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9화 골목 깊숙이
정보를 읽어 냈기 때문일까. 통증이 잦아들었다. 여전히 눈에 힘이 들어간 기분이기는 하지만 아까보다는 낫다.
떠오른 정보에 정신이 팔려 아픈 것도 잊었지만.
[검은 비]
-누군가 죽기로 된 존재를 깨웠습니다.
-혼돈의 파편이 만들어질 세계, 그곳의 옛 영웅 델버튼을요.
혼돈의 파편. 델버튼.
내가 모를 리가 있나. 가장 먼저 만난 혼돈의 파편이 델버튼인데.
프램버그에서 인연을 만든 드워프들. 그들을 멸망까지 몰고 간 존재가 델버튼이다.
나 역시 무한 코인이 아니었다면 상대할 수 없는 괴물이었고.
‘지금은 그때랑 달리 혼돈 수치가 100점을 넘기는 하지만.’
그때만큼 무력하지는 않겠지만 지금이라고 상대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애초에 99층까지 올랐던 릴카와 킬더레스도 모두 잡는 데 실패하지 않았던가.
세계가 멸망하는 방법은 다양했지만 가장 위험한 게 있다면 혼돈의 파편이다.
탑에 있는 어떤 몬스터도, 몬스터를 떠나 마물이나 재앙을 다 합치더라도 혼돈의 파편에는 도달하지 않는다.
사실상 최종 보스에 가까운 놈인데…….
“괜찮나?”
“아, 잠깐 눈이 좀 아파서. 괜찮아.”
폐가에서 나온 그레고리를 향해 손을 들어 올렸다.
진정하자. 현 상태에서 혼돈의 파편을 잡는 건 어렵다.
어렵다기보다는 불가능에 가깝다. 비록 70층에서 혼돈의 파편의 열화판을 상대로 훈련한 적은 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훈련, 실제가 아니다.
‘90층대는 되어야 나올 줄 알았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그게 맞다. 탑은 결국에는 클리어할 수 있는 정도의 난이도로 층을 배치하니까.
과정이 악의에 가까울 정도로 힘들어도 방법은 있기 마련이다.
나야 그나마 혼돈 수치가 높으니까 가능성이라도 있다 말할 수 있지만, 절대다수의 등반가들은 공격조차 통하지 않을 거다.
즉, 클리어 확률이 없다는 것인데.
아니, 애초에 혼돈의 파편은 온갖 부정적이고 혼란스러운 것이 모여 생긴 거 아니었나?
내가 알기로도 델버튼은 역병과 도박으로 이루어진 거였는데.
나와 내기를 한 것도 그 때문이고. 물론 나도 혼돈의 파편에 대해 잘 아는 건 아니지만.
미묘한 이질감.
난 유심히 설명을 읽었고.
“아.”
몇 가지 포인트를 확인할 수 있었다.
처음에는 혼돈의 파편과 델버튼이라는 이름에 놀라서 스쳐 지나갔는데.
‘설명에는 델버튼을 혼돈의 파편이라고 하지 않았어.’
혼돈의 파편이 만들어질 세계라 말했고, 델버튼을 옛 영웅이라고 불렀다.
그 말인즉.
‘아직 혼돈의 파편이 되지 않았다는 거지.’
그래야 말이 된다. 아무리 스킬과 권능이 강해졌다지만 그것도 어느 정도 성장할 시간을 줘야 써먹는 거지 시작부터 보스몹이 나오면 쓰나.
진짜 혼돈의 파편이 문제였으면 챕터 이름도 검은 비가 아니라 다른 거였을 거다.
그레고리를 비롯한 다른 거인들도 운석이니 뭐니 하는 것보다 혼돈의 파편에 대해 이야기를 했을 거고.
물론 시스템의 영향으로 기억이 단계적으로 해금되지만 말이지.
자세한 건 차차 알아가 봐야 할 거 같다. 거인계의 옛 영웅, 델버튼이 모종의 이유로 혼돈의 파편이 된다는 건 알았으니까.
