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탑에 갇혀 고인물-458화 (457/740)

458화 이길 수 있습니다

놈들의 발목을 잘라내는 사이 떠오른 메시지.

발목 수확자.

그 효과 덕분인가.

-사각!

“효과 좋네.”

10미터가 넘어가는 거인, 그 커다란 몸을 지탱하기 위해 발목 역시 굵고 단단하건만 전보다 수월하게 자를 수 있었다.

행동 관련해서 칭호가 생겨난 건 오랜만이다.

이런 칭호가 효율이 좋다. 특정 부위기는 하지만 대미지가 더 들어가니까.

보정치가 들어가는 것과 들어가지 않는 것은 분명한 차이가 있다.

그건 그건데.

‘새로운 칭호가 생겨날 가능성이 열렸다라.’

이게 정확히 뭔지 모르겠다.

발목 수확자에 대한 이야기인가, 아니면 거인이 공포를 느꼈다는 메시지에 대한 내용인가.

둘 다일 수도 있기는 한데 가능성은 작다. 그랬다면 ‘거인 발목 수확자’ 이런 식으로 칭호가 생겨났을 테니까.

이건 천천히 알아봐야겠다. 칭호라는 게 얻고 싶다고 마음대로 얻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시스템적인 판단이 내려진 후에 받는 거라서.

“좀 지치기는 하는군.”

“그에에.”

정신없이 움직이며 검을 휘둘렀기 때문일까 체력이 빠르게 깎여 나간다.

은신 스킬을 비롯한 스킬들과 칭호, 권능을 한 번에 몰아서 써서 그런 건가.

80층을 넘어서면서 초인의 영역에 들어섰지만 그건 이곳에 있는 숭배자들도 마찬가지.

“무작정 움직여 봤자 당할 뿐이다!”

“밑을 주시하고 뒤에 있는 놈들은 저 새끼들 쏴!”

신체적인 차이와 예상치 못한 스펙으로 예상보다 많은 숭배자들을 무력화시킬 수 있었지만, 놈들도 바보가 아닌 만큼 대응에 나섰다.

결국에는 놈들의 수가 더 많다. 한 번씩만 공격해도 수십 개의 공격이 들어온다는 이야기.

전방에 선 녀석들이 대놓고 나를 견제하며 뒤에 있는 놈들이 원거리 스킬을 사용해 산맥 거인들을 공격한다.

좋은 방법이다. 아주 멍청이는 아니라 이거지.

그렇게 나온다면.

“하하! 잘 있어라, 멍청이들아!”

“그에엑!”

덕춘이와 함께 중지를 곧게 뻗으며 도망쳤다.

그레고리를 비롯한 산맥 거인들도 뭔지는 모르는 눈치였지만 똑같은 손가락 모양을 만들며 전장에서 이탈했다.

아주 멍청이가 아니면 뭐 할까. 덜 멍청이도 멍청인데.

지들이 쫓는 입장이면서 똘똘 뭉치면 어쩌자는 건지. 에휴.

우리야 그때를 노려 도망치면 그만이었다.

한바탕 난리를 겪은 숭배자 놈들이 눈을 깜빡인다.

발을 붙잡으며 신음을 흘리는 이들과 바닥을 적시고 있는 피.

그렇게 만든 나는 저 멀리 달아나고 있는 상황.

“뭐, 뭐야.”

“뭐긴 등신아, 쫓아!”

“젠장!”

이제야 본인들의 실책을 깨달은 놈들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작게 혀를 찼다.

“아쉽네. 더 잡을 수 있었는데.”

나와 산맥 거인들에게 당한 숭배자가 대략 12명 정도.

조금만 더 빠르게 움직였다면 20명까지는 전투 불능으로 만들지 않았을까?

죽이는 게 목적이 아니라 못 움직이는 게 만드는 것에 중점을 맞췄는데도 이 정도다.

고개를 흔들며 아쉬움을 지웠다.

어차피 이 방법은 한 번밖에 안 통한다. 놈들의 머릿수가 월등히 많은 상황, 우리를 얕보고 있어서 가능했던 수법이었으니까.

뭐, 상관은 없다. 어디까지나 방금의 전투는 시간을 더 벌기 위함이니까.

칭호 효과로 찾아온 밤.

누군가에게는 낯선 현상일지 모르겠지만.

“이쪽인 거 같은데?”

“내 느낌이 이곳을 향하고 있다!”

“만악의 근원! 이블아이는 어디 있느냥!”

멤버들에게는 아니라서.

나팔 소리와 밤이 찾아온 장소. 내가 있는 위치를 파악하는 건 어렵지 않을 거다.

중간에 억울한 외침이 섞여 있기는 했지만 뭐 어떤가.

“저기닷!”

“저놈을 매우 쳐라!”

“하하하하! 내가 왔다!”

타이밍 좋게 합류해 준 것을.

4번 구역, 반쯤 허물어진 건물 사이로 멤버들이 모습을 드러냈고.

“처리 대상이 늘어났다!”

“저 자식들 잡아!”

“한 번에 처리해!”

