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탑에 갇혀 고인물-476화 (475/740)

476화 갈리트라의 산채

불길을 타고 치솟은 하늘. 아무렇지 않게 내가 할 일을 알려 주는 프로네.

뭐랄까.

“아니 아니, 너무 쉽게 말하지 말고. 천재지변이잖아, 거의.”

“비슷하긴 하지.”

너무나 쉽게 인정해 버리니 내가 더 어이가 없을 지경이다.

아닌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나?

게이트가 터져도 멀쩡한 세계에 문제가 생겼으니 이 정도는 나와야 밸런스가 맞을지도 모르겠다는 무슨, 이건 너무한 게 맞지.

“돌겠네.”

당장 그걸 내가 해결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답이 없다.

정령계 역시 넓이가 있는 만큼 내가 모든 구역을 감당할 수는 없다.

하려면 어떻게 될지도 모르겠지만 그건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리고.

‘분명 나 말고도 이쪽으로 온 사람들이 있을 거야.’

그 사람들이 한 구역씩 맡으면 가능할 것도 같았다.

어디까지나 예상에 불과했지만. 직접적인 원인도 모르거니와 해결법을 알지도 못하니 자신감이라도 가져야 하지 않겠는가.

게다가 나 혼자 모든 걸 해야 할 필요도 없다.

-타앗

보여 줄 걸 다 보여 줬다는 건지 프로네가 불기둥에서 벗어나 착지했다. 나도 마찬가지.

대략적인 상황은 알았다. 여기 직접 상황을 겪은 녀석도 있다. 심지어 탑에 있으면서 여러 번 겪었겠지.

거인들이 그러했듯이 프로네 또한 대략적인 플랜을 가지고 있지 않을까.

권능을 통해 확인한 결과 숭배자도 아니다. 자신의 세계에 애착을 가지고 새로운 기회를 얻고 싶은 건 자연스러운 일.

“그래, 이제 어떻게 해야 하는지 말해 봐.”

난 녀석의 계획을 물었고.

“내가? 딱히 없는데.”

“그렇군. 나쁘지 않은 계획… 어?”

“없다고.”

잘못 들었나 싶었지만 표정을 보아하니 제대로 말한 게 맞는 거 같다.

오늘 여러 번 당황시키네.

갑자기 두통이 찾아온다. 왜? 대체 왜?

내가 착각한 게 아니라면…….

“아까는 멍청하지 않다고, 나랑 같이 움직일 마음이 생겼다지 않았나?”

“맞아, 따라다니면서 구경할 생각이다.”

“정령계는 어쩌고?”

“네가 고치려던 것 아니냐? 등반가들은 다들 위로 올라가려 하지 않더냐.”

“맞는 말이기는 한데.”

뭐지, 왜 내가 말리는 기분이지?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도 알려 줬거늘. 으음, 자꾸 이상한 부분에서 멍청하구나.”

딱한 표정으로 날 바라보는 녀석.

진짜 딱밤 한 대만 세게 박으면 안 되나.

내 속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프로네가 툭툭 내 등을 두드렸다.

“모자란 게 죄는 아니다. 스스로가 부족하다는 것을 인지하고 나아가려는 자세를 갖추는 것이 시작이지. 힘내라. 이곳까지 왔다는 것만 해도 대단한 것이다.”

작은 주먹을 쥐며 응원까지 해 준다.

오케이. 일단 이 녀석이 도움이 안 된다는 건 알겠다.

내 시야가 좁았다. 세상은 넓고 탑은 높으며 이상한 녀석들은 널리고 널렸다는 것을.

NPC들도 마찬가지. 오랫동안 한곳에 박혀 있으면 정신 건강에 안 좋지. 내가 그걸 몰라봤네.

“잘 모르는 듯하니 알려 주마. 정령들은 정령계에 속해 있기는 하나 세계에 애착이 크지 않다. 전부는 아니지만 많은 정령이 그러하지.”

“어째서.”

“정령계는 애초부터 차원 간의 경계가 느슨하거든. 많은 수의 정령들은 틈 사이로 빠져나가 자연을 즐기거나 계약자와 함께한다.”

느슨한 차원이라.

약간 연옥계랑 비슷한 느낌인가. 이야기를 들어 보니 그것보다도 불안정한 곳인 느낌인데. 멋대로 다른 차원에 돌아다니는 걸 보면.

“내가 너와 함께 다니려는 것도 비슷한 이유지. 정령들은 여기저기 구경하러 다니는 걸 좋아하거든. 보아라. 여기서 무엇을 하고 놀겠느냐.”

“불덩이 던지고?”

“인간은 숨을 마시고 뱉으며 노는가 보구나.”

할 말이 없네. 됐다. 신경 끄자. 여기는 내가 알아서 해야지.