이것만 해도 상당 큰 수확이다.
혼돈의 파편이라는 게 처음부터 존재하는 게 아닌 만들어질 수도 있다는 걸 시사하는 거니까.
‘거인계에 탑이 나타난 게 처음이 아니라는 것도 알았고 말이야.’
어쩌면 델버튼은 그때의 영웅일지도 모른다.
그런 놈이 어째서 하늘의 눈물 호수에 묻혀 있던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레고리, 델버튼이라는 영웅을 알아? 옛날에 있었다는 거 같은데.”
“델버튼이라… 흐음, 자세히는 모르겠군. 그건 영웅들을 모시는 곳에 가 봐야겠는데. 영웅 중에는 대중적으로 알려지지 않은 경우도 많아서.”
이해한다. 편차가 있기는 하지만 거인계는 교통이나 통신망이 발전하지 않았다.
부족사회가 기본인 데다가 과학 기술보다는 주술 쪽으로 발전했으니. 하다못해 마법이 발전한 상태였다면 조금은 사정이 달랐을 거다.
잠깐만…….
한 가지 의문이 들었다.
‘델버튼이 혼돈의 파편이 된 건 분명한 사실이야.’
왜냐 이미 프램버그에서 만났으니까.
그런데 원래의 역사대로 흘러갔다면 델버튼이 잠들어 있던 호수는 운석을 맞아 사라지지 않나?
거인들이 겪었다는 진흙 비나, 내가 본 검은 비나 모두 델버튼의 영향일 가능성이 높은데.
머리가 복잡해졌지만 간단히 정리하기로 했다.
원래의 세계는 결국 델버튼이 혼돈의 파편이 되었지만 내가 있는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
호수는 멀쩡했고, 델버튼은 깨어났다. 아직 델버튼은 혼돈의 파편이 아니다.
다르게 말하면.
‘녀석이 혼돈의 파편이 되지 않도록 만들 가능성도 조금 크지 않을까.’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델버튼이 어디 있는지부터 알아야 하는데.
가장 의심스러운 곳이 하늘의 눈물 호수였지만 거긴 아니다.
거인들의 도시, 자이언트 폴리스로 향하기 전 들렀던 호수에는 아무런 이상이 없었으니까.
권능을 사용해 보았을 때도 별다른 정보가 없었으니 다른 어딘가에 있다고 봐야겠지. 어쩌면 멀쩡한 모습이 아닐지도 모른다.
영혼의 형태나 다른 알 수 없는 모습을 가지고 있을 가능성도 있다.
이미 알고 있지 않은가, 주술의 힘을.
당장 지금 진행 중인 부활 사업 역시 주술과 마법을 기반으로 한 사업이다.
머리를 흔들며 정신을 깨웠다.
“결국 챕터 먼저 제대로 끝내야 답이 나오겠어.”
상황이 어떻든 간에 이번 챕터의 제목은 검은 비고, 그걸 이용해 혼란을 일으키는 건 숭배자들이다.
우선은 할 일 먼저 끝내자.
혹시 아는가, 숭배자들 또한 델버튼에 대해 알고 있을지.
“움직이자, 자이언트 폴리스로.”
“하늘을 보아하니 한동안 비가 내릴 걱정은 없겠군. 서두르면 예정보다 빠르게 도착할지도 모르겠다.”
준비를 마친 우리는 자이언트 폴리스를 향했다.
* * *
자이언트 폴리스.
거인들의 도시이자 수도라고 부를 수 있는 거대 공동체.
부족사회 기반인 거인계치고는 상당히 많은 이들이 모여 있는 곳이었고, 어느 곳보다 발전한 모습을 띠고 있는 곳이었다.
원래라면 활력이 넘치고 주술적인 색채가 짙은 만큼 꽤 볼거리가 많은 곳이었겠지만…….
“멸망이 다가온다! 하늘의 순리에 따라 떠날 준비를 해야 한다!”
