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탑에 갇혀 고인물-426화 (425/740)

426화 잡히면 그냥

상위 헌터들과 대치하고 있는 탑 숭배자들.

기껏 기분 좋게 왔더니만 이게 무슨 상황일까. 눈살이 찌푸려진다.

놈들의 본거지를 찾으러 왔다가 상위 헌터들의 위치를 알게 돼서 좋아했더니만.

‘바닥에 굴러다니는 애들도 있는 거로 봐서는 한바탕한 모양인데.’

거기까지는 오케이.

숭배자 놈들 덤비는 거야 익숙하니까. 이곳에 오래 있던 상위 헌터들도 숭배자에 대해서는 알고 있었을 거다.

놈들이 가지고 온 음식과 아이템을 보아하니 상위 헌터들을 회유하려 했던 건 분명하고.

조금만 늦었으면 최악의 상황이 됐을지도 모르겠다.

그건 그건데…….

“많이도 몰려왔네.”

“그에에.”

숭배자 놈들이 너무 많다. 100명? 그쯤 돼 보인다.

상위 헌터들도 있으니 상대할 수 있을까도 싶었지만.

‘상위 헌터 중 척 봐도 멀쩡한 놈들이 없어.’

김선혜를 만났을 때 느꼈지만 생각했던 것보다 더 심각하다.

얼마나 못 먹었는지 볼은 홀쭉하고 몸은 앙상하다. 강인한 체력을 지닌 헌터. 그것도 79층까지 오른 실력자들이 저 꼴이 되려면 오랫동안 굶주렸다는 뜻.

무기를 들고 대치하고 있는 자세는 반듯하다만 막상 싸우면 힘에 부칠 게 분명했다.

그나마 멀쩡해 보이는 사람도 몇몇 있다.

대표적으로 저기, 장비를 제대로 입고 있는 남자. 산군 엠블럼이 박힌 장비를 입고 있는 거로 봐서는 저 녀석이 김조균이겠지.

녀석이 적막을 깬다.

“봐, 봤지? 우리를 도와줄 사람이 있다니까? 하하하하! 이 사람이 바로 마그마 요정이다!”

“아니다, 자식아.”

“아, 아니야? 왜! 왜 아닌데!”

나도 모르게 발끈했지만 아닌 건 아니다.

누구보고 마그마 요정이래. 순간 움찔했네.

“마그마 요정은 따로 지원군과 함께 있지. 난 쁘… 찡 연합의 이블아이다.”

“무슨 연합?”

“몰라. 목소리가 작아서 잘 안 들려.”

“아! 이블아이! 난 알고 있지. 요즘 커뮤니티에서 자주 보이는 쁘찡 연합 일원이야.”

“무지개라길래 무슨 소린가 했더니만 진짜였군, 세상에.”

밥은 굶을지언정 가만히 앉아만 있지는 않았는지 나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들이 제법 있다.

그렇겠지. 여기서 할 게 뭐가 있을까. 온종일 커뮤니티 켜고 엎어져 있는 거겠지.

“보다시피 내가 데리고 왔지… 악!”

어째선지 우쭐거리는 김선혜의 정강이를 가볍게 차 주고 짊어지고 있던 음식 바구니를 내려놓았다.

나의 등장으로 분위기가 바뀌기는 했지만 숭배자들이 눈앞에 있는 것 역시 사실이다.

놈들의 처리 1순위는 바로 나고. 그동안 깽판 친 게 좀 있어서.

-뚜둑! 뚝!

슬쩍 등 뒤로 손을 숨기며 GPS 아티팩트를 부쉈다.

냥펀이 위급한 상황일 때 아티팩트를 동시에 부수라고 했다. 그럼 그 위치로 찾아오겠다고.

마물의 영역에 들어서면서 아티팩트가 망가진 거 같기는 하지만 별수 있나. 이렇게라도 해야지.

