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탑에 갇혀 고인물-445화 (444/740)

445화 운석, 떨어지다

바쁘게 살면 시간이 빨리 흐른다고 했던가.

거인들에게 나를 증명하고 인정받은 뒤, 바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계약서를 통해 운석을 막았던 일이 사실이라는 건 알렸지만 사실 그것도 따지고 보면 지금과는 상황이 달랐다. 지금은 차원 상점도 이용하기 힘들고.

때문에 직접적으로 보여 줘야 했다, 어떻게 해결할 것인지. 계획을 말하고 움직이고 눈에 보이는 대비를 해야 했다.

혼자 했다면 버거운 일이었지만…….

“빨리빨리 움직여! 밥은 괜히 주는 줄 알아!”

“그에엑!”

“으으으, 한국 출신 등반가 중에는 일 중독이 많다더니.”

“이런 잔인한 무지개.”

“저 작은 몸에 얼마나, 얼마나 커다란 악의가 차 있는가. 아흐흑!”

내게는 훌륭한 노예. 아니, 함께 멸망을 막아 내야 할 파트너인 거인들이 있다.

가지고 있는 거라고는 무지막지한 힘뿐인 녀석들. 알차게 부려먹을 생각이다.

덕춘이도 신났는지 혓바닥을 채찍처럼 휘두르며 거인들을 지휘하고 있다.

나라고 가만히 있는 건 아니고.

“흐음, 간이 좀 부족하군. 취사병, 소금 가져와.”

“여기 있다.”

“내가 멈추라고 할 때까지 부어.”

거인들이 먹을 음식을 만들고 있었다.

지시하랴 요리하랴 바쁘다, 바빠.

솥에 담긴 스프를 휘저을 때마다 맛깔나는 냄새가 피어올랐다.

흘깃흘깃, 거인들이 훔쳐봤지만…….

“어허, 앞에 봐라. 자재 옮기면서 한눈팔다 사고 나면 어떻게 하려고.”

“크흠! 미안하다. 나도 모르게.”

그때마다 주의를 주니 다시 일에 집중했다.

침 삼키는 소리는 어쩔 수 없었지만. 그것까지 뭐라 할 수는 없다.

동물도 식물도 다 큼지막해서 그런가. 식재료는 충분했다. 내가 만든 음식을 맛본 녀석들이 자의적으로 재료를 공급해 와 종류도 다양했고.

단순히 맛만 좋은 건 아니고.

[이블아이의 건강 스프]

-거인계의 식재료를 이용해 만든 스프.

-약초가 들어가 특별한 효능을 만들어 냈습니다.

-먹기만 해도 활력이 돌고 힘이 늡니다!

상점창에서 많이 사 먹은 스페셜 도시락처럼 버프를 주는 음식이었다.

포션 제작으로 기른 능력, 히든 가든의 레시피와 꾸준히 해 온 연구, 거기에 SSS등급으로 올라간 권능까지 더해지니 처음 보는 약초도 어떻게 사용해야 할지 알 수 있었다.

그뿐일까.

[요리(S) Lv.2]

어느덧 S등급까지 상승한 요리 스킬 덕에 맛까지 훌륭했다.

연옥계 시나리오 때도 그렇고, 대부분의 식사를 내가 준비하다 보니 실력이 금방 늘었다.

지금은 나 스스로도 자부심을 가질 정도. 이 정도면 밖에 나가서 식당을 해도 잘되지 않을까.

국내 유일 몬스터 전문점!

“음, 그건 힘들겠군.”

곰곰이 생각해 보니 그건 안 될 거 같다.

나보다 먼저 요리계에 뜻을 밝힌 녀석이 있어서.

나와 함께 헬다잉 키친의 지지를 받는 녀석이자, 초창기 헌터인 박재경.

헬다잉 키친에서 수련하고 있을 텐데 잘 지내는지 모르겠다.

닉네임 때문에 친구 등록을 안 해 놔서 개인적으로 연락할 수도 없고.

주기적으로 헬다잉 키친에 식자재를 납품하면서 소식을 듣기는 했다. 잘 지내는 거 같기는 하던데.

요리 수련을 하면서 등반을 하고 있다나.

아무튼…….

