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1화 가자, 친구들!
가끔 그럴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맞닥뜨려 이게 맞나 싶기도 하고, 뭔가 억울하기도 하고, 이 순간이 얼른 끝나기를 바랄 때.
지금이 바로 그때다.
“어억! 나 환자야, 얘들아!”
“환자? 환자아? 환장하겠다 그래!”
열심히 옆구리를 찍어 누르는 핥짝이와.
“내 소중한 아티팩트를 다 날려? 그리구 내가 갈 때 추적 범위 알려 줬잖앙!”
어디서 꺼냈는지 모를 금괴로 투구를 내리치는 냥펀.
“하하하하! 이거 재밌네!”
“은근 밟는 맛이 있잖아?”
이유는 모르겠지만 신나게 옆에서 거들고 있는 탈모맨과 마그마 요정.
아니, 멤버들은 그렇다 치는데 넌 왜 자연스럽게 껴서 이러고 있냐?
반항하고 싶었지만 체력도 마력도 많이 깎인 상황. 이놈들은 쌩쌩하다 못해 기운이 넘쳐흘렀다.
비통하다. 약할 때를 노리는 영특함까지 겸비할 줄이야.
“어, 그니까 이게… 어어.”
“음, 마그마 요정이군. 뭔지는 몰라도 맞을 짓을 했을 거야. 요정 클럽이 이상하기는 해도 상식이 아예 없지는 않으니까.”
도와주리라 믿어 의심치 않은 김선혜와 김조균 역시 한 발 떨어져 상황을 주시하고 있다.
저 멀리 대기 중인 숭배자들도 마찬가지.
썩을 놈들이 아까처럼 바로 달려들지 않고 뭐 하는 거야. 그래야 얘들이 나 안 밟고 너희를 밟지!
“그헤헤헤!”
“더, 덕춘이 너마저!”
배신감 어린 눈으로 덕춘이를 바라봤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옆에서 발로 차 댄다.
개구리가 신체 구조상 저게 가능한가?
모르겠다. 영물이니까 어떻게든 되나 보지. 불도 뿜고 그러는데.
맞을 때마다 펠라인 세트 파츠들이 각기 다른 색을 뿜어서 그런가 애들이 더 신나서 패는 거 같다.
“저게, 저게 무슨 광경인가.”
“보통 놈들이 아닌 건 알고 있었지만 상상을 뛰어넘는군.”
“끔찍한 혼종이다. 악마보다 더한 인간들이 있을 줄이야.”
수군거리는 숭배자들.
“…이게 쁘찡 연합의 실체? 소름.”
“위로 올라갈수록 제정신이 아닌 사람이 많다고는 하더라, 으음.”
김선혜와 김조균 역시 괴상한 걸 본다는 표정이다.
그렇겠지.
개구리랑 은갈치 헬멧, 금덩이, 초록 타이즈, 용암 흘리는 갑옷이 맞을 때마다 번쩍거리는 무지개를 밟고 있으니.
내가 생각해도 기괴하기 짝이 없다.
얼마나 밟았을까. 이제야 분이 풀렸는지 냥펀이 망치로 쓰던 금괴를 인벤토리에 넣는다.
개운한 표정으로 옆머리를 넘기는 모습에 울컥한 것도 잠시.
“뭐. 콱 씨.”
“아, 아냐. 밟느라 힘들었지? 어깨 주물러 줄까?”
팔짱을 낀 채 매섭게 노려보는 핥짝이와 눈이 마주치고 바로 꼬리를 내렸다.
언제 날 때렸냐는 듯 어깨로 올라오는 덕춘이.
‘넌 오늘 밥 없다.’
“그에?”
덕춘이가 슬며시 손을 들어 올린다.
그치? 아무리 그래도 말 못 하는 동물한테 밥도 안 주는 건 동물 학대 아니, 영물 학대겠지?
그렇다면 가장 만만한 건.
