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1화 산맥 출신 합류
팝콘을 다 먹을 때쯤 상황이 정리됐다.
나야 편하게 대하고 있지만 그레고리도 한가락 하는 녀석이라 시스템으로 만든 중립 NPC 정도는 충분히 해결할 수 있었다.
‘뭐, 이게 전부일 거라는 생각은 안 들지만.’
탑 시스템이 작정하고 만들면 말도 안 되는 수준의 괴물도 만들 수 있을 테니까.
이놈들은 그저 피라미에 불과하다. 심심치 않게 만나볼 수 있는 양아치 정도.
탑을 등반했다는 설정이 있으면 모를까, 탑도 오른 적 없는 이들이라면 아무리 거인족이라 할지라도 수준이 떨어졌다.
특히나 그레고리는 80층대에 머무는 NPC.
뛰어난 종족 값 때문에 80층 이하에서는 볼 수도 없는 게 거인인데 등반까지 했으니 얼마나 강할까.
“으으으으, 이런 괴물 같은.”
“어디서 이런 놈이 들어온 거야.”
“머리가 깨질 거 같아.”
“이미 깨졌다, 등신아.”
곡소리가 울려 퍼졌다.
구경에는 불구경, 싸움 구경이 제일이라고 했던가. 어느새 몰려든 이들이 수군거리며 검은 쥐 일당들을 훔쳐봤다.
“저놈들도 나름 치는 놈들인데 쉽게 잡는군.”
“까불 때부터 알아봤지. 내가 직접 손보려다 참았을 뿐.”
“그래? 그럼 내가 따로 검은 쥐한테 찾아가서 말해 줄까?”
“말이 그렇다는 거지. 아무튼 속 시원하구만. 설치는 게 마음에 안 들었거든.”
“그건 맞지. 꼴 좋네. 이상하게 밑바닥 부하들이 나대더라고.”
반응을 보아하니 평판이 그리 좋지 않은 모양이다.
암시장. 놈들의 설명에 의하면 자이언트 폴리스를 양분하는 언더 시티를 관리하는 세력 중 하나가 검은 쥐라고 하던데.
이놈들은 그다지 볼 게 없다.
“이, 이런. 이건…….”
“흠. 다시 말하지만 안내원은 많을 필요 없지. 너는 별로 하고 싶지 않은 모양이군.”
툭툭. 손바닥을 털어 낸 그레고리가 듀렉을 바라본다.
녀석의 얼굴이 창백해지더니 바로 굽신거리기 시작한다.
“아냐, 아냐. 뭔가 오해가 있는 거야. 하하하. 안내 말이지? 당장 갈까? 어휴, 가방 무겁지? 내가 대신 들게.”
“억지로 할 필요 없다. 피곤해 보이는데 나란히 옆에 눕는 게 나을 거 같다.”
그레고리가 무기도 사용하지 않고 두 주먹으로 10명의 조직원을 곤죽으로 만드는 걸 두 눈으로 본 게 듀렉이다.
몇몇은 얼굴이 뭉개져 숨도 제대로 못 쉬고 있다.
듀렉의 얼굴이 하얗게 질린다. 그레고리가 다가가는 것에 맞춰 뒷걸음치던 녀석이 양손을 펼쳤다.
“잠깐! 밖에서 온 이들을 찾는다고 했었지? 어디 출신인지 말해 봐!”
“동쪽 산맥, 여덟 봉우리와 하늘 호수 출신이다.”
“여덟 봉우리와 하늘 호수…….”
빠르게 머리를 굴리던 녀석의 얼굴에 화색이 돈다.
“내가 위치를 알아. 들어 본 적 있어. 내가 안내해 줄게.”
“널 어떻게 믿고? 한 번 등쳐 먹은 놈은 두 번도 등쳐 먹을 수 있다는 걸 모르는 멍청이가 있나?”
“이번에는 진짜야! 거짓말 안 하고.”
이래서 신뢰 관계가 중요한 거다. 구라치다 걸리면 이후에는 진실만 말해도 믿음이 안 가니까.