“이블아이, 시킨 거 다 했다. 밥 줘라.”

“내가 먼저 끝냈다! 내가 먼저다!”

“난 더 늦게 끝냈지만 먼저 먹고 싶다.”

“솔직하군. 내 앞에 서라!”

“누구 마음대로!”

슬슬 식사 시간이 된 거 같다. 좀비처럼 거인들이 몰려오는 거로 봐서는.

덩치가 커서 그런가, 아니면 즐길 거리가 많지 않아서일까. 먹는 데 진심인 애들이 많다.

저저 봐라. 먼저 먹겠다고 다투기나 하고.

-깡! 깡! 깡!

거인 맞춤용 국자로 솥을 두들겼다.

단번에 모이는 시선.

슬며시 발을 들었다.

“싸우지 말고 줄 서. 새치기하거나 다투는 놈 있으면 그대로 엎는다.”

“이, 이런 잔인한!”

“다들 줄 서라! 뒈지기 싫으면!”

“하하하하! 난 사실 질서 있게 움직이는 걸 좋아했지.”

언제 싸웠냐는 듯 줄을 서는 녀석들.

짧은 시간이지만 함께하면서 깨달았다. 종족 특성인지는 몰라도 활발하다 못해 날뛰는 성격인 녀석들이 많다.

그래서인지 곱게 타이르는 것보다는 강하게 말하는 편이 편했다. 살짝 협박이 섞여 있으면 더 좋았고.

한때는 착하고 배려심 깊었던 내가 어쩌다 이렇게 됐는지… 이게 다 험난한 탑의 생태계 때문이다.

“그에에?”

뭔 개소리냐는 눈빛으로 덕춘이가 바라봤지만 사뿐히 무시해 줬다.

당사자가 그렇다는데 그런 줄 알아야지. 흠흠.

이미 나와 덕춘이 몫의 식사는 남겨 놨고, 나머지는 취사병들이 알아서 배급해 줄 거다.

충분히 만들었으니 모자를 일도 없을 거고.

“정량 배식. 다 먹고 더 받아가는 건 괜찮지만 다 먹지도 못하게 퍼가다 걸리면 알지?”

“물론이다. 한 명씩 오도록!”

식사 시간 겸 휴식 시간.

난 간단히 식사를 마치고 발걸음을 옮겼다.

그동안 우리가 만든 물건을 살폈다.

“프램버그랑 인연이 있어서 다행이야.”

거인들은 피지컬과 특유의 주술 능력으로 대부분의 문제를 해결하는 놈들이라 다른 기술력은 부족했는데, 내게는 그 부분을 보완해 줄 세력이 있었다.

탑에 공급되는 대부분의 기계를 만들어 내는 곳. 프램버그.

마음 같아서는 완제품을 가져오고 싶었지만.

[시나리오를 어그러트릴 개입은 용납되지 않습니다.]

시스템적으로 막혀 있어서 그건 힘들었다.

거인계 입장에서는 오버테크놀로지라 이거지.

다만 기술과 재료를 가져오는 것까지는 가능했다.

나도 장비 제작을 통해 손기술은 좀 있는 편이라 어느 정도 할 수 있는 게 많았다.

그렇게 만든 것들이 이거.

[폭발의 돌(AA)]

-파이어 밤을 인챈트한 폭발성 물질.

-붉은 머리 일족의 화염 주술이 섞여 있습니다.

-터집니다. 터져! 펑펑!

첫 번째로 화력을 올려 줄 폭약.

안전성은 좀 부족하지만 위력은 상당하다. 거인의 주술은 예상보다 뛰어났다.

직접 만든 만큼 시간은 좀 걸렸지만 이 정도 양이면 충분하겠지.

게다가 프램버그에서 가져온 합금으로 만든 대포.

기존에 녀석들이 사용하던 대포와는 질이 다르다.

명중률은 물론이고, 여러 차례 사용할 수 있을 정도로 내구성도 좋다.

폭발의 돌을 화약으로 사용하는 만큼 내구도는 중요했는데.

“비교적 가볍지.”

거기에 경량화까지 시도했다.

왜냐?

“이블아이, 밥 다 먹었나?”