“탈모맨, 네 이놈! 날 돕지는 못할망정!”
“그래도 내가 사진 찍자는 건 말렸는데?”
“항상 널 믿고 있었지, 고맙다.”
빠르게 태세 변환을 했다. 맞은 것도 억울한데 박제까지 되는 건 너무하지.
어디 보자. 그럼 남은 녀석은…….
“마그마 요정, 요정 클럽과 좋은 관계를 맺을 줄 알았는데……!”
“응! 애들이랑 친해졌어.”
녀석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녀석들.
맞네, 멤버들도 쁘찡 연합이지? 이게 바로 다수 앞의 약자인 건가.
만신창이가 된 몸을 일으켜 세웠다. 생각하질 말자. 해 봤자 내 손해다.
이 녀석들 이러는 게 한두 번도 아니고.
“아무튼 다들 와서 다행이야. 상황이 썩 좋지는 않았거든.”
예상치 못한 구타가 있기는 했으나 결과적으로 보면 좋다.
나 혼자서 저놈들을 모두 쓸어버리려면 고생 꽤 했을 테니까. 그 과정 중에 코인을 몇 번 소모 했을 가능성이 크고.
고작해야 4명이 더 온 거에 불과했지만 그거면 충분하다.
하나같이 동층대 최상위권을 달리는 녀석들이니까.
우르르 몰려 있는 숭배자들보다 이쪽이 훨씬 강하다.
당장 나 한 명 어쩌지 못해서 지금까지 시간이 끌린 놈들 아니던가.
그건 그거고.
“저쪽으로 상위 헌터들 갔는데 어떻게 됐어?”
“그쪽은 걱정 안 해도 돼. 무지개다리 확인하고 바로 조치했으니까.”
“숭배자 애들이 몰려 있더라고. 대충 정리했으니 악마들이랑 천사들이 마무리할 거야.”
다행이군. 산맥 쪽에서부터 오길래 예상은 했지만 이번에는 운이 좋았다.
하필 저쪽에 숭배자들의 본진이 있을 줄은 몰랐어서.
“악마들이 머물고 천사들은 이쪽으로 올걸.”
“걔네는 왜?”
“뭐긴 뭐야. 아까 하늘에서 난리 친 거 너 아니야?”
“맞긴 하지?”
“천사 어쩌구하면서 꼭 오겠다더라.”
핥짝이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불에 달려드는 나방처럼 천사들도 강한 신성력에 끌리는 경향이 있다.
당장 눈앞에 있는 천족 숭배자들도 나한테는 덤비지 않고 있었으니까.
상위 헌터 쪽은 신경 쓰지 않아도 되겠다.
멤버들만 움직였다면 모를까 다행히 악마와 천사들도 대동하고 움직여서 상대적으로 여유가 생겼다.
저쪽은 알아서 하게 놔두고 이쪽부터 확실히 끝내는 게 좋겠지.
“숭배자 놈들, 이렇게 바글바글 모여 있고. 딱 좋네. 쓸어버리면 되겠다.”
“어디 보자. 저기 두 녀석이 가장 강해 보이는데?”
“누구 맡을래? 왼쪽, 오른쪽?”
“난 왼쪽.”
“오케이.”
-콰아아앙!
저마다 상대할 놈들을 정한 녀석들이 앞으로 쏘아져 나갔다.
탈모맨이 트라할을, 핥짝이가 데하일을 노린다.
마그마 요정이 온몸에서 용암을 쏟아 내며 숭배자 무리를 덮치고, 냥펀이 금화를 튕기며 보조한다.
“크하아아아악!”
“당황하지 마라! 여전히 머릿수는 우리가 더 많다!”
용암에 휩쓸린 놈들이 허우적거리며 소리친다.
그것도 잠시.
[골드 익스플로젼(S) Lv.10]
-콰아아아아앙!
황금빛 폭발과 함께 입을 다물었다.