뭐, 저놈은 그게 아니더라도 신뢰가 없는 놈이기는 하지만.
어디 보자.
괜찮은 아이디어가 생각났다.
“괜찮을 거 같은데?”
“흐음. 겪어 본바 이런 놈은 믿으면 안 된다.”
“그건 나도 알아.”
내가 속닥이자 그레고리가 머리를 긁적이더니 고개를 끄덕인다.
“네가 그렇다면야.”
이미 첫 번째 챕터를 통해 나에 대해 알렸다.
아무 생각 없이 행동할 사람이 아니라는 건 알고 있겠지. 이런 게 신뢰 아닐까.
대놓고 계획을 말할 수는 없어서 적당히 말하다 말기는 했다만 나중에 상황이 펼쳐지면 그레고리도 알아차릴 거다.
“앞장서라.”
“그래! 하하. 이쪽이야. 그리 멀지는 않을 거야.”
듀렉이 손을 비비며 길을 안내한다.
녀석의 뒤를 따라 걸으며 골목에서 얻은 방울을 흔들었다.
-딸랑
* * *
듀렉의 안내는 훌륭했다.
실력 행사를 한번 해서 그런지 친절하게도 알려준다.
“이쪽 식당은 구이가 맛있지, 비법 소스가 있다고 하더라고. 여기는 장물을 파는 곳인데 품질만 괜찮다면 어디서 얻었는지는 묻지 않아.”
언더 시티에서 활동했다는 게 거짓은 아니었는지 자질구레한 것들을 잘 알고 있다.
주민으로 보이는 이들도 간간이 아는 체를 하는 것도 그렇고.
대부분 이주민이라 했던가. 무질서하게 건물과 좌판이 펼쳐진 곳에도 나름대로의 구역이 존재했다.
같은 지역 출신, 혹은 같은 부족 출신끼리 모여 구역을 만든 것.
“언더 시티는 크게 5개의 구역으로 나뉘고, 각자 역할이 있지. 내가 속한 검은 쥐가 관리하는 곳은 그중에서도 4번째 구역이고. 검은 쥐는 남쪽에서 올라온 이들로 이루어져 있어.”
언더 시티를 나누는 5개의 구역.
각 구역은 비교적 규모가 큰 세력들이 관리하고 있었다.
우리가 있는 곳은 4번째 구역으로, 기타 소규모 집단들도 섞여 있었지만 주류는 남쪽 지방 출신들.
“남쪽이면 그거군, 유목민들.”
“유목민?”
“거인들도 지역마다 문화가 다르지. 우리와 같은 산맥 출신들은 털 색으로 부족을 나누고, 유목민들은 동물의 이름으로 부족을 나눈다.”
생각해 보니 그레고리는 붉은 머리 부족이었지.
문화 차이야 흔한 거니까. 당장 지구만 해도 다른 나라랑 비교할 것도 없이, 한 나라 안에서도 지방마다 말도 좀 다르고 음식도 좀 나뉘는 편이니까.
“동물 이름만 들어도 그 특징을 알 수 있지. 검은 쥐면 그걸 거다, 약탈을 주로 하는 이들. 다른 유목민이 움직인 경로 정보를 팔기도 할 거다.”
“다 의미가 있다 이거네.”
“그렇다. 실전 경험이 많을 테니 한 구역을 차지한 것도 이해가 되는군.”
슬픈 현실이지만 세상에 망조가 들면 법이나 윤리보다는 주먹이 앞서기 마련이다.
약탈을 하던 이들이면 전투에도 이골이 났을 테니 빠르게 세력을 휘잡을 수 있었겠지.
나쁘지 않다. 그런 설정이라면 언더 시티 내에서도 다른 세력에게 꿇리지는 않을 거 같아서.
“자자, 이쪽이야. 산맥 출신 중에 새롭게 정착한 사람이 있지. 아직 신고식도 안 한 모양이더라고.”
“신고식?”
