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6화 가자
난 물끄러미 헬그레이트를 바라봤다.
영혼체. 그것도 현실에 영향을 줄 정도로 강력한 영체였다.
본인이 영향력을 행사하려는 게 아니었음에도 지물에 영향을 줬는데 육체를 가지면 얼마나 강력할까?
모르긴 몰라도 다른 NPC들과 비교해도 전혀 꿇리지 않는 힘을 가지고 있지 않을까?
물론 영격이 강하다고 육체적인 능력이 강한 건 아니다. 다만 영격이 강할 정도면 어느 분야로든 이치를 깨우치고 선구자라고 불릴 정도의 위치는 되었다는 거다.
내가 보기에 헬그레이트는…….
‘육체적인 부분에서도 전혀 밀리지 않을 거 같단 말이지.’
강한 정도로 따지면 상위층에 위치한 NPC들과 견주어도 부족함이 없을 거다.
왜냐 영격이 높은 존재들을 이미 만나 봤으니까.
대표적인 녀석들이 영물. 당장 옆에 있는 덕춘이를 봐도 그렇고, 재앙을 상대할 때 만났던 녀석들도 그렇다.
쌍두귀도 잡기는 했지만 전투를 통해 잡은 건 아니었다. 녀석이 가지고 있는 규칙을 깨 버리며 잡은 거지.
월광의 옥토 선생?
‘그 녀석은 사실상 재앙급을 넘어섰고.’
클리어 조건과 녀석의 약점이 있어서 잡기는 했다. 아니, 그것도 내가 차원 상점을 열지 못했다면 실패했겠지.
존재 자체가 수인의 조상 격 되는 녀석이기도 하다. 한 종의 시초가 되는 것. 그건 어떤 의미로든 대단한 일이었고 단순 전투력만 따졌을 때는…….
‘상위 헌터들도 어쩌기 힘들어. 나랑 같은 층에 있는 이들이라고 할지라도 말이지.’
이게 내 객관적인 판단이다.
과장을 보탠다면 혼돈의 파편과도 비교할 수 있다.
세계까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나라 몇 개 정도는 파괴할 힘이 있었으니까.
시간은 좀 걸려도 절대 무시할 수준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내 앞에 선 헬그레이트는?
“이봐.”
“거지 같은 세상. 수많은 생명이 스스로를 불살라 멸망에 거부했거늘!”
“혼자 떠들지 말고 귀신 양반, 야!”
“내가, 음? 불렀나? 뭐 하는가. 어서 퀘스트를 수락하지 않고.”
이거 골 때리는 놈일세.
지가 실컷 떠들어 놓고는 나보고 뭐라 하다니.
그냥 퀘스트를 무시할까도 생각했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내 예상대로 흘러간다면 녀석은 엄청난 전력이 될 테니까.
“이거, 델버튼을 막는 건 어떤 방법을 사용해도 상관없는 거지?”
“제한은 없다. 내가 원하는 건 델버튼의 평화 그거 하나뿐이니까. 네놈은 모를 것이다. 나와 친우가 얼마나 많은 고생과 역경을 넘어 이 세상을 지키려 했는지.”
“그건 별 관심 없어. 자기 세계 구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이 한둘인가.”
당장 나도 그렇고 다른 녀석들도 비슷할 거다.
물론 체감하는 건 편차가 있을 수 있다. 등반가라고 다 같은 경험을 하는 건 아니니까.
지금 생각해 보면 상위층에 배치된 층들은 그 감정을 느끼라고 만들어 둔 거다.
멸망에 이르는 세계가 어떻게 되는지, 이들이 멸망에서 벗어나기 위해 어떻게 행동하는지.
나야 이 전에도 멸망한 세계의 단면을 봤기에 알고 있지만 아닌 사람들도 있을 테니.
“수락하지.”
선언과 함께 퀘스트가 수락된다.
흡족한 표정을 보이는 녀석. 벌써 좋아하면 안 될 텐데.
내 속내를 아는지 모르는지 헬그레이트가 입꼬리를 올린다.
“하하하하! 그래. 내 뜻에 따라줄 줄 알았어!”
“그럼 그럼. 그런데 말이지. 이게 다 델버튼을 위해서 그러는 거잖아, 그치?”
“그렇다. 델버튼은 충분히 평화를 만끽할 자격이 있으니.”
“맞는 말이야. 네 말대로 세계를 위해 헌신했다면서.”
슬쩍 운을 떼자 녀석이 호응한다.
“녀석과 함께 많은 일을 벌였지. 미친 짓도 있었지만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다 추억이군. 알아주는 이들은 없었지만 우리는 최선을 다했다.”
“진짜 최선을 다했어?”
“장담하지.”
“아니, 넌 아직 최선을 다 안 했어.”
“뭐라?”
심기가 불편해진 녀석이 눈썹을 찡그린다.
가뜩이나 험상궂은 녀석이 인상을 쓰니 이건 뭐. 애가 보면 울겠다.
아무튼 하던 말은 계속해야지.
“이렇다 저렇다 말은 하지만 결국에 다 말뿐이구만그래. 나한테도 해 달라고나 하고 말이야, 어? 나였으면 죽어서도 도우러 갔다!”
