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탑에 갇혀 고인물-447화 (446/740)

447화 82층

위로 떠오르는 메시지.

내 생각이 맞다면 저게 뜻하는 바는 하나였다.

‘호수가 사라지지 않으면서 결과가 바뀌었어.’

거인들이 말하는 예언이 적힌 벽화. 그것에 따르면 호수에 있는 뭔가가 나타나서 멸망을 앞당긴다.

지금까지는 운석 때문에 호수가 완전히 날아가 버려서 아무런 일이 없었지만 지금은 달랐다.

시스템 메시지가 말하는 그대로 호수 속에 잠들어 있던 멸망의 존재가 깨어났다.

이걸 뭐라고 해야 할까.

“재앙을 막았더니 새로운 재앙이 생겨나는군.”

이런 빌어먹을 곳 같으니.

이쯤 되면 망하라고 고사를 지내는 정도 아닌가.

정신 차리자. 새로운 문제를 알아냈다는 것만 해도 성과가 있다.

예언 속 존재가 어떤 건지는 몰라도 이제 막 눈을 떴다고 했다.

그동안 거인들도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로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는 뜻. 어쩌면 봉인되었던 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지금 바로 처리하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이 아닐까?

-타아아앗!

“약할 때 처리해야겠어.”

“그, 그렇군! 제기랄. 다들 뛰어!”

“팔다리 한 짝 너덜거리는 거로 엄살 부리지 마라!”

“드디어 새로운 길을 찾았는데 꼬일 수는 없다!”

빠르게 호수로 달려갔다. 사태를 파악한 거인들이 황급히 호수로 뛰어든다.

덩치만큼 둔하지 않아서 다행.

난 이곳의 전설이나 예언에 대해서 아는 게 없다. 당연히 호수 밑에 뭐가 있는지도 모른다.

그저 예측할 뿐.

하늘이 흘린 눈물로 만들어진 호수.

하늘의 눈물이라는 건 폭우를 뜻하는 걸까. 홍수로 일대가 잠겼을 가능성도 있다.

-푸우우우우우.

호수 안으로 잠수해 헤엄치며 머리를 굴렸다.

생각하자. 가능성을 따져 보자.

몬스터일까. 존재라고 했으니 재앙과 같이 괴이한 현상이나 영물이 잠들어 있는 걸지도 몰랐다.

호수에 잠겨 있는 만큼 물과 관련됐을 가능성이 크지만 해양 동물 형태는 아닐 거다.

‘그러기에는 이곳 위치가 별로야.’

거대한 호수가 뜬금없이 있기는 하지만 기본적으로 우리가 있는 곳은 산맥이다.

수생 몬스터가 기본적으로 피지컬이 좋고 강하기는 하지만 어디까지나 물에 있을 때의 이야기다.

주변이 산인 이곳에서는 그다지 위협적이지 않을 터.

모르겠다. 대략적인 느낌은 알 거 같은데 가능성이 너무 크다. 직접 눈으로 보지 않는 이상 확신할 수 없다는 것.

그렇게 속도를 높여 아래로 향하는 타이밍.

-스아아아아.

놀랍도록 소름 끼치는 감각이 느껴졌다.

물 온도가 한순간 내려간 듯 서늘하면서도 끈적한 느낌.

끈적?

그러고 보니 거인들이 말하지 않았었나.

운석에 의해 호수가 증발하고 하늘에서 진흙 비가 내렸다고. 끈적한 진흙 비가.

달라붙는 진흙에 빠져나오지 못하고 죽은 거인들도 있다고 했다. 그 강인한 거인들이 말이다.

정상적인 것과는 거리가 먼 현상.

사실 그것이 호수 안쪽에 잠든 무언가의 영향으로 생긴 거라면?

저 깊숙한 곳에 있는 뭔가가 밑으로 잠수한 우리를 붙잡는다면?

