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탑에 갇혀 고인물-472화 (471/740)

472화 이러면 안 되는데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 낯설다.

멤버는 당연히 아니고 마그마 요정이나 근육 요정 같은 요정 클럽 사람도 아니다.

루키 그룹도 아니었고 이전에 만났던 상위 헌터의 목소리도 아니라는 것은.

‘먼저 이곳에서 대기하고 있던 다른 상위 헌터라는 건데.’

통역 스킬을 통해서 말 자체는 알아들어서 어느 나라 사람인지는 대충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것도 그런 것이 러시아어를 쓰고 있었으니까. 러시아어가 맞나?

나도 여러 나라 국어를 아는 건 아니라서 정확하지는 않지만 그런 느낌이 들었다.

목소리 톤으로 봤을 때 여자인 거 같았는데 그건 딱히 중요한 게 아니고.

‘이걸 들키네.’

완전범죄를 저지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래, 그럴 수도 있지. 내가 모르는 상위 헌터가 땅에 박혀 있기도 했는데 다른 상위 헌터라고 이곳에 있지 말란 법이 있던가.

자고로 이럴 때일수록 뻔뻔하고 당당하게 나가야 하는 법이다.

차분함을 유지한 채 천천히 몸을 일으켜 세웠다.

“뭔가 오해가 있는 거 같은데 범죄 현장이 아니라 장난을 치고 있던 중이었지.”

“오. 생매장하고 있지 않았나?”

뒤를 돌아보자 제법 큰 키의 여성이 짝다리를 한 채 나를 훑어보고 있었다.

금발을 뒤로 묶고 팔이 드러나는 옷을 입고 있다.

근육이 좀 붙어 있는 것이 건강미가 있다. 다행이랄까, 눈빛에는 경계나 적의보다는 흥미로움이 깃들어 있었고.

“대기실에 새로운 사람이 들어온 건 오랜만인데. 그치, 드미트리?”

“푸아압! 물어볼 거면 흙이라도 치워 주고 묻든가!”

숨이 막혔나. 땅에 박혀 있던 녀석이 몸을 흔들며 고개를 내민다.

칫. 하긴 상위 헌터인데 위에 흙 좀 쌓았다고 어떻게 될 일이 있나. 마음만 먹으면 땅속에서 언제든지 나올 수 있었을 텐데.

그래서 더 이상하다. 왜 안 나오고 있던 건가.

“내기에서 졌으면 벌칙을 받아야지. 오늘 해 지기 전까지 그러고 있기로 했잖아.”

“아니! 그래도 그렇지, 이런 또라이가 있으면 말이 다르지!”

또라이?

설마 날 보고 하는 말인가?

괘씸한 마음에 다시 녀석의 얼굴을 땅에 묻으려 했지만 옆에 있던 녀석이 말렸다.

“그래도 새로 온 사람이 있으면 우리도 위로 올라갈 가능성이 크잖아. 좋게 생각하라고.”

“위로 올라가는 게 마냥 좋은 건 아니라고, 옥사나.”

서로 알고 있는 사이인가.

대기실에 같이 있었으면 모르기가 더 어렵긴 하겠다.

대충 남자가 드미트리, 여자가 옥사나인가.

“반갑군. 난 이블아이라고 한다.”

“이블아이? 아, 들어봤지. 최근 커뮤니티에서 자주 언급되거든.”

땅에 묻혀 있던 드미트리가 반색한다.

등반가치고 커뮤니티를 안 하는 사람이 드물다. 층으로 단절되어 있기도 하거니와 마땅히 즐길 거리가 없는 만큼 커뮤니티를 하게 돼서 말이지.

탑 밖에 있는 사람들이 TV를 보는 거랑 비슷한 느낌이라고 보면 됐다.

그나저나 이쪽까지 내 이름이 퍼졌군.

당연하다면 당여한 일이다. 모두가 그런 건 아니지만 연합 사람들 중 일부는 상위층에 올라왔으니까.

비교적 조용하던 상위층 채널도 지금은 활기를 띠고 있다.

연합 사람들이 워낙 떠들썩해야지.

