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8화 80층
-우우우웅
[80층으로 전송됩니다.]
익숙한 부유감과 함께 빛이 몸을 감싼다.
그동안 겪었던 것과는 전혀 다른 형식으로 진행된 70층대.
“꽤 오래 있었지.”
“그에에.”
실제로 보낸 시간도 길었지만 시나리오가 지나면서 생겨난 기억 때문에 체감상 느끼는 시간은 더 길었다.
진짜 10년은 있던 기분.
정신적으로 피곤하기는 했지만 얻은 게 많았다.
80층 진입 조건은 스테이터스 스텟 전부를 999점까지 끌어올리는 것.
조건을 채우기 위한 환경이 조성된 결과, 70층대를 거치며 스텟과 스킬이 빠르게 성장했다.
동시에 한계에 부딪히기도 했지만.
그동안은 동층 대비 압도적인 스텟과 스킬 등급으로 찍어 누를 수 있었지만 지금은 다른 등반가들과 어느 정도 통일성을 이루었다.
리스타트.
다시 한번 같은 지점에서 올라가는 것. 왜냐…….
“80층부터는 초인의 영역이니까.”
다 같은 초인의 영역에서 누가 어디까지 나아갈 수 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뭐, 말은 이렇게 해도 진짜 다들 같은 출발선에서 시작하는 건 아니지만.
그동안 어떻게 등반을 해 왔냐에 따라 가지고 있는 칭호와 권능, 스킬의 종류, 아이템이 다르다.
쌓아 온 업적과 노력, 운이 잠재력이 되어 폭발하는 시기라 봐도 좋지 않을까.
왠지 모를 두근거림을 느끼며 서서히 잦아드는 빛 너머를 바라봤고.
[80층- 안전지대]
[당신은 진정한 초인의 영역에 발을 디딜 수 있습니다.]
[더욱더 정진하세요!]
환영하듯 떠오르는 메시지와.
“으으으으으.”
“어으으.”
“속이 뒤집힐 거 같아.”
“좀 괜찮아? 등 두들겨 줄까?”
“대체 포션이 어땠길래 이 모양이지?”
바닥을 구르고 있는 이들과 그들을 토닥이는 이들이 뒤엉킨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아직도 이러고 있네. 비위가 이렇게 약해서야.
대부분의 사람들이 바닥에 앉아 있는 타이밍, 냥펀과 핥짝이가 팔을 펼쳤다.
“80층! 안전지대! 내가 가장 사랑하는 곳!”
“목욕하자, 목욕! 냥펀, 준비됐지?”
“응! 오늘을 위해 입욕제까지 준비했다구!”
신났구만. 하기야 연옥계 시나리오 때는 제대로 된 주거 공간도 없어서 노숙만 주야장천 했다.
샤워 스킬도 있지만 진짜 뜨신 물에 들어가 쉬는 거랑은 비교가 안 되지.
맛있는 거 먹고, 몸 녹이고, 푹신한 침대에 누우면 그거야말로 천국이 아닐까. 바로 흥미가 생긴다.
“와! 입욕제! 나도 쓸래!”
“5,000포인트 되겠습니다, 고갱님.”
자연스럽게 옆에 붙어 만세를 했지만 냥펀은 넘어가지 않았다.
아니, 무슨 입욕제가 5,000포인트나 해.
“그, 할인은 없나요?”
“어림도 없다, 요놈!”
바로 냥냥펀치를 날리는 녀석이었지만 그것도 잠시.
“그래도 생명수 줬으니까 내 특별히 하사하노라, 엣헴.”
“아이고,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넙죽 녀석이 주는 걸 받았다. 핥짝이는 뭐 안 주나? 생명수는 같이 먹었는데 흘낏 쳐다보니 녀석도 흠칫 놀라 주머니를 뒤진다.
“흠흠, 아주 귀한 물건이야. 잘 쓰라고.”
“오, 이건 진짜 오랜만에 보네.”
“빡빡 닦으란 말이야. 냄새 안 나게.”
