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9화 초인의 영역
나를 보고 반가워하는 두 NPC. 구면이다.
아닌가?
분명 내가 아는 얼굴이기는 한데.
‘뭔가 커졌다? 느낌도 그렇고?’
내 기억 속의 모습과 완전히 똑같지 않다.
혹시나 잘못 본 건가 싶기도 했으나.
“이렇게 만나게 될 줄이야!”
“이블아이라면 80층까지 올 줄 알았어!”
반응을 보니 아무래도 맞나 보다.
내게 달려와 달라붙는 녀석들.
“다들 잘 있었냐, 치히린, 모빌리딕.”
45층에서 만났던 NPC들이었다. 40층대는 선택 구간, 45층에서 호수에 빠져 있는 두 녀석을 대상으로 누굴 구할 것이냐고 시스템이 물어왔고 난 둘 다 구했다.
그 과정에서 요정의 친구 칭호도 얻었고.
몸을 비비는 모빌리딕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어째 더 커진 거 같다? 아니, 그전에 너 말 못 했었잖아.”
안 그래도 커다란 녀석이었건만 지금은 더 커졌다.
흙을 열심히 파먹었는지 포동포동해졌다고 해야 하나. 게다가 느껴지는 기운도 한층 강해졌다.
예전에는 딱 흙바닥 같은 느낌이었다면 지금은 단단하고 묵직한 암석 느낌?
“이곳으로 넘어온 다음 승급을 했어. 이제 말도 할 수 있다고.”
“후후후후. 나도 뭐 달라진 거 없어? 있을 텐데!”
찰싹.
면적을 많이 차지하는 모빌리딕의 얼굴을 밀어낸 치히린이 우쭐거리며 허리에 손을 얹는다.
모빌리딕도 모빌리딕이지만 치히린 역시 많이 바뀌었다.
가장 눈에 띄는 건.
“키도 커졌고, 날개도 훨씬 화려해졌네?”
“히히히! 맞아!”
원래는 요정 종족 특성대로 팔뚝만 한 사이즈였는데 지금은 꽤 자랐다.
2차 성징 이런 건 아닐 테고 아무래도 힘이 커지며 변화가 온 거 같은데, 지금은 거의 내 배꼽 언저리까지 온다.
요정치고는 상당히 큰 키.
날개도 예전에는 각도에 따라 색이 바뀌는 은빛 날개였다면, 지금은 나비나 나방처럼 화려한 무늬가 달렸다.
“놀라지 마시라. 짝만 잘 만나면 나도 요정 여왕이 될 수 있다!”
“오오오, 그거 굉장한데?”
“그치? 그치!”
사실 잘 모르지만 좋아하는 거 같아 맞장구쳐 줬다.
요정의 친구 칭호가 있기는 하지만 요정계의 문화에 대해서는 많이 아는 게 없어서.
“치히린, 어떤 요정도 요정왕이랑 결혼하면 여왕이 될 수 있어.”
“시끄럽다, 덩치만 큰 녀석이. 에이잇!”
“악! 야야!”
언제나 팩트는 상대를 도발하는 법.
진실을 말한 모빌리딕이 치히린에게 두들겨 맞는다.
덩치가 커져서 그런가 맞을 데가 많네. 변함없이 사이좋게 지내는 거 같아 흐뭇하구만.
그런 의미에서 상태를 확인해 볼까.
난 권능을 사용했고.
[모빌리딕- NPC]
-권능 상승 담당 NPC.
-권능 업! 땅의 최상급 정령이 되었습니다.
-말도 할 수 있죠!
-여전히 물은 싫어합니다.
[치히린- NPC]
-스킬 초월 담당 NPC.
-스킬 초월! 신비가 더욱 짙어졌습니다.
-어쩌면 요정 여왕의 자리에 오를지도?
-본인의 날개가 무척 마음에 드는 거 같습니다.
과연 40층대에서 봤을 때보다 훨씬 강해진 이유가 이거였나.
