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1화 계약의 문
난 앞으로 달렸다. 내 뒤로 우르르 몰려오는 수많은 정령.
내가 좋아서 따라오는 건 아니고.
“기아아아악!”
“크르르륵!”
자아를 잃고 괴물이 되어 버린 녀석들이었다. 그 수가 어림잡아 수백. 본체가 불의 정령이라 그런지 놈들이 움직일 때마다 산불이 번지듯 사방이 일렁거린다.
잡으려면 어떻게 잡을 수는 있다만.
‘잠깐 멈춰 서면 딴 곳에서 또 달려든단 말이야.’
정령계는 피라미드 구조다. 소수의 강력한 정령이 있다면 나머지는 하급, 그 이하 등급의 정령으로 채워져 있다는 말.
사실 하급까지는 끽해야 5성급 몬스터 수준이라 별 상관 없는데.
“카하아아악!”
“이크!”
-콰르르르릉!
중급 정령은 상황이 달랐다. 하급 정령까지만 변질된 줄 알았더니 중급 정령 중 일부도 자아를 잃은 상태였다.
중급부터는 확실히 다르다 이건가. 아니면 주변 환경에 영향을 받아 더 강해진 건가. 체감상 퍼스트 몬스터랑 비견해도 전혀 꿇리지 않는다.
오히려 더 까다롭지. 정령은 신비의 존재. 정신체에 더 가까운 놈들이라 물리적인 타격은 별 의미가 없어서.
더 큰 문제가 있다면…….
“정령 살려!”
“으아아아!”
몬스터로 변해 버린 녀석들이 같은 동족도 거리낌 없이 공격한다는 것.
정령들 입장에서는 소름 끼치는 일이다. 얼마 전까지 같이 놀던 친구들이 괴물이 되어 공격하고 있는 거니까.
사람으로 치자면 언데드나 다를 바 없는 상황. 정령계가 어떻게 망가져 갔는지 알겠다. 게이트가 터져도 멀쩡한 세계도 멸망은 다가온다.
-서걱
-콰아아아아앙!
검을 휘두르는 것과 동시에 파이어 밤을 터트렸다.
똑같은 불 속성의 공격인 만큼 대미지가 적게 들어가는 건 당연했지만 이미 MAX레벨을 찍은 만큼 잔챙이들을 처리하는 건 쉬웠다.
변질된 중급 정령은 본능적으로 위협을 느꼈는지 몸을 돌려 피했지만.
거대한 늑대와 같이 변형된 녀석이 앞발을 휘둘렀다.
-카르르륵
검을 비틀어 공격을 흘려보낸 뒤 왼손을 뻗었다.
[데몬 스피어(S) Lv.10+]
“크하아아아악!”
마기를 한껏 품은 창이 놈의 몸통을 꿰뚫고 날아갔다.
가슴이 시원하게 뚫린 녀석이 앞으로 고꾸라지고.
[오로라 빔(S) Lv.MAX]
깔끔하게 오로라 빔으로 마무리했다. 광선이 놈의 몸 전체를 없애 버렸다.
번거롭기는 하지만 이게 가장 확실하다. 불의 정령이라 그런지 불의 영역에서는 조금만 몸이 남아도 재생을 해 대서.
“괜찮냐, 프로네?”
“물론이다.”
걱정되는 건 옆에 같이 움직이고 있는 녀석.
상급 정령인 만큼 자아를 잃거나 하지는 않았으나 표정이 안 좋다.
정령계가 어떻게 되든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지만 어디까지나 겉으로 보이는 모습일 뿐. 괴물로 변해 버린 정령들을 바라보는 시선에는 연민이 가득했다.
이미 수차례 본 광경이겠지.
“거의 다 왔어.”
우리를 쫓아오던 놈들이 조금씩 사라진다. 여전히 괴성을 지르고는 있었으나 이내 추적을 포기했으니.
“여기부터는 땅의 영역이다.”
“그래 보여.”
이곳은 영역의 경계선이었다. 여전히 불길이 치솟고 있었으나 굳건하게 서 있는 바위와 산이 웅장한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여기라고 상황이 좋은 건 아니다.
“우우우우우!”
“그그그극!”
땅의 정령들 또한 맛이 간 건 똑같아서. 그럼에도 내가 이곳으로 온 이유는 하나.
“이곳이 시작이라고 했지?”
“응. 흐름대로라면 이쪽에서 가장 먼저 계약의 문을 열어. 다른 차원과 연이 있는 녀석이 있거든.”
프로네에게 정령계가 어떤 식으로 멸망에 대항했는지 이야기를 들었다.
탈주. 다른 차원의 대상과 계약을 맺어 다른 차원으로 넘어가는 것.
완벽한 방법은 아니다. 정령의 뿌리는 이곳에 있고 결국 계약 기간 동안 위험을 피하는 것에 불과했다. 그렇다 하더라도.
‘다른 방법이 생각나질 않아.’
