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4화 거인의 던전
거인의 무덤. 정확한 위치를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몇 가지 이유가 있는데…….
“구전으로 전해지는 게 크지. 목격자가 주기적으로 발견돼서 없다고 생각하는 이는 없지만 말이야.”
“여긴 사진 같은 거 없지?”
“그림은 있다.”
없다는 거구만.
사진과 같은 기록 없이, 목격자들의 증언을 통해 전해진다라.
자그마치 과거의 영웅들이 묻힌 곳이다. 이들에게 있어서도 꽤 의미 있는 곳일 텐데 아는 사람이 많지 않다는 게 선뜻 이해되지는 않았으나…….
“거인의 무덤이라는 곳은 던전과 같다. 지도로 만들 수도 없지.”
“조건이 맞아야 생겨난다는 건가?”
“비슷하다. 그곳의 관리자들을 만나야 해. 그들만이 영웅을 모시고 무덤으로 안내할 수 있지.”
“부족 중 하나라는 거군.”
“일반적인 부족과 비교하면 안 될 거다. 관리자들의 주술은 강력하니까.”
도굴꾼을 막기 위해서라도 무력을 가지고 있을 거다.
그레고리가 경고할 정도면 어지간한 NPC 이상으로 강하다는 뜻.
안 그래도 좀 의아하기는 했다. 옛 영웅들을 모신다고는 했다만 그 영웅들이 죽었을 때 누가 무덤으로 데려가나 했거든.
따로 영웅들을 수습하고, 일대기를 기록하는 부족이 있다는 거다.
신비로운 존재들.
“나도 자세한 건 모르나 그들의 역사는 매우 길며, 멸망이 찾아왔을 때도 한동안 살아갔다고 알고 있다.”
“관리자들도 NPC인가?”
“아마도. 나 또한 영웅의 무덤에 들어가 예언을 봤었지만 그들과의 교류는 거의 없었다.”
그럼 좀 말이 통하겠네.
자세한 건 가서 물어보자.
그레고리도 관리자에 대해 자세히 모른다면 다른 NPC도 모른다고 보는 게 맞았다.
한 가지 걸리는 점이 있다면…….
‘NPC라면 어째서 활동을 하지 않은 걸까.’
그레고리를 비롯한 산맥의 거인들, 새롭게 들어온 등반가들과 함께 이주해 온 거인들까지.
다들 기회가 된다면 등반가와 함께 시나리오를 클리어하려고 움직였다.
설마 숭배자 편인 건 아니겠지?
순간 그런 생각도 들었지만 이내 생각을 지웠다. 그랬다면 이전 챕터 때 이미 모습을 드러냈을 거다.
거인의 무덤을 공개하고 멸망이 다가왔음을 선전했겠지.
그렇다고 숭배자를 배척하느냐고 묻는다면 그건 또 모르겠다.
어찌 됐든 그들이 지키는 유적에 멸망에 대한 예언이 그려져 있는 건 사실이니까.
잠깐만…….
“어? 벽화 조작하려면 관리자들도 어떻게 해야 하는 거 아닌가?”
“대충 머리 쪼개서 기절시키면 될걸?”
“보통 머리가 쪼개지면 죽는단다, 핥짝아.”
“넌 한 번은 살잖아.”
“아니, 그건…….”
말을 말자.
현재 나와 그레고리, 핥짝이는 거인의 동굴을 향해 움직이고 있었다.
숭배자들이 이곳으로 오도록 유도하는 거 같아서 불안하기는 했지만 가기는 가야 하는 법.
그렇다고 우르르 몰려가자니 그건 또 안 됐다. 일정 수 이상이 넘어가면 무덤 관리자가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고 해서.
또 한 가지…….
‘그쪽으로 전력이 몰린 사이 언더 시티를 공격할 가능성도 있어.’
만약 나를 거인의 무덤으로 유인한 거라면 놈들이 할 수 있는 건 두 가지다.
무덤에 가는 길에 나를 공격하는 것.
아니면 내가 없는 사이에 언더 시티를 공격하는 것.
양쪽 다 나를 기준으로 설명하게 되는데, 자의식 과잉이 아니라 내가 가지고 있는 상징성과 능력 때문에 그렇다.
결국 검은 비를 정화할 수 있는 건 나뿐이니까.
다행히 한동안은 비가 내릴 거 같은 기미는 안 보이는데 주변 지역 정화 작업은 못 할 거다.
“언더 시티 쪽은 다른 사람들한테 맡기자고.”
핥짝이가 어깨를 두들기며 말했다.
맞다, 나 혼자 모든 걸 해결할 필요는 없다.
거인의 무덤을 향할 때 함께 가겠다고 손을 든 건 두 명. 핥짝이와 탈모맨.
냥펀이야 가능한 안전한 것을 추구하니까 당연하다면 당연한 결과였다.
