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2화 거인
프리즘 레인보우.
무려 SS등급의 은신 스킬이다.
등급이 높아서 그런가 완전 은신이 가능하다는 설명이 있었고 그 효과는 탁월했으니.
“찌찍?”
날 바라보던 거대 생쥐가 갑자기 사라진 나를 보고 놀라더니 빠르게 도망치기 시작했다.
저 녀석 입장에서 보면 멀쩡히 서 있던 사람이 한순간에 사라진 거나 마찬가지니까.
“신기하네.”
“그에에.”
덕춘이 역시 동의하는지 고개를 끄덕인다.
은신 스킬이라는 게 생각보다 고급 스킬이라 여러 가지 조건을 주렁주렁 달고 있는 경우가 많다.
당장 내가 사용하던 외톨이의 길도 인간의 형태를 지닌 이들에게는 효과적이지만 짐승형 몬스터에는 효과가 떨어졌다.
기능도 다르다. 외톨이의 길이 인지를 흘리는 거라며 이건 투명화다.
심지어 내 몸만이 아니라 가지고 있는 장비, 덕춘이까지 같이 투명해진다.
그러면서도 나 스스로는 내 몸을 인지할 수 있다. 약간 투명한 느낌이기는 하지만.
“목소리는 따로 못 숨기는 거 같고.”
꾸욱. 발을 강하게 누르자 발자국이 생긴다.
거칠게 움직이면 발자국도 남는 모양.
냄새까지는 잘 모르겠다. 투명화에 가까운 스킬이니 냄새도 따로 가려지지는 않을 거다.
하긴 소리, 냄새, 흔적까지 다 가려지면 SS급이 아니라 SSS급이어도 가능할까 말까 아닐까.
이 정도만 돼도 충분하다.
펠라인 세트가 하나로 합쳐지며 기존에 있던 효과가 강화되는 한편 새로운 옵션도 생겨나서.
[펠라인의 무지개 세트(SSS)]
-올스텟 +200
-쾌적(D)
-감각 공유(C)
-조용한 발걸음(A)
-소음 완화(B)
.
.
.
소음 완화와 조용한 발걸음.
두 스킬 덕에 갑옷치고 상당히 조용하게 움직일 수 있었다.
그 전에도 움직임을 컨트롤 하면 은밀하게 이동하는 건 일도 아니었고.
“유지 시간이 얼마나 되는지 확인해 봐야겠군.”
펠라인 스킬 중에는 아스트랄 레인보우같이 사용 시간이 정해진 것도 있지만, 무지개다리처럼 정확한 횟수나 지속 시간이 없는 것도 있어서.
이 스킬 역시 직접 사용해 보며 유지 시간과 효과를 확인해 봐야 할 거 같다.
마침 81층에 떨어져 새로운 시나리오를 진행해야 하는 상황.
‘거인의 시대라.’
등반을 하며 거인족을 만나게 될 거라고는 생각했지만 바로 그쪽 세계로 떨어질 줄은 몰랐는데.
거인족. 당연한 이야기지만 드러난 정보가 거의 없다. 80층대에서 등장하는 종족을 바깥에 있는 헌터들이 알고 있을 리가 없으니까.
거기에 더불어.
[80층대에 위치한 NPC에게는 새로운 규칙이 적용됩니다.]
이 부분도 신경 쓰였다.
새로운 규칙. 탑에서 규칙이라는 건 상당히 중요하다. 공략에 큰 영향을 주니까.
확인해 보자.
[80층대 멸망에서 벗어나려는 세계의 NPC는 계승자를 고를 수 없습니다.]
“흐음?”
계승자를 구할 수 없다?
NPC에게 있어 계승자는 새로운 기회를 얻을 수 있는 마지막 방법 아닌가?
적어도 내가 알기로는 그렇다. 어떤 식으로 진행되는지는 여전히 미스테리지만.
정보를 찬찬히 읽어 내려갔다. 아무런 이유 없이 저런 규칙을 만든 게 아닐 테니까.
약간의 시간이 흐르고 규칙에 대해 완독한 난 작게 얼굴을 쓸어내렸다.
“그러니까, 후우… 70층대랑은 전혀 다르게 진행되겠네.”
간단하게 요약하자면 이거다.
80층대까지 올라온 등반가라면 비교적 100층까지 올라갈 가능성이 큰 사람이다.
즉, 여기 있는 NPC들은 저층에 위치한 NPC들보다 훨씬 좋은 조건에서 계승자를 선택할 수 있다는 것.
형평성을 위해 80층대에 있는 NPC들에게는 계승자를 선택할 권리를 박탈한다. 대신…….
“시나리오에서 완전히 멸망에서 벗어나는 업적을 이룬 NPC는 기회를 얻는다.”
당연히 80층대의 NPC들은 본인들이 NPC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70층대와 확연히 다른 점이었다. 이곳의 NPC들은 멸망에서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 칠 테니까.
물론 쉽지는 않을 거다.
80층대에 올라오는 사람들이 적은 만큼 기회는 한정적이고, 탑이라는 곳은 몇몇 부분에서는 엄격할 정도로 형평성을 중요시한다.
