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탑에 갇혀 고인물-453화 (452/740)

453화 오해가 아닌 걸로

찬란한 빛.

가공할 만한 기세.

형언할 수 없는 속성이 한데 섞인 일격.

-파하아아아아앗!

강렬한 빛에 일순간 주변이 어두워진 듯한 착각까지 느껴진다.

태생적인 크기의 차이는 의미를 잃었다.

검강으로 거대해진 빛의 칼날은 디레트를 정수리부터 갈라 버리기에 충분했으니.

-쿵

디레트가 무릎을 꿇었다.

놈의 머리 바로 위에 닿은 검.

머리카락이 타는 고약한 냄새가 풍겼지만 누구도 얼굴을 찌푸리는 이는 없었다.

그저 입을 벌린 채 굳었을 뿐.

“…아.”

디레트가 멍청한 소리를 낸다.

검이 다가오는 시점, 놈의 눈이 커지는 것을 봤다.

놈은 대항할 수 없는 힘에 전의를 상실했고, 난 표정으로도 권능으로도 그 심정을 알아차렸다.

굳이 죽일 필요는 없다고 판단해 머리를 쪼개기 직전, 검을 멈췄다.

-사아아아아아

힘을 풀자 검을 둘러싸고 있던 기운이 파편이 되어 사라진다.

다양한 색을 뽐내며 흩어지는 마력의 파편.

혼돈검을 회수해 검집에 넣었다.

거짓말처럼 빛이 사라지며 세계가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전투 전과 달라진 게 있다면 주변이 조용해졌다는 것 정도?

“굳이 끝을 보고 싶으면 말해. 마저 해 줄 테니까.”

“아니, 아니다.”

디레트가 고개를 저었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격차를 깨달았다는 표정이다. 미미하게 입꼬리가 올라가 있는 걸 보니 나름 나에 대해 증명을 한 거 같다.

녀석에게만이 아니다. 나 스스로에 대한 증명이기도 했다.

‘80층대에서도 통한다.’

처음 탑에 오를 때만 해도 80층대는 생각도 못 하고 있었는데.

상위층의 기준인 70층대를 넘어 완연히 위쪽에 해당하는 곳. 살짝 불안한 감이 있었다.

80층을 기준으로 스펙업이 된 만큼 다른 등반가나 NPC, 숭배자들 또한 수준이 높을 게 뻔했으니까.

81층에서 그레고리와 싸우기는 했지만 어디까지나 서로 오해가 있던 상황이었고, 녀석도 나를 죽이려는 게 아니라 포획이 목적이었던 만큼 실전이라 하긴 어려웠다.

반면에 이번 녀석은 여차하면 서로 죽여도 무방한 싸움을 하려 했고.

내 수준을 아는 건 중요했다. 멸망에 등장하는 괴물들을 상대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등반에 있어 걸림돌이 하나 있으니까.

숭배자들.

‘80층대부터는 골드 등급이 있어.’

숭배자들을 나누는 티어. 그중 상위권에 속하고 실버 등급 숭배자들을 부리는 이들이 있다.

그동안 등반하며 이야기를 들어온 유헤다와 데이본드 역시 80층대 어딘가에 있을 거다.

그놈들 말고도 더 있겠지. 80층을 넘어 90층대로 간다면?

‘그때는 다이아몬드 등급이 기다릴 거고.’

이쪽에 대해서는 아는 게 없다.

당장 골드 등급만 돼도 실버 등급한테 축복을 내려 주는 괴물들인데 다이아급은 얼마나 강할지.

거기에서 한발 더 나아간다면?

숭배자들의 패. 그 맨 위는 비어 있다. 다이아 등급이 끝이라는 걸까. 아니면 표현할 수 없는 누군가가 있다는 걸까.

이건 직접 알아봐야 할 거 같다.

아무튼…….

“굉장, 하군.”

“보통이 아니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조금은 싱겁게, 하지만 임팩트 있게 디레트와의 대결이 끝났다.

위험하다 판단되면 끼어들려고 준비하던 산맥 거인들은 작게 감탄했고, 방해 없이 싸울 수 있도록 자리 잡고 있던 검은 쥐 조직원들은 입을 다물었다.

말로 표현하지는 않았지만 긴장감과 흥미, 왠지 모를 기대감이 서려 있다.

“제대로 소개하지. 나는 언더 시티 4구역을 담당하고 있는 검은 쥐의 수장 디레트라고 한다.”

“이블아이다.”

“예언에 대해 자세히 알지는 못하지만 네가 평범한 존재는 아니라는 건 확실해. 솔직히 감탄했다. 자비를 베풀어 줘서 고맙군.”

뭘 또 고마울 거까지야.

자비를 베푼 것도 있기는 하지만 의도는 따로 있다.

놈을 죽여서 얻는 것보다는 살려 두는 편이 더 이득이라서.

놈이 죽은 후 기존에 있던 검은 쥐 조직원들이 가만히 있을지도 미지수고, 이 구역을 담당하던 세력의 우두머리가 사라질 경우 다른 구역의 세력들이 얼쩡거릴 수도 있다.