“네 이노오오옴! 뚫린 입이라고 아무렇게나 지껄이는……!”
“닥쳐! 네가 할 수 있는 게 더 있다!”
결국 노성을 터트리는 녀석에게 소리를 질렀다.
어이가 없는 건지 당황한 건지 헬그레이트가 순간 입을 다문다.
“비록 육신을 잃었으나 영혼까지 썩지는 않았을 텐데! 죽어서도 눈을 감지 못 한 건 그 때문이 아닌가!”
“아, 아니. 그건 그냥 내가 이곳에 잠들어서 있는 건데.”
“변명 따위는 필요 없어! 그렇게 델버튼을 위한다면 일어서라. 되살아나 직접 녀석을 막아라!”
녀석에게 영혼석을 내밀었다.
“내가 도와주지. 나와 다른 NPC들이 힘을 합치면 널 부활시키는 것도 불가능은 아니야.”
“부활?”
“그래. 물론 쉽지는 않겠지. 방법이 있다.”
헬그레이트에게 부활 사업에 대해 이야기를 해 줬다.
처음에는 뭔 개소리인가 싶던 녀석도 시간이 지날수록 감탄하기 시작했다.
“오오! 그런 방법이!”
“손해가 이만저만이 아니지만 네 뜻이 좋아서 해 주는 거야, 알겠어?”
이게 다 순수하게 녀석을 도와주고 싶어서 그런 거다.
암, 그렇고말고.
그렇다고 무작정 도와주기만 하면 녀석이 부담스러울 수도 있겠지?
“흠흠, 물론 사업을 하는 이들에게 부탁하려면 소소한 성의도 필요해. 다 쓰러져 가는 무덤이지만 뭔가 쓸 만한 게 있겠지.”
어디 보자. 퀘스트 보상은 보상이고 따로 받아 갈 만한 게 없으려나.
“…네놈 약간 눈이 돌아간 거 같다.”
“에헤이, 아냐. 내가 얼마나 눈이 초롱초롱한데. 저게 좋겠군.”
덥썩, 관 뒤에 숨겨져 있던 거대한 도끼를 꺼냈다.
나도 장비를 여러 번 제작해서 어느 정도 보는 눈이 생겼다. 척 보기에도 범상치 않은 물건.
“잠깐! 그건 내가 아끼는 애병!”
“떼엑! 지금 이깟 무기가 중요해? 새 삶을 살 수 있게 됐는데!”
“아니, 그렇기는 하다만.”
“시끄럽고 얌전히 영혼석에 들어가 있어. 그래야 작업을 시작할 수 있으니까.”
죽은 녀석이 왜 이리 물욕이 많은지, 에이잉.
작게 혀를 차자 입을 벙긋거리던 헬그레이트가 비장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인다.
“좋다. 너만 믿고 있겠다.”
[고대 거인족 영웅, 위대한 전사!]
[헬그레이트가 영혼석에 깃듭니다!]
-슈우우우욱
진작에 이럴 것이지.
영혼이 수정 안으로 빨려 들어간다. 이걸로 시간은 벌었다. 혹시 모를 의심도 피할 수 있고.
“이제 어쩐다.”
턱을 쓸어내렸다.
부활 사업 자체는 거짓말이 아니지만 어디까지나 협업으로 이루어지는 일이다.
애초에 내가 맡은 역할은 홍보와 사업에 참여할 영혼을 찾는 것 정도고. 실질적인 일은 호문쿨루스인 제네타와 52층에 있는 현자와 오델토가 했으니까.
“몰라, 어떻게든 되겠지.”
안 되면 되게 하라.
다행히 내게는 도움을 줄 사람들이 있다. 몸체야 프램버그에 만들어 달라 하면 그만이고, 필요한 약물은 내 지식과 히든 가든의 레시피를 이용하면 된다.
주술적인 부분이 살짝 애매하기는 한데.
“이건 현자한테 방법을 알려달라 하면 될 거야.”
현자를 직접 데리고 오는 건 불가능하지만 갈매기를 통해 통신하는 거 자체는 가능하니까.
시간이 좀 걸리고 예상보다 조악한 결과가 나올지도 몰랐지만 어떻게든 할 수 있을 거 같다.
그럼.
“해 보자.”
난 곧장 작업에 들어갔다.
* * *
-띠링
-띠링
커뮤니티 알람이 울린다.
거인의 무덤에 들어온 지 얼마나 됐을까.
창문 하나 없는 곳에서 계속 있다 보니 시간 감각이 없어진다.
적잖은 시간이 지난 것은 분명했다. 그에 따라 사건·사고도 있었고. 물론 내가 겪은 건 아니다.
[정수리 핥짝]: 야! 이 새꺄! 언제 오냐고!
[냥냥펀치]: 사회의 악! 희대의 쓰레기! 쁘띠한 공듀! 퉤퉷!
[니머리 탈모]: 야야, 이번에는 좀 힘들긴 했다? 그치?
[정수리 핥짝]: 조금? 쪼오오오금? 힘이 남아돌지? 어? 내가 더 굴려 줘?
