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5화 시험의 골렘
진법이라는 건 꽤 까다로운 종류다.
마법진도 마찬가지기는 한데, 전문적인 지식이 없으면 어떤 식으로 구동되는지조차 알 수 없을뿐더러 규칙 또한 진법 제작자에 따라 제각각이다.
제작자의 의도를 알지 못하면 건들 수조차 없다는 말.
오히려 해 보겠다고 만지작거리다가 더 꼬이기 마련이다.
“나도 이쪽으로는 문외한이지만 권능이 있지.”
물병, 망치, 상자, 화분.
하얀빛으로 이어진 물건들을 하나씩 움직였다.
처음에는 느껴지지 않았던 마력이 드러난다.
철저하구만. 마기로 만들었다면 악마들이 바로 눈치챘을 텐데.
“이런 걸 공부하는 사람들은 머리가 엄청 좋겠지?”
현대 사회에는 이런 진법이나 마법진을 연구해 진짜 사용하는 이들도 있다.
아티팩트와 특수한 아이템을 연구해서 사용하고자 하는 노력은 정부 차원에서 진행되고 있으니까.
나도 나중에 기회가 있으면 공부해 보든가 해야겠다.
그거야 시간 될 때 이야기고.
-드드드드드
지금은 던전을 클리어하는 데 집중하자.
거의 다 됐다. 마지막으로 진흙을 구워 만든 인형을 옮겼다.
이것으로 진법은 완성.
-우우우우우웅!
평범하기 짝이 없던 물건이 진동한다.
일그러지는 공간.
[제단으로 향하는 길이 열립니다.]
“그렇지!”
주먹을 내질렀다.
아무것도 없던 벽에 문이 생성됐다.
거침없이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니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이 있다.
꽤 깊은 건가.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발소리가 메아리친다.
특별한 함정은 보이지 않는다.
조금은 지루할 수 있는 시간이었지만 의외로 그렇지는 않았다.
천장에 박힌 발광석이 은은한 빛을 비추었고, 좁게 이어진 통로의 벽에는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악마와 천사.
전쟁의 모습과 소소한 일상의 형상, 마물, 묘비.
천마대전을 표현한 벽화.
역동적으로 그려진 것이 보는 것만으로도 그때의 상황을 알 것 같다.
카르스타라는 대공 녀석, 도둑질뿐만 아니라 그림에도 재능이 있던 모양.
“낯익은 얼굴도 있군.”
그다지 크게 그려지지는 않았지만 알아볼 수 있었다.
그리가. 천마대전에 참전했다더니 여기에 그려졌을 줄이야.
이야, 저건 뭐야. 백터? 벽화에서도 시체 옆에서 얼쩡거리고 있네.
흥미롭게 벽화를 보고 있자니 점점 크게 그려진 인물들이 눈에 띄었다.
예측하건대 마계의 대공들.
실제로 저렇게 큰 건 아닐 거다. 권세와 힘을 상징하기 위해 크게 그린 거겠지.
천사들을 휩쓸고 있는 대공 중 한 명이 카르스타일 것이고, 그 녀석이 만든 것이 이 던전이다.
그림처럼 커다랬으면 이 통로는 통과도 못 한다.
봐라.
“킬더레스랑 플레타.”
둘 모두 가장 크게 그려져 있지 않은가.
왼쪽에는 플레타가 검으로 천계와 마계의 경계를 베고 있었고, 오른쪽 벽에는 킬더레스가 몸집을 불리며 악마들을 호령하고 있었다.
내가 만나 봐서 안다. 실제로는 그리 크지 않다. 뭐, 전투 때는 어떨지 모르겠지만.
계속해서 걸어가니 전쟁의 막바지가 표현되어 있었다.
거대하게 그려진 천사들이 분투한다. 킬더레스도 마찬가지.
서로 교차하는 무기와 손과 발. 몸 전체를 가릴 정도로 커다란 날개가 뒤엉킨다.
대천사? 아마 천계에서 높은 위치를 차지한 녀석과 싸운 모습이 아닐까 싶었고 통로 맨 끝.
“오호.”
수많은 시체 위, 잘린 대천사의 목을 들어 올린 킬더레스가 그려져 있었다.
물론 킬더레스도 멀쩡하지는 않았다.
온몸이 피로 젖었고, 날개마저 한 짝 잘려 나갔으니까.
이렇게라도 보니까 반갑기는 하네.
피식 웃으며 툭 킬더레스의 그림을 건드렸고.
“음?”
한 가지 이상한 점을 발견할 수 있었다.
날개?
킬더레스가 날개가 있었나?
내 기억에는 없었던 거 같은데. 가물가물하지만 내 기억이 맞다면 10층에서 봤을 때는 날개가 따로 없었다.
물론 평소에는 넣어 두고 생활하는 걸지도 모른다.
아니면 나처럼 진짜 날개가 아니라 아이템 같은 걸 수도 있고.
아니군. 그건 아니겠다. 그림에는 날개가 뜯겨서 피가 흘러내리고 있으니까.
