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0화 85층
빛이 사그라들며 주변 환경이 눈에 들어온다.
내가 있는 곳은 불의 영역. 확실히 다르다. 던전을 클리어하고 불의 정령왕 파편을 가져오면서 불길이 더 강해졌다고 느낀 게 착각이 아니었다.
아니, 이 정도면…….
“그냥 지옥불인데?”
“그에에.”
덕춘이가 마음에 안 드는지 낮게 운다. 영물이니 뭐니 해도 일단은 개구리라 건조한 것보다는 습기 있는 것을 좋아해서.
특성 중에 화염이 있어 활동하는 건 문제없지만 취향이라는 게 있으니까.
“왔구나.”
나를 반기는 프로네.
아무렇지 않게 손을 흔든다.
잠깐만…….
“너 좀 커진 거 같다?”
“후후, 바로 알아보는구나. 불의 힘이 이렇게나 강한데 정령인 내가 영향을 안 받을 리가 있나. 이곳뿐만이 아닐 거다. 다른 곳도 마찬가지지.”
같이 섰을 때 가슴 정도까지 왔던 녀석이 지금은 턱까지 온다.
정령이라는 게 워낙 자연 친화적인 존재라 그런지 환경의 영향을 많이 받는 모양.
들어 본 적 있다. 탑에 올라오기 전부터 몬스터나 게이트에 대한 정보는 열심히 찾아봐서.
‘정령 퇴치에 효과적인 방법으로 거론되고는 했었지.’
의견은 갈리지만 게이트에서 나오는 정령도 일단은 몬스터로 분류하고 있다.
아무 일 없이 돌아다니다 사라지는 경우도 있지만 피해를 끼치는 경우도 있어서.
나름 온화한 성격인지라 가능한 싸우지 않고 퇴치하는 쪽으로 공략 방법이 정해져 있다.
‘속성과 반대되는 환경을 구축한다고 했던가.’
불의 정령이 오면 가장 먼저 달려오는 게 소방차다. 스키장에서나 쓰는 눈 만드는 기계도 배치되고, 얼음 계열 스킬을 사용할 수 있는 헌터가가 우선적으로 지원을 나온다.
간혹 짜증을 부리며 난동을 부리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힘이 시들해지다 모습을 감춘다고.
반대로 속성에 맞는 환경을 만나면?
그때는 뭐, 곤란해지는 거지. 언제였더라 바다에서 게이트가 터지면서 물의 정령들이 모습을 드러냈고, 수십 미터짜리 파도가 쳤던 적이 있었다.
우리나라 이야기는 아니고 일본 쪽에서 벌어졌던 일인데, 국소적으로 쓰나미가 일어나 민간 피해가 심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차원 간섭은 어느 정도 푼 거 같은데 이게 정상적인 모습이 맞아? 내가 정령계를 잘 몰라서.”
“그럴 리가 있겠느냐. 정령계는 구역이 갈리기는 하지만 조화로운 곳이다. 이건 도가 지나치지.”
역시나 정상적인 상태가 아니라는 건가.
미간을 찌푸렸다.
“던전을 깨지 않는 게 정답이었나.”
“그건 또 아니다. 그대로 뒀다면 차원 간섭이 심해져 공간이 더욱 일그러지고 끝내 차원이 붕괴했을 거야.”
한마디로 최악의 상황을 피하기 위해 차악을 선택한 거라 이거네.
80층대를 겪으면서 느낀 건데 망할 멸망은 벗어나려 해도 끈질기게 달라붙는다.
거인계 때도 그랬다. 기껏 운석을 막았더니 델버튼이 깨어나고 멸망의 예언대로 흘러갔었지.
어느 쪽을 선택하든 상황이 악화되는 흐름. 그나마 여기가 탑이고 챕터별로 진행되니까 이 정도지 실제로 벌어지는 일이었다면?
‘동시다발적으로 온갖 사건·사고가 벌어지는 거야. 커버할 수 없는 곳도 존재할 거고.’
계기가 될 만한 큰 사건이 발생한다 쳤을 때, 한국에서 벌어진 일은 막았는데 지구 반대편에서도 일이 터진다면?
그럼 답도 없는 거다. 혼자서 모든 것을 커버할 수 없다는 뜻이기도 하고.
다르게 말하면 뛰어난 사람 몇 명 모인다고 멸망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는 거다. 적어도 일이 최악이 되지 않도록 시간을 벌어 줄 사람이 필요하다.
이번 층도 마찬가지겠지. 다른 녀석들이랑 합류를 하긴 해야겠지만 그 전에 할 수 있는 일들은 모두 끝내 놓자.
[챕터 진행에 따른 기억이 생성됩니다.]
“크흡!”
짜릿한 두통과 함께 새로운 기억들이 떠오른다.
첫 번째 챕터를 클리어하고 시간이 얼마나 지난 걸까.
시간 개념이 명확한 곳이 아니라서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대략 두 달 정도 흘렀군.”