“대충 먹었어. 넌 왜 왔냐.”

“하하하하! 조금이라도 더 준비해야지. 내 역할이 중요하니.”

저거.

던질 거다.

던지는 사람은 그레고리.

계획을 짠 후, 가장 먼저 한 게 역할을 나누는 거였다.

사람마다 잘하는 게 있고, 특징이 있으니까.

포환던지기 역시 마찬가지. 후보군 20명 중에 가장 명중률과 힘이 좋은 그레고리를 뽑았다.

줄에 매단 포환을 던지는 건 생각보다 많은 경험과 센스를 요구해서.

‘이번 일에 핵심적인 일 중 하나기도 하고.’

다른 거인들도 저마다 할 일이 있다.

저기 완성을 코앞에 두고 있는 건축물도 그렇고.

길게 이어진 쇠사슬도 그렇다. 이걸 쇠사슬이라고 불러도 될지는 모르겠지만.

거인 몸통 굵기의 쇠사슬로 투박하지만 튼튼한 건 진짜다.

툭.

그레고리의 발목을 두드렸다.

“너무 무리하지는 말고, 조만간이니까. 컨디션 조절해야지.”

“걱정 마라. 거인족의 회복력은 누구나 알아주니까.”

잇몸을 보이며 웃은 녀석이 어깨를 돌리더니 연습용 포탄을 던지기 시작한다.

하늘 높이 치솟았던 포탄이 떨어질 때마다 산맥 어딘가에서 몬스터의 울부짖음이 울려 퍼졌지만 신경 쓰는 사람은 없었다.

좋네. 연습도 하고 몬스터도 없애고. 이걸 보고 ‘일석이조’라고 하는 건가.

순조롭게 준비되고 있는 시점.

난 기지개를 켰다.

“잘돼야 할 텐데.”

거인들이 준비했던 방식. 무식하고 어설펐지만 그중 일부는 쓸 만했다. 거인족 특성에 맞춘 방법이기도 하고.

살릴 수 있는 건 살리고, 보강할 거는 보강해서 운석을 막을 생각이다.

운석이 떨어지는 시기는 등반가가 들어오고 8일 뒤.

간단하게 말하면.

“내일이군.”

때가 다가왔다.

* * *

한 덩치 하는 거인들이 우르르 몰려 있는 모습은 그것대로 장관이다.

그것도 각 부족에서 온 엘리트들로만 이루어져 있다면, 자연스럽게 뿜어져 나오는 기세만으로 하늘이 일렁일 지경.

…그냥 몸에서 올라오는 열기 때문에 아지랑이가 피는 거 같기도 하다.

거인들이 워낙 체온이 높아서.

아무튼.

“준비 완료. 다른 부족원 공동체는 주변에 있는 몬스터들을 쓸어버리고 있다.”

“혹시 모를 변수는 없애야 하니까.”

“기대되는군. 지금까지 이렇게 준비한 적은 없었어.”

모든 준비를 마친 거인들이 긴장한 얼굴로 날 바라봤다.

그럼에도 입가에는 미소가 걸려 있다. 그만큼 지금까지 한 노력에 자신감이 있다는 뜻.

말마따나 주변에 있는 몬스터들을 모조리 쓸어버려서 그런가 산맥은 조용했다.

‘서두르길 잘했어.’

하늘을 올려다보며 생각했다.

나름 빠르게 준비한다고 했는데 생각보다 시간이 촉박했다.

시선을 던졌다. 산맥을 따라 만들어진 거대한 구조물.

모르는 사람이 봤으면 다리나 롤러코스터라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비슷한 느낌이긴 하지.

중요한 건 그게 아니지만.

“때가 됐다.”

모두가 모인 공터.

우리가 준비한 물건들이 가득한 곳에서 입을 열었다.

시선이 몰린다.

“긴말하지 않겠다. 누구보다 오늘과 같은 광경을 많이 본 게 너희니까.”

탑에 갇힌 채 멸망을 되풀이하고 있는 이들.

70층대와 달리 모든 것을 기억하고 더 나은 미래를 위해 발버둥 치고 있다.

쾌활한 척 웃고 떠들지만 속은 곪고 있는 녀석들. 반복되는 실패와 무너지는 세상을 지켜본 이들에게 내가 뭐라고 말할 게 있을까.

