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탑에 갇혀 고인물-479화 (478/740)

479화 84층 클리어

잠깐 에이션트 몬스터의 등장에 정신이 팔리기는 했지만 내가 이곳에 온 이유는 차원이 일그러진 원인을 없애기 위함이다.

언데드들은 대충 던전에 배치된 몬스터 정도로 생각하는 편이 낫겠지.

상황을 봤을 때, 저 언데드 놈들은 프로네가 말했던 불을 숭상하던 이들과 관계가 있을 가능성이 크기는 하지만.

자세한 배경이나 이야기는 크게 관심 없다. 내 세계도 아니고 몬스터들 과거 알아서 뭐에 쓰라고.

관심이 가는 건 하나.

‘정작 그 녀석이 안 나왔다고, 이 던전의 주인.’

나를 막아섰던 에이션트 몬스터의 이름은 기네. 이곳 던전의 이름은 갈리트라의 산채.

저 갈리트라라는 게 사람 이름인지, 지역 이름인지를 모르겠다. 전자라면 다른 뭔가가 더 숨겨져 있다고 생각하는 편이 좋겠지.

좋지 않다, 에이션트 몬스터. 이번에도 놈과 상극인 힘을 가지고 있어서 편하게 클리어하기는 했다.

아이템빨도 좀 있었고, 다만 아쉬운 것이 있다면…….

[교단의 지식에 진입할 수 없습니다.]

[사용자의 부담을 줄이기 위해 접근이 제한됩니다.]

왕관의 핵심 효과 중 하나인 교단의 지식에 들어가는 것이 막혔다.

일종의 안전장치. 교단에 속한 인물의 일생을 엿보는 능력인 만큼 정신적인 충격과 스트레스를 수반하게 된다.

대충 시나리오를 겪으며 생겨나는 기억의 강화 버전이라고 해야 하나. 자칫 잘못하면 정체성을 잃고 자아가 흩어질 수도 있는 문제라 이해는 한다만.

“난 상관없다고.”

극강의 정신 보호를 가지고 있는 내게는 해당 사항이 없었다.

더군다나 남의 기억을 엿보는 건 이미 익숙해서. 알리오스의 계승자가 되면서 잘 때마다 자동으로 사용된 스킬, 수면 전투 복기.

매일 밤, 알리오스의 기억을 토대로 전투 경험을 쌓아왔었다. 권능의 싱크로율이 100퍼센트에 도달한 이후로는 알리오스의 기억을 사용하지는 않았지만.

대신 그날 내가 겪었던 전투를 꿈 속에서 재현해 반복하고 있다.

피곤한 일이기는 하지만 실력이 그만큼 늘어나니 안 하기도 뭐하다.

혼돈의 파편에게 99층까지만 올라가는 게 나을 수도 있다는 말을 들은 상황. 강제로 100층까지 올라가야 하는 내 입장에서는 뭐라도 해 보는 수밖에 없었다.

“다시 생각해도 화나네.”

어쩌다 무한 코인을 얻어서 이 꼴이 된 건지. 최근 들어서는 죽은 적도 없구만.

물론 잘 사용하기는 했다. 등반 초기도 그렇고, 프램버그에서도 그렇고. 이제 와서 칭얼거리기에는 모양 빠졌지만 사람 마음이라는 게 그렇다.

달면 삼키고 쓰면 뱉고. 그리고 내 옆에는…….

“퉷.”

실제로 그것을 실천하는 영물 님도 있다.

심심한지 던전에 있던 뭔가를 우물거리더니 인상을 쓰며 뱉는다.

“덕춘아, 지지야. 그런 거 먹는 거 아냐. 밥도 제때 잘 주는데 왜 그러냐.”

“그에에.”

“그러게 내가 맛이 없다지 않았느냐.”

“응?”

자연스럽게 타박하는 프로네. 이미 그 말을 한 시점에서 직접 먹어 봤다는 거 아니냐?

이걸 어디서부터 뭐라 해야 하나 싶었지만 이내 포기했다. 처음부터 제정신이 아닌 녀석이라서.

요정도 그렇고, 정령도 그렇고, 사람과는 사고방식이 좀 다르다. 이성보다는 감정, 논리보다는 호기심을 기반으로 움직이는 종족들이라.

그런 점이 호감일 때도 있기는 한데.

-꾸우우욱

녀석의 뒷덜미를 잡아 들어 올렸다.

인간의 형태를 하고 있기는 했으나 내 가슴 정도까지 올 크기. 릴카보다 좀 더 큰 정도였다.

딱밤이 간절하다. 지금이라면 진심으로 때릴 수 있다.

주먹에 힘을 주며 애써 미소를 지었다.

“중간에 딴소리하지 말고, 이쪽 방향 맞지?”

“물론이다. 쓸데없이 의심만 많구나. 하여간 인간이란.”

길 안내하다 말고 노닥거린 게 누군데. 괜히 억울하네.

진정하자. 말려들어 봤자 나만 손해다. 다루려 하지 말고 그냥 그러려니 하는 게 마음 편하다.