그나마 다행인 건 나에 대한 거부감이나 적대감은 딱히 보이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럴 거였으면 처음 봤을 때부터 그랬을 거다. 지금도 펠라인 세트를 입고 있으니까.

“혹시나 하기는 했지만 진짜였네. 반가워. 옥사나라고 불러.”

“난 드미트리.”

“둘 다 러시아 출신인가?”

“맞아. 의외지?”

드미트리의 말에 고개를 저었다.

러시아는 국토에 비해 헌터의 질이 높지 않은 편이기는 하다.

성격이 급한 건지 아니면 국가 전략을 그렇게 잡은 건지는 몰라도 어느 정도 전투에 투입될 수 있는 수준이 되면 미련 없이 밖으로 나오는 케이스가 많아서.

내가 보기에는 고육지책이다.

땅덩어리가 넓어 영토 전체를 관리하려면 당장 쓸 인력이 필요한 실정이라 그런 풍토가 생긴 것이리라.

어디까지나 그렇다더라 하고 들은 이야기지만, 둘의 반응을 보니 그리 틀린 소리는 아닌 거 같다.

“너희 말고 대기실에 있던 사람이 더 있어?”

“없지. 우리도 여기서 대기한 지 얼마 안 됐어. 대충 2주?”

2주라.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시간이다.

특히나 시나리오를 겪고 나면 시간 개념이 흐릿해져서 2주 정도는 그런갑다 하고 넘어가기 마련이라.

치열하게 싸우다가 휴식 시간이 생기면 푹 쉬고 싶은 것도 있고.

나도 그럴 거다. 어떻게 된 건지 빌어먹을 탑은 내가 쉬는 꼴을 못 봐서.

‘쉬는 시간이 필요하기는 해.’

특히 이번에는 혼돈을 흡수하며 체력적으로나 정신적으로 피로감이 크다.

이걸 뭐라고 해야 하지? 쉬지 않고 나아가기는 하는데 그 과정에서 얻은 경험을 제대로 소화하지 못하고 있다고 해야 되나.

이러다 번아웃이 오는 건 아닐까 모르겠다.

뭐, 탑에서 번아웃 오면 죽는 거라 그러고 싶지는 않지만.

위협에 시달리는 것도 그렇고 쉬지 못하는 것도 지금은 익숙할 지경이라.

여튼 중요한 건 대기실에 먼저 와 있던 등반가는 두 명이 전부라는 것.

2주일 동안 대기했던 만큼 나를 포함해 다수의 등반가가 온 지금, 다음 시나리오로 넘어갈 가능성이 크다는 거다.

아니나 다를까.

[36시간 후, 다음 시나리오로 전송됩니다.]

시스템이 이동 시간을 알렸다. 그래도 이 정도면 양반이다. 바로 넘어가지는 않았으니까.

다르게 말하면.

‘시스템이 판단하기에 아직은 보낼 타이밍이 아니라는 거군.’

원인은 모른다. 이제 막 올라온 이들을 배려하는 거일 수도 있고 먼저 시나리오 진입한 이들과 관련된 게 있을지도 몰랐다.

이건 생각해 봤자 별 영양가 없다. 답을 알 수가 없어서 그때그때 상황 보고 움직이는 게 좋았다.

내가 집중해야 할 건.

‘하루가 넘는 시간이 생겼다는 거야.’

이 시간 동안은 쉴 생각이다. 재충전의 시간이 필요한 것도 있었고 그동안 밀렸던 공략법도 올려야 한다.

한동안 모습을 안 보였더니 커뮤니티에 ‘공듀님 돌아와!’라는 글이 도배되어 있었다.

어째서 부끄러움은 내 몫인가. 이상한 짓을 하더라도 한곳에 몰아 놔야지.

공략 글을 쓰면 그쪽 댓글에서 놀 거다. 이러면 적어도 다른 상위 헌터들에게 쓴소리는 덜 듣지 않을까.

앞으로 만나게 될 가능성이 큰데 쁘찡 연합에 대해 선입견이 있어서 좋을 건 없다.

더불어.

