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탑에 갇혀 고인물-443화 (442/740)

443화 두 번째 태양

누군가를 만날 때, 굳이 사람이 아니더라도 어떤 환경에 새롭게 노출되었을 때, 첫인상이 중요하다고 한다.

처음 인식이 잡히면 이후 인식을 바꾸는 데 시간이 걸리고, 무의식적으로 첫인상에 맞춰 상대를 평가하게 되니까.

그런 의미에서 그레고리의 첫인상은 개판이었다.

“다짜고짜 잡아가니 뭐니 하면 내가 좋게 보겠냐고.”

“그에에.”

내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있는 녀석.

온몸에서 연기가 올라오고 있다. 자상도 가득하다.

거인족은 체온이 높나. 흘러내리는 피가, 피가 아니라 용암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끈적하고 뜨거웠다.

물론 용암은 아니겠지. 마그마 요정 같은 케이스는 아니니까.

아무튼.

“강하군.”

“괜히 80층대에 들어선 게 아니거든.”

나름 여유로운 척 말하고 있지만 나 역시 상태가 좋지는 않았다.

마법 공격에 강한 내성을 가지고 있는 녀석. 특히나 붉은 머리 일족은 불 속성에 대한 저항력이 높았다.

내가 주로 사용하는 스킬 중에는 폭발 같은 불 속성 스킬이 많고.

덕분에 고생 좀 했다. 검으로 열심히 그어 댔지. 덩치가 커서 그런지 벨 곳이 많아서.

피지컬에서도 밀리니 상성이 영 좋지 않은 편이었으나.

[펠라인의 무지개 세트(SSS)]

[SSS급 권능, 별을 주시하는 눈이 빛납니다.]

[SSS급 권능, 굴하지 않는 검귀가 번뜩입니다.]

장비는 물론이고, 권능까지 업그레이드된 덕분에 어떻게 상대할 수 있었다.

확실히 SSS급 정도 되니까 효과가 좋다.

뭐, 정말 서로 죽자고 싸웠으면 어떻데 될지 잘 모르겠지만.

적당히 서로 실력을 보고 한발 물러선 거에 가까웠다.

“이제야 동등한 위치에서 대화할 준비가 된 거 같은데, 어때?”

“거인족은 강자를 존중하지. 넌 그럴 자격이 있다.”

“자비롭게 문화 차이로 이해할게.”

썩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이 녀석이 가장 먼저 만난 거인족이다.

내 기준에서는 개떡 같은 놈이지만 혹시 아는가. 다른 거인족에 비하면 온화한 성격일지.

만약 그렇다면 그건 그것대로 문제지만.

후우. 작게 숨을 내뱉었다.

한바탕 난리를 쳐서 그런가 더운 기분이다.

펠라인 세트가 있는데도 이 정도인 걸 보면 거인계의 기후는 뜨거운 게 맞았다. 태양이 두 개라 더 그런 거 같기도 하고.

“날 왜 잡으려는 거지?”

“시나리오는 등반가를 기준으로 시작되고 끝이 나니까. 우리에게는 흔치 않은 기회다. 아무 생각 없이 돌아다니다 죽으면 시작도 전에 시나리오가 끝나잖아.”

한마디로 이들에게 있어 등반가는 타이머나 다를 바 없다는 것.

등반가가 멋대로 날뛰다 죽으면 기약 없이 다음 등반가가 올 때까지 기다리고 있어야 한다는 거지.

이게 70층대와 가장 다른 점이다.

70층대에 있는 NPC와 달리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있으니까.

멸망에서 벗어나는 업적을 세워 새로운 기회를 얻는 것.

다르게 말하면…….

‘이 녀석들은 세계가 멸망한 원인을 알고 있어.’

적어도 몇 개는 알고 있을 거다. 다는 아니겠지만.

모든 멸망의 원인과 해결 방법을 알고 있었다면 여기서 이러고 있을 일도 없지.

상관없다. 뭐라도 하나 알고 있으면 도움이 될 테니.

“이번 챕터의 문제점이 뭐야.”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는군. 보통 잡아갔던 등반가들이 어떻게 됐는지나 거인계에 대한 정보를 묻던데.”

“별 관심 없어. 잡힌 놈들이야 굴러다니다가 위로 올라갔겠지.”

탑 밖으로 빠져나간 녀석도 없었고, 80층 안전지대에서 머물고 있는 놈도 없었다.

그럼 뭐겠는가. 80층대 어딘가에 박혀 있거나 위로 올라갔다는 뜻이지.

혹은 따로 뭔가를 하고 있던가.

“흐흐흐, 범상치 않기는 해도 이제 막 올라온 티가 나는군.”

“뭐?”

“80층대는 70층대와는 달라. 꼭 올라갈 필요는 없지. 이곳은 목적이 분명한 곳이다.”

그레고리가 입꼬리를 올린다.

“거인계가 왜 멸망했을 거라고 생각하나. 게이트? 하하하! 그딴 건 의미가 없다. 대부분의 몬스터는 토종 생물한테 먹히거든. 그게 또 문제기는 하지만.”