80층에서는 권능과 스킬을 초월할 수 있다. 그것을 담당하게 된 것이 둘이고.
당연히 본인이 가지고 있던 능력을 키웠을 테니 한계를 돌파한 것도 납득됐다.
‘호수에서 벗어나면 안전지대로 이동된다고는 했는데 설마 이쪽으로 올 줄이야.’
이건 예상치 못한 상황이었으나 내게는 좋은 소식이다. 아는 애들이 담당 NPC면 보다 편하게 행동할 수 있을 테니까.
“뭐야, 얘네랑 아는 사이였엉? 나 없는 사이에 여기저기 꼬리를 흔들었다 이거지! 이야압!”
“아! 왜 때리는데.”
목마 태우고 있던 릴카의 기습에, 진심으로 릴카를 바닥에 내리꽂을까 고민했지만 참았다.
일단은 이 녀석의 계승자기는 하니까.
잠깐만…….
“생각해 보니 열 받네?”
-콰앙!
“으갸갸갸갹!”
바로 냅다 꽂았다.
몸부림치며 바들거리는 녀석.
릴카가 날 째려본다.
“너무해!”
“너무하기는, 어? 네가 더 너무하지.”
이 녀석 계승자가 된 다음 얻은 권능이 차원 상인의 무자본 혜택이다.
일주일 단위로 랜덤해서 뭔가를 얻을 수 있는 가챠 박스.
놀랍게도 쓸만 한 물건이 나온 적이 없다. 뭐지, 이 극악의 확률은?
그 와중에 등급은 SS급이다. 다른 SS급 권능인 별을 주시하는 눈과 굴하지 않는 검귀는 알차게 써먹다 못해 간이며 쓸개까지 빼먹는구만.
“솔직히 말해. 확률 조작 아니야?”
“으에? 뭔 소리야?”
됐다. 이건 나중에 따로 이야기를 나누도록 하자.
내가 누구의 계승자인지 떠들고 다녀 봐야 좋을 게 없으니까.
멤버들만 있으면 또 모르겠지만 지금은 요정 클럽 사람들도 있어서.
어차피 멤버들은 대충 눈치채고 있을 거다. 내가 릴카의 계승자인걸.
“이게, 이게 무슨. 말도 안 돼!”
오랜만에 만나 근황을 묻는 것도 잠시.
멀뚱히 서서 상황을 지켜보던 근육 요정이 입을 벌렸다.
“난 친해지려고 갖은 노력을 다했는데!”
“…누구였지?”
“어, 종종 얼쩡거리던 앨걸?”
근육 요정의 노력이 무색하게 모빌리딕과 치히린은 녀석을 딱히 기억하고 있지 않았던 거 같다.
더욱 큰 상처를 입은 표정인 근육 요정이 쪼그라지고 마그마 요정이 그의 등을 두들겨 줬다.
그때마다 떨어진 용암이 등을 타고 흐른다.
“자자, 여기서 앉아 있을 게 아니지. 오랜만에 왔는데 우리의 친구를 길바닥에 둬서 쓰나! 따라오라고.”
“80층에 제대로 정착했다는 걸 보여 줄게.”
화기애애하게 모빌리딕과 치히린을 따라 건물 안에 들어갔다.
[초월의 장]
-80층에 위치한 초월의 장.
-당신의 권능과 스킬의 한계를 뛰어넘어 봅시다!
-그럴 자격이 있다면요!
과연, 이전에 봤던 것과 비슷한 느낌인가.
두 NPC가 준비해 준 다과를 즐기며 주변을 훑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특이한 게 없다. 굳이 따지자면 두 녀석의 취향대로 꾸면 둔 것 정도?
한쪽에는 광석들이 박혀 있고, 다른 한쪽에는 치히린이 직접 그린 듯한 그림이 벽을 가득 메우고 있다.
원색을 위주로 그린 추상화인가.