“이거, 이거. 예상치 못한 방해물이 왔네요.”

“혼자 온 거 같은데. 잘됐군. 여기서 정리하면 되겠어.”

“용케 여기까지 왔다. 우리의 수고를 덜어 주는구나.”

숭배자 무리 앞에 서 있는 3명.

아무래도 저놈들이 우두머리인 거 같다.

‘어쩐지 본거지로 생각되는 곳이 3개나 된다 했더니만 3개의 파벌로 이루어져 있던 건가.’

그럼 마물의 영역 경계에 있던 것도 원래는 본거지로 썼던 곳이고?

하긴 위장용으로 만들었다기에는 너무 공을 들였다 했다.

상위 헌터들을 영입하기 위해 파벌 전부가 이곳으로 온 거다.

그래야 마물들의 공격을 뚫고 이곳까지 올 수 있으니까. 압도적인 전력으로 상위 헌터의 저항도 눌러 버리고.

대략적인 상황은 알겠다.

[SS급 권능, 별을 주시하는 눈이 발휘됩니다.]

-츠즈즈즈즈

권능을 통해 놈들에 대한 정보를 살폈다.

역시나.

[펠]

-탑 숭배자.

-79층, 천족 무리의 수장.

-골드 등급 유헤다를 따릅니다.

-실버 등급 최상위권입니다.

[데하일]

-탑 숭배자.

-79층, 악마 무리의 수장.

-골드 등급 데이본드를 따릅니다.

-실버 등급 최상위권입니다.

[트라할]

-탑 숭배자.

-79층, 연옥계의 왕.

-연옥계 출신 악마들의 수장입니다.

-실버 등급 최상위권입니다.

하나같이 살벌한 설명들. 같은 실버 등급을 부하로 써먹을 정도면 그동안 만난 놈들과는 수준이 다르다고 봐야겠지.

정면에 서 있는 악마, 트라할을 주시했다.

어떤 놈인가 했더니만 저 녀석이었나.

저놈이 이곳까지 이들을 끌고 온 거겠지. 연옥의 왕 출신이면 이곳 지리에 대해서는 빠삭할 테니까.

-스스스슥

-처억

상위 헌터들이 내 쪽으로 붙는다.

선택지가 없다면 모를까 나의 등장으로 가능성이 열렸다.

굳이 숭배자가 되지 않더라도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가능성이.

“딱 보니 상황 뻔한데 다들 저놈들 말 들을 필요 없어. 이 녀석 신성력을 높여 주는 능력을 가지고 있거든. 보다시피 식량도 있고.”

김선혜 역시 정보를 풀며 상위 헌터들을 끌어모았다.

신성력이 올라간다는 말에 눈빛이 달라지는 헌터들.

몇몇은 큰 반응이 없다. 아마도 천족 진영이 아니라 악마 진영 소속이겠지.

“마기를 올릴 방법도 알고 있다. 위로 올라가고 싶으면 내 쪽에 붙어. 괜히 숭배자 놈들한테 넘어가지 말고.”

“엇? 너 마기도 올릴 수 있어? 정체가 뭐야.”

놀란 눈으로 날 바라보는 김선혜.

뭐긴 뭐야 구라 치는 거지. 나도 아직 마기 스텟을 끝까지 못 찍었는데 무슨 수로 올려 줘.

그렇다고는 해도 완전히 구라는 아니다.

‘마기는 악마를 상대로 싸우면 올라가잖아. 숭배자 놈들 싹 긁어모아서 조지면 올라가지 않을까?’

느껴지는 기운으로 봐서 마기를 지닌 이들 모두 700스텟은 넘는 거 같은데.

보아하니 숭배자 무리는 악마의 비중이 높다. 마기 스텟을 치환하면 꽤 많지 않을까?

그걸로도 모자라면 마기 관련된 영약이라도 구해 올 생각이다. 생각해 보면 헬다잉 키친의 대표도 악마다. 어떤 식으로든 구할 수 있겠지.

