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탑에 갇혀 고인물-465화 (464/740)

465화 이놈 자체를 가져가?

내가 탑을 오르며 다양한 일을 겪기는 했지만 던전에서 납치를 당할 줄은 몰랐는데.

핥짝이를 향해 손을 내뻗는 찰나 공간이 바뀌었다.

무슨 놈의 던전이 멋대로 위치를 바꾸고 그러냐. 정확히 말하면 내게서 뭔가를 느껴서 이런 현상이 벌어졌다는 것인데.

대체 어떤 부분이?

짐작 가는 부분이 없지는 않다.

“이거 때문인 거 같은데.”

벨자트의 저주를 풀어 주고 받은 아이템.

[거인의 무덤 열쇠]

-고대 거인족 전사 벨자트는 위대한 영웅의 무덤을 지키는 수호자였습니다.

-비록 타락했지만 열쇠만큼은 지니고 있었죠.

-위대한 거인족의 영웅 헬그레이트의 무덤에 진입할 수 있습니다.

이곳은 수많은 과거의 영웅들이 묻혀 있는 던전.

내가 가지고 있는 열쇠는 그중 한 명인 헬그레이트의 무덤에 진입할 수 있는 아이템이었다.

다르게 말하면…….

“거인의 던전이란 다른 하위 던전을 품고 있는 종합 던전이라는 거지.”

“그에에.”

던전치고는 좀 특이한 구석이 있기는 했다.

다른 이도 아니고 관리자라 불리는 NPC들이 거주하고 있었으니.

공간이 바뀌었기 때문일까, 내 주변에는 관리자로 보이는 자들이 없었다.

인기척 자체가 없다고 하는 게 맞다고 해야 하나.

그래도 처음 들어갔을 때는 횃불이든 발광석이든 시야를 확보해 줄 장치가 마련되어 있었던 거 같은데.

물론 야간 시야가 있어서 어둠은 큰 제약이 되지 않았다.

“흐음.”

천천히 복도를 따라 걸으며 벽을 훑었다.

손끝에 묻어 나오는 흙 조각.

방치되어 있는 느낌인데. 내가 지나온 길을 확인하니 바닥에 쌓인 복도에 내 발자국만 선명하다.

관리자를 포함해 오랜 시간 동안 이곳에 들어온 이가 없다는 뜻.

생각했던 것보다 거인의 무덤은 규모가 클지도 모르겠다. 그러니까 방치되는 공간도 생기지.

만약 그런 게 아니라면?

“들어가지 못하도록 통제한 곳에 들어온 거고.”

관리자가 지정한 금지禁地에 진입했을 가능성도 있었다.

그런 건 아니었으면 좋겠는데. 왤까, 불길한 짐작은 틀리지 않는걸.

-타악

일정 구간을 넘어서는 타이밍.

[잊힌 거인들이 무덤에 진입했습니다.]

[영겁의 시간과 사념은 묻히기 마련인 법.]

[고대의 존재들의 평화를 깨지 마십시오.]

“아, 나한테 왜 그러냐 진짜.”

지금이라도 돌아갈까?

슬쩍 뒤를 돌아봤지만 마땅히 길이 안 보인다. 그도 그럴 것이 저 멀리 보이는 복도의 끝은 막혀 있었으니까.

세월의 풍파를 못 이겨 무너진 건지, 아니면 일부러 무너트린 건지 알 수가 없다.

아마 후자겠지. 잊힌 거인들 어쩌고 하면서 메시지가 뜨는 걸 보면.

게다가…….

-우우우우웅

내가 쥐고 있는 열쇠가 작게 진동하고 있다.

이쪽 방향이 맞다는 걸 암시하는 거겠지. 나를 이쪽으로 불러들인 것도 열쇠의 주인일 거다.

고대의 영웅, 헬그레이트.

커뮤니티로 핥짝이한테 말이라도 걸어야 하나.

잠깐 고민했지만 고개를 저었다.

“옆에 그레고리만 없었어도.”

NPC는 등반가의 커뮤니티를 엿볼 수 있다.

그럼 내가 쁘띠공듀인 것도 알아차리겠지. 인간의 존엄성을 위해서라도 그러고 싶지는 않았다.

살짝 꼬이기는 했지만 이곳에도 들르려고 했었고.

목적지는 저기.

“찾기 쉬워서 좋네.”

복도의 끝. 아치형 문이 보였다.

이전에는 문으로 사용했을지 몰라도 지금은 벽돌로 막혀 있는 곳.

한 가지 특이점이라면 중앙에 자그마한 홈이 파여 있다.

열쇠를 가져다 대자 딱 맞는다.

-찰칵

돌리지도 않았건만 저절로 열쇠가 돌아간다.

[고대의 영웅, 헬그레이트가 당신을 부릅니다.]

-콰르르릉!

슈우우욱!

문을 막고 있던 벽돌이 빠르게 무너지며 느껴진 인력이 나를 집어삼켰다.

안으로 빨려 들어가자마자 다시 수복되는 벽돌.

열쇠가 있는 사람만 들여보낸다는 건가.