옆에서 종알거리는 프로네를 무시하고 걸어갔다. 쓸모없다는 것을 알았으니 대충 방관자 혹은 가끔 팁 던져주는 봇으로 여길 생각.

‘원인 파악이 우선이야.’

문제가 발생했으면 원인을 없애야 하는 법. 우선 이상 현상이 벌어지는 곳으로 직접 가 볼 생각이다.

차원이 경계가 느슨하다고는 하나 엄연히 분리되어 있는 곳이다.

원소가 폭주한 이유가 있을 터. 진짜 자연재해면 답 없는 거고. 그럼 뭐, 그냥 망할 팔자였던 세계인 거지.

하지만 그렇지는 않을 거다. 그랬으면 탑이 굳이 이곳을 80층대에 배치하지는 않았을 테니까.

급하지 않게 천천히 시작하자.

시작은 여기, 불의 정령들이 사는 곳.

폭발 위주의 스킬을 사용해서 그런가 불이 아무래도 친숙하다.

-우우우웅

환경에 반응하는 건지 펠라인의 빨간 머리통도 빛나고 있고.

파츠 별로 속성이 있는 만큼 정령계와 같이 원소의 힘이 강하면 변화가 있는 모양.

덕분에 불의 힘이 강한 곳을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호오, 불의 중심으로 들어가려는 게냐.”

“들어가 봐야지. 가만히 앉아서 구경한다고 바뀌는 거 없어.”

“그럼 행동력이야말로 모험의 기본이지. 내가 알던 영웅들도 그랬다. 간혹 생각보다 행동이 빨라 단명하는 이들도 있었지만 말이지.”

영웅?

그건 좀 흥미가 있다. 다른 차원의 영웅, 혹은 강자들에 대한 이야기가 도움이 될지도 모르니까.

어쩌면 그들 중 누군가가 탑에 있을 수도 있고, NPC일 수도 있고 어쩌면.

‘델버튼처럼 혼돈의 파편으로 존재할 수도 있겠지만.’

짧게 혀를 차고 말을 걸었다.

“너도 정령계 밖에 있었나?”

“여러 곳을 다녔지. 중앙계도 갔었고, 천계도 갔었다. 후에는 탑도 올랐고.”

탑에 오른 거야 별로 관심 없다. 상위층 이상 올랐으니까 NPC로 있는 거지 뭐.

펠라인 세트의 반응과 온몸을 통해 느껴지는 열기를 감지하며 앞으로 걸어갔다.

“영웅이라면 어떤 걸 말하는 거지? 등반가들을 말하는 건가. 우리 세계에서는 헌터라고 부르는데.”

“물론 탑을 겪은 자 중에는 초월적인 힘을 가진 이도 있지만 내가 말한 건 그 전의 이야기다.”

대충 탑이 나타나기 전의 이야기로군.

흥미가 생긴다. 탑이 생기기 전의 영웅. 사실 따지고 보면 우리 또한 역사적 영웅들이 존재해 왔다.

대격변이 일어나고 나서?

‘그때는 많은 악당과 영웅이 있었지.’

전설이나 역사에서 나오는 사람들이 아니더라도 삶에 있어 그런 사람들이 있었다.

지금은 어떨까. 탑이 생기고 헌터들이 등장하고 사회가 다시 돌아가기 시작했을 때, 그들 모두 일상으로 돌아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살아가고 있다.

겉으로 보기에는 평범한 일상. 속마음은 어떨까. 다시 한번 혼란이 찾아오는 지금, 그들은 무슨 생각을 할까.

잠시 미간을 찌푸리며 생각에 잠겼지만 이내 털어 냈다.

프로네가 말하고 있는 영웅들은 다른 종류인 거 같았으니.

“중앙계. 아, 본인들은 인간계라고 부르는 곳이었지. 그곳도 여기와 긴밀히 엮여 있는 곳이거든.”

“계약을 했었나 보군.”

“여러 번 했었지. 정령은 오래 살거든. 사실 수명이라는 게 없지. 원래대로 돌아갈 뿐.”

뒷말이 살짝 흐리다. 내가 모르는 뭔가가 있다는 거겠지.

이 부분은 잠시 미뤄 두자. 하고 싶지 않은 말을 굳이 찔러 봤자 답이 나오지는 않을 테니.

“그 사람은 어떤 사람이었지?”

“희망의 끈을 놓지 않는 사람. 삶의 의지가 강한 자였다. 본인에게도 자기 사람한테도. 정령은 무언가에 몰두하지 못해. 그래서 다른 이를 보며 그 감정을 느끼려 하지.”

종족적인 특성도 있는 모양.

하기야 정령도 그렇고 요정도 그렇고 진지한 것과는 거리가 먼 종족이기는 하다.

