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5화 정령계
내가 잘못 봤나. 불구덩이라니. 분명히 말도 안 되는 상황인데 왤까. 어디서 본 거 같은 기분이다.
가볍게 손으로 주변을 어루만졌다. 화기 내성이 높아서 그다지 뜨겁지도 않다. 그게 아니더라도 미묘하게 안 뜨거웠지만.
오히려 따뜻하다고 해야 하나.
따뜻한 불덩이라는 게 말이 안 되기는 한다. 불에 직접 손을 넣고 있으면 뜨거워야 정상이지.
잠시 턱을 쓸어내리며 생각에 잠겼고.
“아, 그때였군.”
예전에 겪었던 곳과 비슷한 느낌이다. 16층에서 만났던 불강아지들. 정확히 말하면 자아도 제대로 생성되지 못한 최하급 불의 정령이 있던 곳과 비슷한 느낌이다.
그동안 온갖 일이 있어서 기억이 안 났었네.
불로 이루어진 산과 언덕, 이파리 대신 불꽃을 태우는 나무, 붉은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는 연못.
감정을 가지고 있기라도 한 건지 때로는 따뜻하게 가끔은 맹렬하게 피어오르는 불꽃을 보고 있자니 괜히 마음이 편해졌다.
내가 이곳저곳 불을 지르고 다녀서 그런 건 아니고.
“정령의 친구 칭호 덕분인가.”
나름 나를 우호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기분이 들었다.
바닥에 앉아 봤다. 묘하게 따땃해서 누우면 꿀잠 잘 거 같은데. 내친김에 그냥 누워 버렸다.
그래도 하늘은 멀쩡하네.
하긴, 정령도 나올 때가 되기는 했다.
[당신의 유형은 정의할 수 없는 혼돈입니다.]
[시스템의 판단에 의거, 균형을 위해 정령계에 임의 배치됩니다.]
예상하건대 이번 차원에는 정령계만 있지 않을 거다. 요정계도 같이 있겠지.
균형을 위해 이곳에 배치되었다는 것만 봐도 다른 곳이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왜 하필 요정계가 이번 시나리오에 있을 거라고 생각하느냐?
두 종족 모두 신비의 존재기 때문에?
그것도 있는데…….
“아직 안 나왔잖아, 프렉탈 파크.”
헬다잉 키친 모임에서 여러 집단의 존재를 알게 됐다. 70층대에서 들렀던 히든 가든도 그중 하나.
헬다잉 키친의 대표 브루헴이 말하지 않았던가. 요정과 정령으로 이루어진 집단 ‘프렉탈 파크’라는 게 있다고.
그게 설마 80층대에 있을지는 몰랐지만.
거인과 달리 정령과 요정은 상위층에 오르기 전에도 봤어서. 치히린과 모빌리딕, 헤이다, 하이누.
정령과 요정에 대해 생각해 보니 그런 말도 들었던 거 같은데…….
“천사들은 정령과 친하고, 악마들은 요정들과 친하다고.”
종족도 사용하는 능력도 다르지만 공통점이 있다.
천사와 정령 모두 철저한 계급 사회라는 것.
악마와 요정 모두 장난에 진심이고 순박한 면모가 있다는 것.
차이점이 있다면 천사들의 계급은 사회적인 부분이 크고, 악마의 장난에는 선이 없다는 정도다.
이 부분을 인지해 두자. 이번 시나리오를 관통하는 주제일지도 모르니까.
것보다…….
“여긴 안 오네.”
잠깐 누워 있으면 뭐라도 반응이 올 줄 알았는데.
거인계에서는 내가 들어오자마자 신나서 달려 왔었다. 여기는 별다른 반응이 없고.
나 말고 다른 등반가한테 갔나?
그럴 가능성도 있다. 꽤 많은 등반가가 들어왔을 테니까.
조금 더 기다릴지 움직일지 고민하고 있는 찰나.
“헥헥헥.”
“어? 오랜만이다, 불강아지?”
불의 최하급 정령이 헥헥거리며 다가왔다.
자아가 없어 짐승이나 다를 바 없는 존재. 사실 정령이라고 말하기도 애매한 부분이 있었고 그 옆에는…….
“샐러멘더도 있군.”
지구에서 등장하는 게이트에도 가끔 모습을 보이는 2성급 몬스터였다. 얘도 말이 몬스터지 따지고 보면 정령의 일종이다. 온순한 편이기도 하고.
몬스터를 애완용으로 키우게 된다면 가장 가능성이 높은 놈 중 하나로 손꼽힌다.
80층대에서 보니까 또 반갑구만. 정령계에서는 짐승이나 곤충 대신 이런 녀석들이 돌아다니는 건가.
저기, 이름은 모르겠지만 잠자리 비슷한 게 날아다니고 있다. 역시나 불로 되어 있지만.
아무래도 이쪽은 불의 정령 섹터 같은데. 눈의 정령이나 물의 정령 이런 애들을 위한 구역도 따로 있는 건가.
