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7화 왕관을 쓰다
등반을 하면서 많은 몬스터을 만났고 사냥을 했었다.
그러면서 내 나름의 기준을 잡았는데.
-빠악!
“여기 스켈레톤이 머리 부수는 맛이 제일 좋네.”
물렁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너무 약하지도 않고.
뭐랄까. 타격감 확실히 주고 깨지는 느낌? 나중에 몇 마리 잡아다가 땅에 묻어 두고 두더지 잡기 하면 재밌을 거 같다.
어디까지나 상상일 뿐이지만. 굳이 해골 대가리 부수려고 던전에 계속 남아 있을 생각은 없어서.
“제법 잘하는구나. 그런데 왜 굳이 딱밤으로 잡는 것이지?”
“아, 나도 모르게 그만.”
어느 순간부터 무의식적으로 릴카 딱밤 때리는 느낌으로 사냥하고 있었다.
금단 증상인가. 안전지대에 있을 때 좀 더 때리고 올걸.
아쉽지만 별수 있나.
“이쪽은 거의 정리 됐네. 징그러워라.”
손을 털며 주변을 바라봤다.
내가 지나온 길을 따라 길게 이어진 뼛가루. 거대한 연필로 그어 놓은 것처럼 검은 뼛조각이 널브러져 있다.
거기에 불까지 타오르고 있었으니 분위기 하나는 살벌했다. 실속은 없었지만.
80층대에서 등장한 던전이라 긴장했었는데 지금까지 나온 몬스터는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몇몇 변종으로 보이는 객체도 보이기는 했으나.
“영 별로야.”
그놈들도 그리 강하지는 않았다. 툭. 바닥에 꽂힌 뼈를 걷어찼다.
대충 3성급 정도인 놈들이 많았고, 좀 낫다 싶은 놈들도 4, 5성급? 아직까지 6성급도 안 나왔다.
지금은 6성급이 나타나도 어렵지 않게 잡을 수 있다.
재앙이나 다른 NPC들을 상대하는 것보다는 6성급 몬스터가 훨씬 쉽지.
애 좀 먹으려면 못해도 에이션트 몬스터는 나와야 할 거다.
아니지. 굳이 애먹을 필요 있나. 괜히 플래그 세우지 말자. 쉽게 가는 게 좋은 거다.
“오, 차원이 일그러져 그런가. 공간뿐만 아니라 시간까지 꼬여 버린 듯하구나. 에이션트 몬스터는 게이트 밖으로 나가지 못하는데. 던전에 게이트가 합쳐진 게로군.”
“…그거 참 신기하네. 하아.”
말이나 말걸.
말도 안 했구나. 그냥 생각만 했는데, 짜잔. 진짜 이루어졌습니다.
산맥을 따라 올라간 공간.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는 몰라도 일대가 파헤쳐져 있었다.
군데군데 보이는 비석을 보아하니 원래는 공동묘지가 아니었을까 싶었고 그 중앙에는…….
“인간! 살아 있는 인간이 있었구나!”
말라비틀어진 아저씨가 한 명 서 있었다. 사람은 아닐 거다. 사람의 거죽을 뒤집어썼다고 다 사람은 아니니까.
척 보기에도 음산한 기운이 넘친다. 사방이 불길인 걸 감안하면 참으로 이상한 일이었으나 워낙 자연스러워 거부감이 들지는 않았다.
오히려 좋다. 인격체라기보다는 괴물에 더 가까워 보여서 마음 편히 다져 줄 수 있을 거 같거든.
살아 있다고 보기 힘들 정도로 메마른 남자. 머리는 벗겨졌고, 피부는 초록색으로 변질되어 있다.
근육이 있기나 한 건지 의심스러운 팔과 다리. 문자 그대로 뼈에 가죽만 붙은 몰골이었고.
“네놈의 육체는 신선하겠지. 내게 오라. 생명이야말로 가장 아름다운 것이며 결핍이 곧 갈망이 되리라!”
정신병자인가?
처음 만났던 에이션트 몬스터는 이러지 않았던 거 같은데. 이름이 뭐였더라. 잡아서 부활 사업 실험체로 만든 이후로 연락이 끊겨서 기억이 안 난다.
모르긴 몰라도 행복하게 잘살고 있겠지. 분명 그럴 거다.
“저 녀석을 산 채로 붙잡아라!”
-구구구구궁!
그의 외침에 공동묘지에서 언데드가 몸을 일으켜 세웠다.
이곳까지 오면서 만났던 놈들과는 차원이 다른 음에너지를 지닌 괴물들.
그 형태마저도 인간의 것이 아니었다. 보다 강력한 무언가. 이름조차 알 수 없는 종족의 사체.
“오호라, 고대의 존재들이구나. 아주 오래전 중앙계를 차지했던 자들이다.”
“설명 고맙다.”
“이 정도 가지고.”
칭찬 아닌데. 쫑알거리는 프로네를 무시하고 옆으로 몸을 던졌다.