헬다잉 키친 말고도 손 벌릴 곳은 많다. 프램버그, 화조국, 릴카, 갈매기, 히든 가든, 대림원.

쓸 수 있는 건 모두 써서 받아 오지 뭐. 진짜 답 없으면 차원 상점을 쓸 수도 있는 거니까.

“크큭! 크흐하하하! 허세가 심하구나. 그래. 좋다. 궁지에 몰릴수록 말이 많아지는 법이니까.”

“네가 제일 말이 많아, 닥쳐.”

“이놈이!”

데하일이 발끈한다. 다혈질인가.

반면에 펠과 트라할은 별다른 동요가 없다.

천사인 펠은 표정이 없어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고, 트라할은 흥미로운 눈길을 보내고 있다.

맹목적으로 내게 적대감을 드러내는 숭배자 놈들과는 좀 다른 반응.

“이블아이라고 했나.”

“어. 맞아.”

“네놈과 네 동료들이 연옥계를 어떻게 움직이는지 지켜봤다. 재밌더군.”

“너 재밌으라고 한 건 아닌데. 이왕 재밌게 봤으면 감사의 의미로 물러나 줄래?”

솔직히 좀 쫄려서 말이지.

피식 웃은 녀석이 고개를 젓는다.

“그건 좀 힘들겠군. 대신 제안을 하나 하마. 내 밑으로 들어올 생각 없나?”

“트라할!”

“저자는 처단해야 할 대상이에요. 그럴 수는 없습니다.”

녀석의 말에 데하일과 펠이 격한 반응을 보인다.

들어갈 생각도 없는데 왜 지들이 난리인지 모르겠네.

“연옥의 왕으로서 지금의 모습이 썩 나쁘게 보이지는 않아서 말이지. 내 호의라 생각해라. 여기서 네놈이 살아남을 방법은 이것뿐이니.”

다른 두 녀석을 무시한 녀석이 내게 손을 내민다.

좋게 봐 줬다니 고맙기는 한데 난 그럴 생각이 없어서 말이지.

“덕춘아.”

“그에.”

내 의지를 읽은 덕춘이가 가운뎃손가락을 들어 올린다.

이거면 답이 됐겠지?

“…후회할 짓을 하는구나!”

분노한 트라할이 노성을 터트렸다.

진심이 제대로 전달된 거 같다.

놈의 손짓에 숭배자 무리가 앞으로 다가온다.

준비되어 있던 테이블과 상자가 쏟아지며 음식과 아이템이 나뒹굴었지만 지금은 그걸 신경 쓸 때가 아니다.

“도와주지, 이블아이. 너에 대해서는 루키 그룹에서 대충 이야기 들었어.”

내 옆으로 김조균이 붙었다.

“아까는 마그마 요정이라더니.”

“합류하기로 했던 게 그 사람이라서 일단 지르고 본 거지. 사소한 건 잊자고.”

“으아, 밥도 먹었겠다. 소화도 좀 시켜야지.”

왼쪽에는 김조균. 오른쪽에는 김선혜.

상위 헌터쯤 되면 회복도 금방 된다 이건가. 독 기운도 빠지고 밥도 먹였더니 처음 만났을 때랑 비교할 수도 없게 컨디션이 올라간 거 같다.

“부상자 챙기고 떨거지들 막아! 저 세 놈은 우리가 어떻게든 붙잡고 늘어질 테니까!”

“뒤에 바구니 있으니까 돌아가면서 배부터 채워. 조금이라도 기력 회복해야지.”

“지원군이 올 때까지 어떻게든 버텨!”

빈말로도 좋은 상황은 아니다.

저 3명을 붙잡아 두는 것쯤이야 그렇다 치지만 주변에 깔려 있는 100여 명의 숭배자를 나머지 사람들이 커버할 수 있을까.

‘절대 못 할 거 같은데.’