나도 그게 낫다고 생각하고 있었고.
다른 것도 아니고 도시 전체를 개편하고 한정적인 물자를 나누는 일을 해야 한다.
냥펀의 주특기 중 하나. 이쪽에 관해서는 냥펀이 제격이다.
거기에 탈모맨도 옆에 붙여 뒀다. 아무리 연합 사람들과 상위 헌터들이 있다고는 하나, 한 명 정도는 냥펀과 함께 움직이고 전투력을 담당할 인물이 있는 게 좋을 거 같아서.
‘탈모맨을 데리고 왔다가 어떤 일이 벌어질지 예상하기 힘들기도 하고.’
돌발 행동을 할 가능성이 가장 큰 녀석이라.
거인의 무덤에서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만큼 목적에 따라 움직이는 사람이 가는 게 맞다고 판단했다.
핥짝이도 눈치가 좋고 머리 회전이 빨라서 이번 일에는 반드시 필요했다.
“왔다.”
그레고리가 조용히 손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거인의 무덤에 진입할 수 있는 루트는 다양했으나 모두 관리자를 통해서 들어가야 한다고 했다.
다르게 말하면 관리자를 만날 수 있는 포인트가 몇 군데 있다는 것.
숭배자들이 어떤 방법으로 움직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우리랑은 겹치지 않은 거 같다.
여기까지 오는 데 놈들이 설치한 함정이나 매복은 없었으니까.
“저 나무를 베어 내면 나타날 것이다. 내가 하지.”
우리가 도착한 곳은 계곡이 이어진 산.
평탄한 지형에 수풀이 우거진 곳이었는데 그중 하나, 이질적으로 생겨난 나무가 하나 있었고.
[계속 자라는 나무]
-밟혀도 계속 자라나는 잡초라고 하던가요?
-이 나무는 잘려도 계속 자랍니다!
-불태워도 마찬가지죠!
-나무를 없애면 누군가 나타날지도?
권능을 통해 확인하자 특이한 정보가 떠오른다.
잘라도 계속 자라는 나무라. 이거 무한 목재 공급 나무 아닌가.
물론 자라나는 속도가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말이야.
-콰앙!
망설임 없이 그레고리가 주먹을 휘두르자 나무가 기둥째 날아가 계곡에 박혔다.
거인들이 치는 주먹은 화끈한 맛이 있단 말이지. 타격감이 있달까.
여기까지는 그다지 특이한 점이 없었으나.
“그레고리군.”
“오랜만이다, 관리자.”
곧 물보라가 튀면 신기루처럼 흐릿한 잔상이 모습을 드러냈다.
마치 물방울이 하나씩 자리 잡으며 하나의 현상을 만드는 모습.
이내 실체화된 관리자가 우리를 향해 다가왔다.
후드를 깊게 눌러쓴 녀석이었는데 고개를 살짝 들자 안광이 번뜩였다.
“등반가, 그것도 둘이라. 소란스러운 건 알고 있었다만 등반가를 보는 건 오래간만이야.”
“너희는 시나리오가 어떻게 흘러가든 관심이 없으니까. 밖에 조금만 관심을 가졌다면 재밌는 것들을 볼 수 있었을 거다.”
“허상과 같은 세계에 그만한 관심은 없다. 이루어질 것은 모두 이루어졌으니.”
NPC 맞네. 허상 같은 세계라고 하는 걸 보니.
이루어질 것이 이루어졌다는 것은 멸망을 이야기하는 거 같고.
예언이 그려진 벽화가 멸망을 가리키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었나 보다.
[SSS급 권능, 별을 주시하는 눈이 발휘됩니다.]
-츠즈즈즈즈
[나한타]
-거인계 소속 NPC.
-거인의 무덤을 관리하는 존재입니다.
-이들은 바깥세상에 관심이 없죠.
-단 하나, 영웅의 등장에는 또 다르지만요.
-관리자들은 특별한 힘을 씁니다.
특별한 힘을 쓰는 존재.
거인들은 주술을 사용하는 종족.
보통은 자신들이 살아온 고향이나 부족 문화와 관련된 주술을 사용한다.
설산 출신의 거인 파머가 냉기를 다루고, 산맥 거인인 그레고리가 영적인 짐승들을 다루는 것처럼 말이다.
이들은 어떤 힘을 쓸지 감이 안 잡힌다. 이건 직접 겪어 봐야 알겠지. 겪을 일이 없으면 더 좋고.
“거인의 무덤으로 향하고 싶어 나를 찾아왔겠지. 눈을 감아라. 안내하겠다.”
속내를 알 수 없는 눈으로 나와 핥짝이를 바라보던 관리자가 품에서 검은 천을 꺼냈다.
눈을 가리기 위한 것이었고, 그레고리가 별다른 저항 없이 눈을 가렸다.