쓸데없는 이권 다툼에 시간 뺏길 생각은 없다. 내 목표는 어디까지나 무사히 챕터를 마무리하는 거다.

‘그러기 위해서는 언더 시티에 있는 놈들과 불필요한 마찰을 빚어서는 안 돼.’

자이언트 폴리스에서 활동하는 숭배자들과 대적하기 위한 발판으로 이곳을 삼았는데 내부에서 문제가 터지면 안 하느니만 못하다.

외부와 내부 양쪽에 적이 있는 것과 마찬가지니까.

“좋다. 네가 예언 속 인물이라는 걸 믿지. 내 눈으로 똑똑히 확인했으니 더는 할 말이 없다. 게다가…….”

놈의 눈이 깊어진다.

무엇을 보는 걸까. 나를 보고 있는 거 같기는 한데 초점이 불명확하다.

그냥 멍을 때리는 건 아닌 거 같은데.

“거인 중에는 신비의 힘으로 대상의 아우라를 보는 이들이 존재하지. 나도 그렇다. 비록 명확히 볼 수 있는 건 아니지만.”

녀석의 몸에 새겨진 문신이 꿈틀거린다.

아직까지 주술을 풀지 않고 있어서 뭐 하는 건가 싶었더니 주술적인 뭔가로 나에 대해 확인하고 있던 모양.

“다양한 힘. 자연적이면서도 강렬한 무언가. 신비의 존재라 이건가. 요정과 정령, 짐승의 냄새도 살짝 나고. 이계에 있다는 날개 달린 존재의 형상도 보여.”

날개 달린 존재라고 한다면 천사 아니면 악마를 말하는 건가.

짐승의 냄새는 대림원에서 만난 수인들이겠지.

제대로 보기는 했네. 요정과 정령, 수인, 악마와 천사까지. 그 외의 종족과도 친구 칭호가 있으니까.

어째 생각해 보니 만났던 종족이랑은 거의 다 친구가 된 느낌.

그럴 수 있지. 다른 사람들도 비슷하지 않을까? 아니면 말고.

“너도 그렇고 산맥에서 왔다는 녀석들도 그렇고 작정하고 싸우면 곤란해지겠어.”

“걱정하지 마. 어떻게 할 생각은 없으니까. 일종의 파트너가 되자 이거지. 우리도 이쪽은 처음이라.”

“이 바닥은 우리가 전문이긴 해. 좋다, 이야기를 좀 나눠야겠군.”

디레트가 주술을 풀며 손짓하자 다른 조직원들 역시 전투 태세를 없애고 물러선다.

“멀리 갈 필요 있나. 술집으로 들어가서 이야기하자고.”

아무래도 소란이 있어서 구경꾼들이 몰려올 거 같다.

가면을 쓰고 후드를 뒤집어썼다.

대외적으로는 내 정체를 노출할 생각이 없어서.

다녀 보니 거인계에서는 이렇게 신분을 속이는 게 효과적이기도 했고, 의심을 덜 받는다고 해야 하나.

“안으로 들어가지. 마침 손님도 없었어.”

“저놈은?”

“음?”

디레트의 말에 거인들의 시선이 한쪽으로 쏠린다.

우리가 온 타이밍, 주점에서 술을 먹다 쫓겨난 인물.

얼떨결에 싸움이 시작되어 도망도 못 치고 구석에 쭈그리고 있던 놈이다.

그러고 보니 저 녀석도 내 정체를 아네?

“아하, 하하하. 아이고. 취했다. 집, 집 가야지.”

“동작 그만. 저놈도 데리고 들어와라.”

“난 아무것도 못 봤어! 나 귀도 안 들려! 그, 그래. 앞도 안 보여!”

디레트의 명령에 조직원들이 다가가자 되도 않는 변명을 하며 저항했으나.

“진짜 그렇게 만들기 전에 조용히 따라와.”

협박 한마디에 잠잠해진다.

역시 법보다는 주먹이 가깝지. 디레트 저놈은 진짜 하고도 남을 놈이고.

가뜩이나 덩치가 큰 놈들이 취객을 양쪽에서 붙잡고 끌고 들어가는 모습이 영락없는 범죄자였지만 뭐.

“본인 팔자지.”

그러게 근처에 있으랬나.

우리는 안으로 들어갔다.

* * *

주점, 봉우리 산장.

내부는 특이할 거 없었다. 산맥 출신이라 그런지 오두막 형식으로 건물을 지었다.

이곳에서 통나무는 어디서 가져왔는지 모르겠지만 나름 분위기 있달까.

발광석을 박아 넣은 게 아니라 램프로 조명을 해 놔서 아늑하면서도 따뜻한 분위기가 연출 되었다만…….

‘이건 뭐 산장이 아니라 산적들 본거지 느낌인데?’

얼굴 험악하고 문신으로 도배된 검은 쥐 조직원들과 산맥 출신 특유의 거친 기운을 뿜어 대는 그레고리 무리가 앉아 있자 살벌하기 그지없었다.

그 와중에 잡혀 온 취객은 눈치를 보며 바닥에 앉아 있고.

