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탑에 갇혀 고인물-462화 (461/740)

462화 83층

잊힌 영웅의 등장.

나도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었고, 나를 잡기 위해 온 숭배자 역시 생각 못 한 변수였다.

검은 비와 함께 내려온 인물.

델버튼.

“또 보는군.”

“그 모습은 처음이지만 말이지.”

내 말에 앞에 서 있던 거인이 입꼬리를 올리며 나를 돌아봤다.

앞에 나가떨어진 골드 등급의 숭배자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모습.

기습이기는 했지만 골드 등급을 한 번에 제압했다. 물론 확실하게 죽인 건 아니고 충격을 줘서 날려 버린 거에 가까웠지만.

삐걱거리는 몸을 일으켜 세웠다.

델버튼, 혼돈의 파편이자 프램버그를 무너트린 멸망의 존재.

역병과 도박으로 이루어졌던 괴물이었으며, 나와의 내기에서 패배한 녀석이기도 하다.

그때의 모습과 지금의 모습을 비교하자면…….

“지금이 훨씬 보기 좋군.”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당시에는 시커먼 것에 뒤덮이고 뒤틀려 있어 사람의 형상이라는 것만 알아볼 수 있었는데, 지금은 온전한 모습이었다.

저걸 온전하다고 말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파지지직

-치이이익!

몸의 형태가 불안정하다. 수시로 튀어 오르는 스파크와 연기.

팔과 다리는 물론, 얼굴도 순간적으로 바뀐다. 뭐라고 해야 하나.

‘버그가 사람한테 일어나면 저런 모습일 거 같은데.’

노이즈가 껴 있다고 하면 설명이 될까.

한 가지 분명한 게 있다면…….

‘강해.’

예전이었다면 내 수준이 떨어져 상대방이 얼마나 강한지 가늠조차 하기 힘들었겠지만 지금은 아니다.

80층대에 들어서면서 완전히 초인의 영역에 진입했을 뿐만 아니라 어중간한 NPC 정도는 싸워서 이길 정도의 무력을 가지게 됐다.

그래서 안다. 녀석이 얼마나 강한지.

이게 옳은 판단인지는 모르겠지만.

‘알리오스도 저 정도는 아니었던 거 같단 말이지. 최소한 동급, 어쩌면 그 이상.’

99층까지 올랐던 이들을 몇 명 알고 있다. 알리오스가 그러했고, 킬더레스가 그러했으며, 릴카도 마찬가지였다.

이들 중 나에게 공격적으로 나온 녀석이 알리오스뿐이라 정확한 비교가 힘들기는 하다.

킬더레스에게 맞은 적은 있지만 그거야 불의의 사고였고, 그는 내게 우호적인 NPC이다. 릴카야 뭐 성격 자체가 목숨 걸고 싸우는 쪽이 아니라서.

혹시나 싶어 권능을 사용해 봤으나.

[델버튼]

-예고된 혼돈의 파편.

-탑에 종속된 존재.

-거인계의 잊힌 영웅입니다!

-그의 숭고한 ■■■ ■■하는 사■■…….

-■0■■■ 도■■…….

시스템이 정보를 보는 것을 거부하는 것인지 중간중간 내용이 깨져 있다.

지글거리며 흔들리는 홀로그램. 정상적으로 보는 거 자체가 불가능하다.

형태부터 정보까지 버그로 뒤덮인 녀석.

한 가지 특이한 점이 있다면…….

‘NPC라고 적혀 있지 않아.’

탑에 종속되어 있다고는 적혀 있었으나 어디에도 NPC라고는 되어 있지 않다.

마치 다른 등반가들에게 권능을 썼을 때처럼.

그렇다고 델버튼이 등반가라는 건 아니다. 탑에 종속된 시점에서 이미 등반가라는 타이틀은 의미를 잃으니까.

탑에게 있어도 델버튼, 혼돈의 파편의 존재는 특별하다는 건가.

