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탑에 갇혀 고인물-469화 (468/740)

469화 하늘 호수의

내게 오는 델버튼. 어딜 봐도 정상이 아니다.

처음 프램버그에서 녀석을 마주했을 때의 모습으로 바뀌고 있는 상황. 혼돈의 파편이 되고 있다.

녀석을 오염시키는 혼돈을 흡수하기는 했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던 걸까.

그렇겠지. 고작 그거 한 번으로 막을 수 있는 거였다면 혼돈의 파편이 위험할 리가 있나.

그나마 다행인 점이 있다면.

‘아직 완전히 오염되지는 않았어.’

흐릿하기는 하지만 자아를 유지하고 있다. 스스로도 저항하고 있을 거다.

권능으로도 보지 않았던가. 거인계를 수호하기 위해 희생한 존재라고. 헬그레이트도 말했었다. 누구보다 이 세계를 지키고 싶었던 인물이라고.

내게 다가오던 녀석의 눈이 순간 돌아간다.

-푸화아아아악!

붙잡고 있던 이성의 끈이 순간적으로 끊긴 걸까.

놈의 몸에서 뿜어져 나온 시커먼 액체가 의지를 가지고 주변에 있는 거인들을 덮친다.

“피해!”

-콰아아아앙!

그레고리를 향해 날아가는 액체 쪽으로 파이어 밤을 터트렸다.

순간적인 고온에 증발해 버리는 액체. 고약한 독성을 지닌 연기가 피어올랐고, 그것만으로도 그레고리가 입에서 피를 내뱉었다.

제대로 닿지 않았음에도 즉각적으로 반응이 올 정도의 독성.

주변에 얼쩡거리던 이들의 피부에 수포가 올라왔으며, 누군가는 고름을 흘리며 고통을 호소했다.

“제길.”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난 저게 뭔지 안다.

여러 차례. 몇 번이었는지 기억도 안 날 정도로 많이 당해 봤으니까.

프램버그의 드워프들을 대신해 몇 번이고 온갖 질병과 독에 노출됐었다.

얼마나 지독한 것인지, 어떤 고통이 동반되는지 나보다 잘 아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직접 당한 사람들은 다 죽었을 테니까.

“크윽, 큽!”

델버튼이 머리를 붙잡고 휘청인다. 뒤집혔던 눈이 원래대로 돌아온다.

세차게 흔들리는 동공. 혼돈의 영향력이 머리까지 끼쳤다. 시스템도 그 사실을 알고 있다 이건가.

[혼돈의 파편 탄생이 머지않았습니다.]

[거인계를 뒤덮은 멸망의 기운이 한층 짙어집니다.]

혼돈의 파편. 멸망을 향해 질주하는 세계에서 볼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존재.

그 어떤 몬스터도, 그 강한 재앙조차도 한발 물러서는 멸망의 의지 그 자체.

그것이 깨어나려 하고 있었다. 99층까지 올랐던 이들조차 끝까지 해치우지 못한 괴물들.

다르게 말하면.

“헬그레이트!”

“그리로 가마!”

지금 막지 않으면 이번 챕터는 망한다.

내 외침에 그라함을 몰아붙이던 헬그레이트가 자리에서 이탈했다.

지금 숭배자가 중요한 게 아니다. 숭배자도 충분히 위협적이기는 하지만 혼돈의 파편은 차원이 다르다.

당장 NPC고 나발이고 이곳에 있는 등반가들도 전멸할 수 있다.

챕터를 망치는 건 나중의 이야기.

‘시스템의 판단하에 일이 커지기 전에 챕터가 종료되면 차라리 다행이지.’

그게 아니라면? 그때부터는 답이 없다.

지금까지 봐 온 시스템이라면 델버튼이 완전한 혼돈의 파편이 되기 전까지는 챕터를 종료시키지 않을 거다.

그럴 거였으면 전장에 떨어진 시점에서 끝났지.

아직 완전히 혼돈의 파편이 되지 않았지만 숭배자들을 벌레 잡듯이 잡고 있다. 혼돈의 파편이 되기 전에 얼마나 죽을지 알 수 없는 상황.