가뜩이나 컨디션도 나쁜 상황, 섣부르게 움직인 게 아닐까.

위기감이 느껴졌고.

‘덕춘아, 저 녀석들 빼내!’

직감적으로 느껴지는 불안감에 덕춘이에게 생각을 전했다.

빠르게 다른 거인들을 향해 헤엄쳐 나가는 녀석.

그때.

-부그르르르르.

밑에서 올라오는 기포 사이로 시커먼 무언가를 본 거 같았다.

불길하고 끈적한 무언가로부터 대피하려는 타이밍.

[81층 클리어!]

[대기실로 이동합니다.]

시야가 암전됐다.

“후아!”

숨이 터져 나왔다.

호수에 들어간 만큼 홀딱 젖어 있어야 했지만 물기 하나 없다.

이 정도의 배려는 해 준다는 건가.

털썩, 소파에 앉았다.

“대충 이쯤에서 끝나지 않을까 싶기는 했지.”

시나리오를 몇 번 겪다 보니 대략적인 흐름이 파악된다.

운석을 기점으로 클리어 했다는 메시지가 뜰 거라는 건 알고 있었기에 놀라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뭐였을까.’

대기실로 넘어오기 전, 호수 밑에 잠들어 있던 것의 정체는 알 수 없었다.

아마 다음 챕터에서 정체를 드러내겠지.

다급할 필요 없다. 뭐가 됐든 첫 번째 챕터는 훌륭히 막아 냈으니까.

‘사실 그냥 운석이 떨어지게 놔두는 게 정답이었을지도 모르지만.’

호수의 존재와 거대 운석.

둘 중 어느 것이 거인계에 치명적인 영향을 끼칠지는 지켜보는 수밖에 없다.

당장 거인들도 운석을 막아 낸 게 이번이 처음이라 이후부터는 기존에는 없던 새로운 전개가 펼쳐질 거다.

그나마 어떤 식으로 진행될지 참고할 자료가 있다면 예언이 그려진 벽화겠지.

“할 게 많네, 많아.”

“그에에.”

[챕터Ⅰ-하늘이 무너지다 클리어!]

[두 번째 태양이 사라졌습니다.]

[거인계가 새로운 국면에 접어듭니다.]

[탑의 간섭으로 얽혔던 멸망 예언이 가동합니다!]

[혼돈 수치 +15점]

“허허. 이거 참.”

좋아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혼돈 수치를 많이 줘서 좋기는 한데 멸망 예언이 가동됐다는 말을 보면 일이 꼬인 거 같단 말이지.

됐다. 어차피 운석이 떨어졌어도 멸망이었다. 이 부분은 가서 생각해 보도록 하고.

-촤르르르르르.

난 허공에 떠오른 화면에 집중했다.

호수로 들어갔던 거인들이 방향을 바꿔 밖으로 나온다.

부상을 입은 녀석들이 바닥에 나자빠지고 호수 밖에 있던 녀석들은 아직 나오지 못한 이들을 끌어당긴다.

여기까지는 괜찮다. 문제는 다음 장면.

“저게 뭐야.”

운석에 의해 물이 넘쳐 수면이 낮아진 호수가 시커멓게 물든다.

뒤늦게 밖으로 나가려던 거인이 열심히 헤엄쳤지만 끈적하게 변해 버린 물은 녀석의 몸에 달라붙었고 이내 체력이 떨어진 거인이 늪에 가라앉듯 호수에 빨려 들어갔다.

그를 돕기 위해 줄을 집어 던지고 나무를 뽑아 내밀었지만 헛수고. 내밀었던 밧줄과 나무도 빨려 들어간다.

-촤르르르르.

화면이 계속해서 흐른다.

거인계 어디를 보여 주는 것일까.

일단 내가 있던 곳은 아니다. 나는 산맥에 있었고 지금 보이는 곳은 평원에 가까웠을 뿐만 아니라.

“도시? 좀 미묘한 느낌이군.”