머리로 들어온 기억, 첫 번째 챕터에서 말한 부조화가 무슨 뜻이었는지 알 수 있었다.
가뜩이나 각 속성의 환경이 미쳐 날뛰고 있었건만, 곳곳에 있던 던전이 클리어되고 정령왕의 파편이 흡수되면서 더 강해졌다.
한 가지 알게 된 사실이 있다면…….
‘정령왕은 불, 물, 바람, 땅 4명뿐이야.’
모든 정령의 정점. 근원적이면서도 강력한 존재.
그들은 모두 죽었다. 소멸하면서 남긴 힘의 파편이 흡수되면서 균형이 깨졌고 그 결과가 이거.
여기에 하나 더 짚고 넘어가야 할 게 있었으니.
[기존 등반가가 있습니다.]
[챕터Ⅱ- 진압 스테이지 종료.]
[진행 중인 챕터로 편입됩니다.]
[챕터Ⅱ- 분열分裂]
지금 챕터에는 우리보다 먼저 올라온 등반가가 존재한다.
거인계에서 내가 공략 중이던 챕터로 멤버들과 상위 헌터들이 넘어온 것처럼 이번에는 내가 다른 사람이 진행 중인 챕터로 넘어왔다는 것.
그 녀석이 챕터Ⅰ을 클리어한 방법?
“미치겠군.”
간략하지만 알 수 있었다.
우리처럼 던전을 클리어했다. 정령왕의 파편도 가지고 나왔다.
여기까지만 보면 별다를 게 없었으나.
“이 자식 일부러 이런 건가?”
놈은 가지고 나온 파편을 다른 곳에다 뿌렸다. 바람의 파편은 불의 정령 구역에, 땅의 파편은 물의 정령 구역에, 나머지도 마찬가지.
어렴풋이 떠오르는 기억에서의 모습이 가관이다. 높이 솟은 협곡에서 홍수라도 난 것처럼 폭포가 쏟아져 내렸고, 불은 바람을 타고 세를 불렸다.
물의 파편을 머금은 바람은 휘몰아쳐 일대를 파괴했다.
각 속성이 시너지를 내어 더욱 강력해진 것. 이 또한 상호작용이라고 말하면 할 말이 없었으나…….
‘이건 조화를 이루었다기보다는 서로 자극하고 있는 거야.’
백 보 양보해서 이 또한 자연의 모습이라고 할 수도 있다, 할 수는 있는데…….
“4대 원소의 힘이 너무 커졌다. 이렇게 돼서는 다른 정령들은 활동할 수가 없어. 이미 살 곳을 잃고 사라져가는 이들이 있다. 나무의 정령은 이미 전멸 직전이구나.”
다른 정령들의 입장에서는 재앙이나 다를 바 없었다. 이게 부조화의 결과.
특히나 정령계에는 끔찍한 일이었으니. 주변 환경의 영향을 많이 받는 만큼 과도한 에너지에 정신 줄을 놓는 정령들이 등장한 것.
그뿐이랴. 살 곳을 잃은 소규모 정령들이 사라지면서 균형이 깨지고 있다.
규형이 깨지면서 정령들 또한 변질되었으니.
“그하아아악!”
“읏차.”
불길에서 뛰쳐나온 몬스터가 나를 덮쳤다.
기세를 감출 생각도 없는지 대놓고 덤비는 녀석. 가볍게 검을 휘둘렀으나 살짝 주춤할 뿐 뒤로 물러나지는 않는다.
덩치가 꽤 크다. 준대형급 몬스터. 정확하게는 정령이지만 지금 모습은 괴물이나 다를 바 없었다. 그것도 꽤 강력한 괴물.
“급이 낮을수록 자아를 잃기 쉽지. 스스로 짐승이 되는 것과 같은 것이야.”
측은한 눈빛을 보낸 프로네가 손을 들어 아가리를 들이미는 녀석에게 내밀었다.
한입에 삼켜지지는 않을까 걱정되는 모습이었으나.
-화아아아아악!
프로네의 손에서 가공할 만한 불길이 일었다.
푸르다 못해 하얗게 보일 지경의 초고온 불길.
나도 눈을 가리며 눈을 찌푸렸다. 과연 불의 정령이다 이건가. 불 지르는 데는 나름 일가견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태생이 불인 녀석에게는 한 수 밀리는 감이 있다.
“하나가 아닌 거 같군. 일단 자리를 뜨자고.”
사방에서 기척이 느껴진다. 에너지가 넘쳐흐르면서 폭주하는 정령들이 늘어났다.
평소보다 훨씬 강력한 모습. 방금 프로네가 잡은 녀석도 샐러맨더의 변형 객체다. 기껏해야 2성급이 녀석이 4성급 이상의 위력을 발휘했다.
아직은 제대로 된 자아를 지니지 않은 최하급 정령만 변하고 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더 심해지겠지.
만약 옆에 있는 프로네가 저런 식으로 변한다면?
