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탑에 갇혀 고인물-455화 (454/740)

455화 통보

거인계 두 번째 챕터를 클리어하기 위해 가장 먼저 한 건 언더 시티를 차지하는 것.

그 시작은 기존에 있던 구역을 하나로 합치는 것이었다.

내가 2번 구역으로 찾아간 이유도 그 때문이고, 디레트가 5번 구역으로 향한 것도 같은 이유다.

가능성을 본 결과, 2번 구역은 협조적으로 나왔지만…….

“좋게 대화로 해결했다.”

“크윽! 비겁한 녀석.”

디레트가 갔던 5번 구역은 그렇지 않았던 모양이다.

다시 돌아온 4번 구역, 산맥 거인들이 운영하고 있는 주점에 들어가니 묶여 있는 거인 한 명을 볼 수 있었다.

“저놈은 누구지?”

“5번 구역을 관리하는 녀석이지. 나름 친분이 있어서 쉽게 끝낼 수 있었다.”

“닥쳐라! 비겁하게 술 산다고 데려와서는 다짜고짜 묶어 놨잖아!”

“아, 걱정 마. 술은 내가 쏘지.”

쪼르륵.

컵 가득 술을 따른 디레트가 그의 앞에 잔을 내려놨다.

물론 묶여 있어서 마실 수는 없었지만.

디레트 이 녀석 인성이 굉장하다.

“네놈이 하는 짓을 보고 배웠지.”

날 바라보며 엄지를 세우는 녀석.

어디서 내 핑계를 대냐. 그냥 본인 성격이 안 좋은걸.

“그에에.”

물끄러미 눈짓을 주는 덕춘이. 아, 또 왜. 누가 보면 내 인성이 안 좋은 줄 알겠다.

그건 그거고.

“5번 구역도 함께하기로 한 거 맞는 거지?”

“물론이지. 순수하게 아무런 강압도 없이 자발적으로 함께한다고 하더군.”

“네가 협박한 거잖, 아악! 발 밟지 말라고!”

“아, 실수. 고의였다.”

억울해 보이기는 했지만 그건 둘이 알아서 풀라고 하자.

과정이야 어떻게 됐든 이야기가 통하면 된 거니까.

“그럼 전에 말한 계획대로 움직이도록 하지. 줄은 풀어 줘. 어차피 함께할 사인데 팔다리는 자유로워야지.”

“그것도 그렇군.”

디레트가 눈짓하자 옆에서 대기하던 부하들이 줄을 풀어 준다.

손목에 밧줄 자국이 선명한 게 꽤 오래 묶여 있던 거 같다.

“후우, 짜증 나는 녀석. 어쩌다 이런 놈이랑 엮여가지고.”

“고향 친구 좋다는 게 이런 거 아니겠어?”

“누구 마음대로 고향 친구냐. 전혀 다른데. 쯧. 일단 이야기는 들었다. 누오라고 한다. 멸망을 거부하는 난쟁이라고 했던가.”

“소인이다.”

“그거나 그거나.”

사실 난쟁이도 소인도 아니지만 굳이 정정할 생각은 없다.

여기는 거인계고 난 이방인이나 마찬가지니까. 놈들에 비해 작은 것도 사실이고.

협박이 섞여 있기는 했지만 5번 구역도 앞으로의 일에 동참하기로 결정한 거 같다.

“하여간 예전이나 지금이나 다를 게 없어, 에잉.”

손목을 문지르며 누오가 불만을 뱉어 낸다.

대충 이야기를 들어 보니 디레트와는 예전부터 알던 사이라고 한다.

디레트가 남쪽의 초원에서 약탈을 했다면, 누오는 초원 옆에 있는 늪지대에서 살던 이였다.

약탈한 물건을 교환하면서 교류를 했고, 가끔 합작해서 다른 유목민을 털어먹었다나.

끼리끼리 논다는 옛말은 틀리는 법이 없었다.

“그러는 넌 2번 구역과는 이야기를 잘 나눴나?”

“잘 풀었지. 나 먼저 왔고 좀 있으면 직접 올 거야. 해결할 일이 있다고 천천히 오겠다고 했거든.”

2번 구역의 우두머리인 파머 또한 언더 시티의 네임드.

무작정 움직이기에는 보는 눈이 많았다. 따로 처리할 것도 있는 눈치였고.

앞으로의 계획과 잡담을 나누며 시간을 보낸 타이밍.

-끼이익

주점 문이 열리며 파머가 들어왔다.

덥수룩한 수염과 짐승의 가죽으로 만든 옷을 입었는데, 꽤 튼튼해 보이는 것이 전투할 때 입는 것 같았다.

맹수가 남긴 것으로 보이는 발톱 자국과 이빨 자국이 있는 걸 보니.

언제든 싸울 수 있게 준비했다 이거겠지.

“보기 힘든 얼굴이 둘이나 있군. 과연 이블아이가 말한 대로인가.”

자그마치 언더 시티의 네임드가 3명이나 모였다.

거기에 산맥 거인들까지 있으니 언더 시티를 장악하는 건 어렵지 않아 보였다.

