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6화 안전장치
언더 시티를 통합하기 위해 가장 먼저 한 일 중 하나는 1번과 3번 구역 사이에 위치한 2번 구역의 전력을 강화하는 거였다.
강화를 위해 단순히 전투를 담당할 조직원들을 배치해 둔 것만은 아니다.
“파머, 괜찮겠어?”
“어차피 이곳 또한 스쳐 가는 곳일 뿐이다. 우리의 근본은 따로 있으니까.”
우리는 전쟁을 하려고 하는 게 아니다. 적어도 언더 시티의 주민들과는 말이지.
멸망에 저항하겠다는 대의를 내걸었고, 종말을 거부하는 자라는 상징을 내세웠다.
여기서 목적을 달성하겠다며 다른 사람들을 휘말리게 한다면 그건 안 될 일. 애초에 정의니 뭐니를 내세운 적은 없지만 우리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그걸 원하니까.
가뜩이나 고달프게 사는 이들을 괴롭히고 싶지도 않고.
그래서 2번 구역에 있는 주민들을 모두 빼냈다. 이미 나머지 구역은 하나로 통합된 상황. 구역 간의 경계는 없었다.
이번 전투에 있어서 전장이 되는 곳은 2번 구역. 파란 손 조직을 이끄는 파머가 있던 곳이었다.
“확실히 이렇게 싸우니 편하긴 하네.”
팔짱을 낀 채, 텅 비어 유령 도시처럼 된 곳을 바라봤다.
시나리오를 겪으며 전쟁도 해 보고 이런저런 일을 많이 해 본 결과, 보급품의 중요성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다.
적을 말라 비틀어지게 하려면 보급 물자를 끊는 것만큼 좋은 방법이 없었고, 정상적인 전력 유지를 위해서라도 보급은 필수였다.
그런 의미에서 언더 시티 내에서의 싸움은 그 부분을 걱정할 필요 없었다. 진영 바로 앞에서 싸우는 거나 마찬가지였으니.
“각 구역의 치안을 담당하는 인원과 혹시 모를 기습에 대비한 인원을 제외한다면 거의 다 모았다, 이블아이.”
“다 합치면 300명 정도 되는군. 이렇게 모인 건 처음이야.”
“부족 간의 전쟁에서도 이러지는 않았는데 말이지.”
나를 비롯해 산맥 거인들, 각 조직의 수뇌부와 행동 대원들이 모였다.
부족 사회를 기본으로 하고 있는 이들에게는 낯선 모습이기도 했다.
이것도 다 검은 비 때문에 거인들이 한곳에 몰리며 생겨난 현상이지만.
개인의 무력은 뛰어날지 몰라도 전략적인 부분, 규모 있는 싸움에서는 부족한 게 거인이다.
이쪽으로는 그나마 내가 아는 편이라서 직접 지휘하기로 했다.
다들 긴장한 눈치였지만 사실 크게 위협적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몇 가지 이유가 있었는데.
“놈들도 멍청이는 아니니 싸우지는 않을 거다.”
“전력부터 차이가 나지 않는가. 불필요한 피해를 만들 이유가 없지.”
“특히나 놈들은 구성원들 간의 단합력이 좋지 않다.”
첫 번째는 역시 전력 차이.
아무리 1번과 3번 구역이 힘을 합친다 한들, 3개의 구역에다가 산맥 거인들까지 합류한 우리와 비교하면 약하다.
두 번째는 구성원의 차이.
대부분의 구역은 강세 부족을 필두로 하여 조직을 운영해 왔지만 두 구역은 상황이 좀 달랐다.
파머의 이야기로는 두 구역을 관리하는 우두머리들은 고향에서 데리고 온 인원이 그리 많지 않다고 한다.
때문에 온갖 부족이 뒤섞인 형태를 지니고 있다나. 서로 살아온 환경이 다른 만큼 내부적인 마찰도 잦은 편이고.
검은 쥐 부족은 약탈자 집단이라 상명하복이 확실하고, 파란 손 조직은 전사끼리의 형제애가 강해 단합이 잘되는 것과는 달랐다.
여기까지만 보면 걱정할 게 전혀 없는데.
“늦어. 아무리 생각해도 진작에 답변이 왔어야 해.”
이미 통보한 시간이 코앞이다.
그나마 어제까지는 두 구역에서 몰래 넘어온 거인들이 있었는데 새벽을 기점으로 발길이 끊겼다.
구역에 있는 거인들이 다른 곳으로 가지 못하도록 막았다는 뜻.
가능성은 2개다.
‘탈주하는 이들로 인한 혼란과 불안감을 줄이기 위해, 그것도 아니면…….’
방패막이.
그렇게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전자이기를 바란다. 후자면 끝까지 우리와 싸우겠다는 뜻이나 다를 바 없으니까.
“이블아이, 시간이 됐다.”
태양을 바라보던 그레고리가 말했다.
진격하기로 통보했던 시간이 됐다. 조금 더 기다려 보고 싶었지만 이미 말을 꺼낸 이상 움직여야 하는 법.
