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0화 83층 클리어
오염됐던 세상이 깨끗하게 정화되는 모습. 그것은 신비로운 동시에 경외감이 드는 현상이었다.
그것이 다른 재앙도 아닌 한 사람의 능력으로 이루어진 것이라면 더욱더.
혼돈의 파편이 되어야 했던 존재가 멸망을 거부하고 더 나은 세상을 만든 것은 그 자체로 의미 있지 않을까.
“오오.”
“이건… 아름답군.”
“어둠 끝, 빛이 찾아오리니. 이 또한 운명이로다.”
거인들과 상위 헌터, 멤버들 또한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봤다.
내가 델버튼을 정상화하는 동안 전투도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었다.
숭배자의 구심점이나 다를 바 없었던 그라함과 브레이가 죽었고, 남은 이들은 부상자들을 내버려 두고 도주했다.
뭐라 할 생각은 없다. 수뇌부가 당한 상황. 다른 중립 NPC와 달린 숭배자들은 한번 죽으면 되살아나지 못한다.
그건 다른 일반적인 NPC들도 마찬가지지만. 70층과 80층의 차이점 중 하나.
80층대의 NPC들은 본인들의 목숨을 걸고 움직인다. 그만큼 적극적인 동시에 상황에 따라서는 소극적으로 움직일 수도 있었으나 이번에는 전자였다.
“크읍! 이건 말도 안 된다.”
물론 모두가 옳은 선택을 하는 건 아니었지만.
만신창이가 되어 바닥에 주저앉은 녀석. 자이언트 폴리스의 자경단장.
놈은 숭배자가 아니다. 그레고리와 산맥 거인들과 마찬가지로 일반적인 NPC였지.
그동안 스스로의 정체를 숨기고 기회를 엿보았지만 최후의 순간 숭배자의 편을 들었다.
왤까. 나에게 기대하고 있다고 했던 말은 거짓말이 아니었던 거 같았는데. 내가 모습을 감추었기에 조급했던 걸까. 아니면 정체를 알아차린 숭배자들이 포섭한 걸까.
어느 쪽이든 자신이 한 행동의 결과는 책임져야 할 거다.
그의 손에 죽은 이들이 한둘이 아니니.
차갑게 식은 눈으로 녀석을 잠시 바라보다 고개를 돌렸다.
저놈은 알아서 처리하게 놔두자. 거인의 무덤에 박혀 있던 나보다는 언더 시티에 머물며 놈과 교류했던 이들의 배신감이 더 클 테니까.
“끝이 났군.”
난 이쪽에 더 집중하고 싶었다.
작게 중얼거리는 헬그레이트와 그를 붙잡은 델버튼.
델버튼의 혼돈을 흡수하느라 주변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전혀 인지하지 못했다.
솔직히 말하면 지금도 머리가 멍하다. 지독하기 짝이 없는 독성과 질병을 함유한 혼돈의 힘을 빨아들였으니 몸이 정상일 리가 있다.
팔은 비틀렸고, 혈관을 타고 썩은 피가 흘렀었다. 델버튼의 주술의 힘 덕분에 지금은 멀쩡한 거 같지만 후유증은 남았다.
내 몸이 내 몸 같지 않은 기분. 뭣대로 날뛰는 혼돈에 휘둘려 영혼 자체가 찌그러지는 느낌을 받았으니까.
간단하게 말하면 찝찝했고, 자세히 말하면 다시는 겪고 싶지 않을 정도로 끔찍한 경험이었다.
내부에 쌓인 혼돈을 길들이는 것만 해도 버거워서. 한동안은 회복의 시간을 가져야 할 거 같다.
그보다…….
“헬그레이트.”
“드디어 멀쩡한 모습이구나, 델버튼.”
두 고대 영웅의 재회를 잠시 바라본 난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미쳐 날뛰는 델버튼에게 매달리며 시간을 끌어준 녀석. 그 대가는 컸다.
기껏 부활시켜놨더니만 팔다리는 거의 녹았고, 몸통도 잔뜩 찌그러졌고 우그러들었다.
일반적인 생명체였다면 진작 죽고도 남았을 부상.
마법 생명체인 호문쿨루스라 하더라도 결코 가벼운 상처가 아니다. 냉정하게 말하자면 회생 불가라고 해야겠지.
어깨와 목을 타고 금이 크게 벌어져 있다. 사이사이로 에너지가 흘러내리는 게 보인다.
오래 못 버틴다. 강력한 에너지를 머금고 있는 아케인 젬이라도 이렇게 줄줄 새면 감당할 수 없으니까.
델버튼 또한 그 사실을 아는지 침울한 표정으로 오랜 친우를 바라봤다.
“네가 이곳까지 올 줄이야.”
“절친한 친구를 보기 위해 죽음에서 돌아왔다. 네놈이 그러했던 것처럼.”
“난 실패했다. 혼돈의 파편이 되어…….”
-찰싹
헬그레이트가 가볍게 델버튼의 뺨을 때렸다.