나를 쫓던 숭배자들도 몰려왔다.

뭐지, 왜 포위된 기분이지?

“이블아이, 지원군이 맞나?”

“어째 우리를 공격하려는 거 같은데.”

거인들도 비슷한 느낌을 받은 거 같다만.

“그, 그럴 리가 있나. 우리를 도우려고 멀리서부터 달려온 건데.”

두 팔 벌려 녀석들을 맞이했다.

설마 아무리 내가 제대로 말도 없이 위로 올라갔지만 그걸로 악감정을 가질 리가…….

-콰아앙!

-까드드드득!

…있군, 있었어.

바로 나를 향해 몸통 박치기를 하는 탈모맨과 이때다 싶어 다리를 거는 냥펀, 그 위로 올라타 파운딩을 날리는 핥짝이.

“치사하게, 어? 먼저 올라가? 페어플레이가 없어!”

“얍! 얍! 죽어랏!”

“서운하게 말도 없이 가다니!”

왤까, 데자뷰가 느껴지는데.

일단 몸을 둥글게 말았다. 맞아 보니까 이게 덜 아프더라고.

아니, 그보다.

“지금 이럴 때가 아니라고! 저놈들부터 처리해야 한다니까악! 악! 옆구리 찬 애 누구야!”

빈틈을 노리고 발을 꽂아 넣다니, 이런 사악한!

알고는 있었지만 이 녀석들 사람 패는 기술이 좋다.

짧은 분풀이가 끝난 시점. 손을 턴 핥짝이가 턱을 까딱인다.

“저놈들 왜? 다른 녀석들이 알아서 상대할 텐데.”

“다른 녀석들?”

멤버들 말고 다른 놈들도 왔나?

다른 지역에 있던 거인들이라도 데리고 온 건가 싶어 고개를 돌리자.

“저 간악한 무리를 처단하자!”

“이블아이의 원수를 갚아라!”

“쁘찡 연합의 이름으로!”

어째서인지 낯익은 놈들이 숭배자들을 덮치고 있었다.

79층에서 만났던 상위 헌터들. 다 같이 80층에 올라 전력을 다듬고 있어야 할 이들이 왔다.

진짜 장비 하나도 없이 빈털터리 상태라 시간이 더 걸릴 줄 알았는데 예상보다 빠르게 장비를 맞췄다.

“내가 힘 좀 써 줬징!”

“…반강제로 대출시켜서 판 거잖아.”

“정당한 거래닷! 이자도 25퍼센트밖에 안 돼! 쁘찡 연합으로 들어온다고 해서 깎아준 거라구.”

탈모맨의 말에도 당당히 가슴을 펴는 냥펀.

그렇구만. 화조국에 연락해서 장비를 맞춰 준 모양이다.

그래도 이자가 20퍼센트가 넘으면 날강도 아닌가? 3금융권도 저 정도는 아닐 거 같은데.

됐다. 냥펀의 술수에 놀아난 녀석들이 잘못이지.

상위 헌터들도 쁘찡 연합에 들어온 건 의외긴 하다.

그나저나.

“잘 싸우네.”

상위 헌터들과 두 번째 챕터로 넘어오며 합류한 거인들까지 섞여서 싸우고 있는데 위세가 굉장하다.

그동안 79층에 박혀 있는 동안 쌓였던 경험을 쏟아내는 느낌.

다들 오랫동안 등반을 해 온 이들이다. 자기만의 노하우와 기술은 충분하다는 이야기.

할 게 없었던 만큼 서로의 지식을 교류하며 더 숙달됐을 것이다.

“히야압!”

그중 유독 돋보이는 녀석들이 있었으니 그곳에서 만났던 한국인 김선혜와.

“가자!”

“으으! 긴장돼! 마그마가 나온다!”

요정 클럽의 근육 요정과 마그마 요정.

“오? 후배 실력 괜찮은데?”

“닥쳐라.”

“하하하하! 패기가 좋아. 같은 산군 출신끼리 너무 날 세우지는 말자고.”

“그곳과는 연 끊은 지 오래야.”

“우연이네. 나도 그런데.”

그 옆에서 전투를 벌이는 루키 클럽의 김조균과 오징혁.

“어?”

오징혁?

얘가 왜 여기 있어.

눈이 마주친 녀석이 눈살을 찌푸린다.

“더 끔찍한 모습이 되었군, 이블아이. 몇 번을 봐도 얼굴을 밟고 싶어.”

“오빠, 그런 말 쓰면 안 된다고 했지?”

“…지르밟고 싶어.”

“그래, 그 정도면 노력했어. 잘했어.”

“난 항상 잘하지.”

옆에 익숙한 핑크 머리도 보인다. 메카닉을 사용하던 여인, 놀랍게도 오징혁과 연인인 김소담.

쁘찡 연합 소속인 동시에 상위층으로 오르면서 보기 힘들었던 이들.

“우리 올라갈 때쯤에 연합 사람들도 좀 올라왔더라. 쟤네는 좀 빠르게 움직여서 우리랑 같이 온 거고.”