“노인네는 여전히 건강해 보이는군.”

“늙은이가 늙지를 않아.”

이미 구면인지 서로 아는 체를 한다.

“성격 더러워 보이는 얼굴도 그대로구나, 디레트. 누오 네놈도 심술이 얼굴에 잔뜩 붙어 있어.”

그다지 친해 보이지는 않았지만 말이지.

서로 으르렁거리기는 해도 나쁘지는 않다. 결국에는 한자리에 모인 거니까.

“계획은 다들 들었을 거야. 먼저 두 구역에 통보를 해야 돼.”

“안 그래도 전령을 보냈다.”

“일 처리가 빨라서 좋군.”

무작정 쳐들어갈 생각은 없다. 그랬다가는 다른 평범하게 살아가고 있던 거인들도 피해를 보니까.

안 그래도 고향을 잃어서 이곳으로 모여든 이들인데 기껏 터전을 잡았더니 부순다?

악감정이 안 생기는 게 더 이상하다.

궁극적인 목표는 숭배자들보다 많은 중립 NPC들을 확보하는 거다. 멸망에 저항하는 사람이 늘어나도록 하는 것.

통보하는 데 명분이 있느냐. 이것도 중요한 부분이기는 한데.

“소문은 잘 퍼트리고 있나?”

“물론이다.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지.”

“이미 예언에서 등장한 존재가 있다는 소문은 소문이라고 말하기도 애매하지.”

“그렇게 대놓고 돌아다녔는데 소문으로 받아들일 사람이 있나.”

우리에게는 나름의 명분이 있었다.

숭배자들이 예언을 가지고 멸망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외치는 것처럼 우리도 나를 상징 삼아 활동을 하는 것이다.

예언에서 나온 구원자와 함께 멸망을 이겨 내자고.

특히나 이곳은 멸망에 대한 거부감이 큰 곳. 적어도 언더 시티 내에서는 우리를 지지하는 이들이 더 많지 않을까.

“서신은 오늘 내로 전달될 거다.”

“잘됐군. 그럼 다음 계획으로 넘어가자고. 홍보는 해 뒀지?”

“물론이다.”

검은 쥐 조직원들이 1, 3번 구역으로 서신을 가지고 떠난 타이밍, 난 후드를 벗고 밖으로 나왔다.

오늘을 위해 대대적으로 홍보를 했다. 예언 속 존재가 멸망에 저항할 것을 선포할 예정이라고.

이미 언더 시티의 지배자 대다수가 그와 함께하기로 했다며 이야기를 하고 다녔다.

거기에 더불어 두 번째 태양을 없앴다는 이야기와 검은 비에 대한 것과 같은 일화와 정보를 풀어 댔으니 사람들의 관심이 쏠리는 건 당연했다.

* * *

“저게 그 소문의?”

“맞는 거 같은데. 헛소문인 줄 알았더니 그건 아닌 모양이야.”

“대대적인 발표가 있다더니 진짜인 거 같아. 검은 쥐들도 몰려 있잖아.”

“파머와 누오도 있어. 심상치 않군.”

수군거리는 사람들.

여론은 이미 만들어지고 있다. 나에 관한 이야기를 의도적으로 뿌린 결과, 나를 보기 위해 4번 구역으로 몰려든 이들도 제법 많았다.

미리 마련해 둔 단상 위로 올라갔다.

공개적으로 모습을 드러낸 건 이번이 처음이다.

“아아, 다들 반갑습니다. 저에 대한 소문은 많이 들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안전을 위해 검은 쥐를 비롯한 산맥 거인, 파머와 누오가 이끄는 각 구역의 가드들이 단상을 둘러쌌다.

그들의 얼굴을 확인한 이들의 표정에 묘한 기대감이 올랐다.

“시대가 바뀌었습니다. 멸망이 다가오고 있다는 사실은 누구보다 여러분이 더 잘 알고 있겠죠.”

찰랑.

보기 쉽게 병에 든 검은 비를 흔들었다.

2번 구역에서 파머를 설득할 때 느꼈는데 거인들에게 희망을 주고 같은 세력으로 흡수하기에는 이만한 방법이 없었다.

“말할 게 뭐가 있겠습니까. 행동으로 한번 보여 주는 것만 못한데. 맞습니다. 멸망을 막으려고 제가 왔습니다.”

검은 비를 손바닥에 부었다. 끈적하게 달라붙는 물질.

손가락을 펼치자 늘어지며 흘러내린다.

신성력으로 중화, 마기로 컨트롤, 이어서 아직은 낯선 혼돈을 사용하자.

-스으으으으

검은 비가 사라졌다.

그동안 연습해서 그런가 처음보다 수월하게 진행된다.

내게 쏠리는 시선.

가볍게 손을 털며 말을 이었다.

“우리랑 함께합시다. 저 망할 멸망인지 뭔지 막아 보자고요.”

턱. 단상을 잡았다.

“멸망은 받아들이는 게 아닙니다. 끝까지 저항하는 거지.”

이 말은 진심이다.

힘들다고 포기하면 바뀌는 게 없다. 어쨌거나 내 세상인데 내가 직접 움직여야지.