밑에서는 뜨거운 용암이, 게다가 언제 어디서 날아올지 모르는 금화 폭탄까지.
최대 전력인 트라할과 데하일은 탈모맨과 핥짝이한테 잡혀 있다.
둘이서 한 명을 상대할 때는 강한 시너지를 발휘하지만 각각 흩어지면 그렇지 않다.
애초에 나를 잡기 위해 조합을 짰던 녀석들.
“우오오오오!”
“인간 주제에!”
트라할과 탈모맨이 펀치를 날린다.
검도 안 박히는 털로 뒤집어쓴 것이 트라할이었지만 탈모맨은 굴하지 않고 계속해서 주먹을 내질렀다.
트라할 또한 손톱과 발톱을 휘둘렀으나.
-카그그그그극!
“무슨 말도 안 되는!”
“타이즈의 힘이다!”
탈모맨이 무식하게도 몸으로 받아내고 있다.
저저, 또 헛소리한다. 타이즈는 신나게 찢겨 나가고 있구만.
몸뚱이가 뭐로 되어 있으면 몸이 긁혔는데 쇳소리가 나냐.
-빠그그그극!
“크하아아악!”
놈을 붙잡은 탈모맨이 트라할을 걷어차며 움켜잡은 털 뭉텅이를 뽑아 버린다.
어찌나 세게 뽑았는지 털과 함께 피가 쏟아진다.
저 방법을 몰랐네. 자를 생각만 했지 뽑을 생각은 못 했다.
“와, 역시 탈모맨. 털 있는 자들에게 자비가 없어.”
옆에서 데하일을 상대하던 핥짝이가 감탄한다.
“어딜 보는 거냐!”
“넌 어딜 보고?”
그런 핥짝이를 공격하기 위해 데하일이 손을 뻗었으나 닿지 않았다.
리치가 짧아서?
그럴 리가.
[해제(S) Lv.10]
-콰아아아앙!
언제 떨어트린 건지 모를 압축 구슬이 그대로 팽창하며 데하일을 찢었다.
작게 감탄했다.
“더 발전했는데?”
그동안은 투척 후 압축 구슬을 해제하는 식으로 싸웠는데 지금은 아니다.
내가 시한폭탄을 설치하듯 구슬을 뿌려 놓고 터트리고 있다.
그냥 터트리는 것도 아니다.
“방출 방향을 조절하고 있어.”
전 범위로 팽창하는 것이 아니라 특정 방향으로 팽창하며 뻗어 나갔다.
해제 스킬을 다루는 능력이 더 섬세해졌다는 뜻.
저것만으로도 대단했지만 진짜 위험한 건 저거다.
“냥펀한테 받은 물건이 있지. 후후후.”
[구속 저주의 수갑(B)]
-범죄자의 팔을 구속하기 위해 만들어진 수갑.
-무겁습니다!
-그게 다입니다!
그저 상대방에게 장착되는 무거운 아이템에 불과하다.
등급도 고작해야 B등급.
하지만 핥짝이에게 걸린다면.
[압축(S) Lv.10]
-우드드드득!
길로틴이나 다를 바 없다.
급격히 수축한 수갑이 데하일의 팔목을 아작 낸다.
“크윽!”
고통에 얼굴을 일그러트린 녀석이 스스로의 팔을 잘라 낸다.
어차피 끊어지기 직전. 걸리적거리는 걸 포기하고 공격하겠다는 뜻.
“팔의 대가는 목으로 가져가마!”
놈이 핥짝이를 향해 손을 내뻗는다.
살을 주고 뼈를 취하는 공세. 지척에서 벌어진 일이었기에 반응하기 쉽지는 않았으나.
[오로라 빔(S) Lv.10]
-카아아앙!
바로 오로라 빔을 쏘아 내 놈의 팔을 튕겨 냈다.
“왜? 꼽냐? 둘이서 덤빌 때가 좋았지?”