“어서 가! 이쪽은 우리가 알아서 할게!”

“죽지 말라고!”

“나만 믿어! 끝장 보고 와!”

상황을 눈치챈 핥짝이와 냥펀, 탈모맨이 소리쳤다.

흘낏 바라보니 수세에 몰렸던 그라함이 자세를 고쳐잡고 있었고, 죽은 줄 알았던 브레이 역시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저만한 상처를 입었는데 안 죽었다고? 어이가 없을 지경이었으나.

[그라함이 축복을 내립니다.]

[생명을 불태우는 전사의 주술이 깃듭니다!]

그라함이 수작을 벌인 거였다.

마법과 기술을 벗어난 또 다른 힘, 주술.

부족마다, 개인마다 종류가 다른 건 알고 있었지만 저런 것도 있었나.

효과만 보면 불굴 스킬의 상위 호환 같은데.

검에 베였던 목과 탈모맨에게 당했던 상처에서 푸른 불꽃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불길이 꺼지는 그 날까지 난 죽지 않는다.”

-투두둑

대검을 쥐고 일어서는 브레이와 놈에게 맞서는 탈모맨.

그라함과의 결전을 준비하는 핥짝이와 냥펀.

다른 숭배자들을 상대하고 있는 상위 헌터와 언더 시티 연합.

팽팽한 힘겨루기가 진행되는 가운데.

“정신 차려라, 델버튼!”

-콰아아아아앙!

헬그레이트가 델버튼의 얼굴에 주먹을 꽂았다.

크게 기우는 몸. 거기서 멈출 생각이 없는지 헬그레이트의 주먹과 다리가 쉬지 않고 움직였다.

친우이기 때문일까. 쥐고 있던 도끼를 사용하지 않았으나.

“머리가, 아프다. 다 꺼져라.”

-푸화아악!

그건 실수였다.

델버튼이 내민 손에서 온갖 질병과 독이 쏟아져 나왔으니까.

반응하기 힘든 속도. 피할 수 없는 범위.

헬그레이트의 몸에 검은 액체가 달라붙으며 타들어 갔다.

치이익. 기분 나쁜 소음과 함께 피어오르는 연기.

“크으읍!”

유기물로 이루어진 생명체였다면 이번 일격에 상반신 전체가 사라졌을 거다.

혹여 녹아내리지 않았다 한들 수포가 차오르거나 피부가 벗겨지거나 했겠지.

하지만 지금의 헬그레이트는 호문쿨루스. 마법 생명체였으며, 몸은 뼈와 근육이 아닌 쇳덩이와 마법 합금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피 대신 아케인 젬에서 뻗어 나오는 에너지가 돌았으며, 피부는 마법 코팅으로 도배되어 있다.

프램버그의 역작. 마도공학의 결정체.

“나다! 헬그레이트! 네놈과 함께 탑을 올랐던 나를 잊었을 리가 없다!”

독액을 털어 낸 헬그레이트가 도끼를 내려찍었다.

주먹으로 안 되면 더 강한 충격을 줘서라도 정신 차리게 만들겠다는 의지였으며.

“덕춘아, 가자!”

“그에엑!”

나 역시 헬그레이트를 도와 녀석의 정신을 되돌리기 위해 참전했다.

이곳에서 혼돈을 흡수할 수 있는 건 나 혼자. 델버튼도 그걸 알기에 나를 찾아오지 않았던가.

-파아앙!

다리에 힘을 줬다.

헬그레이트가 시간을 끌어 주고 있지만 여전히 델버튼은 정신을 못 차린 상태.

지금도 눈이 뒤집혔다 돌아오길 반복하고 있다.

아직 조금이라도 제정신일 때 해결해야 한다. 파편화가 종료되면 답이 없다.

“그에엑!”

[혀놀림(S)]

덕춘이가 길게 혀를 뺐다.

헬그레이트가 도끼를 휘두르며 발로 걷어차는 타이밍, 덕춘이가 델버튼의 발목을 붙잡았고.

“그에에?”

“잘했어, 덕춘이! 이걸 노렸어!”

절대적인 물리력을 이기지 못한 덕춘이가 델버튼 쪽으로 날아갔다.