거인들 또한 마찬가지.

믿기지 않는 눈으로 날 바라보는 이들. 그들에게서 다양한 감정이 느껴진다.

난 손가락으로 하늘을 가리켰다. 저 멀리 먹구름이 보인다.

자이언트 폴리스에 도착한 지 어느덧 보름이 넘는 시간이 지났고.

“언제까지 잃기만 할 겁니까. 이곳도 피할 수는 없습니다. 계속 도망치고 밀려나기만 할 건가요? 어디까지 도망칠 수 있을까요.”

천천히 이동한 먹구름은 검은 비를 뿌리며 다가오고 있었다.

“이제 움직여야 할 때입니다.”

이미 먹구름을 피해 몰려온 거인들은 결정을 내려야 했다.

그리고 이들은…….

“멸망에서 벗어날 때가 됐다!”

“더 도망칠 곳도 없어!”

“막을 수 없으니 받아들이라는 개소리도 지겹다. 해보자!”

지금까지 겪었던 일들을 되풀이하고 싶지 않았다.

* * *

언더 시티 통합 계획.

1번 구역과 3번 구역에 통보를 한 시간이 지났다.

이블아이의 선전은 계속되었으며 이미 여론은 그쪽으로 흘러갔다.

천천히. 하지만 분명히 다가오고 있는 먹구름의 영향일지도 몰랐다.

뒤숭숭한 분위기. 달루와 헤르마 역시 조직원들을 통제하며 구역 주민들을 관리했지만 한계가 있었다.

“헤르마, 사람들을 억누르는 데도 한계가 있어요. 결정을 내려야 합니다.”

“파머는 이미 넘어갔고, 곤란하네.”

고집을 버리고 분위기에 동참하면 간단하게 끝날지도 몰랐다.

피해를 입을 리도 없었고, 숭배자들이 주 고객인 것은 맞지만 어디까지나 비즈니스적인 관계. 피를 보면서까지 의리를 지킬 이유는 없었다.

걱정되는 건 하나.

“지금과 같은 위치에 있지는 못할 거야.”

이블아이의 세력에 합류하게 된다면 지금 같은 위세를 떨치기는 어렵다.

세력을 이루는 무리 중 하나가 될 테니까. 게다가 숭배자들과의 거래가 끊길 테니 자금 사정이 나빠질 건 뻔했다.

언더 시티에 있어 자본과 무력은 반드시 필요한 것이었고, 그중 하나라도 잃는다면 잡아먹히기 일쑤였다.

무엇보다 보복이 두렵다.

숭배자들에게 거부감을 가지고 있는 이들이 많았지만 모두 힘과 돈으로 찍어 눌렀기에 지금의 시장이 만들어졌다.

그에 대한 반발하는 이들도 있었으니 조직이 와해된다면 원한을 가진 이들이 덤벼들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다른 구역의 관리자들과 달리 이들은 같은 출신으로 뭉쳐 세력을 일군 게 아닌 숭배자와의 거래를 통해 힘을 넓힌 케이스.

“바로 내일이에요. 이미 저들은 전투를 불사할 준비를 마쳤어요. 구역 3개가 합쳐진 만큼 전력에서 밀리는 건 당연하고요.”

“그게 아니더라도 내부에서 길을 터 줄 놈들이 한가득한 게 문제지.”

“이렇게 고민하는 것도 우습죠. 사실 선택지가 없는 거나 마찬가지인데.”

괜한 저항 없이 받아들이는 게 그나마 나은 선택이라는 건 알고 있다.

그저 그럴 용기가 없었을 뿐.

헤르마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어쩔 수 없군. 문을 개방해야…….”

“그럴 필요 있나?”

그때, 둘밖에 없어야 할 공간에서 낯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검은 후드를 쓰고 있는 인물. 망토 뒤에 그려진 숭배자의 문양과 금목걸이.

골드 등급에 해당하는 숭배자임을 나타내는 증표.

“우리의 소중한 거래처가 난처해지는 걸 가만히 지켜볼 수 없더군.”

그가 수정 구슬을 내밀었다.

마법적인 장치로 녹화된 화면이 홀로그램처럼 펼쳐진다.

“저들은 폭도야. 예언을 무시하는 이들이자 자이언트 폴리스를 위협하는 무장 단체라는 거지. 누구 덕에 이곳에 자리를 잡은 줄 알고 저리 행동하는지. 쯧.”

“이건.”

“크흠!”

헤르마와 달루가 홀로그램을 바라본다.

전투 태세를 마친 거인들이 몰려 있다. 자이언트 폴리스의 전사들. 그 옆에 서 있는 멸망 옹호론자들.

“한번 밟아둘 때가 됐어. 이제 그만 너희도 우리와 함께할 때가 되었다는 생각이 드는군. 우리가 도와주지. 어떤가?”

그의 말에 헤르마와 달루가 시선을 맞췄고.

“이제는 거래 상대가 아니라 가족이 되겠군요.”

“언제까지 음지에 있을 필요는 없겠지. 양지로 나갈 때가 됐어.”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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