결국 저 3명을 상대하면서 가능한 많은 숭배자를 커버해야 한다는 뜻.

저놈들뿐일까. 순찰 도는 놈들까지 생각하면 이쪽 어딘가에 숭배자들이 더 모여 있다고 보는 게 맞았다.

다 합치면 몇 명일까? 150명? 200명? 어쩌면 그 이상일지도 모르겠다.

“후우.”

숨을 내쉬며 혼돈검을 꺼내 들었다.

생각하지 말자.

“덤벼.”

그런 거 생각하면서 싸울 거면 할 수 있는 것도 못 할 테니까.

[오로라 빔(S) Lv.10]

-찌유우우우웅!

손가락을 타고 쏘아진 오로라 빔이 숭배자 한 녀석의 머리를 날려 버렸고.

“쓸어버려라!”

“어리석은 선택의 대가를 치르게 해 주마.”

그것을 신호로 전투가 시작됐다.

* * *

심층부.

평소였다면 야행성 마물이 짖는 소리를 제외하면 고요했을 곳이었으나 지금은 달랐다.

-화르륵

횃불을 든 악마와 천사들이 빠르게 움직였다.

그 규모가 꽤 대단했고, 가장 선두에는 냥펀과 핥짝이, 탈모맨, 마그마 요정이 있었다.

“오오! 이쪽으로 잡힌다! 달려!”

커다란 지도를 칠판째로 등에 멘 탈모맨 뒤로 냥펀이 눈을 반짝인다.

조현수가 마물의 영역으로 들어가며 신호가 끊겼다.

이상을 감지한 멤버들이 곧장 움직이는 건 당연했고, 그에 따라 작전을 바꾸었으니.

“탈모맨 님, 1팀은 A 포인트로 이동했습니다.”

“2팀부터 4팀까지는 B 포인트로 가고 있습니다요.”

숭배자들이 움직이기 전에 먼저 치기로 했다.

원래라면 시간을 들여 차근차근 진행할 생각이었으나, 이블아이의 돌발 행동과 신호가 끊긴 김조균의 상황을 봤을 때 둘 다 숭배자와 마주쳤을 거라는 판단이었다.

숭배자들이 있을 거라고 생각되는 포인트는 A, B, C 총 3개.

그중 가장 거리가 멀고 예측이 안 되는 A 포인트는 그리가가 이끄는 악마 군단이 진격했으며, B 포인트는 천사와 악마 혼합 팀이 맡기도 했다.

전투보다는 경계, 감시 위주.

그 밖에 후렌 키아노와 루나르, 간부급 인사들은 멤버들과 함께 C 포인트로 움직이기로 했다.

마지막에 신호가 잡힌 곳이 그곳이었고, 만약 그곳에서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라면 C 포인트를 클리어한 후 다른 팀과 합류하여, B 포인트와 A 포인트를 차례대로 치려는 계획.

“이 녀석은 어딜 가기만 하면 사고를 치냐.”

“이번에 잡으면 다리몽둥이를 부수는 게 좋을 거 같앙.”

“음? 이블아이는 기어서라도 나갈걸?”

“좋은 지적이야. 다리 말고 머리를 쳐야겠어. 기절하면 가만히 있겠… 야야, 잠깐.”

조현수가 들었으면 기겁할 소리를 하며 달려가던 멤버들이 잠시 멈춰 섰다.

심층부 안쪽으로 이동했기 때문일까, 그동안 잡히지 않았던 아티팩트 신호가 다시 잡혔다.

마물의 영역 깊숙한 곳.

한곳에 모여 있던 아티팩트 신호가 깜빡였고.

-팟

한꺼번에 사라졌다.

서로의 얼굴을 본 멤버들이 와락 얼굴을 구겼다.

명백한 구조 신호.

“진짜 잡히면 두들겨 패야겠다.”

핥짝이가 나직이 중얼거렸고 다른 멤버들 역시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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