신비로운 현상이었지만 크게 관심 가지지는 않았다. 언제 어떤 일이 벌어져도 이상하지 않은 곳이 탑이니까.

대신 경계심을 키웠다.

복도와 마찬가지로 탁한 색깔의 공동.

그 안을 가득 채우는 벽화가 눈에 띄었다.

“이건.”

첫눈에 뭔지 알 수 있었다.

비록 예언에 대한 벽화는 본 적 없었지만 이야기는 많이 듣고 있었으니까.

익숙한 그림도 보였다.

탑.

“예언의 일부인가.”

예언이 그려진 벽화가 하나가 아니라 여러 개였던 건가.

그런 생각도 들었지만 이내 뭔가 다르다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탑이 그려진 건 맞다.

검은 비가 내리는 장면도 그려져 있었다.

호수라든지 운석 같은 건 없었지만 대신 하늘에서 울부짖는 듯한 존재는 표현되어 있었다.

워낙 단순하게 그려져 있어서 못 알아차릴 뻔했지만 그 정체는…….

“델버튼이야, 그런 거 같지?”

“그에엑.”

덕춘이도 같은 생각인지 고개를 끄덕인다.

직접 봐서 확신할 수 있다. 저건 델버튼이다. 형상으로 봤을 때 혼돈의 파편이 된 상태가 아닐까 싶다.

그의 발밑에는 수많은 거인이 죽어 있었으며, 검은 비로 오염된 세상은 지옥과 같았다.

멸망한 세계.

난 그 맞은편에 그려진 벽화에 집중했다.

“탑에 도전한 걸 표현한 건가.”

따로 문자나 설명이 적혀 있는 건 아니었지만 그런 느낌이다.

멀쩡한 상태의 델버튼이 있었고, 그 옆에 있는 건 누군지 모르겠다.

아마 이 무덤의 주인이겠지, 헬그레이트였나.

탑 정상에 그려진 빛무리와 세계를 비추는 무언가.

정확한 뜻을 알아내기는 힘들었으나 뭔가 숭고한 분위기다. 신비로운 모양이기도 하고.

-쿠르르르릉

한참을 감상하고 있던 찰나, 진동음이 들렸다.

무덤 가운데에 비치된 관.

두꺼운 바위로 만든 곳에서 빛이 흘러나오면 영체인지 뭔지 모를 것이 떠올랐다.

덥수룩한 수염에 대충 걸친 옷. 산발인 머리가 묘하게 사자 갈기랑 비슷하게 생긴 녀석이었다.

“익숙한 기운이 느껴져 불렀거늘. 내가 아는 얼굴이 아니구나, 등반가여.”

“네가 날 이곳으로 부른 건가.”

희끄무레한 것이 귀신이나 다를 바 없는데 존재력이 강하다.

지금도 누르면 만져질 거 같다. 어느 정도 맞는 생각인지 녀석이 몸을 비틀 때마다 근처에 있던 돌 부스러기가 떨어진다.

“델버튼, 나의 옛 친구의 기운이었는데. 네가 가지고 있는 혼돈 또한 그렇다. 여기서 가지고 있을 만한 수준이 아니야.”

“그건 네 기준이지, 헬그레이트.”

“나를 아는가.”

그의 질문에 어깨를 으쓱였다.

알긴 뭘 알아, 초면인데.

덕분에 하나는 알았다. 녀석은 날 초대한 게 아니다. 나를 델버튼이라고 착각해서 불러들인 거지.

이유는 하나.

“델버튼을 찾는다고 했나? 내가 만나기는 했어. 그래서 착각한 모양이군.”

“…델버튼을 만났다?”

“어.”

우뚝. 잠시 멈춰 섰던 녀석이 몸을 일으켜 세운다.

구구구구궁!

존재력이 강해지며 공동이 울린다.

“거짓말하지 말거라! 델버튼을 봤다면 네놈은 이미 죽었을 터! 봤을 턱이 없다. 내 친우를 욕보이지 말라!”

쩌렁쩌렁하게 울리는 외침.

그 안에 담긴 힘에 누군가는 정신을 잃을지도 몰랐으나 태생적인 등급을 뛰어넘은 정신 보호를 가지고 있는 내게는 그다지 위협적이지 않았다.

그저 귀가 좀 아플 뿐.

눈살을 찌푸리며 귀를 막았다.

“이상한 놈이네. 아까는 델버튼인 줄 알고 불렀다며. 뭘 이제 와서 봤을 리가 없다 그러는 건데.”

“네놈은 모르는 것이 있다. 혹여나, 만에 하나 스스로를 잃지 않았을지도 모르는 일. 나는 믿고 있다. 델버튼이 되돌아오기를. 혼돈의 파편에서 벗어나기를!”

“그건 좀 늦은 거 같은데.”

놈 앞에 혼돈검을 흔들었다.

일단 이 녀석과 델버튼이 아는 사이인 건 알겠다.

똑같이 잊힌 거인이라 분류될 정도로 고대의 영웅인 것도 맞고.

다만 델버튼이 어떻게 됐는지는 모르는 거 같다.

