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8화 검은 비
자이언트 폴리스.
거인계의 중심지. 다르게 말하면 수도와 같은 곳이었다.
거인들은 부족 사회를 이루는 줄 알았더니 꼭 그런 것도 아닌 모양.
“땅이 워낙 넓다 보니 여러 부족이 하나의 공동체로 사는 경우가 많다만 그중에는 제법 큰 규모를 자랑하는 곳도 있지.”
“그곳이 자이언트 폴리스고?”
“그렇다. 일종의 도시인 셈이지. 우리는 자급자족을 하지만 이들은 다른 공동체와 거래를 한다. 우리도 만들기 어렵거나 없는 것들은 건너 건너 거래를 하고는 하지.”
예로 들자면 화약의 재료라던가, 제대로 정제 과정을 거친 금속 같은 것들.
그 외에도 자잘한 아티팩트나 주술적인 뭔가를 가져오기도 한다는 것 같다.
어딜 가든 사람이 모인 곳은 번화하기 마련이니까. 이상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다만 이곳은 주술적인 색채가 강한 만큼 꽤 신기한 느낌을 주었다.
거미 눈알이랑 발로 밟은 박쥐 똥 같은 건 왜 거래를 하는 거지.
‘주술에 대한 것도 살짝 배워 볼까.’
저주 같은 거는 크게 관심이 없지만 물약을 만드는 건 좀 관심이 있어서.
나중에 기회가 되면 한번 알아봐야겠다.
“오늘은 이쯤에서 야영을 하지.”
“괜찮은 선택이야. 아직 갈 길이 멀잖아.”
챕터Ⅱ가 진행되고 6일.
그레고리와 함께 자이언트 폴리스로 향하고 있었다.
꽤 많이 왔다고 생각했지만 아직 거리가 있었다.
원래라면 여기까지 오는 데만 8일은 걸렸을 거라고는 하는데, 검은 비 때문에 몬스터가 모조리 죽어 버려서 좀 빨리 왔다.
빽빽하게 자라 있던 나무들이 말라비틀어져 길을 헤맬 일도 없었고, 나 역시 땅굴 이동이나 무지개다리 등을 이용해 이동에 속도를 올렸다.
“여기는 그나마 좀 상태가 나아 보이는데?”
야영지를 정리하며 감상을 말했다.
그동안 지나쳐 왔던 곳은 짐승이든 몬스터든 다 죽어버려 음산했다면, 여기는 그래도 풀이나 곤충이 돌아다녔다.
“검은 비가 맨 처음 발생한 곳은 우리가 있던 곳이다. 그다음 북쪽으로 올라갔지. 이곳까지 오려면 아직 시간이 좀 걸린다. 적어도 진흙 비는 그렇게 이동했지.”
검은 비라는 것도 나름 이동하는 방향이 있는 거 같다.
결과론적으로는 모든 곳에 비가 오게 되겠지만 말이지.
나도 아직 검은 비가 내리는 모습은 본 적이 없다. 그저 비가 왔던 흔적이 남은 곳을 지나쳐 왔을 뿐.
“이곳이 좋겠군. 지붕이 남아 있어.”
우리가 있는 곳은 유령 마을. 검은 비를 피하기 위함인가 거인들이 사라진 곳이었다.
느낌이 이상했다.
거인들이 지냈던 흔적이 있었다. 건물도 있고, 도구나 가구도 그대로 남아 있었으나, 지금은 차갑게 온기가 식어 있다.
그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많은 이들이 자이언트 폴리스로 향하고 있다. 난민들이 몰리는 만큼 다양한 문제가 발생하고 있겠지.”
“그리 특별한 이야기는 아니군.”
전쟁이나 천재지변. 거스를 수 없는 재난을 당했을 때 난민이 생겨나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고, 난민으로 인해 사건·사고가 끊이지 않는 건 필연이었으니까.
연고지도 돈도 없는 상태에서 도움을 줄 사람도 없는데 어떻게든 살아가야 한다.
도둑질이면 도둑질. 사기면 사기. 일을 구할 수 있다면 다행이지만 그게 아니라면 불법적인 일로 그날 먹을 음식을 구해야 한다.
‘그러다 점점 폭력적인 일로 넘어가면 슬럼화가 되는 거고.’
차라리 슬럼화가 된 후 서로의 영역이 나뉘면 다행인데, 실제로는 상황이 더 안 좋다.
기존에 있던 사람들은 땅을 내어주기 싫을 것이고, 슬럼화로 인해 치안이 약해지는 걸 반기지 않으니까.
최악의 경우 난민들을 없애기 위해 공격해 오는 수도 있었다.
그때는 뭐. 여럿 죽는 거지.
-타악
-화르르르
난로에 불을 붙인 그레고리가 냄비를 올리더니 침대에 걸터앉는다.
나 역시 간이침대에 모포를 깔고 앉았다.
-후룩
주전자를 들어 차를 탄 녀석이 찻잔을 건네더니 한 모금 마신다.
내게는 양동이나 다를 바 없는 사이즈였지만 별말 없이 받았다. 따땃하고 좋네.