의자에 앉으라 했지만 본인은 이게 편하다며 공손히 무릎을 꿇고 손을 들고 있다.

누가 보면 협박이라도 한 줄 알겠네.

“…저는 가족이 있습니다.”

“누가 뭐래?”

“가족 누구? 혼자 있기 심심하면 말해. 모셔올 테니까.”

“아, 아닙니다! 사실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했어요.”

본전도 못 찾을 거면서 왜 입을 열까.

작게 한숨을 내쉬고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그니까 언더 시티 내에서도 멸망 옹호론자들과 엮여 있는 세력이 몇 군데 있다는 거지?”

“1번과 3번 구역이 그렇지.”

“5번 구역이야 우리랑 비슷한 입장이지만, 둘 사이에 끼어 있는 2번 구역은 눈치를 보고 있을 거다.”

“굳이 그곳이 아니더라도 슬금슬금 내부에 들어오려는 옹호론자들이 있지.”

5개의 구역으로 나누어진 곳. 그중 2곳은 숭배자들이 주 고객이라 가깝게 지내고 있다는 듯하다.

언더 시티 자체가 이주자들 위주로 만들어진 터라 숭배자들에게 좋은 감정은 없지만, 비즈니스 관계라면 말이 또 달라진다.

고향을 버린 만큼 기반이 없으니 뭐라도 해야 먹고 사니까.

그나마 다행인 게 있다면…….

“자이언트 폴리스 쪽에서는 우리를 달갑게 여기지 않지. 1, 3번 구역 놈들도 바깥까지는 나가지 않아.”

“괜히 신경 건드려서 좋을 게 없다는 거군.”

“놈들 입장에서는 위협이니까. 주 고객들은 양지에서 구할 수 없는 물건과 서비스를 찾아온 이들이지.”

“예로 들자면?”

“금지된 주술의 재료와 저주 재료, 간단한 인력 서비스들. 대충 알아들을 텐데?”

고개를 끄덕였다.

거인계나 지구나 암시장의 역할은 정해져 있다.

세세한 품목 따위는 관심 없다. 암시장의 거물이 되려는 것도 아니고.

중요한 건 이거지.

“바깥에서 숭배자들의 위치는?”

“종교에 가깝다. 부족 중에는 종말에 대한 이야기가 전해져 온 곳도 있어서 그들을 가장 먼저 포섭했지.”

아직 모든 거인을 포섭하지는 못했다는 뜻.

오케이. 대충 감이 온다. 아직 놈들도 완전히 이곳을 장악하지는 않았다.

“놈들이 개소리하고 있다는 걸 안다. 여기, 종말에 거부하는 자가 앞에 있으니.”

“약탈만 하고 살았는데 설마 이런 일에 끼어들게 될 줄 누가 알았을까.”

“우리도 역사에 한 획을 긋는 거지.”

“그동안의 죄를 씻을 기회를 주는 거라고 생각한다.”

처음에는 묵묵하던 놈들이 지금은 신이 났다.

종말을 막는 주축이 될지도 모른다는 기대감.

진지한 표정을 지은 디레트가 지도를 펼친다.

언더 시티. 각 구역을 나눈 곳.

“언더 시티를 차지할 거라고 했지. 그러려면 먼저 아까 말했던 두 구역을 고립시켜야 해. 숭배자들을 탐탁지 않게 여기는 곳이 있어.”

툭. 녀석이 한 곳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5번 구역 녀석들이 특히 싫어하지. 이쪽은 내가 가서 협상할 수 있다. 너라는 존재가 있으니 이야기가 통할 거야.”

“남은 건 2번 구역 애들을 지원하면서 덩치를 불리는 거군.”

“그렇다.”

1번과 3번 사이에 끼어 있는 2번 구역.

어떻게 보면 줄 사이에 끼어 있어 위축되는 포지션이지만 이들에게 힘을 실어 준다면?

‘그때는 2번 구역을 기준으로 1번과 3번 구역을 고립시킬 수 있는 거야.’

이후로는 한 곳씩 공략하면 그만이다.

디레트가 5번 구역으로 향한다고 하면, 2번 구역으로는 나와 그레고리가 움직여야 한다.

검은 쥐 조직이 움직이면 공격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으니 이게 맞다.

문제는 2번 구역에 대해 아는 게 없다는 건데.

“저, 저어. 그 사실 제가 2번 구역에서 넘어왔습니다. 그쪽은 좀 분위기가 좀 팍팍해서.”

“음?”

바닥에 있던 거인이 조심스럽게 손을 들었다.

“사, 살려만 주시면 제가 모시겠습니다.”

뭔가 오해를 단단히 하고 있는 거 같은데 그렇게 나온다면…….

“그래, 하지만 명심해라. 허튼짓하면 목숨은 없다.”

“네넵! 물론입죠!”

어쩔 수 없이 오해인 채로 놔두는 수밖에.

내가 인상을 팍 쓰며 말하자 거인들과 덕춘이가 어이없는 표정으로 날 바라봤다.

뭐. 왜.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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