“예언에 등장한 탑이 생겨난 지 오래. 괜한 발버둥은 분노를 일으킬 뿐임을 왜 모르는가!”
지금은 아니었다.
뒤숭숭한 분위기. 검은 비를 뜻하는 건지 검은 후드를 뒤집어쓰고 돌아다니는 숭배자 놈들이 저마다 목소리를 높이고 있었다.
각기 부족을 상징하는 색의 천을 달아 이어놓은 길거리. 다양한 형태의 탈과 지팡이를 전시해 둔 건물들은 신비로웠지만, 어두컴컴한 하늘과 멸망을 외쳐 대는 숭배자들 때문에 음산한 느낌마저 들었다.
이게 멸망을 향해 다가가는 세계의 분위기라는 거겠지.
가면을 쓰고 있었지만 느낄 수 있었다. 그레고리의 기분이 좋지 않다는 걸.
나도 마찬가지. 평소에는 음지에 박혀 있었을 숭배자들이 양지에서 돌아다니는 걸 보니 기분이 더럽다.
“당당하게 활동하는 걸 보고 있자니 배알이 꼬이는군.”
“참아라. 지금은 나설 때가 아니다. 우리 둘만으로는 무리야.”
빠르게 이동한 결과, 나와 그레고리는 자이언트 폴리스에 입성할 수 있었다.
아무래도 놈들의 근거지가 이곳인 만큼 세력에서 밀리기에 우비를 두르고 가면을 썼다.
주술적인 문화도 있고, 언제 내릴지 모르는 검은 비를 대비하기 위해서 가면과 우비를 쓰고 다니는 사람은 많았다.
나 또한 숭배자들에게 얼굴이 팔린 만큼 주의할 필요가 있었다.
여기에 한 가지 더.
“이것도 좀 그렇군.”
“참아라. 그나마 이게 가장 평범해 보이니까.”
거인들의 키는 다양하지만 성인 기준 대부분 10미터를 넘어간다. 평균으로 치면 15미터 정도? 더 큰 녀석들도 심심치 않게 보인다.
말 그대로 거인. 어지간한 대형 몬스터도 맨손으로 찢어 버리는 이들이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었지만, 2미터도 되지 않는 내게는 너무 크다.
어쩔 수 없이 위장을 하게 되었는데…….
“오? 옆에는 아들인가. 날씨가 좋지 않으니 옷을 여미는 게 좋을 거야.”
“몇 살이지? 5살 정도 됐나?”
“네!”
그렇다. 일단 애인 척하고 있다.
애써 목소리를 높여 대답하자 흐뭇한 표정으로 바라보던 거인들이 손을 흔들고 지나친다.
와, 이건 이거대로 자괴감 드네.
저 망할 숭배자들만 아니었어도 그냥 다니는 건데. 지금의 수치를 기억해 두었다가 반드시 복수할 것이다.
이게 다 숭배자 때문이야. 그렇고말고.
“읏즈므르.”
“게흑. 극흑!”
등 뒤에 붙은 덕춘이가 끅끅거리며 웃는 게 느껴진다.
펠라인 세트를 벗고 있어서 그런가 더 잘 느껴지는걸?
“이쪽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길을 찾아 나선 그레고리가 골목으로 향했다.
허름한 판자촌.
땅덩어리가 넓은 만큼 거인족들은 굳이 한곳에 몰리지 않고 멀찍이 자기 집을 만들었다.
이곳 또한 한때 살던 이들이 두고 간 곳으로 버려진 집이었는데 지금은 다르게 사용되고 있었다.
검은 비를 피해 자이언트 폴리스로 몰린 난민들이 모여든 공간.
급하게 떠나왔는지 가지고 있는 물건이 많지 않다.
비로 인해 물이 오염된 탓인지 물이 충분히 공급되지 않은 거 같다. 다들 몸이 말랐고 제대로 씻지 못한 모습이다.
“새로운 이들이 들어왔군.”