지금도 환상적이고 신비로운 게 있을 맛이 나기는 하지만 아무래도 움직여야 할 거 같다.
공략을 위해 필요한 건 이곳에 위치한 NPC들이니까.
그런 나를 붙잡고 싶은 건가. 불강아지가 내 다리를 문다.
“끼잉. 끼이이잉.”
“어허, 물지 마. 계속 그러면 나도 어쩔 수 없어.”
살포시 주먹을 말아쥐었다. 아프지는 않지만 선빵을 친 건 이 녀석이니까.
-빠악!
“그에에.”
“아, 왜! 아퍼.”
내 뒤통수를 때린 덕춘이가 한심한 눈으로 고개를 젓더니 불강아지에게 손을 내젓는다.
동물끼리는 뭔가 통하는 것인가. 고개를 끄덕인 불강아지가 수시로 날 확인하며 앞장섰으니.
“저거 따라오라는 건가?”
“그엑.”
대충 그런 뜻인 거 같았다.
난 또 공격이라도 하는 건가 했지. 애매하기는 하지만 일단은 몬스터로 취급하고 있으니까.
겉모습에 유혹됐다가는 오래 못 있는 게 탑이라서 방심하지 않은 거뿐이다. 그럼 그럼.
절레절레 고개를 흔드는 덕춘이.
뭐가 됐든 불강아지의 의도는 전달되었다. 놈을 따라 이동한 곳은 언덕 사이.
연못 옆으로 미묘한 각도로 연결되어 있는 곳이라 눈에 띄지 않는 위치였다. 아지랑이가 피어올라 더 그런 느낌도 들었고.
걷는 시간이 제법 되었지만 그다지 심심하지는 않았다. 다양한 형태의 정령들을 보는 맛이 있어서.
“새로 온 등반가인가. 이번에는 그나마 멀쩡한 녀석인 거 같군. 이리 와라, 패콤.”
불로 만들어진 부들을 지나는 찰나 목소리가 들려왔다.
미묘하게 갈라지는 목소리. 바위 위에 한 여인이 앉아 있었다.
그녀의 부름에 바로 달려가는 불강아지. 이름이 있었던 건가. 여인의 다리에 머리를 비비는 것이 딱 강아지다. 처음 볼 때부터 그러기는 했지만.
갑자기 더덕이가 떠오르는군. 덕춘이는 저러지는 않아서.
“그에에.”
덕춘이가 띠꺼운 표정으로 슥 바라본다. ‘뭐, 한번 비벼 줘?’ 이런 표정인데.
아니, 됐다. 갑자기 덕춘이가 안 하던 짓을 한다?
매우 높은 확률로 사고를 쳤거나 덕춘이의 형상을 한 함정이거나 둘 중 하나다, 그치?
“그에에.”
“어허, 덕춘아. 주인한테 중지 올리는 거 아니야. 내려.”
기껏 신뢰의 표시를 했구만 괜히 쑥스러워하기는.
아무튼.
“이곳의 NPC인가?”
“보다시피. 그리 놀라지는 않는구나.”
“NPC야 여러 번 봤으니까. 80층대는 협력하는 구조기도 하고.”
내 말에 피식 웃은 녀석이 고개를 끄덕인다.
“말이 통해서 좋군. 다른 녀석들은 올라오면 신기하다고 쓸데없는 것을 물어보고는 하는데. 그 짓도 하다 보면 질리거든. 프로네라고 한다.”
“난 이블아이.”
“친근한 향기가 나는군.”
그건 아마 정령의 친구 칭호의 효과일걸?
이게 참 좋은 게 어디 가서 일단 배척은 안 받는다.
잠깐 대화를 섞었는데도 시니컬한 성격인 거 같아서. 괜히 마찰을 빚었다가는 협조고 뭐고 없을 거 같아서.
봐라. 지금도 챕터가 진행 중이지만 뚱한 표정으로 앉아 다리를 꼬고 있지 않은가.
어떤 녀석일까. 난 권능을 사용했고.
[프로네]
-84층에 위치한 NPC.
-불의 상급 정령입니다.
-뜨거움 하면 불! 그 성질은 성격에도 영향을 미치지만 글쎄요?
-불이란 모든 걸 태워 버리면 시들하기도 합니다.
불의 상급 정령.
꽤 높은 등급이다. 정령이라는 게 태생부터 등급이 정해져 있는 거라 임의대로 바꿀 수가 없어서.
나와 인연이 있는 모빌리딕도 힘만 따지면 상급 정령 이상의 힘을 지니고 있지만 등급 자체는 여전히 중급 정령으로 분류된다.
탑을 통해 강해져도 이러니 정령에게 태생적인 등급이란 건 절대적인 가치를 지니고 있는 듯했다.
프램버그의 수장, 베힐탄도 말하지 않았던가. 탑의 초대를 받는 건 위로 올라갈 가능성이 있는 대상이라고.