지금도 갑자기 흥미가 생겨 날 돕고 있는 중이고.

펠라인 세트로 불의 기운이 강한 곳을 어림짐작할 수는 있지만 불의 정령이 프로네에 비할 바는 아니다.

“이쯤이로군. 호오, 고대의 유적을 발굴했던 모양이야.”

총총거리며 나아가던 프로네가 작게 감탄했다.

불길 때문에 시야가 제한되어 있어 보지 못하고 있었는데 안쪽에는 산채가 하나 있었다.

일반적인 여행객을 위한 건 아니고.

“산적 소굴이었네.”

“내가 봐도 그러한 거 같구나.”

적의 침입을 감시하기 위한 망루와 벽, 군대 막사나 다를 바 없는 구조로 지어진 산채를 보아하니 산적들이 사용하는 것 같았다.

도축을 위한 작업대와 도구들도 그대로 달려 있고.

이상한 일이지. 불길이 이렇게나 거센데도 쓰러지지 않고 그대로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니.

뭔가 자연적이지 않은 힘이 작용했다는 증거.

흔적을 봤을 때.

“습격당했군.”

“지킬 수 없는 보물은 독이 되고는 하지.”

바닥에 쓰러진 시체를 확인했다. 기습을 당한 건지 별다른 반항도 못 했다.

그중 유독 화려한 장비를 찬 녀석의 목에는…….

[갈리트라의 목걸이]

-처음 산적단을 꾸리고 노획한 황금으로 만든 목걸이.

-그게 다입니다!

산적 이름이 갈리트라였던 거군.

대략적인 상황이 그려진다.

산적들이 뭔가를 가지고 있었고, 고대 불을 숭상하던 이들이 공격해 온 거겠지.

불타고 있는 산에 돌아다니고 있던 스켈레톤은 말할 것도 없이 산적들의 시신으로 만들어진 걸 거고.

물론 놈들뿐만이 아닐 거다. 그러기에는 숫자가 너무 많아서.

산채의 규모를 봤을 때, 많아 봐야 100명이 좀 넘는 수준이다.

나머지는…….

‘불을 숭상했다는 과거의 집단.’

프로네가 말하길 예전의 모습은 사라지고 은밀하고 위험한 집단으로 변질되었다는 거 같은데.

과연 그래서일까.

“제단. 저게 놈들이 생각하던 불의 신의 모습인가. 정령이랑은 거리가 멀어 보이는데.”

“우상으로 삼기에는 제격인 거 같다만.”

산채 내부, 연병장으로 보이는 공간에 뼈로 만들어진 제단이 보였다.

불의 신을 모방하려 했던 것인지 일그러진 가죽과 붉은 털을 모아 만든 인형이 토템처럼 서 있다.

8개의 팔과 가슴까지 내려온 송곳니. 재료가 뭔지 알 수 없는 옷과 흉흉하게 생긴 기형 무기가 사방에 꽂혀 있다.

주술적인 의미를 가진 비석도 둥글게 쌓아 뒀고.

이거야 뭐, 신을 부르려는 건지 악마를 부르려는 건지.

모르고 봤다면 불의 정령왕을 소환하려는 게 아니라 사탄을 모시는 비밀 집단의 소행으로 생각했을 거다.

결과는 보다시피 실패. 프로네가 말했듯이 이미 불의 정령왕은 죽었으니까.

대신…….

“힘의 파편이 남아 있구나. 놈들의 부름에 이끌려 온 것이겠지. 한 번에 자연으로 돌아가기에는 불의 정령왕은 강대한 존재다.”

제단 위에 뜨겁게 타오르는 조각이 하나 있었다.

깨진 유리병처럼 생겼지만 안에서 느껴지는 기운은 보통이 아니었다.

정령왕이라는 존재가 얼마나 강한지 간접적으로나마 알겠다. 죽어서 남은 흔적만 해도 이 정도의 기운이라니.

“차원이 일그러진 이유가 이거였군.”

파편을 챙겼다.

[불의 정령왕 파편(SS)]

-소멸한 불의 정령왕의 힘이 담긴 파편.

-불안정한 힘이지만 강력합니다!

-자연에 흡수되려면 오랜 시간이 필요하죠.

-정령계에 귀속되어 있습니다.

재료라고 해야 하나, 아니면 아이템이라고 해야 하나.

SS등급인 게 살짝 구미가 당기기는 하다만 내가 가질 수는 없을 거 같다.

정령계에 귀속되어 있다고 하니까. 아무래도 소환에 의해 빨려 들어가는 과정에서 차원 간섭이 생긴 게 아닐까 생각된다.

[던전 클리어!]

-우우우우웅

역시나, 파편을 챙기는 것으로 던전이 클리어됐다.

던전이 생성된 원인이라는 뜻. 에이션트 몬스터가 등장한 것만 빼면 생각보다 수월하게 끝났다.

환경 자체도 그리 좋은 편은 아니었지만 나한테는 그다지 상관이 없어서.