모르겠으면 물어보면 되는 법. 다행히 킬더레스에 대해 잘 알고 있는 녀석이 있다.
커뮤니티를 켰다.
[쁘띠공듀]: 맨 MAN! 탈모맨! 응답하세욧!
[니머리 탈모]: 오옹, 공듀! 올라오냐?
[쁘띠공듀]: 안타깝게도 아직 79층이랍니닷. 또르륵…….☆
[니머리 탈모]: 얼른 올라와 여기 이상하고 괜찮은 애도 있어! 하하하하핫!
“이상하고 괜찮은 애?”
누군지는 몰라도 정상인은 아닌 게 분명하군.
다른 사람도 아니고 탈모맨이 이상하다고 했으면 진짜 이상한 거다.
반대인가? 이상한 놈이 봤을 때 이상하면 정상인가?
자세한 건 모르겠지만 벌써 80층에서 인맥을 다지고 있다는 건 알겠다.
미묘하게 사교성이 좋은 놈이니 그럴 수 있지.
것보다.
[쁘띠공듀]: 궁금한 게 있는데 호오오옥C 킬더레스가 날개가 있나용?
[니머리 탈모]: 음? ㄴㄴ 없을겨.
[니머리 탈모]: 10층에서 뒤지게 맞으면서 배웠는데 본적 없음.
[쁘띠공듀]: 그렇군욧! 정보 감사함돳! 조만간 위로 올라갈게요!
[니머리 탈모]: 그랴. 아. 오, 올라오기 전에 핥짝이한테 좀 봐달라고 부탁 좀…….
[쁘띠공듀]: 전 죽기 싫어욧! 그럼 뿅☆
[니머리 탈모]: 공… 듀? 공듀!
미련 없이 커뮤니티를 껐다.
나보고 핥짝이를 막으라니, 어리석은 녀석. 그게 될 리가 없잖아.
“당장 나도 좀 위험해서.”
79층에 갇힌 지 며칠이 지났지만 아직 합류를 안 했다.
대충 할 일이 있어서 돌아다니고 있다고 했지.
지금 상위 헌터들 밥 먹이고 하느라 고생 좀 하고 있을 거다.
그뿐일까 핥짝이에게 은근히 신성력은 언제 올려 주냐고 물어보고 있다는데, 당장 내가 없어서 기약 없이 곧 가능하다고만 떠드는 중이라나.
나도 약속한 게 있어서 빨리 가고는 싶은데 챙길 거는 챙겨야 하니까.
게다가 아직 마기는 올릴 방법을 제대로 못 찾고 있다.
“필드 돌아다녀 보니 숭배자 놈들은 남아 있는 거 같던데. 걔네부터 조지면 어떻게 되지 않을까.”
“그에에.”
일단은 악마들도 섞여 있으니까 잡다 보면 오르기는 할 거다.
충분히 올릴 수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마물도 마기가 있기는 한데 악마에 비하면 턱없이 모자라서 크게 도움은 안 될 거고.
이번 보물을 찾은 다음에 프램버그나 헬다잉 키친에 물어보든가 해야겠다.
-끼이이이익
계단 끝 문을 열었다.
꿉꿉한 곰팡내와 함께 묘하게 습한 공기가 나를 반긴다.
눈앞에 보이는 건 제단.
드디어 찾았다.
몬스터는 없었다. 애초에 마물이나 기계 장치같이 어중간한 함정은 준비할 생각이 없던 모양.
대신.
[위대한 악마, 킬더레스를 기려라.]
제단 위에는 거대한 악마 형상의 골렘이 있었다.
안이 텅 비어 있는 갑옷이 고개를 숙인 채 왕좌에 앉아 있다.
그 앞에 놓인 제단에는 마법진이 그려져 있었으며, 알 수 없는 관이 갑옷 골렘과 연결되어 있었다.
[천사를 제물로 바치라.]
[악마의 위대함을 알리라.]
[자격을 지닌 자, 시험을 치르리니.]
“이런 거였군.”
머리를 긁적였다.
권능을 사용할 필요도 없었다. 제단 아래 친절하게 사용법이 적혀 있었으니까.
천사를 제물로 바치면 신성력을 빨아들여 마기로 변환시킨다.
그걸 모아 갑옷 골렘을 가동하면 시험이 시작된다.
단순하게 생각하면 천마대전에서 승리한 악마들이 천사들을 잡아 바치는 것으로 성과를 증명하라는 것인데.
“개소리지. 절대 못 해.”
상황을 생각했을 때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천마대전이 끝난 시점, 여전히 천계와 마찰이 있기는 하겠지만 전쟁 때처럼 천사들을 대놓고 공격하는 건 안 된다.
왜냐?
악마들의 주인인 킬더레스의 아내가 천사니까.
배반자니 뭐니 하지만 천사인 건 변하지 않는다.
왕의 아내와 같은 출신들을 잡아서 제물로 사용한다?
글쎄. 천사들이 덤벼들어 어쩔 수 없이 싸우는 거라면 몰라도 일부러 학살했다가는 킬더레스가 가만히 있지 않았을 거다.