부족 사회를 이루고 있던 곳과 달리 제대로 된 건물들과 각종 편의 시설이 모여 있었다.

잘 닦인 도로 위에는 괴수를 길들여 끄는 마차가 오갔으며 드물지만 3층 이상의 건물도 보였다.

그렇다고 완전히 도심지라기보다는 뭐랄까, 종교적 색채가 강하다고 해야 하나.

부족원들로 보이는 이들이 저마다 얼굴에 분장을 하고 색을 칠한 뒤 춤을 추고 제사를 지낸다.

샤먼? 사람들의 대표 격으로 보이는 자가 살아 있는 몬스터의 목을 베어 내며 기도를 한다.

-촤라라라.

화면이 지나간다.

보이는 건 하늘. 시커먼 먹구름으로 뒤덮인 하늘은 음침하다 못해 불길했다.

구름에서 쏟아지는 검은 비는 더 그렇다.

콰르르릉!

일순간 하늘을 빛내는 번개, 순간적으로 보이는 정체를 알 수 없는 무언가의 그림자.

검은 비가 바닥을 적신다. 적신다고 하는 게 맞는 말일까. 끈적이는 타르와 같은 것이 바닥에 쌓이듯이 고이는데.

시간이 빠르게 흐르는 모습을 보여 주려는 건지 검게 물든 나무가 날이 지날수록 말라비틀어지는 모습이 보인다.

광합성을 못 한다 이거겠지. 비단 식물만이 아니다. 동물과 몬스터들 역시 털이 엉키고 코와 눈, 입이 막혀 죽어 간다.

예언에 나오는 검은색 무언가.

그게 뭐를 뜻하는지 알 것 같다.

장비를 점검했다.

“다음 챕터로 넘어가야지.”

위로 올라갈 타이밍이 됐음을 직감했다.

제대로 느꼈는지 메시지와 함께 전송 마법진이 펼쳐졌다.

천천히 멈추는 화면.

[82층에 진입합니다.]

-우우우우우웅.

빛이 몸을 감싸는 순간 뭔가를 보았다.

화면 속 작지만 뭉쳐 있는 시커먼 옷차림의 거인들을.

눈에 마력을 불어넣어 제대로 확인하려 했지만.

-파아아아앗!

거센 빛이 나를 감쌌다.

하여간 뭐 하나 제대로 알려 주지를 않네.

짜증보다는 한숨이 나왔다. 탑이 이러는 게 한두 번도 아니고.

살며시 눈을 감으며 마법진에 몸을 맡겼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발에 바닥이 닿는 기분이 들었다.

[82층]

[챕터Ⅱ-검은 비]

눈을 뜬 내가 가장 먼저 맞이한 세상은 빈말로도 좋다고 말할 수 없었다.

하늘은 맑았다. 처음 건인계에 떨어졌을 때와 마찬가지로.

다만 다른 점이 있다면.

“영상으로 본 것보다 상황이 안 좋은데.”

끈적이는 물질에 뒤덮여 죽어 버린 산맥.

검게 물든 채 말라비틀어진 나무가 죽 이어져 있는 모습은 흡사 산불로 타 버린 것만 같았다.

괴상한 광경. 검은 비가 왔던 곳은 모두 이렇게 되어 버리는 건가.

이쯤 되면 진흙 비가 차라리 나을 거 같은데. 적어도 지금보다는 덜 끈적일 거 같아서.

연옥계도 이런 환경은 아니었다. 야생적으로 생명이 요동치던 거인계가 지금은 이 모양이라니.

쯧. 작게 혀를 찼다.

“이블, 아이? 왔군!”

“그레고리?”

그런 나를 향해 오는 거인이 있다. 그레고리.

첫 번째 챕터만 해도 가벼운 옷차림이었지만 지금은 꽤 몸을 여러 장비로 둘러쌌다.