그저…….

“다만, 내일의 모습만큼은 동등하게. 한 번도 본 적 없는 세상을 맞이하겠다.”

손가락을 위로 가리켰다.

두 개의 태양.

이제는 그렇게 부를 수도 없다. 우리를 향해 돌진하는 운석은 더 이상 태양이라 부를 수도 없을 정도였으니까.

시간을 확인했다.

“태양이 하나인 세계에서 다시 보자. 다들 준비!”

“준비───!”

“빠르게 움직여! 기회는 한 번이다!”

길게 말할 거 없다.

직접 보여 주면 된다.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거인들. 눈이 마주친 그레고리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작전 수행까지 10분!”

“1조, 준비 완료!”

“2조, 배치 끝!”

“3조, 대기 중!”

나와 그레고리가 있는 곳은 공터 가운데 언덕.

인위적으로 만든 곳이다. 어떻게든 운석에 가까운 곳에 자리 잡기 위함.

후우. 심호흡하며 경량화 대포에 폭발의 돌을 가득 채웠다.

이후 안전장치를 확인한 후, 투구를 쓰고 대포 안에 쭈그려 앉았다.

대포 끝에 연결된 사슬을 잡은 그레고리가 결연한 표정을 짓는다.

“그레고리, 하던 대로만 해.”

“오늘만을 기다렸다. 꽉 잡아!”

대답할 시간은 없었다.

불끈! 힘줄이 튀어나오게 힘을 준 그레고리가 사슬을 잡고 돌기 시작했으니까.

사슬이 팽팽하게 당겨지며 원심력을 품은 대포가 언제든지 날아갈 준비를 한다.

세상이 빙빙 돌고 밖으로 튕겨 나갈 거 같은 반발력에 안전장치를 꽉 쥐었고.

-후우우우우웅!

“가라아아아아!”

그레고리가 괴성과 함께 잡고 있던 줄을 놓았다.

하늘 높이.

대포에 탄 채로 운석을 향해 나아갔다.

우리가 없애야만 하는 두 번째 태양이 다가온다.

아직 거리가 멀다.

하지만 걱정 마라.

[파이어(A) Lv.8]

그걸 알기에 2단 추진력을 준비했으니까!

-화르륵

-콰아아아아아아앙!

대포 안에 쌓인 폭약이 터지며 나를 밀어낸다.

인간 포탄이 되어 하늘을 향해, 운석을 향해 날아갔다.

“으그그그그극!”

폭발의 여파를 그대로 받은 등과 다리가 부러질 거 같았고, 가공할 만한 속도에 입도 제대로 열 수 없었다.

숨이 턱 막히는 압박감.

-쿠르르르릉!

대기권에 진입해 불타오르는 운석.

크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걸 폭탄을 던져서 부수는 건 힘들다.

그래서 떠올린 방법.

[파이어 밤(S) Lv.10+]

[달라붙기(S) Lv.8]

폭발을 일으켜 위치를 조절해 운석에 달라붙었다.

뜨거운 열기와 함께 온몸을 울리는 진동이 느껴졌지만 견뎠다.

여기서부터가 중요하다.

[무지개다리(S)]

-촤아아아악!

-카가가가가가강!

운석에 달라붙은 채 무지개다리를 사용했다.

평범한 방법으로는 운석의 무게와 힘을 견디지 못하겠지만 무지개다리는 이동 중 파괴 불가 옵션이 있다.

거센 충격에 머리가 울릴 지경이었지만 목표점을 정확히 잡았다.

가고자 하는 곳은 산맥을 깎아 만든 레일.

레일을 따라 쇠사슬을 붙잡은 거인족들이 줄지어 있다.

-콰앙! 콰아아아앙!

무지개다리를 긁으며 운석의 속도가 줄어든다.

이어 산맥에 설치한 레일을 부수듯 타고 내리며 2차로 속도가 줄었고.

그다음은…….

“당겨어어어!”

“버텨어어어어!”

거인들의 차례다.

빠른 속도로 레일을 타고 내려오는 운석을 보며 거인들이 쇠사슬을 잡아당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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