“아무 데나 빈 곳에 들어가라. 열심히 찾아보면 괜찮은 곳이 남아 있을지도 몰라.”
“쯧쯧. 자식이랑 같이 왔나 보이. 살기 힘든 세상이 되었어. 너무 깊이는 들어가지 말게.”
나와 그레고리를 한 번씩 살펴보던 이들이 길을 터준다.
같은 처지다 이거지. 고향을 버리고 온 만큼 아무것도 가진 게 없다.
골목 외곽 쪽에 자리 잡은 거 보면 이들도 이주해 온 지 얼마 되지 않은 거 같다.
안쪽에 비교적 아늑한 곳은 처음 자리를 잡은 이들이 차지했을 테니까.
-스으윽
그레고리가 말없이 안으로 들어갔다.
괜히 말을 섞어 봐야 좋지 않다는 거겠지.
나 역시 옆에 붙어 가면 사이로 이들을 바라봤다.
[밀]
-82층 챕터를 위해 만들어진 중립 NPC.
-위생 상태가 안 좋아 보인다.
[베멕스]
-82층 챕터를 위해 만들어진 중립 NPC.
-그레고리의 물건을 탐내는 듯하다.
과연, 여기 있는 이들은 중립 NPC라 이건가.
대놓고 만들어진 NPC라고 쓰여 있으니 은근 소름 돋는다.
진짜와 구별하기 힘들 정도로 생생한 가짜 존재를 만들어 냈다는 거니까.
나야 권능을 통해 구분할 수 있지만 다른 이들은 불가능할 거다.
그레고리도 그렇기 때문에 내색하지 않고 움직이는 거고.
“나라고 모든 거인을 아는 건 아니다. 이들 중에는 산맥에서 온 이들 외에 다른 지역에서 온 진짜 NPC가 있을지도 모르지.”
“어쩌면 숭배자가 몰래 섞여 있을 수도 있고.”
작게 속삭이던 그레고리가 고개를 끄덕인다.
“먼저 이곳으로 향한 이들은 이 골목을 포함해, 이후 할렘가로 발전하는 곳곳으로 흩어져 있다. 중심부에 간 이들도 있고. 일단은 분위기와 정보를 모아야 한다.”
“맞는 말이지, 특히나 이번에는.”
나로 인해 첫 번째 챕터가 비틀렸으니 처음부터 다시 시작한다는 마음가짐으로 움직이는 게 옳다.
그레고리를 비롯한 산맥 출신 거인들도 그걸 알기에 흩어진 걸 거고.
안쪽으로 계속 들어갔다.
뭔가가 썩는 냄새도 나고 이상한 약 냄새가 나기도 한다.
아무렇게나 바닥에 누워서 자는 이들도 있었으며, 구석에 웅크리며 경계의 눈빛을 보내는 이도 있었다.
반대로 제법 멀쩡하게 입고 다니는 이들도 있고.
같은 난민이라도 편차가 있다.
열악한 환경.
거인 중에도 탑에서 나온 이들이 제법 될 텐데 이럴 수가 있나. 특히 물 같은 건 생활형 스킬이라 어지간하면 가지고 있을 텐데.
“그레고…….”
-텁
그레고리를 부르려던 때 벽에 기대앉아 있던 여인이 날 붙잡았다.
바로 대응하려 했지만 상대방의 표정을 보고 멈췄다. 불안한 듯 눈을 떨면서도 다급함이 느껴졌다.
“안으로 들어가면 안 된다, 아이야. 여기까지가 우리 같은 이들이 있을 수 있는 경계선이야. 내가 말해 줬다고 하면 안 된다.”
빠르게 속닥이며 손가락으로 입을 막은 여인이 그레고리를 슬쩍 바라보더니 구석으로 도망치듯 빠져나간다.
우리 같은 이들? 경계선?
“…챕터가 바뀌었군.”
“들어가 보자.”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우리는 골목 깊숙한 곳으로 진입했다.
-딸랑
종소리가 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