태양의 열기를 피하기 위해 사막 부족이 몸을 감싸듯 머리에는 챙이 넓은 모자를 썼고 그 위로 방수 천을 망토처럼 둘렀다.

이미 몇 번 사용했는지 본래의 색은 사라지고 시커먼 빗자국만 남았다.

“기다리고 있었다!”

“야야야! 허리 나간다.”

덥썩 나를 잡는 녀석.

반가워하는 모습이 나쁘지는 않은데 과하다. 하여간 거인 놈들.

“다른 애들은?”

“아직 기억이 생성되지 않은 모양이군. 흩어져 있다. 너와 함께 이동하기 위함이지. 대부분은 자이언트 폴리스로 향했지.”

자이언트 폴리스?

그건 또 뭐야. 의문이 생기는 것도 잠시.

[82층 진입 확인.]

[기억이 생성됩니다.]

“으음!”

두통과 함께 기억이 생성되었다.

호수. 정체를 알 수 없는 무언가. 정신을 잃었던 건가. 기억이 뜨문뜨문 이어진다.

거인들이랑 뭔가를 하기도 했고 다른 거인과 싸우기도 했다.

검은 천을 뒤집어쓴 놈들이었는데 등에는 탑이 그려져 있었다.

‘탑 숭배자.’

놈들의 정체를 파악하는 건 쉬웠다.

그러고 보니 이곳으로 넘어오기 전에 화면에서 봤던 인물들이 숭배자였던 거 같은데.

머리가 욱신거린다.

뭔가 생각날 거 같으면서도 안 나는 답답한 기분.

“너무 무리하지 마라. 80층대는 기억이 온전치 않다.”

“무슨 소리지?”

“80층대는 우리들도 기억을 가지고 있지. 70층대처럼 친절하게 알려 줄 필요 없다는 거야.”

어떤 말을 하는지 알 거 같다.

70층대는 기억을 통해 정보를 주지 않으면 진행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가능한 자연스럽게, 비교적 선명하게 기억이 남지만 여기는 아니다.

80층대에 있는 NPC들은 시나리오와 챕터에 대해 알고 있으며 적극적으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움직이니까.

즉, 기억이 분명하지 않더라도 NPC들을 통해 정보를 모아 진행할 수 있다는 거다.

난이도 조절.

누가 탑 아니랄까 봐 이런 식으로 밸런스를 조절해 놨다.

“너만 그런 게 아니다. 우리도 비슷하지. 시스템에 의해 기억 일부분이 봉인되었다.”

“봉인을 왜?”

“각 챕터에서 활용할 만한 기억만 남겨 두는 거다. 챕터가 진행되며 봉인된 기억이 되돌아오는 형식이지.”

등반가 말고도 NPC한테도 이런 제약을 걸어 둔 거였나.

짜증 나는군. 쉽게 쉽게 가면 참 좋을 텐데.

“아무튼 본론으로 돌아와 이번 챕터에서 중요한 건 그거다.”

툭. 그레고리가 품에서 뭔가를 꺼내더니 내게 던져 준다.

“숭배자 패.”

“그래. 멸망에 접어들면서 멸망 옹호론자들, 탑의 기준으로 말하면 숭배자들이 활동했지. 멸망에 순응해야 한다는 사이비 놈들.”

“그저 허무맹랑하게 듣기도 힘들었겠어.”

“맞다. 우리에게는 예언이 있으니까. 거인계는 신화와 주술이 살아 있는 곳이다. 거기에 넘어가는 이들도 많지.”

그레고리가 내게 검은 비를 막을 수 있는 우비를 준다.

“놈들과 경쟁해야 한다. 숭배자가 많아지지 않도록. 그 중심지는 자이언트 폴리스지.”

기억이 생성되며 녀석이 말하는 자이언트 폴리스가 어떤 곳인지 알아들을 수 있었다.

자이언트 폴리스.

“거인족의 중심지.”

아무래도 그곳을 가 봐야 할 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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