친절하게 핥짝이가 설명해 준다.

하긴, 슬슬 연합 사람들도 위로 올라올 때가 되기는 했다.

생각보다 잘 올라오고 있다. 공략 덕분인지 아니면 나와 멤버들과 달리 무리를 지어 안전하게 등반을 한 덕인지 낙오자도 없는 거 같고.

물론 앞으로도 그럴 거라는 보장은 없다. 이미 70층대에서 등반이 멈춘 이들도 있다고 하니까.

아마 오래지 않아 탑 밖으로 나가게 되는 사람들도 생길 거다.

‘이미 다른 쪽에서는 그렇다고 하던데.’

등반을 하며 생긴 인연들이 좀 있다. 노블 나이트와 빅스타 길드.

이준석을 통해 이야기를 들어 보니 그쪽에서는 몇 명 탑 밖으로 나간 이들이 있다고 한다.

실력이 부족하거나 운이 나쁜 케이스도 있고.

‘등반이 어렵다고 판단되면 이쪽 소식을 알리기 위해 일부러 밖으로 나가는 경우도 있다고 했지.’

빅스타는 미국의 대형 길드. 확실히 체계적인 부분이 있다.

쁘찡 연합은 근본 자체가 탑 내부에서 생겨난 것이기도 하고, 길드보다는 다 같이 어울려 노는 느낌에 가까워서 바깥 상황까지 어떻게 할 여력이 안 된다.

뭐, 상위층까지 올라간 이들이 나가게 된다면 어떻게 될지 모르겠지만.

그때는 바깥세상도 많은 게 변할 거다. 인류의 한계라고 여겨졌던 60층대를 돌파해 상위층까지 오른 헌터들이 대거 나올 테니까.

‘조만간 이준석과 이야기를 좀 해야겠군.’

우선은 이쪽부터 해결해야겠지만.

생각했던 것보다 많은 지원군이 왔다. 전세를 완전히 뒤집을 수 있을 정도의 전력.

빙글, 검을 돌렸다.

“옆에서 구경만 할 수는 없지.”

“그것도 맞는 말이야. 그거 알아? 숭배자 놈들 아예 공식적으로 우리를 적으로 간주하겠다고 선포했더라.”

“어?”

핥짝이의 말에 미간을 좁혔다.

“위로 올라가기 전에 릴카가 말해 줬어. NPC들 사이에서 그런 말이 나왔다고.”

“평소 숨어다니던 녀석들이 움직인 거라 화조국에서도 예의주시하고 있엉.”

“나오면 다 때려잡으면 되지! 안 그래?”

내가 없는 사이 NPC들 간에 뭐가 있었던 모양이다.

사실 크게 달라지는 것도 없다. 숭배자와 척을 진 게 언젠데. 평탄한 등반을 위해서라도 숭배자들은 잡아야 한다.

-콰아아앙!

숨을 고르고 숭배자들을 향해 돌진했다.

지원군의 개입에 놈들의 진형이 깨졌다. 주니어라고는 하지만 골드 등급이 녀석들도 섞여 있어 저항이 거세다.

그래 봤자 발악에 가까운 일이었지만.

숭배자들을 모두 쓸어버린 후 단숨에 3번 구역과 자이언트 폴리스에서 온 이들을 제압할 생각.

“제대로 해보자고.”

내게 달려드는 놈을 향해 검을 내질렀다.

* * *

자이언트 폴리스, 언더 시티로 들어가는 골목에 위치한 건물에 한 남자가 의자에 앉아 있다.

언더 시티를 통합하기 위한 싸움. 다양한 세력이 뒤섞인 광경을 바라보던 숭배자가 후드를 벗었다.

골드 등급을 상징하는 목걸이를 찬 인물, 그라함.

자기만의 독자적인 세력을 만들 수 있는 골드 등급 시니어였다.

데이본드와 유헤다와 같은 위치. 하지만 영향력은 달랐다.

거인 종족 특성상 80층대 밑에 존재하는 거인이 없기 때문. 그에 대해 항상 불만을 품고 있었기에 이번이 기회라고 생각했다.

보다 높은 곳에 위치한 이들에게 잘 보이는 동시에, 눈엣가시인 이블아이 파티를 해결해 입지를 다지는 것.

그렇기에 숭배자들을 동원한 것인데.

“역시 보통은 아니군. 윗분들이 신경 쓰실 만해.”

이미 전투는 막바지로 흘러가고 있었다.

자이언트 폴리스에도 입김을 넣어 자경단까지 투입했건만 승자는 언더 시티였다.

결과를 확인했음에도 그의 표정은 변하지 않았다.

이 정도까지는 예상했다. 그저 소문으로만 듣던 것을 직접 확인하고 실력을 가늠해 보고자 했던 것.

전장에 내보낸 수십 명의 숭배자도 그에게는 장기 말에 불과했다.

그가 고개를 돌린다.

“어떠냐. 이길 수 있겠나?”

건물 내부, 양손을 모은 채 서 있던 거인이 이블아이를 바라봤다.

“네, 이길 수 있습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