-콰아아아앙!
거대한 몸통에 길게 삐져나온 송곳니.
근육은 썩어 없어졌지만 비늘로 덮여 있는 가죽은 남아 갑옷처럼 뼈를 감싸고 있다.
오우거로 만든 스켈레톤에다가 리자드맨의 가죽을 얹으면 저런 모양일까. 도대체 이쪽 세계에는 어떤 종족이 살았던 건지 가늠도 안 된다.
한 가지 확실한 게 있다면…….
‘강하긴 하네. 7성급 정도? 6성급은 확실히 넘어.’
곡선으로 휘어진 검을 내리친 언데드의 힘이 보통이 아니라는 것.
단순히 힘만 세면 양반인데.
-사아아아
검이 내려친 부분이 검게 물들었다.
미약하지만 체력이 빠지는 기분이 든다. 비슷한 종류를 안다. 기분이 더러운 것이 생명력을 훔쳐먹는 거 같은데.
[SSS급 권능, 별을 주시하는 눈이 발휘됩니다.]
-츠즈즈즈즛
[퍼스트 데스워리어]
-7성급 고대종.
-현재는 존재하지 않는 몬스터.
-고대에는 8성급까지 몬스터가 존재했다고 전해집니다.
데스 워리어라.
이름 한번 직관적이고 좋네.
그런 놈이 한둘이 아니라는 게 문제지만.
워리어로 보이는 것이 12마리. 그 옆에는 푸르게 타오르는 불길을 휘감은 말과 그 위에 올라탄 언데드가 보인다.
그냥 봐도 알겠다.
[퍼스트 데스나이트]
-8성급 고대종.
-현재는 존재하지 않는 악몽의 상징입니다.
-주인이 죽어도 죽음을 부르는 군마는 당신을 쫓을 것입니다.
얼씨구. 8성급도 나왔네?
80층쯤 되면 이런 식으로 나온다 이건가.
됐다. 이제 와서 등급은 신경 쓰이지 않는다. 그런 거 따질 거였으면 연옥계에서 마물들이 튀어나왔을 때부터 했어야지.
그놈들도 급에 따라 8성급에 달하는 괴물이 섞여 있었는데.
“크하하하하! 의미 없는 발버둥 또한 생에 대한 의지! 더욱 뛰어라! 생명을 불사르는 모습을 보여라!”
아, 맞다.
정작 저 녀석에 대한 정보를 안 읽고 있었다.
-콰아아앙!
데스나이트가 찔러 온 창을 옆으로 쳐 내며 권능을 발휘했다.
[기네]
-언데드 몬스터의 시초.
-에이션트 데드맨입니다!
-영물과 몬스터, 재앙과 혼돈. 그 경계 어딘가에 있습니다.
-네크로멘서의 시작이 된 존재기도 합니다.
설명은 별다를 게 없다. 그냥 죽은 녀석이라는 거니까.
네크로멘서의 시작이라는 건 좀 신기했다. 헌터 중에도 네크로멘서 쪽으로 스킬과 칭호를 얻어 활약하는 이들이 있어서.
등반하면서 그런 녀석을 만난 적도 있고.
흥미는 딱 이 정도.
빙글. 가볍게 몸을 돌리며 옆구리를 노리는 데스워리어의 머리통을 박살 냈다.
-파아앙!
폭발하듯 깨져 버리는 머리.
파편이 산탄처럼 날아가 데스나이트를 휩쓴다.
순간적인 파괴력에 뒤로 주춤하는 녀석. 그 틈을 노려 기네에게 오로라 빔을 쐈다.
“어림없다!”
기다리기라도 한 것처럼 손을 뻗는 녀석.
손이라도 날릴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멀쩡하다. 혹시나 소환에 특화되어 본체가 약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그렇지는 않은 모양.
언데드의 시초는 괜히 얻은 칭호가 아니라는 거겠지.
하긴, 내가 너무 쉽게 생각하기는 했다. 재앙과 혼돈의 파편, 그 사이 어딘가에 위치한 위험한 존재 아니던가.
이전에 만났던 녀석이 예외적인 케이스였다. 정신계 공격을 하는 녀석에게 있어 SSS급 정신 보호를 가지고 있는 나는 천적이나 다를 바 없었으니까.
이번에는 아니다.
‘온전히 내 실력으로 꺾어야 한다는 거지.’
요행은 없다. 조력자도 없다. 지금 이 순간에도 프로네는 관망만을 하고 있었으니까.
도대체 무슨 생각일까. 진짜 심심했던 찰나에 나를 만나 무료함을 달래는 게 목적인가.
‘이상해.’
-촤아아악!
데스나이트의 군마를 베어 내며 미간을 찌푸렸다.
내가 아는 NPC라면 이런 식으로 행동하는 건 불가능했다. 정확히 말하면 불가능에 가까웠다.
탑은 NPC에게 역할을 요구하니까. NPC가 얼마나 강하든 상관없다.