“그래 보이긴 하더라.”

“거인계의 생태계는 잔혹하고 강렬하지. 이번 챕터의 위기가 뭐냐고 물었나?”

녀석이 손가락이 위로 향한다.

“두 번째 태양. 아니지, 우리를 향해 날아오는 운석을 막아 내는 거다.”

“오, 그렇군.”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 잠깐만…….”

운석이요?

고개를 들었다. 하늘에 보이는 두 개의 태양.

그냥 세계가 달라서 생긴 특이점이라고 생각했건만.

“운석이었다고?”

“챕터가 열리고 8일 뒤, 운석이 떨어진다.”

이건 뭐랄까.

“진짜 망할 만하네.”

납득이 가는 이유였다.

* * *

그레고리와 함께 이동했다.

자기와 같은 거인족들에게 안내해 주기 위함.

한때 지구를 지배했던 공룡들이 왜 멸종했는가. 거대 운석이 떨어졌기 때문 아닌가.

처음 그 이야기를 듣자마자 떠오른 건 옥토 선생이었다.

‘그 녀석이라면 충분히 떨구고도 남지.’

이미 한번 겪어 보지 않았던가.

그때도 차원 상점이 아니었다면 해결하지 못했을 텐데.

물론 이번에는 그것보다 상황이 안 좋았다.

옥토 선생이 떨군 운석은 어디까지나 이능으로 인한 현상. 굳이 어떻게 애쓴다면 상식 범주 안에 드는 공격이었다.

스킬 중에는 메테오라는 스킬도 있으니까.

게다가 어디까지나 소규모 운석이다. 진짜 운석이 아니라 떨어지는 위치도 좀 낮고.

그것 때문에 좀 더 까다로운 면이 있기는 하지만. 어느 순간 갑자기 생성되어 떨어지는 만큼 관측이 어렵고 미리 대비하기 힘들다.

그에 반해 이번 운석은 진짜였다. 하나의 시대를 없앨 정도의 거대한 운석.

“저 운석, 두 번째 태양으로 인해 거인계의 환경이 바뀌었다.”

“그렇겠지.”

과학에 해박한 건 아니지만 큰 영향을 준다는 건 안다.

현대 지구라면 오히려 나을지도 모르겠다. 마법이 없는 대신 과학이 발전했고, 내가 듣기로는 운석이 떨어질 때를 대비해 미사일이나 핵폭탄을 날리는 기술도 있다고 한다.

계산을 통해 운석의 이동 경로를 파악하고 우주에서 폭발시켜 버리는 것.

완전히 부수지 못하더라도 경로를 틀기만 해도 된다.

어디까지나 목적은 하나. 충돌을 막는 것이니까.

그런데…….

‘거인계는 아무리 봐도 과학이랑은 거리가 멀어 보인단 말이야.’

야생 그대로의 환경도 그렇고, 빌딩이나 아파트 같은 고층 건축물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당장 옆에 있는 그레고리의 옷차림도 현대보다는 아마존 원주민에 가깝다.

무기조차 몽둥이 아닌가.

개인 취향이 이쪽이라 들고 있는 걸지도 모르겠지만 만약 주조나 제련 기술 자체가 없는 거라면 상황이 심각했다.

설마 그 정도는 아니겠지.

난 애써 마음을 다잡았고.

“여기다. 붉은 머리 부족이 모여 있는 곳이지. 소식을 알렸으니 곧 다른 부족들도 올 거다.”

“크음.”

녀석의 안내로 도착한 마을을 본 난 침음을 삼켰다.

다행히 철도 사용 못 하는 원시 부족은 아니었다.

체중을 견딜 만큼 튼튼한 집을 지을 수 없어서인지 대부분 단층 건물이었으나 종종 2층 건물도 보였고, 벽과 창문, 천장이 제대로 달린 집에서 살고 있었다.

보아하니 대장간으로 보이는 곳도 있고. 다만…….

‘그리 품질이 좋지는 않군.’

전사로 보이는 이들이 착용하고 있는 방어구와 무기를 봤을 때 높은 수준의 제련 기술은 없는 거 같았다.

크키가 커질수록 만드는 게 힘이 들기는 하지만 저건 뭐랄까.

[투박한 철검(E)]

-뜨거운 주술의 불로 녹인 철로 만든 검.

-광석에 불순물이 섞여 있습니다.

-몇 번 두들기다 보면 깨질지도?

-불의 기운이 일부 서렸습니다.

권능으로 보이는 설명도 영 부실하고, SSS급으로 상승되며 강화된 권능으로 보면 미세한 검의 균열이 눈에 들어왔다.

가뜩이나 힘이 센 종족인데 불순물까지 섞인 검을 내리친다?

‘그게 무슨 검이야. 깨트려서 파편 날리는 거지.’

일상용품을 만들어 사용한다면 큰 문제는 없겠지만 내구도가 중요한 방어구와 무기로 쓰기에는 영 아니다.

