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0화 가속화
80층에서 해야 할 일은 생각보다 빠르게 끝났다.
우연이라 할지 인연이라 할지, 치히린과 모빌리딕을 구했던 게 이런 식으로 돌아올 줄이야.
“이래서 사람은 착하게 살아야 돼.”
그러니까 가만히 있다가도 복이 찾아오잖아.
다 나 같은 사람을 보고 하는 말이다. 암, 그렇고말고.
“그에?”
“왜, 맞잖아.”
덕춘이가 딴지를 걸었지만 이번만큼은 당당하다. 뭐가 됐든 둘 중 하나가 아니라 모두 구해 줬던 건 맞으니까.
친구를 잘 둔 덕에 멤버들과 마그마 요정도 쉽게 권능과 스킬을 초월했고.
좀 더 대화를 나누다 지금은 숙소로 이동한 상태다.
냥펀과 핥짝이는 목욕한다고 난리고, 탈모맨은 근육 요정이랑 운동하러 가고, 마그마 요정은 여관 근처 공통에 땅을 파더니 마음껏 용암을 흘리며 몸을 녹이고 있었다.
이제 와서 드는 생각인데, 연옥계 시나리오에 들어가기 전 들어갔던 용암도 녀석이 흘려 대서 만들어진 건 아니겠지?
괜히 찝찝하네.
그건 그거고.
“이런 식이었구나?”
난 초월한 권능을 확인했다.
[스킬 합성(SSS)]
-예상을 벗어나는 뭔가가 만들어질지도?
[별을 주시하는 눈(SSS)]
-보다 본질적인 것을 볼 수 있을 거 같습니다!
[굴하지 않는 검귀(SSS)]
-검신합일! 궁극에 다다른 검술은 편견을 깨부숩니다!
권능 등급이 올라가며 전보다 강해진 것이 느껴졌다.
별을 주시하는 눈이야 평소에도 자주 쓰는 만큼 익숙해졌다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간단한 정보 외에도 내면적인 부분까지도 엿볼 수 있었으니까.
잘만 사용하면 후렌 키아노가 사용했던 사이코메트리도 흉내 낼 수 있을 거 같다.
굴하지 않는 검귀는 말할 것도 없다.
이미 알리오스가 준 전투 기억을 모두 흡수한 상태.
다른 무기는 몰라도 검에 한에서라면 누구한테도 지지 않을 자신감이 있었지만 지금은 뭐랄까, 완전히 검과 하나가 된 느낌?
그 증거가 이거다.
-츠즈즈즈즈
손가락을 타고 올라오는 마력의 칼날.
검강과 비슷하나 다른 점이 있다. 다른 날붙이가 없음에도 형성된다는 것.
의지의 칼날이라고 해야 하나? 지금은 비록 10센티미터 정도의 마력 칼날이 고작이지만 숙련된다면 검을 잃어도 검술을 사용할 수 있을 거 같다.
마지막으로 릴카에게 받은 권능은.
[차원 상인의 무자본 혜택(SSS)]
-뭔가 아마도 나올 것입니다!
“와, 이건 진짜 쓸모없네.”
어째 달라진 게 없냐. 하다못해 좋은 게 나올 확률이라도 높아지리라 기대했건만.
사기당한 건가? 진지하게 릴카 이 녀석이 개똥 같은 권능을 준 게 아닐까?
괜히 화나네.
슬쩍 옆에 굴러다니는 릴카를 바라봤다.
“뭐야, 그 눈빛은! 에이이잇! 불경하닷!”
“야야야야, 눈 찌르지 마라.”
눈을 찌르려는 녀석의 뒷덜미를 잡고 들어 올렸다.
한참 버둥거리던 녀석이 다짜고짜 내 머리를 잡는다.
“됐고 빨리 내놓으라고오오오.”
“머리 잡아당기지 마라. 튼튼한 모근이지만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는 거란 말이야.”
나한테 달라붙어 머리를 잡아당기는 릴카와 할 이야기가 남았다.
70층 안전지대에서 받은 강제 퀘스트. 릴카의 부탁(6).
[릴카의 부탁(6)- 강제 퀘스트]
-이제 익숙하잖아요? 받아들이세요!
-아쿨라 꽃봉오리(15/15)
-천사의 뿔 가루(1/1)
-비틀린 정령의 검은 눈물(3/3)
-메가 겔리코의 발톱(8/8)
안전지대 올 때마다 있는 일이라 그러려니 했는데 이번에는 좀 특이하다.
‘내가 직접 챙긴 건 없단 말이지.’
70층대 시나리오를 클리어하며 다양한 세계를 접했고, 릴카의 퀘스트 재료들은 그곳에서 얻을 수 있는 것들이었다.
특별한 것도 있고 아닌 것도 있고.
사실 시나리오를 진행하느라 크게 신경을 못 쓰고 있었는데 결과적으로 보면 모두 챙겨 왔다.
