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3화 나랑 같이 갈 사람?
덕춘이의 현란한 혀놀림에 경추에 문제가 생긴 와중, 들려온 노크 소리.
누구려나. 언더 시티 거인들? 아니면 멤버나 연합 사람들일 수도 있다.
아마 거인이겠지만. 핥짝이나 냥펀, 탈모맨이었으면 노크고 뭐고 그냥 부수고 들어올 거 같아서.
-콰앙!
“내가 왔당!”
“아 씨, 내가 먼저 들어가려 했는데.”
“음? 다들 같은 생각이었구나?”
이렇게.
신나게 문을 뻥 차고 들어오는 냥펀. 다들 비슷한 시기에 떨어졌는지 모여 있다.
노크를 한 것으로 보이는 그레고리가 눈을 깜빡이더니 슬쩍 나를 바라본다.
뭐지, 왜 눈빛에 동정심이 가득하지?
“너 또 무슨 사고 쳤어! 뭔데 챕터가 강제 종료되냐고!”
“이야아압! 그냥 평범하게 지나가면 안 되냥!”
“뭐였는데? 나도 궁금해!”
다짜고짜 멱살을 잡고 흔드는 핥짝이와 기세를 몰아 양다리를 하나씩 나눠 든 냥펀과 탈모맨이 날 흔든다.
사람 몸이 이렇게 펄럭거릴 수도 있구나. 처음 알았다.
내가 당해서 알게 될 줄 몰랐지만.
이렇게 된 이상.
“으럇차!”
“으악! 미친놈이!”
바로 몸을 틀며 핥짝이한테 길로틴 초크로 카운터를 날렸다.
그동안 당한 것의 복수다!
“공블아이의 공격!”
“오오오! 훌륭한 자세야. 좀 하는걸?”
“하지만 핥짝이도 가만히 있지 않습니당! 바로 눈 찌르기!”
푸욱!
핥짝이가 눈을 찔렀다. 이런 비겁한!
아니 아니, 너희는 왜 중계하면서도 발을 안 놔주냐. 사실상 3 대 1이잖아.
억울한 것도 잠시.
“잘도 날 잡았겠다?”
“잡은 건 네가 멱살을 먼저… 기하악!”
다리를 움직일 수 없는 것을 노린 녀석이 마운트를 잡더니 멱살을 잡아 들었고.
“으냐아앙! 핥짝이 선수 정수리 드릴 들어갑니당!”
“과연 정수리 탈모가 올 것이냐 정수리가 뚫릴 것이냐! 두피와 두개골의 사투!”
“정수리 탈모는 너랑 핥짝이가 합쳐져야 가능한 거 아닌가요!”
“아, 저는 그냥 M자 탈모로 하겠습니다.”
핥짝이가 그대로 목을 고정한 채 턱으로 내 정수리를 찔러 댔다.
“끄아아악!”
턱이 좀 뾰족한 타입인가? 아니면 턱에 쇳덩이라도 단 건가. 지금까지 느껴 본 적 없는 종류의 짜릿함이 느껴진다.
탭탭탭!
목이 조여 말도 못 해 다급히 탭을 쳤다.
“탭 나왔습니당! 승자 핥짝이!”
“천하의 이블아이도 정수리는 안 되죠. 핥짝이 오늘도 닉값합니다!”
이제야 중계를 마친 두 녀석이 다리를 놓더니 박수를 친다.
승리한 핥짝이는 팔을 벌리며 세리머니를 하는 중.
83층에 오자마자 이게 무슨 꼴이야.
“끝났으면 내려와라 무겁…….”
“뭐?”
“하핫. 편하시면 앉아계셔도 됩니다. 암요, 제가 방석 닮았다는 말을 종종 들었습니다.”
왜 무섭게 노려보고 그러냐.
양심이 있어야지. 지금 등에 커다란 배낭 메고 있잖아. 저건 왜 메고 있는 거야?
“흠흠. 노는 중에 미안하지만 할 말이 있어서 왔다.”
헛기침을 하며 분위기를 환기시키는 그레고리.
노는 중에? 노는 것으로 보였단 말인가. 난 일방적으로 당한 거 같은데.
하기야 뭐, 진짜 치고받고 싸우는 거 생각하면 이 정도는 평소 투닥거리는 거랑 비슷하긴 하지.
어째선지 좀 슬프지만.
아무튼.
“무슨 일인데? 넌 배낭은 왜 가져 왔고?”
“이거? 몰라. 챕터 넘어오니까 메고 있던데.”
“의약품이군. 그것도 말할 것 중 하나다.”
바닥에 내려온 핥짝이가 배낭을 뒤적거린다. 안에는 거인계에서 사용하는 의약품과 매뉴얼이 적힌 책자가 있었다.
말이 책자지 우리 기준으로 따지면 텐트 사이즈다.
“세 번째 챕터로 들어오며 기억 일부가 되살아났지.”
기억한다. 80층대의 NPC들은 본인들이 NPC인 걸 자각하는 대신 시나리오 진행을 위해 챕터에 맞게 기억이 일부 봉인되었다가 해금되니까.