“연옥계도 그랬으니까.”
이번 시나리오의 배경은 천마대전이 끝난 후, 연옥계의 주인을 정하는 경쟁 게임이다.
악마들은 더 위로 올라가기 위해 서로 싸웠고, 그 과정 중에 천족 잔당을 상대하기도 했지만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잔당을 찾아내 먼저 싸움을 건 적이 없다.
어디까지나 먼저 공격해 왔기에 반격한 거지.
나야 애초부터 천사들을 죽일 생각이 없어서 모르고 있었다만 챕터가 진행되며 전해 들어 알게 된 사실이다.
카르스타 이 녀석 머리 좀 썼다. 할 수 없는 과제를 내려준 거니까.
하지만 말이야.
“굳이 천사들 죽여서 할 필요 있나. 그냥 들이부으면 되는 거 아니야?”
악마들은 기본적으로 신성력이 없다.
카르스타는 악마들이 이곳에 오지 않기를 바랐고, 그들이 해결할 수 없는 과제를 마련했다.
다르게 말하면 충분한 신성력이 있다면 그다지 어려울 것도 없다는 이야기.
-우우우우웅!
-파하아아앗!
제단 위에 손을 올리고 신성력을 방출했다.
눈부신 신성력이 뿜어져 나오자 제단의 마법진이 탐욕스럽게 신성력을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그 속도가 굉장히 빠르다.
“으음!”
미간을 찌푸렸다.
생각보다 많이 빨아가네. 그래도 신성력 스텟이 999를 찍었는데.
심지어 신성력이 강화되어 급이 올라가기도 했다.
할 수 있다.
게다가.
“생각보다 수확이 좋은데?”
“그헤헤.”
안 그래도 마기를 어떻게 얻어야 하나 고민하고 있었는데 이런 장치를 준비해 주다니. 덕분에 걱정이 줄었다.
전환율이 좋은 거 같지는 않지만 이론적으로는 신성력만 충분하면 얼마든지 마기를 생산할 수 있다는 거니까.
[신성력이 마기로 전환됩니다!]
[시험의 골렘이 눈을 뜹니다!]
-지이이잉
엔진 돌아가는 소리와 함께 왕좌에 앉아 고개를 숙이고 있던 골렘이 안광을 내뿜었다.
연결된 호스로 마기가 끊임없이 들어가 내부를 채운다.
텅 비었던 갑옷 안이 마기로 넘실거리고 이윽고 대부분의 신성력이 다 빨렸을 때쯤.
[시험의 골렘이 자격을 시험합니다!]
-구구구구궁
골렘이 몸을 일으켜 세웠다.
크기도 하지. 저 정도 사이즈면 대충 13미터 정도?
연기 같은 마기를 흘리며 움직이는 갑옷이라. 묘하게 데스나이트를 닮은 거 같기도 하고.
“돌아, 가라.”
거대한 검을 들어 날 가리킨 녀석이 중얼거린다.
돌아가라. 지금이라도 나가면 봐준다는 건가.
재밌네.
한계까지 신성력을 뽑아내 뻐근한 손을 돌렸다.
뭘 숨겼는지는 모르겠지만 그걸 지키기 위한 최후의 수단이 저 골렘이다.
결코 만만한 상대는 아닐 거라는 말.
그래 봤자 골렘이지만.
“빨리 들어오기나 해. 나 바빠.”
손가락을 까딱였다.
도발이 먹힌 걸까.
“만용의, 대가를!”
-콰아아아아앙!
거대한 덩치에도 불구하고 빠르게 내게로 달려온 시험의 골렘이 검을 내리쳤다.
바닥이 깨지고 풍압이 몰아친다.
대기하고 있던 만큼 피하기는 했지만 이건 뭐.
“한 대 맞으면 가겠는데.”
무식한 것도 정도가 있지.
후웅!
녀석이 곧장 횡으로 검을 휘두른다.
바닥에 낮게 붙어 회피. 이어 놈을 향해 달려갔다.
일단 기동력부터 없애자. 안 그래도 덩치가 커서 다리 말고는 공격하기가 애매하다.
폭발은 가능한 자제할 생각. 기껏 왔는데 폭발 때문에 던전이 무너지면 안 되지.
[검강]
[절삭(S) Lv.10]
놈의 발목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신성력을 쓰고 싶었지만 이미 다 써서 아쉬운 대로 마기를 이용해 검강을 만들었으니.
-카가가가가가가각!
검이 갑옷을 뜯으며 안으로 파고들었다.
그래. 강해 봤자 골렘이지.
피식 웃으며 검을 비틀었다.
“빨리 끝내 줄게. 그래야 서로 편하… 어?”
뭐지?
꿰뚫었던 갑옷이 다시 재생되었다. 갑옷에 끼어 고정된 검.
[시험의 골렘이 마기를 흡수했습니다.]
[갑옷이 수복됩니다.]
[전투력이 상승합니다.]
-우우우우웅!
안광을 빛낸 골렘이 나를 향해 주먹을 내리꽂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