이게 문제다. 이들에게 있어 도끼나 그런 건 크게 중요하지가 않다.

뭐 하러 도끼로 내려치나. 그냥 뽑거나 부러트리면 되는데.

몸으로 대부분의 문제가 해결되니 필요성을 못 느끼는 거다.

적어도 지금까지는 그랬겠지.

지구랑은 정반대의 입장. 우리는 저런 것보다는 게이트가 더 골치 아팠으니까.

속으로 고개를 젓는 사이 거인들이 몰려왔다.

“등반가! 오오오! 잘했다, 그레고리. 어서 철장으로 데려가지.”

“이번에 들어온 녀석은 특이하게 생겼군. 걱정 마라. 지내는 데 불편함이 없도록 준비했으니까.”

하여간 거인 놈들. 일단 가둘 생각부터 하네.

그레고리가 머리를 긁적인다.

“크흠. 이블아이는 갇힐 생각이 없다. 우리와 함께 멸망에 저항할 것이다.”

“그게 무슨 소리? 연약한 소인이 무슨 수로?”

“기껏 신경 써서 준비를 마쳤는데. 그동안 거친 등반가들의 의견을 조합해 만들었다고.”

그레고리의 말에 거인족들이 한쪽을 바라본다.

놈들이 말하는 철창 그거겠지. 소인이니 뭐니 하면서 무슨 희귀 동물 취급이나 하고 말이…….

“음?”

“그에에.”

뭐야 저거, 놈들이 말한 철장이 저거였나?

말이 철창이지 통유리로 된 벽에 아늑한 분위기의 집이 준비되어 있었다. 벽난로에 침대. 저 옆에 붙어 있는 건 훈련실 같고.

주방도 좀 크기는 하지만 제대로 마련되어 있다. 안에는 나도 본 적 없는 술과 식재료들이 가득하고 저건 또 뭐야? 아이템?

생활형 아티팩트다. 과학이 발전하지 못한 세상에서는 저런 아티팩트들이 가전제품 역할을 한다.

한마디로…….

‘좋은데? 안전지대 여관보다 좋은 거 같은데?’

이 자식들도 생각보다 손님 대접이 좋잖아?

본인들이 사는 집보다 잘 만들었다.

“아쉽군. 열심히 만들었는데 말이야.”

“별수 없지. 등반가들이 괜히 불만 있다고 돌아다니다 죽으면 그것대로 곤란하니.”

“원치 않은 거 같으니 부수고 다시 만들자고.”

시무룩해진 녀석들이 커다란 발을 들어 집을 부수려 한다.

“잠깐.”

내게 모이는 시선.

“흠흠, 그래도 준비한 성의가 있으니 이곳에 머무는 동안 임시 거처로 사용은 해 주지.”

“아니. 그렇게 억지로 맞출 필요 없다. 우리가 성격이 급해 과격하게 데려오기는 했지만 손님에 대한 예의는 있거든.”

“어허! 나도 손님으로서의 예의가 있거늘! 두 번 일할 필요 있나. 저기 멸망을 달고 오는 운석이 있는데 모든 시간을 집중하지는 못하고!”

호통에 놀란 걸까. 눈을 크게 뜬 거인들이 고개를 끄덕인다.

“이렇게 적극적으로 나오는 등반가는 처음이군!”

“맞는 말이다. 정말 중요한 건 운석을 막는 것이지.”

“소인이라고 생각했는데 마음가짐만큼은 거인보다 크구나!”

그레고리 역시 감동의 눈빛으로 날 바라본다.

그저 편하게 지내고 싶어서 한 말이지만 좋게 받아들이면 나야 땡큐지.

틀린 말도 아니고.

“자, 그래서 너희는 이미 여러 번 겪었을 거 아니야. 저걸 어떻게 막을 생각이지? 그동안 어떤 방법들을 사용했어?”

시간 끌 거 있나. 8일이라는 시간은 결코 길지 않다. 준비할 수 있을 때 바로 준비해야 하는 법.

“아, 그리고 운석이 떨어지면 어떻게 되는지도 말해 봐. 어디로 떨어지는지도.”

상위 헌터 중에 밖으로 나간 사람은 없다.

다르게 말하면 이번 챕터에서 운석이 떨어져도 등반가들이 죽지 않았다는 뜻이 된다.

“적극적인 게 마음에 드는군. 좋다! 우리가 심혈을 기울여 만든 걸 보여 주지.”

“자세한 내용은 가면서 설명하겠다.”

“그동안 쌓인 노하우와 정보를 알려 주지. 그 전에 이것 먼저 봐라.”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나를 이끈 이들이 공터를 가리켰다.

거인족 기준의 공터라 그런가 축구장 대여섯 개는 합친 규모였고 그곳에는…….

“너희 설마?”

“후후후. 바로 알아보는군. 맞다.”

그레고리가 입꼬리를 올린다.

“위협이 오기 전에 부순다. 그게 거인의 방식이다.”

“아, 제발.”

난 얼굴을 쓸어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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