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9화 앞 털, 뒤 근육
펠의 죽음.
구태여 확인하지는 않았다. 놈이 가지고 있던 신성력은 흔적조차 남지 않았고, 생명체인 이상 목이 잘리면 죽는다.
물리적으로만 아니라 영혼 찢기로 영혼까지 잘라 버렸으니 되살아나는 건 불가능.
영물쯤 되면 또 모르겠지만 그건 아니라서.
어쩌면 나처럼 부활할 방법이 있을지도 모르겠다만.
“저, 자식이……!”
“펠이 당할 줄이야.”
밑에 있는 데하일과 트라할의 반응을 보니 그건 아닌 거 같다.
“위대한 존재가 나타났다.”
“어찌하여 등반가가 저런 신성을.”
“다들 정신 차려! 너희가 멍 때리면 어쩌자는 거야!”
“망할 천사 놈들, 상황 파악을 못 하는구나!”
악마들이 넋 놓고 날 우러러보는 천족 숭배자들을 다그쳤다.
그제야 정신을 차렸는지 천족 숭배자들이 무기를 쥐었으나 아까와 같은 적대감과 흉포함은 보이지 않았다.
천사들은 신성력에 민감하다.
신분과 신성력.
모든 천계를 아울러 천사들 간의 서열을 나누는 근간이었으니까.
범접할 수 없는 신성력을 지닌 자를 동경하고 존중하는 것은 천사들에게 있어 본능과도 같았다.
“한 놈은 끝냈군.”
[칭호, 부활한 교단의 성자가 빛을 터트립니다!]
[교단의 이름을 널리 알립니다.]
[신성력이 증가합니다!]
-쿠르르르릉
후광이 다시금 터져 나온다.
처음에는 잊힌 교단의 팔라딘. 이후 업그레이드되어 생성된 게 부활한 교단의 성자.
단순히 신성력을 올려 주는 게 끝이 아니다.
내가 활약하면 할수록, 업적을 쌓고 알릴수록 신성력이 증가하지.
그 과정에서 얼음과 불의 교단의 이름이 알려지는 건 덤.
‘등반가한테는 크게 영향이 없는 거 같지만 NPC 사이에서는 알려지는 거 같더라고.’
등반가 입장에서야 내가 어느 교단 소속인지 알 수가 없으니까.
하지만 NPC들끼리는 어떤 식으로든 이야기가 전달되는 거 같다.
계속해서 올라가는 신성력이 그것을 증명한다.
-후우우웅
가볍게 날개를 퍼덕였다.
한쪽밖에 없지만 몸이 기울거나 하지는 않았다. SSS급 아이템 정도 되면 뭐가 달라도 다르다는 거겠지.
감회가 남다르다.
그동안은 버프를 연달아 둘러야 겨우 착용할 수 있는 결전 병기 느낌이었는데.
[신성력 스텟이 최대치에 도달합니다.]
‘이제는 굳이 버프를 두르지 않더라도 사용할 수 있군.’
아무래도 펠과의 전투가 컸던 거 같다.
뭐, 그렇다 한들 무한정 쓰기에 부담스러운 건 마찬가지지만.
어떻게 되먹은 건지 자동으로 내 신성력을 빨아먹고 있어서, 장착 유지 조건 중 하나다.
사실상 장비보다는 아티팩트에 가까운 물건이라.
-타앗
천천히 바닥에 내려섰다.
[‘날개 없는 천사의 왼쪽 날개(SSS)’를 해제합니다.]
아직 적은 많았고 숭배자 수장 2명은 악마.
신성력을 조절할 필요가 있다.
누가 시키기라도 한 것처럼 고요하다.
숭배자들 역시 긴장하며 나를 주시한다.
내 옆으로 김조균과 김선혜가 다가온다.
“이, 이블아이. 방금 그건 뭐였지?”
“설마… 그 혹시 천사? NPC는 아닌 거 같은데 우리 세계에도 진짜 천사가 있었던 건가!”
뭔 정신 나간 소리야. 지구에 천사가 어디 있어.
헛소리하는 김선혜를 지그시 바라보자 헛기침을 하며 딴짓을 한다.
본인이 생각해도 좀 아니었던 모양. 다르게 말하면 그만큼 임팩트가 컸다는 뜻이다.
“커뮤니티에서 떠들던 것보다 훨씬 대단한 녀석이었구나? 그냥 콘셉트질 하는 변태인 줄 알았어.”
“쁘찡 연합이 그런 부분이 많잖아. 쁘띠공듀부터가 그 모양인데.”
“그건 그래. 쁘띠공듀와 추종자들에 비하면 이블아이는 양반이지. 오해해서 미안하다, 이블아이.”
“…익명의 세계에서는 언제나 음해와 날조가 판치는 법이지.”
슬쩍 시선을 돌리며 김조균의 말에 답했다.
콘셉트질. 그걸로 시작된 건 맞지. 어쩌다 이렇게 된 건지는 모르겠지만.
과거의 나를 만날 수 있다면 입부터 때릴 거다.
아무튼.