“시간이 얼마 없군. 이것도 자네가 혼돈을 일부 흡수해 줬기에 가능한 일이지만.”

그가 손을 내밀어 검은 비를 받는다.

그때마다 빗물이 의지를 가진 듯 델버튼의 안으로 파고든다.

흡사 기생충이 숙주의 안으로 들어가는 듯한 모습.

“이번 챕터는 끝났어. 나도 모르게 너무 많이 개입해 버렸지만 후회는 하지 않는다.”

“챕터가 끝났다고?”

“이것만 봐도 그렇지.”

조금씩 잦아들고 있는 폭우.

끊임없이 정화 작업을 이어 나간 덕인지 혼탁하기는 해도 임시 저수지에는 평범한 물이 차 있었다.

여전히 잔류하는 검은 비가 있기는 하다만 그것도 내가 시간을 들여 작업한다면 정화될 것이고.

“이블아이.”

-치지지지지직!

순간적으로 델버튼의 몸에서 스파크가 강렬히 튀어 올랐다.

통증이 상당한지 녀석의 얼굴이 구겨진다.

[경고!]

[시나리오가 정상적인 경로를 이탈했습니다!]

[시스템적 제약이 부여됩니다!]

시스템적 제약.

NPC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 중 하나.

아무리 강한 NPC여도 탑에 속해 있는 이상 시스템의 제약에서 벗어날 수 없다.

“자네가 만들어 가고 있는 세상이 마음에 들어. 또 보지. 거인의 무덤으로 향하게.”

그 말을 끝으로 녀석은 싱긋 웃었고.

[챕터Ⅱ- 검은 비가 강제 종료됩니다.]

[82층 클리어]

델버튼이 말한 대로 챕터가 종료되었다.

대기실로 이동하기 전, 쌓였던 검은 비를 모두 쏟아 낸 걸까. 하얀 구름과 밝게 빛나는 태양을 볼 수 있었다.

* * *

“후우.”

대기실에 마련된 소파에 앉았다.

온몸이 쑤신다. 무리하게 혼돈을 흡수한 후유증에다가 막바지에는 골드 등급의 숭배자를 상대하기까지.

“아 씨, 이름이라도 봐둘걸.”

얼굴을 찌푸렸다.

워낙 상황이 안 좋아서 권능으로 정보도 못 읽었다.

그래도 얼굴은 알았으니 나쁘지는 않다. 녀석이 따르는 거로 보이는 녀석의 이름도 알게 되었고.

그라함이었던가.

독자적인 세력을 지니고 있는 골드 등급이 몇 있다. 데이본드, 유헤다.

제대로 된 골드 등급을 부려먹은 거로 봐서는 그라함도 그놈들과 동급의 괴물이라고 봐야겠지.

언제 어떤 식으로 만나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쭈욱 기지개를 켰다. 어찌 됐든 챕터가 끝났다. 상처도 일단은 나았다.

“강제 종료는 처음이네.”

“그에에.”

고생한 덕춘이의 턱을 긁어 주며 화면을 바라봤다.

강제 종료라고 말하기는 했어도 곧 끝날 챕터기는 했다. 챕터 이름부터가 검은 비였고, 난 그것을 막아 내고 있었으니까.

델버튼이 나타나지 않았더라도 금방 챕터가 종료됐겠지. 숭배자 녀석 때문에 몸은 성치 않았을지 몰라도.

이제 거인계 시나리오도 한 챕터 남았다.

살짝 불안하기는 하다.

“80층대는 새롭게 들어가는 인원이 기존에 들어간 등반가가 만든 챕터에 추가되는 형식이야.”

막말로 내가 이 고생을 해서 괜찮은 미래를 만들어 놨다 한들, 나보다 먼저 다음 챕터로 넘어간 녀석이 있다면 그 녀석이 속한 챕터에서 해결을 봐야 한다는 거다.