“지금은 아니지만 당시 거인계에 운석이 떨어지고 많은 변화가 있었다.”
해가 떨어진 밤.
바람을 막아 줄 벽과 지붕, 따뜻한 차와 불이 있기 때문일까.
살짝 감상적으로 변한 그레고리가 과거의 일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조용히 차를 마시며 경청했다.
이런 말 하기는 미안하지만 멸망으로 향하고 있는 세계의 사람으로서 먼저 멸망을 겪은 이의 이야기는 중요한 정보였으니까.
“그때는 진흙 비가 내렸었지.”
“그렇다고 들었어.”
“그 시기에 사이비가 나타났다. 예언된 멸망이 다가왔다고. 순응하며 영겁의 시간 동안 쌓아온 죗값을 치러야 한다고 했지.”
“개소리군.”
“개소리지.”
나도 안다. 탑이라는 것은 혼돈이 쌓인 세계에 찾아온다는 걸.
그런데 뭐. 혼돈이 쌓였다고 생겨나는 탑이 이상한 거지 내가 잘못했나.
살면서 작은 다툼 한 번 안 한 사람이 어디 있나. 그런 것들까지 모조리 혼돈으로 치부해서 세상을 멸망시키려는 게 이상한 거지.
그거 같다가 죄를 지었다니, 순응해야 한다니 떠들면 잘도 오케이 하겠다.
“문제는 거인계에서는 그런 신화와 예언이 가지는 힘이 크다는 거다.”
“적어도 예언에 따라 진행된 건 사실이니까.”
“그렇다.”
거인계는 신비와 주술이 살아 있는 곳.
예언을 단순히 헛소리로 치부할 수 없다. 그레고리의 말에 따르면 실제로 예언이 그려진 벽화와 유사하게 멸망이 진행됐다고 한다.
사이비들의 말에 힘이 실리게 된 이유다. 그레고리를 비롯한 거인들이 벽화에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기도 하다.
“많은 이들이 그들에게 교화되어 숭배자의 길로 빠져들었고 심판이라는 이름 아래 많은 사람이 죽었다.”
“멸망을 앞당기려는 수작이군.”
“맞다.”
이미 겪지 않았던가.
70층대 시나리오. 세계수.
그곳에서 만났던 숭배자가 했던 말을 기억한다.
일부러 세계수를 향해 무리한 공격을 감행했다고. 그로 인해 멸망이 가속되어 선택지를 받아냈다.
멸망이 확정된 세계에서 헌터들은 NPC가 될지 세계에 남을지를 선택할 수 있으니까.
숭배자 입장에서는 하루라도 빨리 탑에 들어가 영생을 사는 게 편했다.
‘정작 숭배자가 되고 멸망을 되풀이하고 있다는 게 조크라면 조크군.’
아닌 경우도 있기는 하지만.
생각해 보면 이상한 부분이 좀 있다. 숭배자들은 영생이니 뭐니 외치고 다니기는 하는데 의외로 내가 만난 숭배자의 수는 많지 않다.
물론 내가 모든 숭배자를 본 건 아니라서 확정할 수는 없지만 그나마 많이 본 게 연옥계 마지막 챕터 정도?
그렇다면 안전지대나 필드에 없는 숭배자들은 어디에 있을까.
그들이 말하던 행복한 영생을 살고 있을까?
모르겠다. 별로 관심도 없고.
아무튼 중요한 건…….
“자이언트 폴리스에는 시나리오를 위해 만들어진 가짜 NPC가 존재한다.”
이 부분.
70층과 80층의 차이.
그중 하나가 가짜 NPC다. 말 그대로 NPC나 다를 바 없는 존재들.
그레고리나 다른 이들과 달리 챕터 진행을 위해 임시로 만들어진 이들이 있다고 한다.
그들이 있는 이유는 하나.
“우리는 탑 숭배자들보다 많은 가짜 NPC들을 포섭해야 한다. 그래야 놈들의 힘이 줄어들 것이고, 멸망이 가속하지 않을 테니까.”
“실패하면 기존의 역사처럼 되는 거고.”
녀석이 고개를 끄덕인다.
오케이. 방법은 알겠다. 그런데 말이지.
“어디까지나 예전 기준인 거잖아?”
“맞는 말이다. 운석을 막았으니 어떤 변수가 생겼을지 알 수 없어. 자세한 건 가서 봐 봐야 한다.”
“그래서 하는 말인데.”
난 판자로 막아 놓은 창문을 향해 턱짓했다.
처음에는 장작 타는 소리인가 싶었지만 지금은 아니다.
-쏴아아아아
“그 변화 지금도 일어나는 거 같다?”
분명 이쪽은 아직 올 때가 아니라고 했는데.
창문 틈. 검은 비가 흘러들어오고 있었다.
* * *
다음 날 아침. 폐가에서 나왔다.
간밤에 비가 내려서 기겁했지만 다행히 지나가는 비였던 모양.
비가 안으로 스며들기는 했지만 넘쳐날 정도는 아니었다.