우리가 탑의 초대를 받는 연령대가 정해져 있는 것처럼 정령계는 최소 하급 정령을 되어야 초대를 받는다고 했었다.
최하급 정령은 초대 자체를 받지 못한다고 했었지.
“헥헥헥.”
불강아지가 슬쩍 다가와 손을 핥는다.
“패콤이 널 마음에 들어 하는군. 짐승은 단순하나 순진한 존재. 심성이 나쁜 녀석은 아닌 모양이구나.”
“궤?”
덕춘이가 반문했지만 깔끔하게 무시했다.
그보다 궁금한 게 있어서.
“짐승이라, 같은 정령이잖아?”
“인간들도 다 같은 생명체인데 돼지를 짐승이라 하지 않느냐?”
“아, 대충 알겠군.”
최하급이나 그보다 못한 정령들은 따지고 보면 지구의 동물 느낌.
정령으로 이루어진 세계인 만큼 이곳의 토종 생명체라고 보면 될 거 같다.
그건 그건데.
“몬스터가 보이질 않는군.”
차원의 특징이 뭐든 간에 탑이 생성되면 게이트가 터진다.
즉, 좋든 싫든 몬스터와 싸우게 된다는 것인데.
“흐음, 좀 멍청한가. 여기서 게이트가 터진다고 뭐가 달라질까.”
따악.
프로네가 손가락을 튕기자 일시적으로 불길이 잦아든다.
그곳에 보이는 건 무수한 뼈. 몬스터의 뼈였다.
지금까지 바닥이라고 생각하고 밟고 있던 게 전부 몬스터의 뼈였던 건가.
“지금까지 나타난 녀석들은 모두 불타 죽었다. 적어도 이곳에 떨어진 놈들은 말이지.”
환경 자체가 몬스터가 견딜 수 없는 구조.
이거…….
‘거인계랑 비슷한데?’
거인계 역시 게이트는 별다른 문제가 되지 않았다.
거인들이 워낙 강해서 높은 등급의 몬스터가 나타나도 때려잡는 데 문제없었고, 굳이 그들이 나서지 않더라도 거인계에 사는 짐승들이 해결했다.
탑에서 쏟아지는 몬스터보다 강한 생태계가 구성되어 있다는 것.
하나의 공통점.
그리고 떠오르는 80층대의 테마.
‘멸망에서 벗어나려는 세계.’
이곳에서 게이트나 몬스터는 부차적인 문제다. 아니, 그냥 문젯거리로 인식하고 있지도 않는다.
다른 부분에 집중해야 한다.
정령계 첫 번째 챕터의 제목은 부조화. 거기서 얻을 수 있는 힌트는…….
“…정령계는 원래 이런 모습이 아니지?”
내 물음에 프로네가 입꼬리를 올렸다.
“반은 맞다고 해 주지. 멍청한가 했는데 눈치는 있네. 좋아, 너라면 함께 움직여도 될 거 같아.”
자리에서 일어선 프로네가 날 잡아끈다.
언덕 뒤. 얼핏 다른 곳이랑 비슷해 보이는 공간.
“열려라.”
그녀가 손을 펼쳤고 순간 일대가 바뀌었다.
불로 이루어진 산이 걷히고.
-화아아아아악!
거세게 타오르는 불길이 나를 반겼다.
그동안 느껴졌던 것이 온화한 불길이었다면 이것은 거칠게 요동치는 업화였다.
그 밑으로 보이는 것은 온갖 대형 괴수들의 뼈. 저걸 뼈라고 부를 수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다 타 버려서 가루나 다를 바 없다.
뜨거운 열기에 바람이 솟구친다.
“잡아. 위로 올라갈 거니까. 녹아내리지는 않겠지?”
“안 녹으니까 걱정 말라고.”
“어깨에 있는 영물은… 신경 안 써도 되겠군. 세상의 법칙에서 어긋난 존재니까.”
규칙에서 어긋난 존재라. 카오스 속성을 가지고 있다는 걸 말하는 거겠지.
그럼.
-타앗
프로네와 함께 불기둥에 몸을 던졌다.
따라오지 못한 불강아지가 왕왕 거리고.
-화아아아아아악!
나와 프로네는 불길을 타고 위로 솟구쳤다.
굉장히 빠른 속도. 흡사 인간 미사일이 된 거 같다.
“원래 이런 불기둥은 정령계에 없었어. 차원이 일그러지고 폭주하면서 벌어진 현상이지.”
가볍게 설명을 하던 녀석이 아래를 가리켰다.
“이곳뿐만이 아니야. 다른 지역도 마찬가지다.”
하늘 높은 곳에서 본 정령계는 혹독한 환경 그 자체였다.
여러 섹터로 나뉜 곳. 그곳에서 한 가지 속성을 극한까지 끌어올린 뭔가가 공간을 일그러트리고 있었다.
“우선 이것들부터 해결해야 할 것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