뭐라도 해 놨으면 발버둥이라도 쳐 보겠다만 만약 아무것도 안 해 놨다면? 오히려 상황을 악화시켰다면?

그때는 뭐, 조지는 거지.

“어째 상위층이 더 커뮤니티를 써야 할 거 같단 말이야.”

그래야 서로 일 안 꼬이게 일정 맞추지. 필요하면 도움도 주고받기도 하고.

이거 말고도 위험 요소는 더 있다.

일단은 상황을 지켜봐야겠지.

편하게 소파에 등을 기댄 채 화면을 바라봤다.

어떤 식으로 흘러갈까.

“검은 비는 제대로 막은 거 같군.”

언더 시티뿐만 아니라 자이언트 폴리스에 내렸던 검은 비도 모두 정화되었다.

임시로 만든 저수지의 물은 따로 수로를 파서 다른 곳으로 흘려보냈고.

골목을 통제하면서 흡수한 이주민들은 언더 시티에 정착했다.

여기서 한 가지 눈에 띄는 것이 있었으니.

“괜찮네.”

“그에엑.”

자이언트 폴리스와 언더 시티의 경계가 좀 완화되었다는 것.

뭐라고 해야 하나. 여전히 서로에 대한 경계심이 남아 있기는 하지만 이전보다는 낫다.

언더 시티도 전부는 아니지만 음지에서 벗어나 양지로 올라간 느낌이고.

열악했던 환경도 꽤 나아졌다. 노후된 건물을 철거하고 새롭게 짓는 건 물론이요, 위생 상태가 의심스러웠던 거리도 상당히 깔끔해졌다.

가장 마음에 드는 건 역시.

“숭배자들도 함부로 나대지는 못할 거야.”

놈들이 외쳐 대던 것은 그거다. 멸망은 피할 수 없으며 그 증거 중 하나가 검은 비라고.

숭배자들에게 동조했던 이들도 이번 일을 계기로 생각이 달라졌겠지.

그에 따라 놈들의 입지가 줄어든 건 당연한 일이고.

-촤르르르륵

화면이 계속해서 넘어간다.

정확히 어디인지는 모르겠다. 자이언트 폴리스에서 살짝 벗어난 곳인 거 같기도 하고.

여전히 밖은 상황이 좋지 않다. 이미 검은 비에 오염된 곳이 원래의 모습을 되찾으려면 시간이 필요하니까.

게다가…….

“검은 비를 완벽하게 막은 건 또 아니란 말이지.”

전보다는 약해졌지만 여전히 먹구름은 거인계 곳곳을 돌아다니며 비를 뿌리고 있었다.

알 수 없는 공간. 후드를 뒤집어쓴 놈들이 움직이는 것이 보인다.

-촤르르르

이번에는 광장. 사람들 사이로 숭배자들이 돌아다니며 뭔가 선전을 하고 있다.

몇몇은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고, 누군가는 돌멩이를 집어 던졌다.

자세한 내용은 모르겠지만 포스터에 나로 보이는 그림이 그려져 있다.

하여간 썩을 놈들. 한시도 가만히 있질 않아요.

그런데…….

“저건 뭐야.”

놈들이 건물마다 붙이는 포스터. 그곳에는 나 말고도 다른 존재가 그려져 있었다.

멀리 떨어졌다가 다른 곳을 비추는 화면.

새롭게 몰려든 이들과 기침을 하는 이들. 도둑질. 누군가의 눈치를 보다가 달려가는 이들까지.

자세히 보기 위해 눈을 가늘게 뜨는 찰나.

[82층 클리어]

[혼돈 수치 +15점]

[83층으로 전송됩니다.]

화면이 끊기며 마법진이 생성되었다.

바로 올라가는 건가.

혼돈 수치 15점이 결코 적은 점수는 아니지만 큰 감흥은 없었다.

이미 혼돈 수치는 100점을 넘긴 지 오래고, 이번에 흡수한 것도 상당해서.