망설임 없이 덕춘이를 붙잡고 델버튼을 향해 몸을 날렸다.

중간에 덕춘이가 눈으로 욕을 한 거 같기는 하지만 무시했고 놈의 지척까지 닿는 타이밍.

[파이어 밤(S) Lv.10+]

폭발을 일으켜 방향을 틀었다.

나를 노리고 뿜어 낸 독액이 엉뚱한 곳을 뒤덮었으며 우측으로 돌아간 나는…….

“살짝 따끔할 거다!”

-뻐어억!

그대로 델버튼의 얼굴에 주먹을 날렸다.

이미 혼돈의 파편화가 진행 중인 상태. 원래라면 제대로 된 타격도 줄 수 없겠지만.

[혼돈 수치가 일정 수준을 넘어섰습니다!]

나 또한 혼돈 수치는 차고 넘친다. 혼돈의 파편만큼은 아닐지라도 혼돈 자체는 90층대를 올랐던 어지간한 NPC보다 높다는 뜻.

혼돈의 힘으로 대부분의 대미지를 무시하던 녀석의 머리가 돌아갔고.

-꽈아아악!

망설임 없이 양손으로 귀를 붙잡았다.

“그아아악!”

비명을 지르며 몸을 털어 내는 녀석.

고개를 흔들며 팔을 휘둘렀으나 악착같이 버텼다.

여기서 나가떨어질 수는 없지.

“내가 잡고 있겠다! 서둘러!”

헬그레이트 또한 온몸을 던져 델버튼을 붙잡았다.

질병과 독이 뒤섞인 가스와 액체가 헬그레이트의 몸을 부식시킨다.

아무리 마법적인 처리를 했다 한들 무시할 수 있는 독성이 아니라는 것.

지금부터는 내가 어떻게든 해야 한다.

-파하아아앗!

일차적으로 신성력, 이어 마기를 운용해 델버튼에게 흐르고 있는 혼돈 에너지를 끌어당겼고.

“덕춘아, 서포트 부탁한다.”

“게에엑.”

-꾸드드득!

그대로 혼돈을 흡수하기 시작했다.

까드득. 나도 모르게 이를 악물었다.

검은 비를 정화했을 때와는 차원이 다른 수준이다. 훨씬 농도 짙은 혼돈이 혈관을 타고 흘러든다.

잘게 부순 모래가 근육과 핏줄을 긁으며 들어오는 기분.

단순한 착각이 아닌지 손가락을 시작으로 피부가 찢어지며 검은 피가 흘러내렸다.

이 정도로 끝났으면 좋으련만.

“으그그극!”

뼈가 시리다. 빌어먹을 정도로 지독한 질병과 독이 침투해 온다.

단순한 혼돈이 아니다. 파편화가 되며 변형된 기운이지.

코와 입에서 뜨끈한 뭔가가 느껴진다. 피? 시커먼 피가 툭툭 떨어진다. 내부에서 썩어 버리기라도 한 건가. 뱉어 낸 핏물에 알 수 없는 뭔가가 섞여 있다.

기도가 부어올라 숨 쉬는 것조차 버거웠으며, 뜨겁게 올라오는 열과 극한으로 찾아오는 추위가 신경을 찌른다.

온몸이 비틀리는 감각. 일전 세계숲 시나리오에서 느낀 크리쳐와 비슷하면서도 더 강력한 고통.

-쿠웅! 콰아앙!

“크하아압!”

진동이 거세진다.

미친 듯이 날뛰는 델버튼에, 그를 붙잡고 있던 헬그레이트의 몸이 찌그러지고 구겨진다.

관절이 부서져 덜렁거리는 팔뚝을 물어서라도 잡은 손을 놓지 않았지만 헬그레이트가 언제까지 버텨 줄지 알 수 없다.

온몸을 헤집는 날카로운 통증과 쉴 새 없이 들썩이는 몸.

잠깐이라도 긴장을 놓으면 정신이 날아갈 거 같은 순간 덕춘이가 합세했다.

“그에에.”

내게 달라붙어 함께 혼돈을 흡수하는 녀석.