“오랜 시간이 지나면서 눈이 썩기라도 한 거냐. 네 모습을 봐라. 내 기억 속의 모습 그대로다.”
“헬그레이트.”
“난 이걸로 족하다. 더 오래 보지 못한 게 아쉬울 뿐. 술이라도 한잔하고 싶었는데.”
생명이 꺼져 가는 것을 느낀 헬그레이트가 희미하게 웃으며 눈을 감는다.
델버튼 역시 그 모습을 잊지 않기 위함인지 이를 악물고 그의 모습을 지켜봤고.
“흠흠, 그 분위기 잡는데 미안한데 좀 비겨줄래?”
난 헛기침을 하며 델버튼의 머리를 옆으로 밀었다.
누가 보면 진짜 죽는 줄 알겠네. 기껏 죽은 녀석 살려 왔더니만 말이야.
예상했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지만 헬그레이트의 몸이 망가질 때를 위해 준비한 게 있다.
애초에 너무 덩치가 컸다. 드워프와 현자 또한 같은 판단을 했고, 혹여나 무게를 이기지 못하거나 과도한 출력으로 망가질 것을 우려, 안전장치를 만들었으니.
“이름하여 긴급탈출 넘버 원.”
-빠각
“헬그레이트으으으으!”
망설임 없이 헬그레이트의 심장 부근을 꿰뚫었다.
그 모습을 본 델버튼이 비명을 지른 건 덤.
아따 목청 좋네. 방금 목소리 때문에 청각 세포가 100마리는 죽었을 거다.
아무튼.
“뭘 놀래고 있어. 그냥 버튼 누른 거구만.”
일반적인 버튼은 아니고 제작자인 나의 마력 패턴에 반응해 활성화되는 특수한 버튼이다.
치이이이.
연기와 함께 헬그레이트의 몸이 풀어진다. 관절을 시작으로 생겨나는 실선. 그것이 벌어지며 금속으로 되어 있는 몸이 분리되었고.
“다시 태어난 걸 축하한다, 헬그레이트 주니어.”
“이건.”
그 안에서 기존보다 훨씬 작은 사이즈의 헬그레이트가 빠져나왔다.
말이 작은 사이즈지 지구인으로 치면 그리 작지도 않다.
나보다 좀 큰 정도? 그래, 탈모맨 정도라고 하면 되겠다.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몸을 내려다보는 녀석을 보며 작게 손뼉을 쳤다.
“그게 기본 네 모습이야. 네 덩치가 워낙 컸어서 임시로 크게 만든 거였지. 일종의 외갑이라고 해야 하나.”
종족이 다른 만큼 갑자기 신체가 바뀌면 부작용이 일어날 수 있어서 만든 장치.
본체는 안에 있고 다른 부차적인 장치를 붙여 거인 사이즈로 키워 놓았다고 보면 된다.
이후에 어느 정도 적응하면 이 상태로 만들려고 했는데 어쩔 수 없지 뭐, 다 망가졌는데.
“아무튼. 작아지기는 했지만 적응하면 괜찮을 거야. 애초에 그편이 출력이 더 좋기도 하고. 에너지를 효율적으로 쓰거든.”
무게와 사이즈가 줄어든 만큼 물리력은 좀 떨어질지 몰랐지만, 보다 원활하게 움직일 수 있을 거다. 속도도 더 빠르고.
아케인 젬도 오래 쓸 수 있으니 부담감이 적을 거다.
이전에는 영혼 형태라 상관없었지만 호문쿨루스가 되면서 지금은 NPC로 인정받았다. NPC로서의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것.
이걸 좋다고 해야 할지 나쁘다고 해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영혼일 때보다는 덜 심심하겠지. 적어도 밖에 돌아다닐 수는 있으니까.
-꾸욱
난 바닥에 내팽개쳐져 있는 헬그레이트의 도끼를 주웠다.
어찌 됐든 부활을 시켜 준 대가로 받은 거니까. 나중에 팔든지 할 거다. 내가 사용하기에는 너무 커서.
듣자 하니 지금은 구할 수 없는 과거의 광물로 만들어졌다고 한다. 그러니까 거인이 마음대로 휘둘러도 안 부러지고 버티는 거지. 녹여서 사용해도 되겠다.
“이건 가져간다.”
“크윽, 아쉽지만 어쩔 수 없지.”
헬그레이트가 잠시 도끼를 바라봤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약속은 약속. 대신…….
“받아.”
보물 주머니에서 쓸 만한 도끼를 꺼내 녀석한테 줬다.
“덩치도 작아졌으니 이쪽이 더 사용하기 편할 거야. 능력치 자체는 별거 없는데 자동 복구 옵션이 달렸으니 오래 쓰기에는 좋지.”
헬그레이트가 감동 어린 눈빛을 보낸다.
다른 이유가 있는 건 아니고, NPC가 된 기념이다.
83층의 새로운 NPC의 탄생. 비록 전성기 때의 힘을 내지는 못한다 하지만 델버튼과 함께 탑을 올랐던 이다.