툭툭. 손을 털었다.

시간이 좀 더 있었다면 확인해 보고 싶은 것들이 있었는데 당장은 힘들 거 같으니 83층에 올라가서 체크해야지.

이번에는 전과는 다른 양상으로 흘러갈 것이다.

멤버들을 비롯해 상위 헌터들, 연합 사람들도 같이 움직일 테니까.

숭배자가 떼거리로 덤벼들어도 상대할 자신이 있다.

-우우우우웅

천천히 번져 나가는 빛.

난 그것에 몸을 맡겼고.

[83층에 진입합니다.]

이내 빛이 사라졌을 때는 익숙한 공간이 펼쳐졌다.

* * *

언더 시티. 산맥 거인들이 운영하는 술집의 창고. 내 침실이 있는 곳이기도 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몸 상태를 점검하며 나와 덕춘이의 정보를 확인했다.

이번에 혼돈을 흡수하면서 변화가 있어서 말이지.

일단 나는…….

“흐음. 잘 모르겠어.”

모르겠다. 혼돈 수치가 일정 수준을 넘어가면서 새로운 규칙이 적용되는 건 확인했다.

혼돈의 파편이 그러했던 것처럼 대미지 일부가 무효화 됐으니까.

이건 좋은 거다. 수준이 높은 헌터라도 방심하면 당하는 이유가 뭘까.

공격 스킬이나 다른 스킬 중에는 S급을 뛰어넘는 스킬이 있지만 내성 스킬은 아니다.

태생적으로 S급을 넘어설 수 없다는 것. 즉, 아무리 레벨을 올려 봤자 한계에 도달하고, 다른 공격에 저항할 뿐 완전히 무시할 수는 없다는 거다.

물론 예외도 있기는 하다.

내가 가지고 있는 정신 보호. 이것도 원래였다면 S등급에서 끝나야 했겠지만 칭호 효과 덕분에 SSS등급까지 올라갔다.

적어도 정신 공격에 있어서만큼은 무적에 가깝다는 말.

나는 이 정도로 끝이고. 덕춘이는…….

“아이고오, S급에 올라서신 덕춘 님 아니십니까.”

“그에에.”

꾸벅 절하는 시늉을 했다.

톡톡. 내 머리를 두드리는 녀석.

괘씸한 마음에 옆구리라도 꼬집어 주고 싶었으나.

[덕춘(카오스 개구리-S)]

-속성: 카오스

-특성: 산성(SS), 회복(SS), 독(SS), 화염(S), 외갑(SS), 괴력(SS)

-고유 능력: 뺨치기(SS), 폭식(SS), 혀놀림(S)

-강력한 혼돈을 지닌 영물입니다.

S등급이 되면서 스펙이 높아져서 어떻게 할 수가 없다.

거의 능력 대부분이 SS급이라. 이거 진짜 나보다 강한 거 아닌가.

아니 그보다…….

“고유 능력이 왜 이래, 버근가?”

혹시나 싶어 덕춘이를 뒤집어 흔들어 봤으나 ‘혀놀림(S)’가 바뀌는 일은 없었다.

대신…….

“그엑!”

-찰싹!

“크하악!”

혓바닥으로 뺨을 맞았지.

진짜 목 돌아갈 뻔했다. 뭐라고 해야 하지 손목 스냅 아니지, 혓바닥 스냅이 더 날카로워진 기분.

아무래도 검은 비를 먹으면서 생겨난 게 아닌가 싶은데.

“무시무시하군.”

뺨치기와 혀놀림의 콜라보가 이루어진다면?

폭식과 혀놀림이 합쳐진다면?

그 시너지는 말할 것도 없을 터.

과연 카오스 속성의 영물이로다.

더더욱 굉장해져 가는 덕춘이를 보며 두려움에 떨고 있는 타이밍.

-똑똑

누군가 문을 두들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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