다른 속성은 몰라도 불에 관해서 만큼은 내성 스킬이 있고, 얼음과 불의 교단의 힘까지 가지고 있는지라 저항력이 강하다.

“이쪽은 끝났군.”

다시 돌아온 정령계. 내가 들어간 곳부터가 불의 정령이 살던 곳이라 별다른 차이는 나지 않았으나 조금은 나아진 거 같았다.

그동안은 미친 듯이 불길이 쏟아졌지만 지금은…….

“이런 미친!”

[정령계가 잃어버린 조각을 되찾았습니다!]

-화아아아아악!

그때와는 비교할 수도 없는 화력이 뒤따랐다.

지금까지 보여 준 건 약과에 불과했단 말인가. 그동안 느껴졌던 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처럼 거센 열기가 쏟아졌다.

나조차도 견디기 힘들 만큼 거센 불길. 뭔가 잘못됐다는 생각이 들었으나.

[84층 클리어!]

[챕터Ⅰ- 부조화 종료]

[대기실로 전송됩니다.]

대응하기도 전에 세계가 암전됐다.

* * *

아득히 멀어지는 공간. 내게 보이는 건 익숙한 대기실이었다.

“이렇게 끝이 난다고?”

순간 당황했다. 내가 한 거라고는 던전 하나를 끝마친 거뿐인데 이걸로 챕터가 종료된다?

“그에에.”

덕춘이가 내 어깨를 두드렸다.

조금씩 진정이 됐다. 이해하기 힘들었지만 어쩌면 이게 정상적인 정령계가 아닐까.

모르겠다. 정령계에 대해 아는 게 있어야지.

그래도 차원을 어그러트리는 원인을 해결했으니 위안으로 삼자.

그보다.

“아직 몇 개 더 남아 있지 않았었나?”

프로네를 따라 하늘로 치솟았을 때 다른 구역들도 극한의 환경을 자랑하고 있었다.

다르게 말하면 불의 정령이 머무는 곳 외에도 차원이 일그러진 곳이 있다는 뜻.

아직 그곳들은 건들지도 못했는데…….

“아.”

화면을 지켜보던 난 작게 소리를 냈다.

정령계로 떨어진 이들. 그들이 던전을 클리어하고 넘어오는 모습이 보였으니까.

잊고 있었다. 나 말고도 정령계에 떨어진 사람들이 있었을 텐데.

그들 또한 챕터를 클리어하기 위해 노력하는 건 당연한 일. 멋대로 내가 전부 해결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털썩, 소파에 몸을 기댔다.

“다들 행동하는 게 비슷했네.”

나만 멸망에 익숙해진 게 아니다. 문제가 생겼으면 원인부터 해결하려는 이들이 있다.

물론 가만히 앉아 있어도 다음 층으로 넘어갈 수는 있다. 누군가가 대신 문제를 해결해 줄 수도 있고, 시나리오가 진행되면서 다음 챕터로 이동되기도 하니까.

다만…….

‘그런 멍청이는 여기에 없어.’

79층에 머물렀던 이들도 그렇고, 다른 이들도 그렇고, 가만히 있다가는 어떠한 성장도 하지 못한다는 걸 체득한 이들이다.

익숙한 얼굴들이 보인다.

핥짝이와 오징혁, 마그마 요정도 정령계로 떨어진 거 같았고. 필드를 돌아다니는 다른 헌터들도 보였다.

“러시아 헌터도 이쪽으로 왔군.”

드미트리랑 옥산나. 두 명도 이쪽으로 왔다. 둘이서 한 팀으로 움직이는 중.

각자 다른 위치로 떨어진 걸까, 다들 던전을 클리어하고 뭔가를 가져왔다. 색과 주변 환경으로 보건대 땅과 바람, 물의 정령왕의 파편이 아닐까 예상된다.

다르게 말하자면.

‘정령왕들이 다 죽은 건가.’

나도 정령에 대해 많은 것을 아는 건 아니지만 기본 속성이라는 게 있다. 그중 베이스가 되는 속성은 4개.

흔히 사대 원소라 부르는 불, 물, 바람, 땅.

그 외에 주류 속성에 해당하는 건 전격과 빛, 어둠. 도합 7개가 대표적인 속성이다.

자세히 파고들면 더 있기는 하다. 당장 나도 얼음도 쓰고 혼돈도 쓰고 기타 잡다한 것을 쓰지 않던가.

정령도 마찬가지. 세계수이자 엘프와 드루이드의 모체가 되는 게 눈의 정령. 눈의 정령 여왕도 직접 만났었다.

따지고 보면 그 녀석도 정령왕 중 하나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어렵군.”

아무래도 나 혼자 모든 것을 판단하는 건 무리가 있다.

확실한 것만 체크하자.

화면을 뚫어져라 쳐다 보면서 정보를 모았다.

-촤르르르르

이내 화면이 끊기고.

“가 볼까.”

난 자리에서 일어났다.

파아앗! 빛과 함께 전송 마법진이 생겨났다.

[85층으로 전송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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