열심히 머리를 굴리던 놈들도 막상 전력 차이를 두 눈으로 확인하면 반응을 보일지 몰랐다.
-쿠웅, 쿠구궁
대열을 맞춰 움직이는 거인들의 발걸음이 울려 퍼진다.
수백의 거인, 각 부족과 조직의 특성에 맞춰 배치한 병력이 움직이는 건 꽤 웅장했다.
게다가 하나 더.
“이건 좀 부담스러운데.”
“받아들여라. 종말에 저항하는 자를 자처한 이상 이 정도는 해 줘야 한다. 우리들이 모인 구심점이 너니까.”
산맥의 대표, 그레고리.
약탈자 검은 쥐 조직의 대표, 디레트.
설산 출신의 파란 손 조직 대표, 파머.
5번 구역, 늪지대 출신 조직 초록 물의 대표, 누오.
4명의 대표가 어깨에 가마를 짊어졌고, 그 위에 내가 올라타 있었다.
각기 다른 부족의 상징이 그려진 가마에 펠라인 세트를 착용한 나.
이게 참 어이가 없는 게 펠라인 세트가 각 속성을 지니고 있는지라 거인들 입장에서는 대통합의 상징으로 느껴졌다고 한다.
약간 끼워 맞추기 느낌이기는 하지만 본인들이 그렇게 생각한다니 그러려니 하는 중.
끽해야 100킬로그램도 안 되는 날 4명의 거인이 들고 있는 모습 자체가 웃기기는 하지만 거인들의 입장에서는 중요한 부분이라고 한다.
사기 진작도 중요한 법이라 자세를 똑바로 한 채 거마에 앉았다.
“바리케이드라, 얕은수를 쓰는군.”
“시간 끌기도 안 될 텐데.”
가능한 2번 구역을 전장으로 쓰고 싶지만 놈들이 들어오지 않으면 못 한다.
수성을 하는 편이 더 유리하니까. 지금도 구역을 나누는 경계에 잡동사니를 쌓아 뒀고.
거인들의 피지컬을 생각한다면 무의미한 짓이나 다를 바 없지만.
단순히 방어를 위해 저러는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1번과 3번. 양쪽으로 나누어진 만큼 어느 쪽으로 공격할지 정해야 한다.
한쪽을 공격하면 다른 한쪽에서 별동대가 나와 덤벼들 수도 있으니까.
그렇다고 본대를 나누어 양쪽으로 동시에 공략한다?
‘위험 부담만 커지지.’
차라리 한쪽을 빠르게 무너트리고 점거한 다음, 다른 쪽을 치는 게 편하다.
싸움을 피할 수 없다면 가능한 빠르게 끝내는 게 좋다고 판단했다. 다른 구역이 무너지는 걸 본다면 남은 구역이 항복할 수도 있는 거고.
그렇기에 작전을 짰다. 몇 가지 안전장치도 만들어 뒀고.
“계획대로 간다. 1번 구역을 치고, 대기조는 2번 구역에 남아 이쪽으로 들어올지 모르는 적을 감시해. 어설프게 상대할 생각은 버려. 아직까지 반응이 없다는 건 끝을 보겠다는 의미니까.”
지시를 내리자 거인들이 빠르게 움직인다.
2번 구역에 남아 감시하고 대응하는 건 늪지대 출신, 누오를 비롯한 거인들이 맡기로 했다.
지역을 잡고 전투를 벌이는 것은 그들의 특기. 방어에 대해서는 전문가였으니까.
그들을 제외한 거인들이 달렸다.
“가자! 1번 구역부터 조져!”
“그놈들이 식량 가지고 장난질 칠 때부터 마음에 안 들었어! 이번 기회에 확실히 서열 정리를 하자고!”
1번 구역을 가장 먼저 노리는 이유.
이쪽을 차지하면 식량을 획득할 수 있다. 언더 시티가 자이언트 폴리스를 양분하는 세력이라고는 하지만 결국에는 이주민들의 주거지.
자이언트 폴리스에 많은 것을 의존하는 중이다. 그중 가장 큰 부분이 식량이고.
이번 싸움으로 자이언트 폴리스는 우리를 경계할 수밖에 없다. 서로의 입장을 확인하고 대화를 하는 동안 시간이 필요할 터.
그때까지 모든 거래가 멈출 가능성도 있었으니 버틸 수 있는 식량 확보가 우선이었다.
* * *
-콰아아아아앙!
거인들의 육탄 돌격에 바리케이드가 산산조각 났다.
나름 경계를 만들겠답시고 벽을 세웠으나.
-사아아아아
-콰가가가가강!
파란 손 조직원들이 주술을 사용하자 한기가 퍼지며 벽을 통째로 얼렸고, 그대로 부숴 버렸다.
얼음 파편이 날아오르는 사이 다른 인원들이 돌격.
“검은 쥐의 힘을 보여라!”
“다들 감 잃은 거 아니겠지? 달려!”