찰나지만 여유가 생겼다. 미친 듯이 내부로 파고들던 혼돈이 분산되었고, 난 그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뿌드드득!

델버튼처럼 비틀려 버린 팔.

끔찍한 고통이 척추를 타고 올라왔지만 견뎠다. 오히려 정신이 들며 컨트롤을 되찾았다.

오직 안으로 스며드는 혼돈에만 집중했고.

“으아아아아악!”

비명과도 같은 기합과 함께 델버튼의 혼돈을 내가 가진 혼돈에 병합하기 시작했다.

변형된 기운 그대로는 흡수할 수 없다. 가뜩이나 불규칙하게 날뛰는 기운이다. 성질까지 제멋대로라면 통제는커녕 몸이 버티질 못한다.

조금씩 속도를 늦췄다. 내가 감당할 수 있을 정도로. 격렬하고 사방으로 튀어 나가려 하지만 큰 방향성만큼은 유지하도록.

고도의 집중력. 온 신경이 내부로 향한다. 밖에서 누가 싸우는지 소리를 지르는지 도저히 알 수 없다.

절벽 사이에 이어진 밧줄 위에서 줄타기하는 기분. 이렇게까지 나 스스로에게 집중한 적이 있었던가.

잡념마저도 잊을 정도로 몰입한 지 얼마나 됐을까.

뭔가 메시지가 떠올랐던 것도 같았지만 보지는 못했다. 얼마나 긴장했는지 쥐었던 주먹조차 펴지 못하고 가는 숨을 이어 나갈 때.

-툭

등 뒤로 단단하지만 따뜻한 감촉이 느껴졌다.

“이블아이, 고생했다.”

“…델버튼?”

손가락으로 내 등을 두드린 녀석은 델버튼. 검게 비틀어졌던 얼굴이 원래대로 돌아왔다.

지친 기색이 역력했지만 미미하게 미소를 짓고 있었고.

“신세를 졌구나. 약소하지만 보답하지.”

델버튼이 위로 주먹을 뻗었다. 선명한 푸른색을 띠는 문양이 팔뚝을 타고 생성된다. 주술.

-찰랑

-푸아아악!

녀석이 누운 자세 그대로 주먹을 바닥에 내리쳤다.

고막이 터질 듯한 굉음. 혼돈을 하도 집어삼켜서 그런가 순간이지만 물소리를 들은 것도 같다.

뭘 한 걸까? 가늠조차 안 되는 기행에 눈을 깜빡인 것도 잠시.

“그에에.”

덕춘이가 내 팔을 잡아당기며 뒤를 가리켰다.

삐걱거리는 목을 돌려 전장을 바라봤고.

“빌어, 먹을.”

땅에서 솟아난 물줄기가 그라함을 꿰뚫은 것을 볼 수 있었다.

하나의 보석과도같이 청아한 빛을 띠며 나무처럼 위로 뻗어 나가는 물줄기.

축복을 내린 주체가 당했기 때문일까. 탈모맨과 혈전을 벌이던 브레이의 상처를 감싸고 있던 불꽃이 꺼졌다.

그건 시작에 불과했다.

-드드드드드드!

-쏴아아아아아!

중력을 역행하듯 바닥에서부터 물방울이 올라와 하늘로 올라갔다.

건물과 바닥, 나무와 짐승을 뒤덮었던 검은 비와 핏줄기가 함께 위로 솟아오른다.

이 세상이 더러운 것은 모두 없애 버리려는 듯 한참이고 오랫동안. 검게 물든 구름마저 지워질 때까지.

[SSS급 권능, 별을 주시하는 눈이 발휘됩니다.]

-츠즈즈즈

하늘이 본래의 색을 되찾는 그때, 권능이 반응을 보였다.

대상은 델버튼.

[델버튼]

-고대의 영웅, 하늘 호수 부족의 델버튼.

-오랜 과거에 존재했다던 신비한 부족의 일원입니다.

-하늘로 솟는 소나기를 본 이들은 입을 모아 이야기합니다.

-세상의 더러움이 모두 씻겨 내려간 것만 같다고.

그는 더 이상 혼돈의 파편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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