이유는 하나.
챕터가 진행되며 생성되는 기억.
단순히 관념적인 기억만 생성되는 것이 아니다.
챕터가 지나가며 소모된 시간만큼 사용한 스킬의 레벨이 올라가기도 했으니까.
아이템도 마찬가지. 아공간 아티팩트를 살펴보니 그 시간 동안 획득한 물건들이 있었다.
새롭게 생성된 기억 중에 약초를 캔 기억이 있다? 그걸 아공간에 넣어 뒀고? 그럼 진짜 아공간에 그 약초가 있는 형태.
이 부분이 중요했다.
‘챕터가 넘어가며 진행된 시간. 그냥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게 아니야. 진짜 겪은 일들이지.’
비록 인지하지 못했지만 내가 한 행동들임이 틀림없다.
그래야 말이 된다. 스킬 레벨이 올라간 것, 릴카의 퀘스트 재료가 모인 것 모두.
전송 대기실에서 다음 챕터로 넘어가는 짧은 순간, 내가 인지하지도 못할 만큼 빠르게 모든 일이 흘러간 거다.
시공간이 비틀려 있는 탑이라 가능한 현상. 당장 바깥보다 2배는 빠르게 시간이 흐르고 있는 곳이니 불가능한 일도 아니다.
문제는…….
‘진짜 아무런 영향이 없을까?’
과학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 애초에 탑에서는 과학이나 상식을 벗어나는 일들이 비일비재하기도 하고.
그래도 시간이라는 건 꽤 중요한 거 아닌가?
괜한 걱정일지도 모른다. 뭐가 됐든 탑이 바깥보다 2배 빠르게 시간이 흐른다는 건 팩트니까.
내가 안에서 무슨 짓을 해도 밖으로 나가면 탑에 있던 시간의 절반만 흘렀다는 건데.
“이것도 생각해 보면 60층대까지 올라온 사람들한테만 해당한단 말이지.”
지금 밖에 나가 있는 사람 중 64층이 최고 등반자니까.
70층부터는 상위층. 다른 규칙이 적용돼도 이상할 게 없었다.
이럴 때는 전문가의 조언이 필요한 법.
“릴카, 70층대는 시나리오 구간이잖아.”
“그칭?”
“챕터에서 챕터 지나갈 때 생기는 기억들 전부 시스템이 꾸민 게 아니라 내가 직접 한 것들 맞지?”
“후후후. 눈치챘군!”
눈치채지 그럼. 이제 생각해 보니 릴카 이 녀석, 이걸 유도하려고 퀘스트를 준 거 같은데.
이전에도 비슷했다.
그저 날 엿 먹이기 위해 강제 퀘스트를 주나 했지만 각 퀘스트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 내게 좋은 쪽으로.
퀘스트 재료를 통해 간접적으로 어떤 몬스터나 환경이 나타날지 암시해 준다던가, 숨겨진 던전이 있는 곳으로 유도한다던가.
에꾸 예티의 눈물을 얻으려다 불과 춤의 화신 칭호와 댄싱 마스터의 왕관을 얻지 않았던가.
60층에 있는 재앙이 뭐가 있을지 예측할 수 있던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번 퀘스트는 이것 때문이라 이건가.
어째선지 뿌듯한 얼굴로 바라보는 녀석을 향해 퀘스트 재료를 건네줬다.
“잇차! 음음, 역시 내 계승자 답도다. 품질이 좋아.”
“그럼 다행이고. 사실 그것들 모은 기억이 희미해서 말이야. 챕터 사이에 있던 일이 진짜 있었던 일이란 걸 알았지만.”
“맞앙. 남들이 보기에는 아무 일도 안 일어난 것처럼 짧은 시간이지만 실제로는 아니지. 밀도 높게 압축된 시간이얌.”
재료를 하나하나 살피며 챙긴 릴카가 고개를 끄덕였다.
지그시 녀석을 바라봤다. 더 할 말이 있을 텐데.
내 의도를 알아차린 걸까. 여전히 재료를 살피며 릴카가 말을 이었다.
“다르게 말하면 그 짧은 순간들이 쌓여서 영향을 준다는 말이기도 하지. 시간이라는 건 절대적이라서 압축에도 한계가 있거든. 조정이 있엉.”
“쉽게 말해 줄래?”
“멸망이 빨라진다는 거양!”
“그렇구나. …잠깐, 잠깐만.”
아니지. 그게 아니지.
압축이 너무 됐잖아.
난 좀 더 자세한 설명을 요구했고, 대략적으로 요약하자면 이거였다.
상위 헌터가 늘어날수록 압축되는 시간이 많아지고 그 반발력으로 바깥세상의 시간이 빠르게 흘러간다.
즉, 기존에는 탑에서의 2년이 바깥세상에서는 1년이었지만 그 시간은 점차 좁혀져 탑과 바깥세상의 시간이 똑같이 흘러가게 된다는 것.