진입은 검은 쥐가 맡았다. 약탈을 업으로 삼았던 이들만큼 적진을 휩쓰는 것에 최적화되어 있다.
기동력이 좋았으며 손속에 자비가 없다.
“제기랄! 놈들이 왔다! 막아!”
“나, 나는 싸울 생각이 없어! 그냥 이놈들이 협박해서 온 거란 말이야!”
1번 구역을 관리하는 이들과 이주민으로 보이는 이들이 뒤섞여 있다.
몇몇은 싸움을 거부한다고 외쳤지만.
“그런 말을 할 거면 무기를 내려놓고 말해라!”
“그 창으로 뒤에서 찌를지 누가 알아!”
검은 쥐 소속 거인들에게 있어 싸울 수 있는 이들은 모두 적이었다.
내가 생각해도 저게 맞았고. 말 같지도 않은 동정심은 약점이나 마찬가지. 저러다 뒤통수를 칠지 안 칠지는 누구도 알 수 없다.
아니나 다를까.
“이이익! 개자식들!”
슬금슬금 뒤로 빼던 이들이 일제히 달려들기 시작했다.
거대한 무기와 주먹, 고함이 공간을 가득 메운다.
고향을 중요시하는 거인들에게 있어 영역 침범은 매우 예민한 주제였으며, 그에 따른 대가는 목숨으로 받는 것이 일반적.
검은 쥐가 진영을 붕괴시키자 산맥 거인들이 파고들었다.
다른 부족에 비해 그 숫자는 적은 편이지만 사방에 몬스터와 괴물들이 사는 곳에서 살아남은 이들이다.
그뿐일까. 챕터에서 활동하는 NPC들인 만큼 전원이 등반가 출신.
단순 무력으로 봤을 때 어중간한 중립 NPC들과는 궤를 달리했다.
-콰아앙!
“크하아압!”
“으아아아아악!”
“이 괴물들은 또 뭐야!”
주먹에 맞은 이들이 날아가 버리는 건 물론이었고, 발차기를 가하자 건물들이 우르르 무너진다.
적들이 주술을 써 가며 반항했지만…….
“이거 뭐, 쉽군그래!”
“좀 더 힘 써 봐!”
주술을 쓰지 않은 산맥 거인들에게 미치지 못할 정도였다.
가까운 사람에게는 친절하지만 산맥의 거인들은 꽤 호전적인 부족.
압도적인 폭력에 전의를 상실한 이들이 무기를 내려놓고 투항하기도 했다.
물론 일단은 제압을 해 버렸지만.
정신없이 싸우면서 포로를 관리할 여력은 없으니까.
내가 나설 것도 없었다. 그만큼 전력에서 차이가 났다.
그런데 왤까, 이 찝찝한 기분은.
“너무 쉬워. 어중이떠중이만 남아 있는 느낌이야. 게다가 달루라고 했던가? 그 녀석도 보이지 않는군.”
처음에는 당연히 간을 보는 거라고 생각했다.
탐색전. 비교적 약한 놈들을 보내 우리의 실력을 확인해 보려는 거라고 생각했는데, 주변이 거의 다 정리됐음에도 불구하고 놈들의 진짜 전력이 올 기미가 안 보인다.
여기에 하나 더.
“주민들이 보이지 않아.”
처음에는 싸움에 휘말리기 싫어서 건물 안에 숨어 있다고 생각했다.
혹은 언더 시티에서의 생활을 포기하고 골목 초입으로 들어간 건 아닐까 생각했는데.
‘급하게 떠난 느낌이기는 한데 몰래 도망치거나 대피한 거라 보기에는 내부가 너무 깔끔해.’
정확히 말하면 필요한 것들은 다 챙겨간 느낌이다.
정말 도망치려고 한 사람이라면 이 정도까지는 챙기지 못한다. 왜냐 가져가는 게 많을수록 짐이 되니까.
1번 구역을 정리하며 뚫린 건물 내부. 피난보다는 이사를 간 것 같다.
우연? 내가 예민한 건가?
아니. 의문이 쌓이면 분명 뭔가가 있는 거다. 적어도 내가 지금까지 겪어 온 바로는 그렇다.
아니나 다를까.
-뿌우우우우우!
2번 구역을 감시하던 팀이 나팔을 불었다.
변수가 생겼다는 이야기였고.
“역시 놈들도 꿍꿍이가 있었군. 다들 2번 구역으로 진입한다. 파머, 이쪽에 남아 정리해 줘!”
“그러지. 금방 마무리하고 합류하겠다.”
우리는 파란 손 조직을 남기고 2번 구역으로 방향을 틀었다.
그런 우리에게 보인 광경.
“이런 제기랄.”
개방된 3번 구역.
그곳에서 일단의 무리가 달려오고 있었다.
예상했던 거보다 훨씬 많은 이들. 그들의 정체를 알아차리는 건 어렵지 않았다.
“숭배자 놈들.”
짜증이 솟아오르는 것도 잠시.
입가를 비틀었다.
“그래, 놈들이 가만히 안 있을 줄 알았지.”
안전장치를 사용할 때가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