우리도 비슷하다.
[83층 진입 확인]
[기억이 생성됩니다.]
찌릿. 따끔한 통증과 함께 기억이 생겨났다.
두 번째 챕터에서 대략 6달 정도 흐른 건가. 정확한 기간은 알 수 없었으나 대략 그 정도 되는 거 같다.
그와 동시에 지금 상황이 어떤 건지 알 수 있었으니.
“역병이 돌았네.”
“기존에 있던 것과 비교하면 아직은 그리 대단하지는 않다.”
검은 비로 오염된 대지와 물.
식물과 곤충, 짐승들이 죽으며 파괴된 생태계.
썩어 버린 시체와 검은 비로 인해 변질된 유독 가스와 독성 물질이 전염병을 일으켰다.
“이주민도 더 늘었고 말이야.”
“언더 시티에서도 최대한 받아들이려고 하지만 힘든 실정이지. 다들 목숨 걸고 온 거라 내쫓기도 애매하고. 급하게 터전을 만들고 있지만 시간이 필요하다.”
언더 시티 자체도 고향을 떠나 들어온 이주민들로 이루어진 만큼 새롭게 들어온 이들을 배척하지는 않았다.
문제는 그들 중 태반이 병에 걸린 상태였으며, 그로 인해 언더 시티, 더 나아가 자이언트 폴리스에도 병이 돌기 시작한 것.
강인한 육체를 지닌 만큼 거인들은 어지간한 질병에는 면역에 가깝다.
마약 같은 것도 통하지 않는 이들인 만큼 말 다 했지.
다만…….
‘그런 거인들도 걸렸을 정도의 병이라면 다른 이들에게는 최악이야.’
등반가들 역시 병에서 자유롭지는 않다는 것.
물론 병이라는 것이 무조건 옮거나 발생하는 건 아니다.
당장 우리만 따져도 사람한테 통하는 것과 동물에게 통하는 병이 따로 있으니까.
거인에게만 유효한 질병일 가능성도 있기는 하지만…….
“등반가 중에도 증상이 나타났던 자가 있다. 너희는 아직이지만 이전에도 이곳을 지나친 이들이 있었으니까. 죽기 전에 위로 올라가기는 했다만 별다른 활약을 하지는 못했지.”
“운이 나쁘면 병에 걸려 죽을 수도 있다는 거군.”
“맞다. 본적격으로 퍼지면 어쩌면 그때보다 더 심할지도 모르겠군. 당시에는 검은 비가 아니라 진흙 비가 내렸던 거니까.”
내가 정화를 한 덕에 이곳에 있던 거인들은 상태가 좋지만 새롭게 들어온 이들은 아니다.
지금 당장 상황이 좋다고 이후에도 좋을 거라는 보장은 없다.
나를 비롯한 등반가도 마찬가지고.
검은 비는 혼돈의 힘이 깃든 물질. 혼돈을 많이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는 큰 영향을 끼치지 않을지도 몰랐다. 어디까지나 희망 사항에 불과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그리 좋은 상황은 아니군.’
나야 이미 동층대에서 얻을 수 없을 만큼 많은 혼돈 수치를 지니고 있지만 모든 등반가가 그런 건 아니라서.
혼돈이 아니더라도 신성력이나 마기를 충분히 가지고 있는 자들은 버틸지 몰랐다.
신성력은 그 자체로 정화하는 힘이 있고, 마기는 혼돈과 가장 유사한 힘이니까.
80층에 넘어온 만큼 등반가들 모두 최소 둘 중 하나는 999스텟 이상이다.
그러니까 아직까지 병에 걸린 사람이 없는 걸 테고.
앞으로도 그럴 거라는 보장은 없지만 말이지.
“델버튼이 있던 곳이니 당연한 건가.”
혼돈의 파편이 된 녀석은 질병과 도박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 원인 중 하나가 이게 아닐까.
도박은 뭐지? 이것도 분명 뭔가 있을 텐데.
“새롭게 들어온 이주민들이 모인 곳이 있는데 그곳을 기점으로 도박을 하는 이들도 있던 모양이군. 흔한 일이기는 하지. 우리도 한때는 그랬으니까.”
“그렇군.”
“알게 모르게 다니는 이들이 제법 될 거다. 거인이 몰릴수록 많은 것이 부족해지거든. 우리가 괜히 영역을 넓게 잡고 살았던 게 아니지.”
거인은 크다. 그에 따라 필요로 하는 식량과 물자가 많다.
결국은 한곳에 너무 많은 거인이 모여 생겨난 변화이자 문제들.
이걸 어떻게 해결해야 하나.
“소문이 돌고 있다고 하더군. 검은 비로부터 자유로운 곳은 이곳밖에 없다고. 앞으로 더 많은 이들이 몰려올 거야.”
“쉽지 않은데.”
당장 식량부터 부족해질 거다. 의류나 다른 생활용품도 부족해질 거고.