[공략자-칭호(성장형)]

-올 스탯 +180

-행운 스탯 +60(행운 스탯은 일반 스탯과 별개로 적용됩니다.)

-신성력 스탯 +160

-마기 스탯 +120

-현재 공헌도: 1,810점(2,000점 도달 시 특수 보상을 획득합니다.)

공략 공헌도 점수도 올려야 한다.

기껏 영약으로 행운 스탯을 올렸는데 그냥 놔두면 아깝잖아.

칭호 효과를 통해 좀 더 올려 볼 생각이다.

그나저나 칭호 효과로 얻은 스탯이 꽤 된다. 보니까 마기 스탯도 생겼고. 아무래도 특수 보상으로 다른 스탯을 얻을 수 있는 모양.

나중에 혼돈 수치도 올라갈지 모르겠다. 여러모로 사기적인 칭호인 만큼 뽑아 먹을 수 있을 때 최대한 뽑아 먹을 생각이다.

오케이. 할 일은 정해졌다.

이왕 쉬는 거 멤버들한테도 따로 쉰다고 말해 줘야지. 같이 있는 것도 좋지만 가끔은 혼자 여유롭게 있을 필요도 있어서.

“만나서 반가웠다. 그럼 잘 있으라고.”

미련 없이 러시아 등반가들한테 손을 흔들고 자리를 떴다.

“잠깐, 잠깐! 그냥 간다고?”

“대기실에서 상위 헌터를 만나는 건 그리 자주 있는 일이 아니야. 위에 있는 사람도 그리 많지 않아.”

드미트리와 옥산나가 질척거린다.

뭘 몰라도 너무 모르는구만.

“상위 헌터 만나기 힘든 건 옛날 말이고. 너희도 할 거 없으니까 이상한 벌칙 가지고 노는 거 같은데 주변 돌아다녀 봐. 이번엔 10명은 넘게 대기실로 들어왔을 거야.”

“여, 열 명!”

“말도 안 돼! 옥산나, 지금 이럴 때가 아니야. 가자고!”

“이번에는 봐준다. 그냥 나와!”

“다음에 찾아가지! 정보 고마워!”

역시 위에 있는 녀석들일수록 사람을 그리워한다니까.

신나서 달려가는 녀석들에게 가볍게 손을 흔들어 주며 조용히 시간을 보낼 곳을 찾았다.

오케이. 이걸로 이상한 녀석들은 보냈고.

“이쯤에서 할까.”

대기실 이름이 꿈동산인지 꽃동산인지 했던 만큼 아늑한 공간은 많았다.

아무 데나 앉아도 잔디밭이 침대처럼 펼쳐져 있고. 누워 보니 벌레도 없고 의외로 푹신하다.

혹시나 방해꾼이 올 것을 대비해 은신 스킬까지 사용한 채 커뮤니티를 켰다.

[쁘띠공듀]: 흐아아아아아잉!

왔습니다, 왔어용. 제가 왔어욧! 하☆잉!

그동안 저를 애타게 찾았다구요? 혹시나 죽어서 밖으로 나간 건 아니냐구용?

뎃츠 논노! (까딱까딱)

요정은 잠시 쉴 뿐, 죽지 않.는.답.니.닷☆

(。•̀ᴗ-)✧

“이 짓도 오랜만에 하니 내성이 떨어지는군.”

전에는 어떤 정신머리로 이걸 썼던 거지?

오랜만에 써서 그런가 정신 보호가 보조해 주는데도 자괴감이 든다.

특히나.

-오오오오오! 공듀님이다!

-일동 차려어어엇!

-경례에에에에ㅔㅔ엣!

-쁘☆찡!

-쁘☆찡!

-쁘메에엔!!

-요정님만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눈나!! 어서 와!!

어디서 소식을 듣고 온 건지 글을 올린 지 얼마 되지도 않아 수많은 사람이 몰려오는 걸 보니 더 그렇다.

보통 환호성을 들으면 기분이 좋아야 정상 아닌가.

됐다. 누굴 탓할까, 내가 쌓은 업보인데. 그래도 반겨 주니 싫지는 않다.