나와 핥짝이도 마찬가지.
“오, 이거 진짜 안 보이는데?”
“안 떨어지네. 밑으로 슬쩍 보려 했더니만.”
“…그러라고 만든 아티팩트다, 등반가들이여.”
아티팩트였나? 어쩐지 저절로 눈에 달라붙더라.
하긴, 단순한 천 조각이었으면 보안을 유지하기 힘들었겠지.
앞이 보이지 않는 상황. 녀석이 밧줄을 손에 쥐여 줬다. 이걸 잡고 따라가면 된다나.
눈을 가린 채 줄을 잡고 천천히 나아가는 것이 뭔가 전쟁 포로가 된 느낌이었지만 어쩌겠는가 이렇게 하는 게 절차라는데.
그렇게 안내를 받아 이동을 얼마나 했을까.
‘이상하군.’
기묘한 느낌이 들었다.
분명 꽤 움직인 거 같은데 계속해서 평지가 나온다?
계곡 근처가 평탄하기는 했지만 이 정도는 아닐 텐데.
마치 구름 위를 걷는 것처럼 발에서 느껴지는 감각도 특이하고.
-터억
지금에 와서는 흙바닥이 아니라 바위나 타일을 밟는 느낌이 들었다.
미묘하게 공기도 좀 달라진 거 같고.
미약하지만 열기도 느껴진다. 모닥불? 혹은 횃불. 발소리도 살짝이지만 울린다.
“도착했다.”
“벌써? 어떻게?”
“뭐야, 근처였던 건가.”
궁금증이 생겼지만 확인하는 건 금방이었다.
친히 천을 풀어 준 녀석이 주변을 가리켰다.
“이곳이 거인의 무덤 입구다. 위대한 영웅이 잠든 곳에 온 걸 환영한다.”
산은 어디 가고 우리가 있는 곳은 탁 트인 초원이었다.
풀로 뒤덮인 곳은 아니고 흙과 돌이 굴러다니는 건조한 장소였지만 원만한 언덕이 연달아 있는 것이 나름 멋진 광경을 자아냈고, 그 중심에는…….
“크군.”
“크네.”
다른 언덕을 압도하는 사이즈의 뭔가가 있었다.
괜히 무덤이라 한 게 아닌지 우리나라의 왕릉을 떠올리게 하는 형태였다. 다른 점이 있다면 입구 부근에 거인의 형상을 한 조각상이 있다는 것.
“들어가지.”
여전히 숭배자의 기척은 없다.
관리자를 인식해서 참고 있는 것인가. 아니면 진짜 이곳으로 날 유인한 뒤 언더 시티를 공격하고 있는 것인가.
적어도 아직은 아닐 거다. 그랬다면 어떤 식으로든 연락을 줬을 테니까.
커뮤니티 알람이 울리지 않았다.
-구구구구궁
그가 굳게 닫힌 입구에 손을 대자 굉음과 함께 열렸다.
“한때 이곳에도 수호자가 있었으나 지금은 없다. 누구를 말하는지는 알고 있겠지.”
“알지, 벨자트 아닌가?”
녀석이 고개를 끄덕인다.
54층에서 만났던 거대한 스켈레톤. 스스로 공허의 기사라고 자처했던 인물.
한때 거인의 무덤을 수호했던 존재였으며…….
“그의 고통을 덜어 준 것에 감사한다, 등반가여.”
공허의 저주를 받아 저질러서는 안 되는 죄를 지은 녀석이기도 했다.
도망친 자이기는 하나 수호자였던 것 역시 사실.
NPC끼리는 나름의 커넥션이 있으니 녀석에 대한 것도 전해 들은 거 같다.
대놓고는 아니지만 내게 우호적으로 나오는 것도 비슷한 이유겠지.
관리자가 입구에 멈춰서 턱을 까딱였다.
“내게 주어진 역할은 안내. 이후에는 다른 관리자들이 있을 것이다. 혹은 몇 남지 않은 수호자를 보게 될지도 모르겠군. 내부는 나의 영역이 아니니.”
관리자라고 모든 것을 관리하지는 않는 모양.
“원하는 것을 이루길 바란다.”
그 말을 끝으로 녀석은 자리에 섰다.
좋다. 어찌 됐든 나도 목적이 있어서 온 거니까.
한 발 앞으로 내밀었다.
[던전, 거인의 무덤에 진입합니다.]
이어 핥짝이와 그레고리도 발을 디뎠고.
-우우우우웅
“음?”
[칭호, 수상한 초대를 받는 자의 효과]
[던전이 당신의 기운과 아이템에 반응합니다.]
[던전 입장 위치가 임의 조정됩니다.]
“자, 잠깐만!”
앞서 나아가는 둘을 향해 팔을 뻗기도 전에.
-파아아앗!
공간이 바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