[냥냥펀치]: 쫄쫄이 넌 죽었음 ㅇㅇ.
[니머리 탈모]: 왜 나한테 그래; 사라진 건 공듄데.
[정수리 핥짝]: 너도 똑같아. 머리가 사라졌… 음, 아픈 곳을 찔렀네. 미안.
[니머리 탈모]: 아니 아니. 그렇게 말하니까 더 이상하잖아… 핥짝아?
먼저 숭배자들이 나를 거인의 무덤으로 유인한 건 맞았다.
갑작스럽게 내가 사라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숭배자들이 덤벼 왔다고 하니까.
관리자들 또한 무덤을 수호하기 위해 나섰고 꽤 큰 싸움이 벌어졌었다고.
다행히 핥짝이와 그레고리, 수호자들이 힘을 합쳐 물리친 후 탈출했다고 한다.
그 와중에 혼란을 틈타 예언이 그려진 벽화를 조작하기까지.
핥짝이, 대단한 녀석. 기어코 이걸 해내네.
“혹시나 하기는 했지만 진짜 양동 작전일지도 몰랐고.”
“그에엑.”
사고는 무덤에서만 벌어진 게 아니었다.
우리가 떠난 사이, 언더 시티와 자이언트 폴리스에도 일이 있었다.
냥펀의 주도하에 체계적으로 언더 시티를 도시화시켰고, 나름 발 빠르게 새롭게 유입된 이주민들을 흡수할 수 있었다.
델버튼은 역병과 도박으로 만들어진 존재.
지금은 제정신을 유지하고 있지만 세계가 병들면 언제 혼돈의 파편이 될지 몰랐다.
그것을 예방하기 위해서라도 이주민들 사이의 병을 고치고 위생 상태를 점검하며 치안 수준을 높여야 했다.
냥펀이 잘해 주고 있던 와중에 숭배자들에게 사주받은 걸로 보이는 이들이 난동을 부렸다나.
“거기에 숭배자들도 섞여서 공격을 해 댔고 말이지.”
더럽게 나오는 건 여전하다.
가뜩이나 나와 핥짝이가 빠진 상황이라 위험할 수도 있었으나 하나로 통합된 언더 시티와 연합 사람들, 상위 헌터까지 있어서 물량으로도 전력으로도 밀리지 않을 수 있었다.
냥펀과 탈모맨이 활약한 건 말할 것도 없고.
특히나 탈모맨 녀석, 골드 등급 시니어랑도 붙었다는 거 같던데.
다행히 크게 다치지는 않았다고 한다. 녀석도 전세가 불리해지자 굳이 탈모맨을 상대하지 않고 모습을 감추었다고.
여기까지만 보면 무난하게 지나간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좀 달랐다.
‘이후에도 간헐적으로 공격이 이어졌다고 했지.’
외부인으로 위장한 놈들이 들어온 경우도 있었고, 비를 피해 도망친 강력한 괴물이 덤벼들기도 했단다.
기껏 관계를 회복한 자이언트 폴리스도 계속되는 공격에 신경이 날카로워진 상황.
설상가상.
‘델버튼이 움직이고 있어.’
자이언트 폴리스를 지나쳤던 먹구름이 되돌아오고 있었다.
정화한 지 얼마 안 된 거 같은데 다시 시커멓게 물든 비구름이.
그때를 노리는 거니 숭배자들 또한 활발히 활동해 댔고, 최근 냥펀이 입수한 정보에 의하면…….
[냥냥펀치]: 숭배자 놈들 힘을 한곳에 합치는 거 같음.
[냥냥펀치]: 요즘 계속 찔러 대는 건 눈속임이고 ㅇㅇ.
놈들이 뭔가 수작을 부리는 듯했고.
[정수리 핥짝]: 근데 걔 뭐냐. 자이언트 폴리스 자경단장? 걔 믿을 만하냐?
[니머리 탈모]: 글쎄, 느낌은 좀 안 좋던데. 내 직감으로는 그럼.
[냥냥펀치]: 물고 오는 정보들은 쏠쏠행!
[정수리 핥짝]: 녀석이 자이언트 폴리스에 진짜 위험한 놈이 있다던데.
[니머리 탈모]: 그때 나랑 싸웠던 애 말하는 거 아냐?
[정수리 핥짝]: ㄴㄴ, 걔 말고. 그놈 상사? 주인이 있다는 느낌으로 말하더라.
[니머리 탈모]: 녜……?
[냥냥펀치]: 탈모맨 쫄았냥? 쫄았엉?
[니머리 탈모]: 둘 다 덤비라 그 ㅎㅎㅎㅎ.
내가 알지 못하는 다른 놈도 있는 것 같았다.
맞네. 자경단장 저 녀석도 나한테 접근했었는데 챕터가 바뀌고 본 적이 없다.
일부러 그런 건 아니고 나도 워낙 바빴어서.
그것도 이제 끝이지만.
전운이 감도는 지금.
-깡깡
난 옆에 있는 녀석의 종아리를 두들겼다.
“가자, 깡통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