그래도 혹시 모르는 상황에 대비해서 뜬눈으로 보내야 하기는 했지만.
“으으으. 이게 뭔 고생이야.”
밖으로 나와 기지개를 켰다.
그런 내 눈에 들어오는 무언가.
-푸득, 푸드득
검은 비가 고인 웅덩이. 발이 빠진 새 형태의 몬스터가 빠져나가기 위해 퍼덕거리고 있다.
날개를 휘저을 때마다 타르가 몸에 튀어 달라붙는다.
체력이 빠져서인가, 아니면 자유롭게 움직이지 못한다는 스트레스 때문인가.
점차 움직임이 줄어든 녀석이 웅덩이에 머리를 반쯤 박은 채 잠잠해졌다.
웅덩이 밖으로 나온 머리. 붉은색 섞인 주황 눈동자가 나와 마주쳤다.
천천히 웅덩이로 향했다.
-쯔으으으
새를 꺼내려 했지만 끈적이는 빗물에 뒤덮여 빠지질 않는다.
억지로 힘을 주면 몸이든 날개든 뜯겨나갈 게 분명해서 양손을 집어넣어 웅덩이를 파냈다.
저항감이 느껴졌지만 내 힘을 이길 정도는 아니다.
“이거 안 되겠는데?”
어떻게 빼내기는 했지만 깃털은 엉망이었고, 달라붙은 날개를 펴질 생각을 안 한다.
부리도 붙었는지 고개를 세차게 흔들 뿐 벌리지 못했고 픽, 쓰러졌다.
스트레스가 극에 달해 죽은 것.
말로만 듣다가 실제로 보니 상황이 더 안 좋다.
“생태계 자체가 무너질 수준이야.”
잠깐 소나기가 내린 수준인데 이 꼴이면 폭우가 쏟아졌을 때는 어떻게 될까.
당장 식물과 곤충, 이런 소형 몬스터와 같은 것들이 견디지 못한다면 이것을 주식으로 삼는 상위 포식자도 서서히 줄어든다.
먹이 피라미드의 밑동부터 도려내는 상황.
엄지와 검지를 버렸다. 그사이에 달라붙은 타르가 늘어난다.
점성에 더불어 탄력까지 있다. 문질러 봐도 닦이기는커녕 번지기나 하고.
[샤워(S) Lv.8]
-사아아아아아
혹시나 싶어 샤워 스킬을 사용해 봤지만 조금 닦여 나가는 게 고작이다.
그래도 S등급까지 올랐는데 이 정도라.
이어 클린을 사용했다.
“클린으로도 완전히 안 지워진다고?”
샤워보다는 확실히 효과가 좋았지만 그래도 조금 남았다.
연달아 클린을 사용하고 나서야 깨끗해졌다.
조금 만진 것만으로도 이 정도면 온몸에 묻었을 때는 고생 꽤 하겠는데.
“읏차.”
보물 주머니에서 의자를 꺼내 웅덩이 앞에 앉았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자세히 좀 알아보자.
숭배자 놈들이 검은 비를 예언에 나온 현상이라고 주장하는 만큼 면밀히 조사할 필요가 있다.
-꾸드드득
바닥에 굴러다니는 막대기로 웅덩이 옆으로 새로운 구덩이를 팠다.
꿀렁이면서 옆으로 흘러가는 타르.
끈적이는 거에 비해 유동성이 꽤 있다. 다른 특징은 뭘까.
-화르르르륵!
살짝 고인 곳을 향해 불을 뿜었지만 크게 반응은 없다. 휘발성은 없다는 거겠지. 오히려 불에 저항하는 느낌도 조금 든다.
차라리 석유 같은 거였으면 좋았을 텐데. 비 내릴 때 다 태워 버리게.
머리를 긁적이며 권능을 발휘했다. 아무래도 이런 쪽으로는 권능을 사용하는 게 가장 빨라서.
[SSS급 권능, 별을 주시하는 눈이 발휘됩니다.]
-츠즈즈즈즈즈
“음!”
순간적으로 눈이 따끔해 인상을 찌푸렸다.
권능 등급이 올라간 이후에 처음 있는 현상.
이전에는 간혹 무리할 때 통증이 있었다. 뽑아내야 할 정보가 많거나 혹은.
‘상대에 대한 정보를 읽어내기 힘들 때.’
눈 뼈를 문지르며 점차 떠오르는 정보에 집중했다.
[검은 비]
-거인계에 내리는 비.
-하늘의 눈물 호수 전설을 아시나요?
-신이 거인계를 만들 때 소중히 여기던 존재가 죽는 것을 보며 하늘이 울었다고 합니다.
-눈물이 고여 거대한 호수가 만들어졌죠.
-거인계에 탑이 찾아온 건 처음이…….
눈이 아프다.
초점이 흐려졌다 돌아오기를 반복했고.
-누군가 죽기로 된 존재를 깨웠습니다.
바늘로 쑤시는 듯한 통증에 주륵, 눈물이 흘러내린다.
희미해진 시야 속 난 엿보았다.
-…돈의 파편……세계……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