“델버튼은 혼돈의 파편이 됐어. 세계 하나도 멸망시켰고, 탑 안에서도 그 행위를 이어 나가고 있었지.”

프램버그에서 겪었던 것.

그다지 좋은 기억은 아니었지만 내게 경고가 됐던 곳이기도 하다.

멸망에 접어든 세계가 어디까지 망가질 수 있는지, 종말이라는 것이 얼마나 끈질긴 것인지 알게 되었으니까.

동시에 내가 처음으로 혼돈의 파편을 잡은 곳이기도 하다.

혼돈검 또한 델버튼을 잡고 남은 재료로 만들어진 것이니까.

“이건, 이런… 말도 안 되는…….”

“도대체 얼마나 여기에 박혀 있던 거야?”

그래도 NPC끼리는 어느 정도 커넥션이 있는데 이 녀석은 아예 없는 거 같다.

뚫어져라 혼돈검을 바라보던 녀석이 몸을 부르르 떤다.

“…나를 속이려는 수작은 아니냐.”

“지가 불러놓고 뭐라는 거야, 아까부터.”

머리를 긁적였다. 이거 잘못 찾아왔나? 난 뭐라도 얻을 게 있을까 해서 온 건데 있는 거라고는 정신 나간 귀신밖에 없다.

영체만으로도 저만큼이나 현실에 영향을 주는 걸 봤을 때 영격이 상당한 놈인데. 보통 영격이 높은 이들은 잘 안 미치지 않나?

모르겠다. 언제나 예외는 있는 법이니까. 똥 밟았다 생각하고 빠져나가자.

혼란스러운 듯 가만히 있지 못하고 떠다니는 녀석의 눈을 피해 슬그머니 발걸음을 옮겼다.

“그럴 리가 없어. 아니지, 가능성이 작기는 했지만 그래도… 빌어먹을 예고대로 된 것인가.”

혼잣말을 해 대는 녀석을 놔두고 밖으로 빠져나가려던 그때.

-슈아아아악!

“으악, 씨!”

놈이 내게 얼굴을 내밀었다.

영혼이라 그런가. 목이 제멋대로 늘어나네.

방금은 나도 좀 소름 돋았다.

녀석이 진지한 표정으로 물었다.

“혹시 검은 비가 내렸나?”

“어, 내렸지.”

“델버튼은 제정신이던가?”

“음, 일단은?”

지금도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잠깐만, 생각해 보니 말이야. 델버튼 그 양반도 거인의 무덤으로 가라 했잖아.

그리고 우연인지 뭔지는 몰라도 델버튼과 인연이 있는 놈도 만났고. 영혼 상태기는 하지만.

이 상황들을 고려한다면 지금의 흐름은?

“등반가, 내 부탁을 들어주어라.”

[잊힌 영웅에게 평화를- 돌발 퀘스트]

-고대의 영웅 헬그레이트는 오랜 친구이자 동료인 델버튼을 구하고 싶습니다.

-숭고한 희생의 대가는 참혹하고 결과는 어두웠습니다.

-더욱 어둠이 짙어지기 전에 평화를 가져오고자 합니다.

-델버튼의 혼돈의 파편화 막기(0/1)

-보상:???(퀘스트 완료 방식에 따라 달라집니다.)

오랜만에 들어온 퀘스트다.

보상이 확실하지는 않지만 퀘스트 정보대로 놈은 고대의 영웅.

클리어 조건만 마음에 든다면 꽤 괜찮은 걸 얻을 수 있지 않을까?

“기어이 멸망이 다시 찾아왔구나. 난 녀석에게 마음의 빚이 있다. 이제 그만 고통받을 때가 되었어.”

퀘스트를 수락할까 말까 고민하는 중에도 헬그레이트의 말은 계속되었다.

“비록 볼 수는 없지만 델버튼이 빌어먹을 탑에서 벗어나 잠깐이라도 평화를 만끽했으면 한다. 아직 파편화가 되지 않았다면 가능성이 있을 것이다. 내 부탁을 들어줘다오.”

어떻게 할까.

해서 나쁠 건 없는데 그렇다고 좋을 게 있냐고 물으면 잘 모르겠다.

아니지. 정확히 말하면 이 퀘스트를 받아들이고 클리어만 할 수 있다면 좋은 점이 많다.

보상은 보상대로 받는 거고 그 과정에서 델버튼을 막게 된다면…….

‘검은 비도 멈춰. 사실상 챕터 종료다.’

이게 중요했다.

할 수 있냐 없냐가 문제지.

머리를 굴렸다. 이번 퀘스트. 아무리 생각해도 델버튼이 유도한 느낌이 강했다.

다르게 말하면.

‘델버튼도 자신을 막아 달라고 한 거지.’

그 방법은 여기, 헬그레이트에게 있는 거고.

놈에게서 정보를 더 얻어야겠다. 막을 수 있는 방법, 델버튼의 약점, 쓸 만한 무기나 아이템 그것도 아니라면…….

“후우. 놈을 볼 수 있으면 좋았으련만.”

…이놈 자체를 가져가 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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