“역시 이블아이! 내가 그린 걸 알아보는구나. 봐 봐, 드래곤이 멋지지?”
“어딜 봐도 지렁, 읍읍!”
팩트를 말하려는 릴카의 입을 막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드래곤의 역동적이면서도 강렬한 느낌이 느껴지는군. 지구의 인상파와 야수파의 이미지를 바탕으로 뜨거운 추상에 가까운 배경이 오묘한 시너지를 일으키고 있어.”
“오오! 무슨 소린지는 모르겠지만 좋은 거 같은데? 음음, 인상파! 뭔가 느낌이 좋아.”
나도 내가 뭐라 말하는지 모르겠다. 미술 쪽으로 아는 게 있어야지. 그냥 어디서 주워들은 걸 되는 대로 갖다 붙였을 뿐이다.
냥펀이 물끄러미 날 바라본다. 표정으로 진짜? 하고 물어보는 거 같은데, 조용히 있으라고 입가에 손가락을 올렸다.
의외로 핥짝이는 흥미로운 눈으로 그림을 감상하는 중.
대화도 무르익은 타이밍.
“모빌리딕, 치히린.”
둘을 불렀다. 만나서 반갑기는 하지만 해야 할 일이 있다.
다른 건 몰라도 초인의 영역에 들어서기 위해서는 둘의 도움이 필요하니까.
물론 기대감이 있기는 하다. 근육 요정이 말하지 않았던가. 호감을 높이면 시련의 난이도가 낮아진다고.
정작 두 녀석이 근육 요정을 기억하지도 않는 걸 보고 신뢰감이 사라지기는 했지만.
여튼 인맥은 인맥이고, 시련은 시련이다.
두 녀석 모두 담당 NPC인 만큼 자신의 역할의 중요성은 알고 있을 터. 무엇보다 시스템은 이런 면에서는 까다롭다.
확실히 자신의 자격을 증명해야 그에 걸맞은 대가를 받겠지.
인벤토리에서 60층과 70층에서 모은 것들을 꺼냈다.
[초월석]
-60층 안전지대에서 구할 수 있는 신비한 돌.
-권능 등급을 올릴 수 있습니다!
[한계 돌파 스킬북(SS)]
-80층 진입 시 익힐 수 있습니다.
-한계까지 강화된 스킬의 레벨 제한을 풀 수 있습니다.
-레벨 10으로 고정.
초월석과 한계 돌파 스킬북.
스킬북의 경우 조건이 80층 진입이라고 되어 있기는 하지만 실제로 쓰려고 하면.
[해당 스킬북은 담당 NPC의 도움이 있어야 활성화됩니다.]
이런 메시지가 떠오른다.
내가 뭘 말하려는 건지 알아차린 모빌리딕과 치히린이 고개를 끄덕인다.
“그치, 올라왔으니 이걸 해야지.”
“내가 권능 담당이고 치히린이 스킬 담당이야.”
-고고고고고고고
두 녀석한테서 가공할 만한 기세가 느껴진다.
담당 NPC가 되며 초월을 했고, 그 결과 과거보다 강한 힘을 손에 쥔 NPC.
절대 약하지는 않을 거다. 등반가 정도는 충분히 제압할 힘을 가지고 있겠지.
그러지 않으면 담당자로서 의무를 다하지 못할 테니까.
‘대단하군.’
속으로 감탄했다. 모빌리딕에겐 흔들리지 않는 굳건함과 압도적인 존재감이 느껴졌으며, 치히린에겐 변화무쌍하며 깊이를 알 수 없는 에너지의 소용돌이가 느껴졌다.
꿀꺽. 침을 삼켰다.
“80층은 초인의 경계.”
“자격을 증명하지 못한 자는 넘을 수 없는 벽.”
둘의 안광이 퍼져 나가며 공기가 얼어붙는다.
그런 둘을 보며 근육 요정인 긴장한 얼굴로 희미하게 웃었다.