당장의 위험부터 피하고 보자는 건 단순한 생각일지 모르나 다른 방도가 없다면 선택할 수밖에 없는 것이기도 했다.
정령계가 폭주하면서 다른 정령들의 힘도 강력해졌다. 그 부작용으로 이성을 잃고 날뛰는 이들도 있지만 다르게 말하면…….
“평소 힘이 없어 계약하기 힘들었던 정령도 계약하기 쉬운 환경이 된 거야.”
차원 너머에 있는 누군가와 계약할 확률이 올라간다.
환경을 어쩔 수 없다면 이용하기라도 해야 한다는 것.
정령계는 여러 차원과 엮여 있는 곳이었기에 갈 곳은 많았다. 그 시작을 여는 곳이 땅의 영역이고.
-구르르르르릉
멀리서부터 진동음이 들렸다. 동시에 느껴지는 이질감.
[땅의 구역에서 계약의 문이 열립니다.]
“시작됐다.”
프로네가 중얼거린다. 다른 차원으로 향하는 길. 첫 번째 챕터에서 봤던 던전과 비슷하면서도 더욱 강력한 힘이 느껴진다.
그런데 말이지.
“…프로네, 도대체 어떤 차원이랑 연결한 거야?”
뭘까, 이 사악한 기운은.
나 또한 연옥계에 있으면서 악마들과 어울린 경험이 있다. 세간에는 악마들을 사악한 존재라고 말하고는 했고 실제로도 온갖 사건·사고를 일으키는 이들이었지만…….
‘이렇게 악의를 가지고 있지는 않아.’
악마들도 그들이 살아가는 공간이었다. 나도 진짜 마계를 가 본 건 아니라서 그쪽의 분위기를 완전히 알 수는 없다.
마계도 여러 개로 나뉘니 어떤 곳은 살육에 미쳐 버린 차원일 수도 있지만 이건 정도가 심하다.
느껴지는 분위기만으로 등골이 오싹해질 정도였으니.
“이건, 이건 아냐. 내가 알던 것과 달라.”
프로네도 당황했는지 말을 더듬는다.
불안하게 흔들리는 눈. 지금까지의 분위기와 다르게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고.
“열면 안 되는 차원을 열었어. 원래는 중간계와 천계가 먼저 열렸는데 어찌 이런 사악한 곳과!”
땅의 구역에서 벌어진 일은 시작에 불과했다.
-콰르르르릉
[바람의 구역에서 계약의 문이 열립니다.]
또다시 떠오르는 알람. 이번에는 바람의 영역이다.
미미하게 느껴지는 신성력. 아무래도 이건 천계 중 한 곳인 것 같았다만.
[유헤다의 시선이 당신에게 닿습니다.]
[유헤다가 당신을 보며 입꼬리를 올립니다.]
“이런, 일이 꼬이려니까.”
명백한 적의가 내게 꽂혔다.
설마 열렸다는 천계가 유헤다가 있던 곳일 줄이야. 그동안 시나리오를 진행하며 천계와 관련된 곳도 몇 번 들렀었다.
천족으로 의심되는 유헤다가 어디서 활동하는지 의문이었는데 이쪽이었나.
아니, 천계까지는 그럴 수 있다. 앞에 말했던 지옥이니 뭐니 하는 곳은 모르겠지만 천계는 열렸던 거 같으니까. 문제는…….
[물의 구역에서 계약의 문이 열립니다.]
[멸망한 세계가 새로운 차원에 호기심을 가집니다.]
“아, 안 돼! 저건 열려서는 안 돼!”
[혼돈의 파편이 정령계로 멸망의 냄새를 맡습니다.]
가뜩이나 어려워지는 공략을 작정하고 망치려는 것인지 와서는 안 될 존재까지 넘어왔다는 것.
프로네가 몸을 떨었다.
“계약의 문을 닫아야 돼! 우리가 멸망한 이유는……!”
그녀가 말을 채 끝내지도 못한 타이밍.
[불의 영역에서 계약의 문이 열립니다.]
[신비의 존재가 서로를 끌어당깁니다.]
내가 있던 불의 영역에서도 계약의 문이 열렸다.
신비의 존재. 저건 보나 마나 요정계다. 대체 누가? 불의 영역에 나 말고도 다른 이들이 있던 건가.
의문을 해결하기도 전에 세상이 암전됐다.
* * *
[85층 클리어]
[챕터Ⅱ- 분열 종료]
[혼돈 수치 +4점]
아득히 멀어지는 세상. 익숙한 대기실에 도착한 난 눈을 찌푸렸다.
“이게 무슨 경우야.”
85층에 올라온 지 얼마나 됐다고 바로 클리어를?
보상이라고 받은 혼돈 수치도 처참한 수준이다. 고작해야 4점. 당연한 일이다. 뭐 한 게 있어야 혼돈 점수를 받든가 하지.