“지금 상황이 어떻게 돼? 싸울 수 있는 사람은?”
“우리 포함 9명이 전부야.”
“다행히 사망자는 없어. 저 개구리 덕분에 목숨은 붙어 있거든.”
“그에에.”
나 잘했지? 하는 표정을 짓는 덕춘이의 등을 긁어 줬다.
사망자가 없는 건 좋은 소식이다만 전투에 참가할 수 있는 인원이 10명도 안 된다는 건 꽤 부담스럽다.
“숭배자들은 아직 많아. 부상자까지 챙기면서 싸워야 하고.”
상위 헌터들. 특히 김조균과 김선혜가 분발해 줬지만 여전히 숭배자 측에는 60여 명이 남았다.
위협적인 적도 2명이나 있고.
‘홍예참도 다 썼어.’
신성력은 반도 안 남았고, 마력도 꽤 많이 사용했다.
구사일생으로 몸이 복구되기는 했지만 충격은 여전히 남아 있는 상태.
싸울 수 있다는 상위 헌터들 역시 정상이 아니다.
객관적으로 봤을 때 이들이 남은 숭배자를 모두 쓰러트릴 가능성은?
‘거의 없다 보는 게 맞겠지.’
쓸데없이 희망찬 생각을 하고 싶지는 않다.
그렇다면 가장 가능성 있는 건 역시.
“내가 앞에서 최대한 버틸게. 나머지는 너희가 어떻게든 해.”
“괜찮겠어? 너도 좀 지쳐 보이는데.”
김선혜가 걱정했지만 지금은 무리할 때가 맞다.
잠깐이지만 분위기가 이쪽으로 넘어왔을 때 찍어 눌러야 한다.
김조균 또한 같은 생각인지 김선혜를 말리고는 날 보며 입꼬리를 올린다.
“부담 줘서 미안하지만 파이팅 하자고. 이쪽은 우리가 알아서 할게. 어디 보자, 대충 한 사람당 7명씩 처리하면 되겠네. 아! 기분이다. 내가 20명 잡을게!”
호기롭게 소리친 김조균이 무기를 고쳐 쥔다.
“그래, 싸울 때는 싸워야지. 살아서 보자고.”
김선혜도 마찬가지.
마음 같아서는 덕춘이도 남겨 두고 싶다만 나도 여유가 없어서 말이지.
“덕춘아.”
“그엑.”
-콰앙!
폴짝, 내 어깨 위로 뛰어오른 덕춘이와 함께 앞으로 달렸다.
펠의 공격 범위에서 벗어나기 위해 놈들이 물러난 상황.
최대한 앞으로 진격해 싸움을 유도할 생각이다. 그래야 상위 헌터들도 부상자들을 따로 모으고 진형을 짤 시간이 생길 테니까.
“오, 온다! 다들 준비해!”
“쫄지 마! 적은 하나다!”
“천사 새끼들은 저놈들이나 조져! 얼타지 말고!”
나와 싸울 의지를 잃은 천족들이 옆으로 빠진다.
자식들, 머리 좀 썼네?
“내가 그냥 보고 있을 거 같냐?”
-파앙!
급격히 몸을 비틀어 방향을 바꾸었다.
목표는 천사들. 이미 내게 심리적으로 압도된 놈들이다.
마음부터 지고 들어온 녀석들만큼 잡기 쉬운 상대는 없는 법. 빠르게 정리해 버리면 저쪽도 여유가 생기겠지.
“으히익!”
“우, 우리는 그쪽과 싸울 생각이 없습니다!”
“젠장! 젠자앙!”
바로 몸을 굳히며 엉성하게 무기를 꼬나쥔 놈들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질끈, 맨 앞에 있던 녀석이 눈을 감는 찰나.
-카아아아앙!
“넌 나랑 마저 싸워야지.”
“복실이 왔어?”
트라할이 내 앞을 가로막았다.
빠르기도 하지. 어느새 내 주변에는 악마들이 가득 들어찼다.
그사이 천사들이 상위 헌터들을 향해 진격한다.
아쉽지만 저놈들은 보내 주도록 하고.
“또 도망칠 거면 지금 꺼지지?”
“작전상 후퇴였을 뿐이다. 건방 떨지 마라.”
“그게 도망쳤다는 건데, 뇌 주름이 부족한가? 몇 줄 그어 줘?”
“마음껏 떠들어라! 이미 널 상대할 방법은 알아냈다!”
가볍게 도발이나 해 보려 했더니만 놈도 멍청이는 아닌지 넘어오질 않는다.
것보다 날 상대할 방법을 찾았다라.
“…이건 또 뭐.”
-으드드드득
-빠득, 빠드드득
어디 무기로 쓸 막대기라도 하나 가져왔나 했더니만 놈이 선택한 방법은 좀 더 극단적이었다.
소름 끼치는 소리와 함께 변형되는 몸.
골격과 몸이 더욱 커지고 손톱과 발톱이 2배는 길어졌다.
거기에 이어.
-부스스스스슷
온몸을 덮고 있던 털이 엄청난 속도로 자라났으니.