삭막하고 우울한 분위기에 취약한 모습을 보이기도 하고 환경적인 영향도 잘 받는다.

눈의 정령 여왕이었던 하이누 또한 나무의 모습으로 돌아가 혹독한 환경에 버티려 했으며, 파괴의 요정인 헤이다는 정신이 살짝 맛이 갔다.

음, 좀 많이 갔던가. 아무튼.

“여기군.”

난 원하던 곳에 진입할 수 있었다.

펠라인 세트가 가장 크게 반응하는 곳. 다른 곳과 비교해도 훨씬 뜨거운 열기를 발산하는 곳.

-우우우우우웅

더 이상 불이 타오르는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파도 대신 불길이 넘실거리는 바다에 들어온 느낌.

이리저리 흔들리는 공간과 아지랑이 때문에 시야가 어지럽다.

불규칙하게 일렁이는 것이 불안정한 지역이라는 걸 확신하게 해 줬고.

[차원 간섭의 영역에 들어섰습니다.]

친절하게도 메시지창이 설명까지 해 줬다.

평소에는 이렇게까지 알려 주지 않는데. 이렇게 말을 해 주는 경우는 대부분…….

“던전이나 유적.”

내 생각이 맞는 걸까. 어디론가 빨려 들어가는 느낌이 들었다.

순간적으로 불길이 멈춘다. 마치 시간이 정지된 것처럼.

이내 비정상적인 현상이 끝났을 때는.

[던전화 진행 중]

[갈리트라의 산채에 진입합니다.]

[주의- 차원이 겹쳐 있습니다.]

[시스템적 제약으로 다른 차원으로 넘어갈 수 없습니다.]

[당신은 임시적으로 정령계에 귀속되어 있습니다.]

다른 공간이 나타났다.

과연, 정령계는 다른 차원들과의 경계가 느슨하다더니 그 접점에 생긴 던전인가.

흥미로운 부분이다. 둘러보면 되겠지. 이 던전이 단서가 될 거다. 불의 힘이 가장 집약되어 있는 곳에 위치한 거니까.

단순한 우연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호오, 신기하구나.”

옆에서 얼굴을 내민 프로네가 작게 감탄했다. 신기한 듯 주변을 둘러보는 녀석.

개인적인 감상으로는 정령계나 여기나 개판인 건 똑같은데.

그나마 다른 점이 있다면 모든 게 불로 만들어져 있지는 않다는 것 정도?

대충 산맥에 불이 타오르고 있다고 보면 됐다. 강 대신에 용암도 흐르고. 용암이 맞기는 한가? 그런 것치고는 묽은데.

자연 현상이 아니라 마법적인 무언가가 섞여 있는 거 같다.

‘갈리트라가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멀쩡한 모습일 거 같지는 않군.’

것보다.

“왜 처음 오는 척하냐.”

“실제로 처음 오는 게 맞다만?”

“너 살고 있는 곳 근처잖아.”

“시스템적으로 막혀 있어서 등반가가 갈 때가 아니면 못 들어간다.”

그렇군. 어쩐지 쫄래쫄래 쫓아온다 했다. 옆에서 구경하겠다는 게 이런 거였나.

하여간 도움이…….

“호오. 이건 과거에 봤던 거구나. 인간 기준으로는 고대에 쓰였던 문양이거늘. 여전히 흔적이 남아 있을 줄이야.”

도움이 된다.

“고대의 쓰인 문양이라 함은?”

“불의 신을 모시는 이들이었지. 나중에는 사이한 집단으로 변질되기는 했다만. 따지고 보면 그들이 모시려던 존재도 신은 아니었다. 불의 정령왕이었지.”

오호라, 이건 좋은 정보다.

어쩐지 미묘하게 정령계랑 비슷한 환경이 되었다 했더니만 정령왕을 소환하려고 했던 건가.

“소환에 성공했는지는 모르겠군. 이곳이 만들어진 시기가 어떤지 알 수가 없어서. 불의 정령왕은 이미 자연으로 돌아갔거든.”

“그건 확인해 보면 되지. 일단은 저것들 먼저 해결해야 할 거 같아서.”

혼돈검을 뽑아 들었다.

이러니저러니 말은 많지만 이곳은 던전.

그 안에 보물이 있을지 쓰레기가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그아아아아.”

“으어어어어.”

일단 몬스터는 확실하게 있었다.

어쩌면 함정이 있을 수도 있겠지.

나를 향해 기어 오는 것들은 시커멓게 타 버린 스켈레톤.

일반적인 건 아니다. 살과 근육 대신 푸르게 빛나는 불이 붙어 있어서.

싹 정리해 보면 뭐든 나올 거다.

-콰앙!

발을 박차며 앞으로 돌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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