장난삼아 본 거였는데 진짜 뭘 줬다. 그것도 익숙하지만 탑에서는 보기 힘든 물건.
때밀이.
오늘 하루는 목욕의 날로 정했다. 바나나 우유도 하나 구해서 마셔야지. 손톱이랑 발톱도 자르고, 맥반석 달걀에 식혜를 딱! 크으!
벌써부터 기분이 업된다. 덕춘이 너도 이 조합을 한 번 맛보면 정신을 못 차릴 거다.
슥슥, 덕춘이의 턱을 긁다가 한 가지 의문이 들었다.
“…근데 이거 쓰던 건 아니지?”
“아니거든!”
“악! 악!”
아니면 아닌 거지 왜 턱으로 정수리를 찌르냐. 딱따구리도 아니고.
평소와 같이 별 쓰잘데기 없는 주제로 떠들고 있는 사이 여러 시선이 몰리는 것이 느껴졌다.
우리가 있는 곳은 안전지대 광장. 안전지대에 올라온 등반가들이 가장 먼저 도착하는 곳이었고.
“내 생에 이런 광경은 처음 보는군.”
“진귀한 장면이야, 허어.”
“이렇게 많은 등반가들이 한 번에 올라올 줄이야.”
“저렇게 이상한 것들이 한 번에 올라올 줄이야.”
“음?”
“뭐.”
NPC들.
다른 곳도 아니고 80층의 NPC다.
이 정도 인원이 올라오는 건 흔치 않은 일이다.
신기한 눈으로 우리를 바라보던 이들이 저마다 이야기를 해 댄다.
“탑이 망조가 들었나. 저번에 올라온 녀석도 이상하던 놈이던데.”
“아, 걔? 원래 끼리끼리 논다고들 하잖아. 같이 있는 놈도 정상은 아니더만.”
이상한 놈이라.
머리에 스쳐 지나가는 한 녀석.
핥짝이와 냥펀도 같은 생각인지 고개를 끄덕인다.
“저기요! 그 이상하다는 놈 혹시 초록색 쫄쫄이를 입고 있었나요?”
“이크! 제일 이상한 애들이 오는구먼.”
“봐라, 끼리끼리 논다 했지? 난 딱 보자마자 알았어. 같은 부류인 거.”
무슨 실례되는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탈모맨이 확실하다.
“혹시 그 쫄쫄이 어디 있는지 아세요?”
“어디에 있는지는 잘 모르겠고 좀 있으면 올 거야. 허구한 날 광장에 기웃거리니까.”
“그렇군요. 감사합니다.”
꾸벅 고개를 숙이자 NPC들이 만족스럽게 끄덕인다.
“생긴 건 이상해도 예의가 있는 친구구만그래.”
“거친 탑의 생태계에서 저 정도면 양반이지. 그럼 그럼.”
뭐든 잘 보이면 평가가 후해지는 법이다.
80층에 얼마나 있을지 모르는 지금 NPC와 잘 지내서 나쁠 건 없지.
이곳에서 해야 할 일이 많다.
것보다…….
“탈모맨도 우리가 올라오는 걸 기다리고 있었나 본데?”
“그렇겠지. 나한테 맞아야 되거든.”
핥짝이가 주먹을 뼈마디를 맞춘다.
“나 팝콘 있엉!”
“난 콜라를 준비했지. 개인 거래로 파는 사람이 있더라고.”
자연스럽게 냥펀과 함께 팝콘과 콜라를 꺼냈다.
만나는 건 만나는 거고, 일단 둘이 투닥거리는 거 구경이나 할 생각.
그런 우리에게 다가오는 이들이 있었으니.
“이블아이, 덕분에 올라왔다.”
“여기는 내게 맡겨. 같은 요정 클럽 일원이 있거든.”
“후우. 이제 좀 살겠네.”
루키 그룹의 김조균과 요정 클럽인 마그마 요정, 김선혜였다.
맞다.