“이놈!”
“이놈은 무슨, 앞이나 봐.”
고함을 지르는 놈에게 턱을 까딱였다.
아무리 화가 나도 그렇지. 상대가 바로 앞에 있는데 그러면 쓰나.
-푸우우우욱!
어느새 거리를 벌린 핥짝이가 기다란 쇠창을 던져 놈의 허벅지를 꿰뚫었다.
관통 스킬도 있었네?
창 쓰는 모습은 본 적이 있었던가.
“천사 중에 창을 잘 쓰는 애들이 있더라고.”
[해제(S) Lv.10]
“카하아아아악!”
창이 폭발적으로 늘어난다.
다리 하나가 날아간 데하일은 사실상 전투 불능이나 마찬가지.
트라할 역시 탈모맨에게 시달리고 있다.
듬성듬성 뽑힌 털 때문에 볼품없는 모습이었으나 흉폭함은 그대로다.
오히려 더 열받아서 살기를 쏟아 내는 중.
겉보기에는 위협적이지만 알 사람은 안다. 궁지에 몰린 녀석이 악을 쓰고 있다는 것을.
“우리라고 가만히 있을 수는 없지.”
“확실히 끝내자고.”
김조균과 김선혜가 참전한다.
지원군이 왔다 해서 구경만 하고 있을 수는 없으니까.
체력적인 부담이 쌓여 움직임은 처음만 못했으나 부상 당한 숭배자 조무래기를 처리하는 것 정도는 충분히 할 수 있다.
“제기랄! 이러고도 너희가 무사할 성싶으냐!”
“훗날 크게 후회하리라!”
트라할과 데하일이 포효한다.
이 상황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다는 표정.
모든 상황이 본인들에게 유리하게 돌아가고 있다가 반전되었으니 그럴 만도 하지.
어쩌나. 원래 세상은 원하는 대로 굴러가지 않는 법이다.
내가 겪어 봐서 잘 알지.
숭배자들 역시 여기서 지면 끝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에 저항이 거세다.
쥐도 궁지에 몰리면 고양이를 문다고 했던가.
항상 궁금했다.
“고양이가 10마리쯤 있어도 무나?”
산맥에서 이어진 소음이 지척까지 다가왔다.
그것이 뜻하는 바는 하나.
“신성을 위해!”
“위대한 빛을 보았다!”
“이블아이의 성전에 참전하라!”
핥짝이가 말했던 천족 무리가 도착했다는 뜻이었다.
저마다 신성을 터트리며 무기를 쳐든 모습이 섬뜩할 지경.
맹목적인 믿음과 광기가 뒤섞인 눈이 번뜩인다.
광신도가 저런 모습일까?
압도적인 기세를 내뿜으며 몰려온 천사들이 30여 명.
트라할과 데하일, 남은 숭배자 모두 질린 표정으로 그들을 바라봤고.
[‘날개 없는 천사의 왼쪽 날개(SSS)’를 장착합니다.]
-파아아아아앗!
“오오, 오오오오!”
“이 무슨 찬란함인가!”
“이것이야말로 어둠을 밝히는 한 줄기 빛!”
나 역시 녀석들의 기대에 부응해 활짝 날개를 펼쳤다.
반쪽짜리 날개였지만 그 존재감은 결코 작지 않다.
“부정한 자들에게 죽음을!”
“빛의 승리를!”
[천족들의 마음이 당신에게 향합니다!]
[호감도가 상승합니다.]
[칭호, 천사의 친구를 획득합니다!]
-화아아아아악!
시스템마저 감복했는지 나를 중심으로 거대한 빛기둥이 솟아올랐다.
천사의 친구라.
씨익, 입꼬리를 올린 나는 신성력으로 번쩍이는 검으로 숭배자 놈들을 가리켰다.
“가자, 친구들! 다 쓸어버려!”
우와아아아!
함성이 터져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