“시작됐군. 다들 각오 단단히 하도록. 빈틈을 보이는 순간 죽을 수도…….”
이미 겪어 봤기에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안다는 걸까.
좋다. 뭐든 와라. 난 온몸에 마력을 돌리며 앞으로의 대비했고.
“근데 이블아이면 괜찮지 않나?”
“그치? 우리 친구는 충분해!”
[담당 NPC, 모빌리딕이 당신을 인정합니다.]
[초월석이 온전한 힘을 되찾습니다!]
[권능이 한 단계 상승합니다!]
-파아아아아앗!
[담당 NPC, 치히린이 당신을 인정합니다.]
[한계 돌파 스킬북(SS)가 자동 활성화됩니다!]
[스킬 레벨 리미트가 풀립니다!]
-쿠구구구구궁
“엥?”
뭐라 반응하기도 전에 변화가 이루어졌다.
권능의 등급이 올라가고 스킬 레벨이 바뀐다.
이어서.
[두 담당 NPC의 인정을 받았습니다.]
[초인의 영역에 들어섭니다!]
[스테이터스의 한계를 돌파합니다!]
-꾸드드드득!
몸 또한 변화가 이루어졌다.
근골이 비틀리는 감각. 순간적으로 비명이 튀어나오려 했지만 참아 냈다.
이 정도 고통쯤은 이제 익숙하니까.
통증이 그리 오래가지도 않았다. 애초에 스텟을 999까지 찍은 상황. 이미 일반적으로 도달할 수 있는 최정점에 오른 후에 바뀌는 변화였다.
잔뜩 움츠러들었던 근육이 일시에 풀리며 시원함과 왠지 모를 공허함이 찾아왔다.
뭐라고 해야 하지?
‘컵에 담긴 물을 대야에 옮긴 거 같군.’
똑같은 힘. 전에는 충만하다고 느꼈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여전히 강하지만 조금 아쉬운? 더 강해지려면 얼마든지 더 강해질 수 있을 거 같은 느낌이다.
이게 바로.
“초인의 영역.”
-꾸욱
잠깐의 격통이 끝나고 주먹을 쥐었다.
그릇이 커졌기 때문일까. 이전보다 힘을 조절하는 능력이 상승했다.
단순히 피지컬만 그런 게 아니라 마력의 운용도 그렇다. 신성력은 물론이요, 마기도 마찬가지.
이전에는 출력이 높아서 힘에 휘둘리듯 움직이는 경향이 조금 있었는데 지금은 완벽히 컨트롤 된다.
특히나 나처럼 특수 스텟이 여러 개인 사람이라면 체감하는 바가 더 클 거다.
씨익. 입꼬리를 올리고 두 녀석을 끌어안았다.
내 인생에 드디어 날먹의 순간이 올 줄이야!
“고맙다!”
“헤헤. 이 정도 가지고 뭘.”
“이쪽은 친구들?”
치히린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였다.
“밑에서부터 같이 올라온 친구들이지.”
“에잇, 기분이다! 그래 친구의 친구면 내 친구지! 너희도 와!”
“까짓것 그럴까?”
요정이란 종족이 원래 이렇다. 즉흥적이고 나사가 좀 빠진 것 같지만 친구에게는 한없이 좋은 녀석. 정령도 비슷한 면모가 있고.
두 종족 모두 신비의 종족이라 그런가.
아무튼.
“어? 근데 얘는?”
모빌리딕이 마그마 요정을 바라봤다.
흠칫. 몸을 굳힌 마그마 요정이 근육 요정과 나를 번갈아 쳐다본다.
어째서인지 기대 어린 눈으로 바라보는 근육 요정.
결심을 굳힌 듯 마그마 요정이 고개를 끄덕인다.
“이블아이 친구 마그마 요정입니다!”
“마그마 너마저!”
자연스럽게 내 옆으로 붙었다.
근육 요정이 배신감 어린 얼굴로 손을 내밀었지만 우리는 암묵적으로 무시하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