80층대 시나리오는 하나같이 멸망에서 벗어날 가능성이 희박한 곳일 게 분명했다.
거의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편이 좋겠지. 왜 80층대가 멸망에서 벗어나려는 세계라고 불리는지 알겠다.
게다가 말이야.
“묘하게 함정이 섞여 있는 기분이야.”
왠지 모를 위화감이 느껴졌다. 겉으로 보이는 내용만 보면 이상할 게 없지만 뭔가 놓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단순한 착각일까. 그런 거면 좋겠는데.
어깨를 으쓱이고 하늘을 올려다봤다.
이번 시나리오는 거인의 시대. 81층. 첫 번째 챕터의 제목은.
[챕터Ⅰ- 하늘이 무너지다]
하늘이 무너진다라, 문자 그대로의 의미일까. 아니면 비유적으로 표현한 걸까.
당장 보기에는 멀쩡해 보인다. 하늘은 맑고 구름도 좀 있고.
특이한 점을 하나 꼽으라면.
“해가 2개군.”
그래서 그런가 날씨가 좀 더운 거 같기도 하고.
일단은 움직여 볼까. 가만히 있는다고 해서 정리되는 건 없다.
가뜩이나 이쪽 세계는 하나같이 다 커서 전체적인 모습을 보려면 열심히 높은 곳으로 올라가야 할 거 같다.
식생도 특이한 것이 새로운 포션 재료를 얻을 수 있지 않을까?
살짝 기대감이 생겼으나…….
“크기 말고는 다른 게 없어 보이는데?”
“그에에에.”
말도 안 되게 큰 사이즈에 놀라 못 알아차렸는데 기본적으로 탑에서 흔히 보이던 식물이다.
이쯤 되면 그냥 나만 작아진 게 아닌가 싶을 정도.
산책하듯 산맥을 오르던 때.
-우아아아아아아아!
-해가 떠올랐다아아아아!
-아아아아아아아!
“뭐, 뭐야!”
천둥과도 같은 외침이 터져 나왔다.
어디서 소리쳤는지 짐작할 수 없을 정도로 사방에서 메아리처럼 울리는 목소리.
소음에 놀란 새들이 날아오른다.
나 역시 긴장감을 올리며 경계했다.
울림으로 봤을 때 산맥 너머에서 소리친 거 같은데 실제로는 어디 있을지 모르니까.
몬스터는 아니다. 문장이 섞여 있는 거로 봐서는 거인들이 분명하다.
-두두두두두두두두
땅이 울린다.
어디로 향하는지 모를 발소리.
세상 전체가 울리는 듯한 착각이 들 지경이다.
은신을 유지한 채 그나마 가장 높이 솟은 나무 위로 올라갔다.
마음 같아서는 산맥 꼭대기에 올라서 주변을 살피고 싶었는데 그럴 여유가 없을 거 같으니 이곳에서라도 확인해 볼 생각.
-뿌으으으으으으!
-키라라라락!
“…여기는 대형급 몬스터가 기본인가. 아니, 초대형급?”
거인들의 함성에 자극을 받은 걸까. 몬스터들이 괴성을 지르며 난리를 치고 있었다.
저기 보이는 건 6성급 몬스터인 메가 매머드 같고, 저건 와이번.
분명 하나같이 덩치가 커다란 놈들인데 여기서는 평범할 뿐이다.
다른 이유가 있는 건 아니고 다른 놈들이 너무 크다.
-카르르르릉!
거대한 퓨마같이 생긴 녀석이 펄쩍 뛰더니 와이번의 목을 물고 착지한다.
저것만이 아니다. 거인 세계 토종 몬스터로 보이는 놈들이 일반 몬스터랑 뒹굴고 있다.
“5성, 6성급 몬스터를 먹이로 삼는 토종 몬스터라.”
마계도 그렇지만 거인계 역시 환경 자체가 살벌하다.
이러니까 멸망에서 벗어난다 뭐 한다 하는 거지.
탑에서 나오는 몬스터 따위 이곳의 주민들에게는 평범한 놈들에 불과하니까.
평범이 뭐야, 오히려 더 편한 상대다. 5성급 몬스터도 최상위 포식자의 자리에 오르지 못한다.
6성급은 되어야 어느 정도 비벼 볼 수준.
이러니까 거인계가 80층대부터 나오지. 이전에 나왔으면 등반가들이 다 쓸려 나갔을 거다.
-쿵! 쿵! 쿵!
진동이 가까워진다.
이전까지와는 다르다. 근처에서 들여오는 소음. 내 쪽으로 이동하고 있다.
우드득.
나무를 박살 내며 달려오는 인물.
“얼마 만에 등반가가 올라온 것이냐! 하하하하!”
붉은 머리카락을 지닌 거인이 호탕하게 웃으며 산등성이를 타고 달려 내려왔다.
중간에 강이 있었지만.
-후웅
-콰아앙!
달리는 속도 그대로 점프를 해 넘어 버린다.