거인계에 대해 아는 것도 많을 테고 숭배자에 대한 적의도 크다.
이후 다른 등반가들이 올라오면 도움을 주겠지. 이건 그래, 일종의 뇌물이다.
고개를 들어 따뜻한 햇볕이 들어서는 언더 시티와 자이언트 폴리스를 내다봤다.
언더 시티를 통합하며 인연이 생긴 NPC들이 보인다.
지쳐 있었지만 얼굴에는 화색이 돌고 있다.
녀석들이 나를 바라본다.
“이블아이.”
“기어코 해냈군. 믿고 있었다.”
“크흑! 젠장! 할 줄 알았다고!”
저마다 소리를 지르며 환호하는 이들.
녀석들의 감정에 반응한 것일까.
[거인족의 뜨거운 마음!]
[칭호, 거인의 친구가 생성됩니다.]
알림이 떠올랐다.
이야, 이제는 거인의 친구인가? 탑에 들어오고 인싸가 다 됐다.
피식 웃으며 알림창을 지웠다. 나도 녀석들에게 손을 흔들었다. 다들 고생 많았고.
“잘 지내라. 숭배자 놈들 보이면 좀 때려 주고.”
한 명씩 만나 인사를 나누고 싶지만 그럴 수는 없다.
[챕터Ⅲ- 델버튼 종료]
[대기실로 이동합니다.]
탑은 그런 세세한 배려까지는 해 주지 않으니까.
챕터 종료와 함께 시야가 멀어진다.
* * *
검게 물든 공간. 전송 대기실에 도착했다.
마지막 챕터까지 끝냈음에도 이곳에 온 이유는 하나. 받아야 할 보상들이 있다.
덤으로.
-촤르르르륵
멸망에서 크게 벗어난 거인계의 단면도 볼 수 있고.
허공에 떠오른 화면. 자이언트 폴리스와 언더 시티의 풍경이 비친다. 이어서 다른 지역들도.
그걸 배경 삼아 난 위를 올려다봤다.
83층 첫 시나리오를 깼다. 70층대에서도 느꼈지만 첫 층 보상은 챕터가 끝나고 들어온다.
지금까지 받아온 첫 층 클리어 보상은 내성 스킬들. 이번에는 뭘 줄지 기대감이 생겼고.
[83층 클리어]
[시나리오, 거인의 시대가 종료됩니다.]
[보상이 지급됩니다.]
[서버 최초! 델버튼을 막아 냈습니다!]
[거인계에 새로운 빛이 스며듭니다!]
[혼돈 수치 +50점]
[질병 내성(AA) 스킬북을 획득합니다.]
“이게 뭐야, 와.”
“그에엑.”
내가 잘못 본 거 아니겠지? 50점이다. 자그마치 50점.
그동안 10점, 20점 받았던 걸 생각하면 두 배가 넘는 점수다.
층이 올라갈수록 난이도도 올라가지만 얻을 수 있는 혼돈 수치도 높아지는 건가.
입꼬리가 올라간다. 그래, 이 정도는 줘야지. 개고생했는데.
특히나 이번 시나리오는 멤버들과 다른 등반가들의 도움도 있었지만 내가 메인이었다.
실질적으로 혼돈을 정화할 수 있는 건 나뿐이었으니까.
다르게 말하면…….
“아직 다른 녀석들은 혼돈 수치가 100점을 넘기지 못했다는 거 아닐까.”
혼돈에 대해 알려진 게 많지 않아 잘은 모르겠지만 100점을 넘기면 할 수 있는 게 많다.
혼돈의 파편에게 유의미한 타격을 입힐 수 있고, 재앙의 규칙에 저항할 수 있으며, 100층 입장 조건도 채우게 된다.
짐작이기는 하지만 혼돈을 컨트롤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조건인 모양이고.
멤버들도 아직인 거 같으니 다른 녀석들은 말할 필요도 없겠지.
그건 그거고.
“질병 내성이라. 이게 있기는 했네.”
망설임 없이 바로 익혔다.
등반 초기, 혹시나 병에 걸릴까 위생에 나름 신경을 썼었다.
헌터라고 병에 걸리지 않는 건 아니라서.
시나리오에 어울리는 보상이기는 하다. 이번에는 내가 있어서 괜찮았지만 다른 사람이었다면 도박과 질병으로 이루어진 델버튼을 상대했을지도 모르니까.
뭐든 내성 스킬은 많을수록 좋은 법.
기본적으로 받을 건 받았고. 이제 다른 것들을 확인해 볼 생각이다.
오랜만에 퀘스트를 해서 말이지.
[잊혀진 영웅에게 평화를- 돌발 퀘스트 클리어!]
[보상이 지급됩니다!]
개인적으로 제법 훌륭하게 완수한 거 같은데 헬그레이트는 어떻게 생각했으려나.
난 가만히 소파에 앉아 기다렸고.
-파아아아앗!
“오오오오?”
화려한 이팩트와 함께 떨어지는 보상을 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