포인트로 대가를 치르지 않거나 역할을 완수하지 않으면 결국에는 탑에 완전히 종속되어 버리니까.
안전 지대에서 장사를 하는 것도 아니니 포인트가 넘쳐날 일도 없고, 이렇게 옆에서 구경하는 게 시스템이 원하는 역할이냐 물으면 그것도 모르겠다.
자아를 잃고 완전한 NPC가 되어도 그만인 건가.
“나를 앞에 두고 여유를 부리다니!”
딴생각에 빠져 있는 내가 마음에 들지 않는지 기네가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가죽만 남은 얼굴이 비정상적으로 찌그러졌고.
[망자의 그림자(SS)가 모습을 드러냅니다.]
사방이 불길인 이 자리에 그림자가 멋대로 뻗어 나왔다.
그 원인은 말할 것도 없이 저 녀석.
이미 내가 부순 언데드들은 다시 몸을 일으키고 있다.
귀찮기도 하지. 보통 언데드는 머리통을 부수면 죽지 않나? 방금 내가 머리를 날린 데스 워리어의 머리가 다시 복구되었다.
약점이 따로 있는 것인가. 아니면 에이션트 몬스터의 능력 때문인가.
“차차 알아가 보자고.”
에이션트 몬스터는 자아가 있다.
다르게 말하면 내 질문에 답을 할 수도 있다는 거지.
던전 안에 있는 녀석이니 다른 누구보다 이곳의 상황을 잘 알지 않을까.
싸워서 이긴다. 제압한 후 정보를 캔다.
단순하지만 효과적인 방법.
“후우.”
짧게 숨을 내뱉었다.
순간적으로 긴장이 풀리며 몸에 활력이 돌았고.
[SSS급 권능, 굴하지 않는 검귀가 번뜩입니다!]
[검강]
-파아아아아앗!
눈앞의 적에게 검을 휘둘렀다.
폭발적인 빛이 전방을 휩쓴다. 내게 달려오던 언데드들이 잠깐이지만 보이지 않을 정도.
풍압에 밀려난 불길이 사그라들었다 다시 타올랐고.
“이, 이건. 네놈! 천사는 아닐 텐데!”
내 검에 분쇄된 언데드는 가루가 되어 일어나지 못했다.
생각해 보니 이 녀석한테도 상극인 힘이 내게 있더라고.
언데드하면 신성력 아니던가. 80층대에 올라온 만큼 신성력 스텟은 999점을 넘어선 지 오래.
“고대종이라 혹시 몰랐는데 효과가 있는 거 같군.”
그럼 앞으로는 쉽지.
파악! 발을 박차고 안으로 파고들었다.
위기를 느낀 건지 녀석이 다시 힘을 사용한다. 멋대로 뻗어 나갔던 그림자가 나를 옭아매기 위해 달려들었고 추가적으로 만들어진 언데드 수십 마리가 나를 향해 달려온다.
그뿐일까.
“으으으으아.”
“어으으으.”
불타고 있는 산 곳곳에 퍼져 있던 스켈레톤까지 이곳으로 몰려들었다.
그래. 이래야지. 네크로멘서하면 물량전의 대가 아니던가.
-파지지지지지!
놈이 조종하는 그림자와 검이 닿자 불쾌한 소리와 함께 연기가 피어오른다.
인간의 얼굴이 뒤섞인 연기가 비명을 지르며 솟아오르는 모습.
그와 동시에 그림자를 통해 내 체력이 빨려 들어간다. 드레인과 비슷한 효과였고 더불어.
[정신 보호(SSS)]
[혼돈이 대미지 일부를 경감합니다.]
[영혼이 입는 대미지가 미미합니다.]
영혼 자체에 타격을 주는 공격이었다.
이것 참. 그냥 그림자인 줄 알았더니만 영혼이 뒤섞인 거였나.
언데드라 그런가 음침한 스킬만 골라 쓰네.
그런데 어쩌나.
“나도 비슷한 게 있는데.”
[러브 앤 피스(S) Lv.10+]
[파이어 밤(S) Lv.10+]
[숙련도가 최대치에 도달했습니다!]
[파이어 밤(S) Lv.MAX]
-콰아아아아앙!
신성력을 담은 파이어 밤이 거대한 폭발을 일으키며 일대를 날려 버리고 그 순간.
[영혼 찢기(S) Lv.10+]
[검강]
-서걱
혼돈검이 그림자를 베었다.
신성력을 둘러 온몸을 감싼 빛무리.
난 인벤토리에서 왕관을 꺼내 머리에 올렸다.
[마그나로크의 왕관(???)]
-얼음과 불의 신전의 총체, 마그나로크의 왕관.
-왕의 자격이 주어집니다.
-신성력이 부족해 능력 일부가 봉인됩니다. (필요한 최소 신성력: 1,000)
[조건 충족!]
[마그나로크의 왕관이 본래의 힘을 되찾습니다!]
여기까지가 전초전.
지금부터가 진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