.
성큼성큼 다가간다. 멀리 떨어져서 공격하는 걸 좋아하는 녀석이 무슨 짓을 하려고 저러는 걸까, 생각하는 것도 잠시.
긴장하고 있던 숭배자가 재빨리 검을 휘둘렀고.
-타앗
예상이라도 한 듯 몸을 틀어 피해 낸 핥짝이가 팔을 휘둘렀다.
오오, 저 자세는.
“훌륭한 뺨 때리기 자세!”
-콰아아아앙!
음? 아니었나? 그냥 미사일을 쏜 건가.
뺨 때리는 소리가 아니라 뭔가 터지는 소리가 났는데.
아니나 다를까.
“흐음, 이것도 제법 쓸 만하네.”
손바닥을 내려다본 핥짝이가 흡족한 표정을 짓는다.
뭔가 했더니 얇게 압축한 물건을 스티커로 손바닥에 붙여 사용한 모양.
어이가 없네. 나보고 자비가 없니, 손속이 과하니 떠들더니만 사람 얼굴에 폭탄을 던져?
내 시선을 읽었는지 핥짝이가 주먹을 흔든다.
“뭘 봐, 이 씨. 편히 쉬라고 내가 직접 움직여 줬더니만.”
“에휴, 됐다. 방금 한 거 몰래 쓰기에는 좋아 보이는데 파괴력은 좀 더 높여야 할 듯?”
툭. 바닥에 쓰러져 꿈틀거리는 숭배자를 발로 쳤다.
핥짝이도 동의하는지 입술을 삐죽 내민다.
“너무 얇게 압축했나. 계속 써 보면서 적정선을 만들어야겠는데.”
“그건 열심히 해 보고.”
-쏴아아아아
난 숭배자의 얼굴에 워터를 사용했다.
물이 끼얹어지자 이상한 소리를 내며 정신을 차린다. 그와 동시에 얼굴을 구기며 살기를 드러냈으나.
-짜악
바로 놈의 뺨을 때려 줬다. 정신이 들었으면 상황 파악부터 해야지 이빨 먼저 들이미네.
약간 모자란 놈인가. 아니면 이런 놈이라 숭배자의 꼬드김에 넘어간 걸까.
“너희끼리의 커넥션이 있을 거야. 그치? 무슨 수로 연락을 하는 걸까?”
“…묻고 싶은 게 그거냐? 누구의 지시로 일을 벌였는지 물을 줄 알았는데.”
“보나 마나 유헤다겠지. 이전부터 악연이거든.”
내 말이 정답인지 녀석이 입을 다물었다.
좋다. 그래도 입을 여는 것이 지금까지 만났던 녀석들보다는 말할 자세가 되어 있다.
물론 말을 이상하게 한다 판단하는 즉시 없앨 거지만. 내게는 거짓말을 확인할 수 있는 스킬이 없고, 숭배자들은 언제나 내게 엿 먹일 준비를 하고 있어서.
“질문에 답하면 살려 주는 건가.”
“물론이지. 약속하마. 질문에 성실히 답하면 낸 어떤 짓도 하지 않겠다.”
“개수작 부리지 마라. 너 말고 네 옆에 있는 자는 날 죽일 수 있다는 거잖아.”
녀석이 핥짝이를 올려다보더니 날 노려본다.
아, 이걸 들키네. 쩝. 입맛을 다시며 핥짝이에게 눈짓을 했다. 작게 한숨을 쉬더니 어깨를 으쓱인다.
“그래그래. 나도 안 건들게 됐지?”
“말만으로는 믿을 수 없다. 계약서를…….”
-콰아아앙!
놈의 옆으로 핥짝이가 던진 압축 구슬이 날아가더니 그대로 폭발을 일으킨다. 파편이 놈의 뒤통수를 때리는 건 덤.
꿀꺽. 침을 삼킨 녀석이 이제야 조용해진다.
이래서 이놈들은 상대를 하면 안 된다니까. 하나 들어주면 고마운 줄 알아야지 뭘 자꾸 해 달래. 누가 보면 상전인 줄 알겠어.
“상황 파악 좀 하지? 우리가 너랑 진득하니 대화하고 싶어서 이러는 거 같아? 적당히 대우해 줄 때 잘하자, 응?”
핥짝이도 같은 마음인지 친절하게 설명까지 해 주었고.
이제야 자신의 처지를 이해한 녀석이 공손히 무릎을 꿇었다. 대화할 준비가 됐다는 뜻.
어디 보자. 그러면…….
“일단 가지고 있는 것부터 물건부터 다 꺼내 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