이번에 들어가서 한 거라고는 미쳐 날뛰는 정령들 잡다가 계약의 문이 열릴 예정인 곳으로 이동하던 게 전부다.
기존에 있던 등반가가 진행 중이던 챕터로 넘어와서 이런 일이 벌어질지도 모른다고 생각은 했지만 직접 겪으니 이렇게 어이가 없을 수가 없다.
하다못해 괜찮은 방향으로 진행이 되었다면 상관이 없는데…….
“일부러 개판을 쳐 놨어.”
“그에에.”
의도가 다분하다. 절대 우연의 일치라고 볼 수 없다. 고의적으로 흐름을 망쳐 놓은 거다.
타이밍을 봐도 그렇다. 나와 다른 이들이 올라온 것을 확인하자마자 계약의 문을 열어 챕터를 종료시킨 거라고 밖에 생각이 안 든다.
심증에 불과하느냐? 아니.
-촤르르르륵
대기실 화면을 보고 있자니 확신이 든다.
나보다 먼저 올라온 이들. 놈들이 열어 버린 계약의 문을 통해 수많은 정령이 몰려들었다.
계약을 통해 밖으로 나가려는 것이 분명했는데.
“미친놈들.”
그것을 막아서고 정령들을 공격하고 있었다. 미끼를 풀어 두고 투망을 던지는 낚시꾼이나 다를 바 없는 행위.
그뿐일까. 프로네가 지옥이라고 불렀던 곳에서는 형체를 알아보기 힘든 괴물들이 넘어왔다.
계약의 문이 오염되어 있는 것이 보인다. 정상적인 경로가 아니다. 계약을 통해 정령들이 빠져나가야 할 곳에서 역으로 들어오고 있으니까.
프로네가 비명을 지른 이유를 알겠다. 이것만 해도 최악이건만.
“진짜로 넘어오려 하는군.”
혼돈의 파편까지 정령계로 향해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아직 완전히 넘어오지는 않았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멸망한 세계와 연결시키다니. 이건 다 같이 죽자는 거나 마찬가지.
무분별하게 차원의 문을 연 대가인가. 아니지. 무작위로 연 게 아니다. 의도적으로 연 거지.
유헤다가 나를 향해 입꼬리를 올렸다던 메시지. 그 의미를 알아차리는 건 어렵지 않았다.
“상위 헌터 중에 숭배자가 섞여 있어.”
계약의 문을 연 녀석들 모두 숭배자다. 스치듯 지나갔지만 놈들의 허리에 숭배자 패가 달려 있는 것을 확인했다.
소파에 앉아 얼굴을 쓸어내렸다.
이제야 상황이 이해된다.
이것 모두.
“유헤다가 짠 짓이야.”
같은 골드 등급의 거인족 수장을 해치웠다. 내가 위로 올라올 것이라는 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겠지.
직접적으로 어떻게 하기 힘드니 이런 식으로 엿을 먹이는 거다.
85층에 대기하고 있다가 내가 뭘 하기도 전에 끝내 버리는 것.
으득. 이가 갈린다. 이런 식으로 방해를 할 줄이야. 내가 너무 안일했던 건가.
“아니야. 이건 대처할 수 없는 방식이야.”
나보다 먼저 위에 올라가서 수작질을 벌이면 일방적으로 당하는 구조다.
혼돈 수치를 제대로 얻지 못하는 건 당연하고 시나리오 전체도 일그러트릴 수 있는 방법.
당장 지금은 어쩔 수 없다. 이미 85층은 클리어됐으니까. 중요한 건 이후.
앞으로도 숭배자 놈들이 이렇게 나오면 곤란하다. 다른 건 몰라도 혼돈 수치는 얻어야 한다. 나뿐만이 아니라 다른 헌터들도.
왜냐…….
‘혼돈 수치가 없으면 혼돈의 파편은 못 막아.’
80층대는 간접적으로 영향력을 끼친다지만 90층대는 어떨까.
그때부터는 혼돈의 파편과 정면으로 맞서 싸우게 될 가능성이 높다. 만약 그전까지 충분한 혼돈 수치를 얻지 못한다면?
그럼 층만 높이 오른 멍청이가 되는 거지. 게이트를 막아 내도, 몰려오는 몬스터를 해치우고 재앙을 이겨 내도 혼돈의 파편을 막지 못하면 멸망은 피하지 못한다.
헌터 수백 명이 몰려도 혼돈의 파편에 대미지를 줄 수 없다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
이미 보지 않았던가. 몬스터 따위에 휘둘리지 않는 세계가 어떤 식으로 무너져갔는지.
“지독한 놈들.”
주먹을 쥐었다. 상황이 어떤지는 알았다.
문제는 나보다 위에 있는 상위 헌터 중 숭배자가 얼마나 더 있을지 알 수 없다는 것.
나 혼자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그렇다면…….
“가만히 당해 주고만 있을 수는 없지.”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히며 커뮤니티를 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