“소원권 잘 받아간다.”
“안 그래도 봤어. 설마 진짜 다 데리고 올 줄 몰랐는데. 원하는 거 있음 말해. 할 수 있는 건 다 들어줄 테니까.”
항복이라는 듯 김선혜가 양 손바닥을 보인다.
그 옆으로 핥짝이가 얼굴을 들이민다.
“뭐야, 너 또 소원권 강탈했냐.”
“어허. 강탈이라니. 정당한 내기였구만.”
“너도 그 많은 사람 중에 이런 놈이랑 내기를 해가지고…….”
“핥짝아, 내가 아직 소원권을 쓰지 않았다는 것을 잊지 마렴.”
“세상 사람들! 여기 있는 이블아이는 사실─!”
“내가 항상 존경하고 있는 거 알지? 응?”
“잘해, 알았지?”
치사한 녀석. 내가 이래서 함부로 소원권을 못 쓰고 있다. 물론 녀석도 아무한테나 말하고 다닐 애는 아니지만 칼자루는 서로 쥐고 있어야 안전한 법.
반면 김선혜는 날 협박할 게 아무것도 없다.
“후후. 우후후.”
“뭐야, 왜 그렇게 웃어. 징그럽게.”
질색하며 한발 뒤로 빠진다.
소원권을 언제 써먹을지 한번 생각해 봐야겠다.
당장 생각나는 건 없지만 나중에는 쓸 일이 생길지 모르니까.
그건 그거고.
“마그마 요정, 아까 이야기는 뭐야. 요정 클럽 사람이 있다니.”
“80층에 대기 중이던 친구 있어. 아! 저기 있네.”
마그마 요정이 광장 한쪽을 가리킨다.
내가 할 말은 아니지만 요정 클럽이라는 곳도 제정신이 아닌 집단인 거 같던데 과연 어떤 사람일까.
의외로 멀쩡할 가능성도 있다. 마그마 요정이 유독 이상한 걸 수도 있으니까.
약간의 기대감을 가지며 그녀가 가리킨 곳을 바라봤고.
“…오.”
“공블아이, 요정 클럽이라는 곳 가까이해도 되는 걸깡?”
“어어, 난 잘 모르겠어.”
탈모맨과 함께 걸어오는 남자를 확인할 수 있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훤칠한 외국인이었으나 종아리까지 오는 부츠와 저거 뭐냐, 레슬링복? 그거 비슷한 걸 입은 채 머리에 천사 링이 떠올라 있다면 말이 달라진다.
얼씨구, 후광까지 비치네.
“탈모맨 같은 애가 또 있을 줄이야.”
이 무슨 끔찍한 일이란 말인가.
“마그마 요정!”
“근육 요정!”
두 녀석이 감동적인 재회를 하고.
“얘들아!”
“잘 왔다, 이 자식!”
“자, 잠깐. 내가 선물을 준비해 왔어!”
“필요 없어!”
핥짝이가 탈모맨을 밟는다.
혼란하다. 혼란해.
상위 헌터들도 NPC도 정신이 아찔해지는 광경을 보며 넋이 나갔다.
-와작와작
나와 냥펀은 팝콘을 뜯었다.
경험적으로 안다. 이상한 게 있다고 당황하지 마라. 이해를 포기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정신 건강에 좋다.
여기서 끝나면 다행이련만.
“이야아아아압! 왔으면 재깍 보고를 했어야지! 요놈!”
“릴카?”
“소란스러운 거 보고 바로 알아차렸다!”
“그엑!”
이번에는 릴카가 달려와 그대로 내게 점프했다.
릴카를 피해 내가 들고 있던 팝콘과 콜라를 들고 도망치는 덕춘이.
“크업!”
복무에 박치기를 당해 뒤로 넘어가는 나.
등반가와 NPC가 뒤섞인 공간, 냥펀이 코를 훔쳤다.
“개판이넹.”
* * *
훈훈한 재회가 끝나고 각자 움직이기 시작했다.