수로도 만들어야겠는데. 새롭게 생겨난 기억을 봤을 때 위생 상태가 개판이다.
생명체인 이상 먹고 싸는 건 당연한 일이었으나, 마땅한 위생 시설이나 공간이 없어서 골목으로 들어가면 그리 보고 싶지 않은 풍경이 펼쳐졌다.
이것도 전염병이 생긴 데 일조했겠지.
벌써 할 일이 많아졌군. 이건 뭐… 차라리 재앙이나 괴물이랑 싸우는 게 속 편하지 도시를 개편하게 될 줄은 몰랐다.
좋게 생각하자. 멸망이 다가오면 이런 경우도 생긴다는 뜻이니까.
우리라도 다르지 않을 수 있다. 대격변 이후, 지방과 수도권, 각 지방의 강세 도시로 사람들이 몰렸었다.
어쩔 수 없는 게 소수가 모이면 고립이지만 다수가 모이면 연합이 된다.
“그래서 내가 해야 할 일은? 할 말이 있다면서.”
이런저런 이야기가 많았지만 그레고리가 하고 싶은 말은 따로 있을 거다.
이것들은 나도 알 수 있는 부분이니까. 이야기는 나누어야겠지만 따로 찾아올 사항은 아니다.
“이것들도 충분히 골치 아픈 문제기는 하지만 못할 건 없지. 이미 겪었던 일이기도 하고, 전과 달리 자이언트 폴리스와의 관계도 나쁘지 않다.”
그레고리가 품에서 포스터를 꺼낸다.
대기실에서 봤던 물건. 그때는 자세히 보지 못했는데 이렇게 보니.
“…거짓된 존재라.”
“결과야 어떻게 됐든 우리의 구심점은 너다. 종말에 거부하는 자, 이미 그 능력은 증명했지. 다만 반대 의견도 나오고 있다.”
미간을 좁힌 그레고리가 작게 한숨을 내쉰다.
“예언에 나오지 않은 자라고. 그저 거짓을 말하며 멸망을 끌어당기는 존재라더군. 정화 역시 눈속임에 불과하며 방심을 유도하기 위함이라고, 더 큰 절망을 주기 위해.”
“개소리도 그 정도면 수준급인데.”
“소문은 개소리일수록 잘 도는 법이다. 자극적이니까.”
맞는 말이라서 반박할 수가 없네.
소문의 출처는 말할 것도 없이 숭배자들.
“거인의 무덤으로 가야겠군.”
“어떻게 할지는 네 결정에 달렸다. 생각해 봐라. 난 용무가 있어서 먼저 일어나 보지.”
대화를 마치고 그레고리가 자리를 떴다.
거인의 무덤이라. 어차피 한 번은 가야 했다. 델버튼도 말하지 않았던가. 그곳으로 향하라고. 그곳에 뭔가가 있다는 거다.
그건 그건데…….
“숭배자들치고 너무 얕은수를 쓰는 느낌이야.”
그런 생각이 들었다.
멤버들 역시 비슷한 생각이었는지 고개를 끄덕인다.
“우움, 그쪽으로 오라고 하는 거 같지 않냥?”
“그치 다른 것도 아니고 소문으로 수작질하기는 좀.”
“예언에 별 관심 없는 사람도 많을걸? 예언이 뭐가 중요해. 멸망만 막을 수 있으면 되지.”
거짓말한 건 맞다. 그래서 뭐? 따지고 보면 뭔지도 모를 예언 가지고 정당성을 확보하려는 것도 우습고, 혹여나 그렇다 하더라도 우리도 똑같이 언론 플레이를 하면 그만이다.
숭배자 놈들이 예언이 그려진 벽화를 훼손해서 나에 대한 것을 지웠다, 이런 식으로.
만약 유도를 하는 거라면 가능성은 두 가지.
“널 그쪽으로 오도록 유인하는 거거나…….”
“아니면 내가 언더 시티에서 자리를 비우게 하고 싶은 거지.”
어쩌면 둘 다일 수도 있고.
역시 핥짝이, 머리가 잘 돌아간다.
“동시에 해야 할 일이 많아졌넹.”
“결국 따지면 이쪽이랑 거인의 무덤인가 하는 곳이랑 한 번에 해결 보면 된다는 거 아닌가?”
냥펀과 탈모맨의 말도 일리가 있다.
숭배자들이 무슨 계략을 꾸몄든 우리 쪽에도 사람은 많다.
멤버들뿐만 아니라 연합 사람들과 상위 헌터들도 있으니까.
해보자고.
“난 무덤으로 가야 할 거 같아. 아까 강제 종료 이야기했지? 그거 델버튼이 나타나서 그런 거야.”
“그 혼돈의 파편?”
“어, 지금 시점에서는 아닌 거 같지만 또 모르지. 아무튼 그 녀석이 거인의 무덤으로 가라 했어.”
예상외의 이름에 다들 눈치다.
그렇겠지. 나도 놀랐는데.
아무튼 그래서…….
“나랑 같이 갈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