“보아라! 더 이상 네놈의 공격을 통하지 않는다!”
“이건 진짜 복실이네.”
몸의 윤곽을 확인할 수도 없을 정도로 자라난 털 때문에 커다란 털뭉치 같이 변해 버렸다.
그 외 있지 않은가, 꼬마들 겨울철에 쓰는 모자 끝에 달린 털방울 같은 거.
저거 앞은 보이는 건가.
“너, 나 안 보이지?”
“보인다!”
정확히 내 머리 위 어딘가를 가리키며 소리치는 녀석.
방향은 맞는데 난 더 아래에 있다.
맞네. 이 자식 시력을 포기하고 방어력을 얻었네.
어이가 없을 지경이었지만 놈의 전략은 꽤 쓸모 있었다.
-카르르르르륵!
다짜고짜 덤벼든 녀석이 손톱을 휘두르기에 옆으로 피하며 검을 휘둘렀더니 그대로 털에 막혔다.
말이 털이지 사실상 쇠로 만들어진 케이블이나 마찬가지.
털이 늘어난 만큼 방호력은 물론 무게도 엄청나다.
그저 몸을 털었을 뿐인데 육중한 무게감에 밀려났다.
덩치를 왜 키웠나 했더니만 털 무게를 버티기 위함이었나.
게다가.
“여기 있군.”
-콰악!
놈에게 있어 시력은 크게 중요하지 않았다.
어지간한 공격은 사각에서 들어와도 털이 막아 줬으며, 내 위치는 후각을 비롯한 예민한 감각으로 알아차렸으니까.
‘이 녀석, 진짜 웨어울프나 수인 혼혈 아니야?’
악마라는 종족 자체가 워낙 다양성이 많다 보니 아니라는 보장도 없었다.
[영혼 찢기(S) Lv.10]
-촤르르르륵!
혹시나 싶어 영혼 찢기를 사용했지만 역시나.
놈의 몸에 닿기도 전에 털에 막힌다.
일단은 털도 신체 일부기는 해서 어느 정도 공격이 들어가기는 했지만.
‘털은 애초에 관절이나 근육이 없지.’
머리털 같은 거에도 영혼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영혼이 잘려도 놈에게는 아무런 대미지가 없다.
포션 중에 털 빠지는 건 없나 생각해 봤지만 없다.
“이크!”
-콰아아앙!
전차처럼 몸통박치기를 하는 놈을 피해 옆으로 굴렀다.
내가 있던 자리가 터지며 땅이 파인다.
방어에 신경 쓰지 않고 일방적으로 공격할 수 있는 놈.
어떻게 보면 차라리 펠이 나았다. 그놈은 공격을 강력했을지 몰라도 내구도는 그렇게 좋지 않았으니까.
자, 어쩐다.
어쩌긴 뭘 어째.
“털뭉치 녀석, 그것밖에 못 해?”
“언제까지 나불거릴 수 있는지 봐 보마!”
-타앗!
앞도 안 보이는 녀석.
그대로 이용이나 해 먹지.
놈이 나를 향해 달려드는 타이밍에 맞춰 숭배자 사이로 파고들었다.
“어, 어어! 피해!”
“트라할 님, 여기 아닙니다!”
“피해! 일단 피해!”
내 목적을 알아차리고 곧장 도망치는 놈들이었으나 어쩌나 내가 더 빠른데.
-콰아아아앙!
“크학!”
“으아아아악!”
미처 도망치지 못한 숭배자 몇 놈이 허공으로 날아간다.
뼈가 으깨지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렸으니 최소 전투 불능, 아마 즉사하지 않았을까 싶다.
확실히 같은 실버 등급이어도 최상위권은 다르네.
다르게 말하면 골드 등급은 저놈들을 부하로 다룰 만큼 강하다는 이야기.
벌써부터 지고 들어가면 안 된다.
“얕은수를 쓰는군.”
자신의 부하를 날려 버렸다는 걸 알아챈 녀석이 으르렁거린다.
“얕은수에 걸려 줘서 고마워. 뭐 해? 계속 들어와야지?”
놈이 볼 리가 없지만 손가락을 까딱였다.
어떻게 나올까. 놈도 공격이 먹히지 않지만 동시에 나 또한 제대로 공격하지 못하고 있다.
빨리 못 해치우면 사이에 낀 부하들만 피해를 볼 터.
선택해라. 변신을 풀 것인지, 아니면 끝까지 갈 건지.
트라할 저 녀석도 생각이라는 게 있다면 변신을 풀…….
“데하일, 같이 움직이자.”
“안 그래도 그럴 생각이다. 펠을 잡은 놈이다. 가장 큰 위협부터 없애는 게 맞지.”
쿵.
내 뒤편에 자리 잡은 데하일이 근육을 부풀린다.
앞 털, 뒤 근육이라.
“이런 치사한 새끼들.”
“닥쳐라!”
“그동안 설친 대가를 치를 때가 왔다!”
-콰아아앙!
큰소리로 외친 트라할이 다시금 달려들었고.
-띠링
커뮤니티 알림 역시 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