“그거 있잖아. 이쪽 치안 담당 하는 게 우리들이니까. 일종의 보호 비용이지 뭐. 무슨 자신감인지 아직까지도 내지 않고 있다 하더라고.”
쉴새 없이 떠들던 녀석이 한쪽을 가리킨다.
지나쳐온 곳에 비해 조금 더 분위기가 험악하다. 날이 서 있다고 해야 하나.
좋게 말하면 긴장감이 좀 느껴지는 거고, 나쁘게 말하면 거친 놈들이 모여 있을 거 같은 느낌.
“술집을 운영한다고 하는군. 산맥 출신 중에는 주조 기술이 있는 이들도 좀 있는 편이라서. 보다시피 이곳에서 술장사하는 건 보통 쉬운 일이 아니야.”
“사건·사고가 많다는 거군.”
“술 먹고 난동 부리는 거야 일상 아닌가?”
그레고리의 말에 듀렉이 어깨를 으쓱인다.
맞는 말이다. 삶도 팍팍한데 술 먹고 날뛰는 놈이 없을까. 세상이 멀쩡할 때도 그런 놈들은 있었는데.
이렇게 구석에 숨어 있는 이들이면 더 지랄일 거다. 따로 경찰 같은 게 있는 것도 아니고, 관리한다고 하는 놈들은 약탈자 출신의 조직이니까.
“헤헤. 안내는 여기까지. 약속 지켰지? 그럼 난 가 볼게. 헤헤.”
“뭘 그리 급하게 가지? 내가 안내의 대가는 준다고 했는데. 안으로 들어가 술이라도 한잔 사지.”
“어휴. 그럴 필요까지 있나. 다 내가 안내하는 걸 좋아해서 한 건데.”
가능한 빨리 벗어나고 싶었는지 극구 사양한다.
괜히 옆에 있다가 맞을까 봐 그러는 건가.
그런데 어쩌나.
“이놈인가?”
“건방진 놈이 하나 들어왔다던데.”
“꽤 날뛰었더군. 말단이기는 하지만 우리 쪽 애들을 납작하게 밟아놨더라?”
자리를 뜨기에는 이미 늦었다.
술집이 위치한 구석, 검은 쥐 마크를 단 놈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 수가 제법 많다. 대충 30명?
인원도 인원이지만 처음 상대했던 놈들과 비교하기가 민망할 정도로 강렬한 기운이 느껴진다.
“해, 행동 대장? 타격대까지?”
“네놈, 날 속였군.”
“아니야! 진짜 아니야! 난 안내만 했다고!”
으르렁거리는 그레고리를 보며 듀렉이 기겁한다.
살짝 그레고리를 잡아당겼다.
“저놈 말 맞아. 내가 유도한 거야. 어차피 한 번은 정리해야 해.”
이미 안으로 들어올 때부터 일을 벌였다. 놈들이 멍청이도 아니고 보는 눈도 있는데, 쪽팔리게 외부인에게 당했다?
그럼 어떤 식으로든 보복이 들어올 게 뻔했다.
앞으로 편하게 활동하기 위해서도 위아래를 정할 필요가 있었다.
게다가.
“아무리 먼저 들어온 사람이 있다고 해도 제대로 움직이려면 세력이 있는 편이 낫잖아?”
“그 말은…….”
“맞아. 검은 쥐라고 했나. 일단 이놈들부터 먹고 시작하자고. 우리가 진짜 상대해야 할 놈들도 규모가 좀 있고.”
결국 이번 챕터를 정리하기 위해서는 숭배자들과 경쟁을 해야 한다.
멸망 옹호론자들과 맞서기 위해서라도 세력은 있어야 하고.
양지에서는 이미 숭배자들이 설치고 다니는 만큼, 비교적 놈들이 활동하지 못하는 이곳을 차지할 필요가 있다.
자이언트 폴리스를 양분하는 언더 시티. 이곳을 움직이는 것.
두 번째 챕터를 클리어하기 위해 가장 먼저 달성해야 할 조건이었다.