‘생각하고 싶지 않군.’
모르기는 몰라도 가히 재앙이라 부를 만한 괴물이 될 거다.
아직까지 만나지는 못했으나 프로네를 제외한 다른 상위 정령들도 존재할 터.
우선 그들을 만나야 할 거 같다. 보다 적극적으로 멸망에 저항하는 NPC가 필요하다.
서둘러 발걸음을 옮기면서도 의구심은 계속해서 들었다.
어째서 프로네는 멸망에 별다른 관심이 없는가. 대략적인 이유는 들었지만 진짜 그게 전부일까.
‘개인적인 이유가 있겠지.’
멸망에 대해 깊게 물어보는 것 또한 NPC에게는 유쾌하지 않은 일.
때가 되면 말해 주기를 기대하며 앞으로 나아갔다.
* * *
태풍이 몰아치는 곳.
거세게 불어오는 바람에 비까지 섞이니 앞을 보는 것조차 버거울 정도였고, 비에 젖은 몸이 빠르게 식어 금세 체온이 떨어졌다.
“정령계가 미쳐 돌아가기는 하나 보네, 아오.”
부르르 몸을 떤 핥짝이가 짜증 섞인 소리를 내었다.
그녀 또한 첫 번째 챕터 때, 던전을 클리어하고 정령왕의 파편을 가지고 왔기에 대략적인 상황은 알고 있었다.
특히 옆에 있는 존재는 직접 겪어 봤고.
“이 정도로 앓는 소리를 내다니. 연약하기 그지없구나! 이래서 멸망에서 벗어날 수 있겠나!”
번개의 상급 정령, 카트란스가 외쳤다.
첫 번째 챕터에서 만난 존재. 등반가를 확인하자마자 찰거머리처럼 달라붙어 잔소리를 해 대고 있었다.
그때마다 천둥이 일며 귀를 때렸다.
“좀 닥쳐 줄래? 입 열 때마다 고막 터지는 거 같다고. 확 씨, 없애 버릴라.”
“때애애액! 어디 어린 녀석이 그리 험한 말을! 이 몸으로 말할 것 같으면 너희의 조상이 태어나기도 전부터 정령계와 중간계를 넘나들며 수많은 영웅과 함께했던 몸!”
“아, 또 시작이다.”
핥짝이가 질린 표정으로 귀를 막는다. 정령도 압축으로 구길 수 있나, 진심으로 고민하면서도 별다른 말은 안 했다.
말로 해서 알아듣는 정령이었다면 진작에 알아먹었을 터. 굳이 말 섞어 봐야 더 귀찮아질 뿐이었다. 하는 짓은 별로여도 공략에 도움이 되기도 하고.
조현수가 느꼈듯 핥짝이 또한 알아차리고 있다. 현재 두 번째 챕터가 비정상적인 흐름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것을.
“카트란스, 원래 정령계도 이런 식으로 흘러갔어?”
“흐음, 좋은 질문이다. 그냥 멍청하기만 한 줄 알았더니 제법 쓸 만한 질문을 던지는구나.”
핥짝이가 불끈, 주먹을 움켜쥐는 것도 모르고 카트란스가 말을 이어 나갔다.
“아직 챕터가 완전히 지나지 않아 기억나지 않는 것도 있다만 비슷하다. 그때도 이렇게 정령계가 무너지고 있었지.”
무너져 버린 정령계. 정령들이라고 무작정 보고만 있지는 않았다.
다른 차원을 오가며 살아가는 것이 정령이라 한들 타고난 세계에 귀속되어 있는 존재.
그 바탕이 없어지면 살아남을 수 없었고.
“첫 챕터에서 겪은 던전을 보고 아이디어를 얻었던 것을 기억한다. 아니, 그게 시작이었지. 다른 차원과의 간섭이 더 많아질 거다.”
카트란스의 말에 핥짝이가 눈을 찌푸렸다.
기껏 던전을 클리어하고 나왔더니만 그런 게 더 많아진다?
어째서? 의문이 생길 수밖에 없었으나 다음에 이어지는 말에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탈출 계획을 꿈꿨다. 정령계가 엉망진창이 되더라도 유지만 된다면 우리는 소멸하지 않아. 나머지 정령들은 계약을 통해 다른 차원에서 살아가면 된다.”
정령계가 무너지는 것을 막을 수 없다?
그렇다면 완전히 사라지지만 않도록 내버려 둔 채 다른 곳으로 대피하면 그만이다.
다만…….
“…잠깐만, 그럼 계약이 끝나게 되면? 아니, 계약을 못 하는 정령들은? 정령의 수가 적지는 않잖아.”
어디까지나 차선택에 불과했다. 근본적인 원인을 해결하는 것이 아닌 뒤로 미루는 것일 뿐.
그것조차 모두에게 해당되는 일은 아니었지만 카트란스는 되려 되물었다.
“자네는 그럼 어떠한 희생과 포기도 없이 멸망에서 벗어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