세상에나, 멀리 있어서 정확히 측정은 못 하지만 강 폭이 못해도 30미터는 되어 보이는데, 도움닫기도 제대로 안 하고 뛰어넘네.
무장 상태는 별거 없다. 대충 옷을 걸쳤고 무기라고는 허리에 달린 몽둥이 정도.
놈이 내가 있는 나무 옆을 지나친다.
날 보고 온 건 아닌 모양. 그냥 우연히 경로가 겹친 거 같다.
덕분에 하나는 알았다. 은신이 제대로 작동되고 있다는 것.
“크아아아아악!”
“하하하하! 이상한 놈이 있군!”
자신의 영역에 침범한 거인이 마음에 안 들었는지 땅속에서 거대한 몬스터가 모습을 드러냈다.
6성급 몬스터, 지하손.
하나의 커다란 몸통에 5개의 두꺼운 촉수가 손을 닮았다 하여 붙여진 이름.
6성급인 만큼 굉장히 위험한 종에 포함되었으나.
-뿌그그극!
-포화아아악!
거인은 덤벼오는 촉수를 잡더니 그대로 뜯어 버렸다.
독성을 머금은 체액이 쏟아지고 나머지 촉수가 발작하듯 꿈틀거렸으나.
“지렁이 같은 녀석!”
거인에게는 발악조차 되지 않았다.
잡히는 촉수를 죄다 찢어발긴 녀석이 땅속 깊숙이 손을 집어넣더니 몸통째로 뽑아 버린다.
대형 버스 3개를 합친 정도의 두께건만 거인에게는 아무렇지 않은 듯싶었고.
“우랴아아아!”
-퍼버버버벙!
연달아 주먹질을 날리니 지하손이 물풍선처럼 터져나갔다.
와, 저런 무식한.
어이가 없어서 말이 다 안 나오네.
지하손이라는 몬스터는 문어같이 온몸이 근육으로 이루어진 놈이라 어마어마하게 질긴 피부와 쇳덩이 같은 내구도를 자랑하는데, 저걸 맨손으로 찢어?
심지어 스킬도 사용하지 않았다. 단순 피지컬로 잡았다는 말.
객관적으로 생각해 봤다.
나라면 저렇게 할 수 있을까?
‘할 수는 있는데 시간이 더 오래 걸리겠지.’
검이라도 하나 들면 또 모르겠지만 맨손으로 저 난리를 치려면 한두 번 휘둘러서는 답이 안 나온다.
힘을 떠나서 크기 차이가 나니까.
저런 놈들이 득실거리는 곳이 거인계.
권능을 사용했다.
[SSS급 권능, 별을 주시하는 눈이 발휘됩니다.]
-츠즈즈즈즛
80층을 넘으며 등급이 상승한 권능이 거인의 정보를 뽑아내었고.
[그레고리- NPC]
-붉은 머리 거인족.
-거인족은 마법 저항력이 강합니다!
-강력한 피지컬과 종족 특유의 주술이 합쳐진 괴물 같은 종족이죠!
-붉은 머리 부족의 전사입니다.
-마법, 그중에서도 불 속성에 대한 저항력이 강합니다.
종족, 부족 특성까지 알아낼 수 있었다.
전사라, 그냥 일반 전사가 저 정도 수준이라. 과연 80층대쯤 되면 NPC도 범상치 않다 이거겠지.
한 가지 다행인 점이라면 숭배자는 아니라는 것 정도?
바로 접근할 생각은 없다. 몇몇 거인을 더 확인해 보고 비교적 온화한 성향을 지닌 녀석과 접촉해 볼 생각.
[프리즘 레인보우가 종료됩니다.]
…이었는데 말이지. 역시나 세상일은 내 마음대로 되는 일이 없다.
기가 막힌 타이밍 은신이 풀렸고.
“음?”
“하, 하하. 안녕?”
나무에 올라 눈높이가 맞은 난 어색하게 손을 흔들었다.
덩치 더럽게 크네, 진짜.
대충 10미터 정도? 더 큰 거 같기도 하고.
-씨이익
놈의 입이 벌어진다.
콧바람을 뿜는 것만으로도 나무가 휘청인다.
은근히 찝찝한 바람에 인상을 구기는 찰나.
“등반가로군. 으하하하하!”
크게 웃음을 터트린 녀석이 눈을 빛냈다.
“넌 죽지 않는다. 절대 죽을 수 없지! 네 다음에 등반가가 언제 올라올지 알 수 없으니까!”
후웅.
놈의 손이 움직인다.
그대로 날 잡으려는 건가.
“저항하지만 않으면 다치지 않을 거다. 잠깐만 철창에 갇혀 있으면 돼!”
거대한 벽이 좁아지듯 내게 다가오는 양손.
하아.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파이어 밤(S) Lv.10+]
-콰아아아아앙!
“으아악!”
갑작스러운 폭발에 놈이 손을 뺀다.
“누굴 짐승으로 아나. 가두긴 뭘 가둬.”
차캉.
검을 뽑았다.
“확 씨, 그냥. 팔다리를 홀수로 만들까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