김조균은 루키 그룹과 연락을 해야 한다며 나중에 다시 찾아오겠다고 자리를 비웠고, 상위 헌터들 또한 이후에 도울 일이 있으면 돕겠다는 말을 남기고 시장으로 향했다.
79층에 갇혀 있는 동안 아이템을 전부 팔아서 먹을 걸 샀으니 사실상 맨손으로 시작하는 거나 마찬가지.
김선혜 또한 그들과 같은 사정이라 따로 움직이기로 했다. NPC들에게 퀘스트를 받거나 할 생각인 모양.
그도 그럴 것이 80층에는 중요한 행사가 있다.
‘권능 등급을 올릴 수 있어. 스킬도 초월할 수 있고.’
나도 이 부분까지 도와줄 생각은 없었다. 80층에 데려왔으면 됐지 그 이상의 간섭은 오지랖이다. 내가 책임질 이유도 없고. 어떻게 보면 그들의 자존심을 건드는 일일지도 몰랐다.
상위 헌터들도 거기까지 도움을 바라지는 않았다. 이 정도는 스스로 해낼 수 있다 이거겠지.
‘뭐, 완전히 놔둘 생각은 없지만.’
특별히 동정심이 많거나 짧은 사이에 깊은 유대감을 느낀 건 아니다. 인류애가 넘쳐 흐르는 것도 아니고.
다만…….
‘등반하면 할수록 느껴져. 지구에는 강한 헌터들이 필요해.’
지구가 멸망의 과도기에 접어든 지금, 이들은 중요한 전력이다.
내가 100층을 클리어하기 전에 지구가 망하면 안 되니까. 그 전에 최대한 높이 오른 다음 밖으로 나가서 현대 사회를 지켜 줬으면 좋겠다.
여기까지는 좋은데 말이지.
“이렇게 움직일 줄은 몰랐는걸.”
“같이 움직이니까 좋지?”
“그건 모르겠고 어그로 하나는 확실하네.”
마그마 요정과 근육 요정이 우리와 같이 움직이고 있다.
다른 이유가 있는 건 아니고, 그사이 탈모맨과 마그마 요정이 친해져서.
나쁘지는 않다. 80층에 오래 있던 만큼 이곳저곳을 안내해 준다고 하니까.
“우웅, 내가 탑 이곳저곳을 돌아다녀 봤는데 너희 이상행.”
어쩌다 보니 목마를 태운 릴카가 내 머리를 탁탁 치며 핀잔을 준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안다. 우리를 흘낏 쳐다보더니 슬슬 옆으로 피하는 NPC들 좀 봐라.
NPC들이 저러는 건 처음 보네.
아무튼.
“숙소는 천천히 잡고 권능이랑 스킬 초월해 주는 곳 먼저 간다는 거지.”
“그래. 마그마 요정을 도와준 보답을 해 주고 싶어서. 일단 담당 NPC들과 친해지는 게 중요해. NPC가 어떻게 나오냐에 따라 난이도가 널뛰거든.”
입꼬리를 올린 근육 요정이 당당하게 품에서 뭔가를 꺼낸다.
뭐야. 이것들은. 사탕이랑 베게? 저건 흙을 담은 병이고 옆에는 광석? 마법 지팡이 같은 것도 있고.
“후후후후. 그동안의 경험을 통해 파악한 효과 좋은 뇌물이다! 쉽지는 않을 거야. 그들은 상당히 까다로운 성향을 가지고 있으니까. 나도 꽤 고생했지.”
오, 뇌물.
드디어 NPC한테 뇌물까지 바치는 신세가 되었구나.
긴장했는지 식은땀을 흘리며 애써 웃은 녀석이 한쪽을 가리킨다.
“다 왔다. 다들 마음 단단히 먹도록.”
그가 굳은 목소리로 말했고 커다란 건물 앞, 두 NPC가 우리를 쳐다봤으니.
“음?”
“이블아이?”
“이블아이!”
탑이 참 좁기도 하지. 구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