이후 탑의 시간이 바깥세상보다 느리게 시간이 흘러가게 되면…….
“더 이상 탑의 초대를 받는 사람은 없엉.”
예전에도 말했었다. 멸망이 진행될수록 탑의 초대를 받는 사람은 점차 줄어들고 종국에는 새내기는 들어오지 않는다는 것을.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현재 진행형이다.
노블 나이트를 이끄는 오필리아가 말하지 않았던가. 미국에서 탑의 초대를 받은 사람이 절반으로 줄었다고.
그러고 보니 저번에 새내기가 들어오고 제법 시간이 지나지 않았나?
초대라는 것이 일정한 시간을 기점으로 발생하지는 않는다고 하지만 슬슬 들어올 때가 된 거 같은데.
“그걸 지금 말하는 이유가 뭐야.”
“지금은 말해도 돼서? 그전에는 시스템 제약 때문에 경고해 주고 싶어도 못했거든. 그래도 난 노력했다?”
어떻게든 간접적으로 정보를 전달하기 위해 퀘스트를 줬다는 것.
고맙기는 한데 전혀 눈치 못 챘다. 이제야 겨우 알아차린 거지.
‘바깥 상황도 확인하기는 해야겠군.’
등반을 하다 보면 날짜 감각이 사라진다.
일일이 날짜를 세는 것도 귀찮은 일이었거니와 밤낮의 구분이 애매한 필드는 물론이요, 층마다 시간이 따로 흘러가서 하루가 지났는지 아닌지 파악하기가 힘들기 때문.
지금도 대략적으로 탑에서 1년가량 보냈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 얼마나 지났을지는 아무도 모른다.
새내기가 들어오고 나서야 제대로 된 시간을 알겠지. 내가 들어온 날짜랑 비교해 보면 되니까.
그냥 넘어갈 문제는 아닌 거 같다.
바깥에 있는 헌터들의 수준이 워낙 낮아서 최대한 많은 헌터들이 상위층에 올라올 수 있도록 기반을 다져 놨다.
그런데 그 기반 덕에 탑의 초대를 받는 사람들은 줄어들고 멸망은 빠르게 진행된다?
“밸런스 한번 거지같이 잡아 놨군.”
“보통은 적당한데 너희가 좀 심한 편이지. 너무 오랫동안 버티고 있었거든.”
그 망할 공략법 때문에 말이지.
정부와 대형 길드가 인위적으로 헌터의 수를 조절해 멸망을 늦추었다.
결과적으로는 부작용만 잔뜩 만들어냈지만.
답답하다. 지금 바깥세상은 어떤 상황일까. 완전히 단절된 공간. 등반가들이 바깥소식을 들을 방법은 새내기가 들어올 때를 제외하면 없다.
설마 벌써 초대받는 사람이 없는 건 아니겠지? 그런 답이 없는데.
“시간이 많지는 않군.”
그 누구도 정확한 시점을 말할 수는 없다. 그러니 최악의 상황을 가정해 빠르게 움직이는 게 맞다.
위안이 되는 게 있다면 80층대에 도달했다는 것? 100층까지 20층 남은 상황, 난 이미 100층에 진입할 수 있는 조건을 채웠다.
여기서 드는 한 가지 의문점.
“릴카, 90층도 진입 조건이 있나?”
70층은 상위층의 경계니까 그렇다 치지만 80층과 100층 모두 진입 조건이 달렸다.
90층이라고 다를까? 그동안 겪어 왔던 탑은 쉽게 넘어가는 게 없다. 분명히 뭔가 조건을 달아 놨겠지.
역시나, 릴카가 고개를 끄덕인다.
“있기는 한데 말로는 못 해 줭. 이유는 알지?”
“그놈의 시스템 때문이겠지.”
“히히히. 그러니까 퀘스트를 받도록!”
[릴카의 부탁(7)- 강제 퀘스트]
-당신을 위한 마음이 느껴지시나요?
-감사한 마음으로 구르란 말입니다!
이제는 안 받으면 섭섭한 강제 퀘스트.
이건 찬찬히 살펴볼 생각이다. 이렇게까지 운을 떼었다는 것은 퀘스트 내용 어딘가에 90층에 오르는 조건의 단서를 넣었다는 뜻이니까.
이거야 80층을 오르며 생각해 보도록 하고.
“슬슬 시작할까?”
뚜둑. 몸을 풀며 준비했다.
굳이 숙소까지 릴카를 부른 이유는 하나.
“망할 차원 상인 녀석, 이번에는 못 빠져나가겠지.”
차원 상인, 카르카에게서 받을 게 있다.
펠라인의 초록색 망토.
마지막 남은 펠라인 세트 파츠.
멸망이 가속되고 있는 시점, 전력 증강은 필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