천천히 닉네임을 살폈다. 약간의 변화가 있다. 다른 나라 사람들도 좀 섞여 있었고 상위층에 오른 것으로 보이는 이들도 존재했다.

오징혁도 나와 같은 층에 있으니 다른 실력 있는 이들도 80층, 적어도 70층대는 오르고 있을 거다.

기존과는 다른 형식으로 등반이 진행되는 만큼 막막함을 느끼는 이들도 제법 있었다.

“챕터별로 진행되는 만큼 정답은 없지만 방향성 자체는 제시해 줄 수 있지.”

직접 그 세계관으로 들어가는 만큼 사실상 선택지는 무한.

중요한 건 적극적으로 움직이냐, 아니면 소극적으로 움직이냐의 차이였다.

그러기 위해 필요한 건 하나. 그 세계가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지, 어떤 위협이 존재하는지 알려 주는 거다. 거기에 더불어 도움을 줄 만한 NPC를 알려 주는 것.

숭배자의 방해가 수시로 들어온다는 것 또한 말해 줬다.

[귀여운 공도]: 세계 숲 시나리오에서는 GO립되면 안 된다구욧!

[쁘띠공듀]: 넴? 연옥계는 천사랑 악마랑 싸우라고 만든 곳이라고용? 맞을래요?

[쁘띠공듀]: 스탯… 스탯이 중요합니다! 스킬을 뾰로롱~☆ 많이 쓰고 신성력은 후후. 제가 도움이 될 만한 것을 드리죠!

[쁘띠공듀]: 모두 볼펜 들어용. 80층에서는 뭐다? 스킬이랑 권능이 올라간다!

.

.

.

처음이 어렵지, 쓰다 보니 빠르게 필요한 정보들이 쏟아져 나온다.

모두가 나와 같은 방식으로 시나리오를 깰 수는 없을 거다.

각자 가지고 있는 능력과 성향이 다르니까. 그래도 참고할 정도는 되겠지.

[쁘띠공듀]: 우리 소듕한 칭구들 겪은 거 서로 공유하는 거 알.죠?

-공듀님 가라사대.

-쁘띠!

-사랑!

-평화!

-서로 돕고 살자!

옳지 잘한다.

상위층은 개인이 겪은 정보를 모아 빅 데이터를 만들어 두는 게 좋다.

그래야 후발 주자들이 각 상황에 맞춰 어떻게 움직일지 고를 수 있지.

[냥냥펀치]: 공듀 떴다!

[니머리 탈모]: 어디 어디? 오오오오옹!

[정수리 핥짝]: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중간에 소식을 들은 멤버들이 들어와 떠들어 댔지만 애써 못 본 척했다.

그런 내게 들리는 커뮤니티 알람 소리.

-띠링.

이준석이다.

녀석도 별 탈 없이 등반을 이어 나가는 거 같았는데.

[이준석]: 공듀님 오셨군요! 이 얼마나 반갑고 기쁜 일인지!

[이준석]: 옥체 강녕하옵고 그 뜻을 널리 펼치사 우리를 빛으로 향하게 하옵시고…….

뭐라 뭐라 말을 해 대는 녀석.

못 본 사이에 사이비 교주라도 된 건가. 그래도 전에는 이 정도는 아니었던 거 같은데.

됐다. 가혹한 탑의 생태계에서는 정상인도 종종 이상한 행동을 하기 마련이니까.

얘는 처음부터 정상은 아니었던 거 같지만.

[이준석]: 그런데 공듀님… 이건 좀 보셔야 할 거 같습니다.

한참을 떠들던 이준석이 사진과 함께 장문의 메시지를 보내왔다.

숭배자? 아니면 다른 대형 길드의 방해가 들어왔나? 어쩌면 규모가 커지면서 연합 내에 문제가 생겼을 가능성도 있다.

아닌가. 옆에 노블 나이트랑 빅스타 길드의 정보라고 적혀 있는 것도 있다.

읽어 보면 알겠지.

난 찬찬히 내용을 살폈고.

“…이럼 안 되는데.”

와락. 얼굴을 구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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