“틀린 말은 아니군.”
“타이밍도 좋지. 경사스럽게도 보스가 직접 온 모양인데?”
30명의 행동 대원들. 그들이 양옆으로 자리를 피하자 중앙으로 얼굴에 문신을 한 거인이 들어왔다.
단련된 근육과 살기가 느껴지는 눈.
척 보기에도 손에 피를 많이 묻히고 산 놈이다.
놈을 따르는 이들 역시 긴장한 기색인 게 두려워하는 느낌이고.
쉬지 않고 나불거리던 듀렉 역시 입을 다물고 눈을 내리깐다.
[디레트]
-완전히 탑에 종속된 NPC입니다.
-조직, 검은 쥐. 남부의 약탈자들을 이끌던 인물!
-손속에 자비가 없기로 유명하죠.
-마무리까지 완벽하지 않으면 계속 귀찮아질걸요?
권능을 사용하자 정보가 떠오른다.
중립 NPC가 아니라 그런지 간만에 발랄한 설명이 이어진다.
어디까지나 말투만 그런 거지만. 설명 자체는 신경 쓰인다. 위험한 놈이라고 공인한 거나 다를 바 없으니까.
귀찮지 않게 한 번에 끝낼 수 있겠다.
머릿수도 많고 보스인 녀석도 보통은 아닌 거 같다만 질 거 같다는 생각은 안 든다.
그래도 그레고리 혼자 해결하는 건 힘들 테니 도와줄 생각.
전투도 꾸준하게 해야지 계속 쉬면은 감 떨어진다.
“재밌군. 신호가 와서 확인해 봤더니 이곳으로 온다? 멋대로 주점을 연 녀석들이랑 한 패인 모양이야.”
디레트가 차가운 눈으로 우리를 내려다본다.
“안 그래도 직접 손을 봐주려 했는데 잘 됐어. 귀찮지 않게 한 번에 처리하지. 잘했다, 듀렉.”
“예, 예에. 감사합니다.”
물론 놈이 아니라 내가 방울을 흔들어서 유인한 거지만 저놈들이 알 턱이 있나.
디레트가 턱을 까딱이자 행동 대원들이 진형을 갖춘 채 접근해 온다.
가뜩이나 덩치 큰 놈들이 촘촘하게 다가오니 거대한 벽이 다가오는 듯한 기분.
수없이 손발을 맞췄는지 발걸음마저 똑같다.
생각보다 까다로운 싸움이 되겠다고 생각한 찰나.
-콰앙!
“어크흑!”
“돈 없으면 마시지 말랬지! 또 오면 뒤지게 맞을 줄 알아!”
술 취한 거인 한 명이 주점 문을 부수며 바닥에 나뒹굴었다.
씩씩대며 소매를 걷어붙이는 인물.
“오, 여기 있었군.”
“그레고리? 다들 나와 봐! 그레고리가 왔다! 옆에는 이블아이겠군! 하하하! 늦어서 걱정했다!”
첫 번째 챕터에서 같이 고생한 녀석이었다.
듀렉이 안내는 정확히 한 모양.
그의 외침에 하나둘 주점 밖으로 모습을 드러낸다.
“진짜군. 보고 싶었다.”
“너무 늦어서 어떻게 된 줄 알았다고.”
처음 나온 녀석까지 합쳐서 총 4명. 나와 그레고리를 합치면 6명.
갑작스러운 인원 추가에 행동 대원들이 멈칫했지만 그것도 잠깐이다. 여전히 놈들의 수가 많았으니까. 여전히 승산이 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우리는 반대지만.
“이 새끼들 뭐야? 뭔데 눈알을 부라려.”
“너희 밟으러 왔다던데?”
“어허허. 발상이 깜찍하군. 쥐새끼 아니랄까 봐 우르르 몰려왔어.”
“대충 한 사람당 5명씩 처리하면 되겠네.”
“그 정도는 가뿐하지.”
일단 이 구역부터 먹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