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5화 밥상머리
서로 도움이 될 수 있다는 확신이 섰기 때문일까, 김선혜와의 대화를 통해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자잘한 이야기도 있었지만 굵직한 것들만 요약하자면…….
“현재 남아 있는 상위 헌터는 대략 26명. 갇힌 지는 대략 14년 정도 흘렀다는 거군.”
“맞아, 오랜 시간이지.”
14년이라. 결코 짧은 시간이 아니다. 그것도 총 등반 기간이 아니라 79층에 갇혀 있던 시간만을 이야기하는 거였으니까.
오랫동안 시간을 보내면서 여러 문제도 생겼고 말이야.
“처음이야 다 같이 이겨 내 보자는 분위기였지만 지금은 아니거든. 생존, 우리에게 중요한 건 그거였으니까. 아집인지 고집인지.”
“이해는 돼. 잠깐이면 몰라도 지금까지 버텼는데 오기로라도 밖으로 못 나가지.”
그동안 보낸 시간이 아까워서라도 그럴 거 같다.
거기에 하나 더.
‘이들은 대부분 초창기에 들어왔던 이들이야. 즉, 탑에서 죽는 걸 진짜로 죽는 거라 생각하고 등반을 해 왔다는 거지.’
초창기. 그러니까 지금의 대형 길드장들과 같은 초창기 헌터들이 밖으로 나오기 전에 들어온 이들.
지금이야 탑에서 죽어 코인을 모두 소모하면 탑 밖으로 나간다는 걸 당연시 여기지만 당시에는 그렇지 못했을 거라는 말.
‘탑에서의 죽음은 진짜 죽음이다’란 그런 마인드로 등반을 해 온 거다.
진지한 자세로, 생존에 목메어 조심하고 또 조심했겠지. 탑에 들어온 시간에 비해 높이 오르지 못한 이유도 이 때문이고.
“밖으로 나가는 것도 방법인 걸 알아. 우리도 머리로는 이해하고 있으니까. 그런데 그거 알아? 탑에 이렇게 오래 있다 보면 밖이 더 무서워진다?”
“무슨 소리지.”
“왜 그런 거 있잖아. 감옥에 수십 년 갇혀 있다 출소한 사람이 사회에 적응 못 하고 다시 감옥으로 들어가는 거.”
나무에 묶인 채 발목을 까딱이던 김선혜가 바닥을 내려다본다.
“사회와 너무 다른 환경에서 오래 있었어. 밖은 어떨까, 내가 알던 그 모습이 맞을까, 낯설고 무서워. 탑에 오랫동안 있는 사람들은 다들 그래.”
“그래서 더 견디고 있던 거군.”
“우습지 않아? 너희는 그렇다며, 최대한 높이 올라가 밖에 나가서 떵떵거리며 살겠다고. 정작 그 사람들보다 높이 오른 우리는 그런 생각 못 하는데.”
생각보다 현실적인 이유.
당장 나도 탑에 들어온 지 기껏해야 1년도 안 됐다. 바깥 기준으로는 반년이 채 안 되는 시간.
그 짧은 시간 동안 많이 바뀌지 않았던가. 주변을 확인하고 적을 가늠하며 상대방을 경계한다.
악마, 천사, 수인, 요정 등등 인간 외 종족을 당연시 여겼으며, 필요하다면 죽이는 것도 서슴지 않았다.
이미 현대 사회에서의 나는 없다. 세상이 미쳐 버리면서 바뀐 것도 있지만 이건 다른 결의 이야기.
초창기부터 들어온 이들이 아니더라도, 탑에서 수년 동안 지내다 보면 이들과 비슷한 생각을 가지게 되지 않을까.
특히 70층대부터는 정신적인 스트레스가 폭증한다. 챕터가 지날수록 짧게는 며칠, 길게는 몇 년 단위의 기억이 생성되니까.
체감상 바깥세상에 격리된 기간이 확 늘어난다는 것.
나야 정신 보호 덕에 아무 문제 없다. 멤버들 또한 빠르게 등반을 하고 있는 만큼 부담감이 적겠지만 이 사람들은…….
‘상황이 더 안 좋아.’
얼굴을 쓸어내렸다.
밖으로 나가는 걸 무서워하는 상위 헌터들.
코인을 모두 소모해 밖으로 나가게 되더라도 사고를 칠 가능성이 크고, 계속해서 이곳에 고여 있다가는 탑 숭배자들의 타깃이 될 가능성이 있다.
왜냐…….
‘숭배자들과 이유는 다르지만 탑에서 벗어나고 싶어 하지 않아.’
숭배자들 입장에서는 살살 꼬드기고 싶은 대상이 아닐까.
심지어 79층까지 올랐던 이들이다. 혹여나 이들이 숭배자가 된 다음 밖으로 나가게 된다면…….
‘그거야말로 최악의 결과야.’
결정했다.
“여기 사람들 모두 데리고 위로 올라가야겠어.”
“엉?”
“일단 안전지대에 올려 두고, 밖에 너희들이 적응할 수 있는 기관을 설치할 거야. 그래야 너희가 밖으로 나가서 뻘짓 안 하지.”
“풉!”
웃어?
기껏 머리 굴려서 생각해 준 건데 배은망덕하게.
멱살을 잡을까 말까 고민하는 타이밍 김선혜가 날 바라봤다.
“할 수 있어? 할 수 있으면 내가 뭐든 들어준다, 진짜로.”
절대 못 할 거지만 말이라도 고맙다는 표정.
이상하다. 왜 내가 진심을 담아 이야기하면 다들 반응이 별로지? 항상 옳은 말만 하는 거 같은데.
됐다, 이렇게 나온다면…….
“말로만 하지 말고 계약서로 써 주시지?”
인벤토리에서 계약서를 꺼내 내밀었다.
일전에 핥짝이한테 소원권을 받아 냈을 때 사용했던 것과 동일한 물건.
살짝 놀란 눈치였지만 그것도 잠시.
“보다시피 묶여 있어서 사인을 할 수가 없네?”
“풀어 줄 거야. 슬슬 움직일 거거든.”
툭.
녀석을 묶어 두었던 체인을 수거했다.
뻐근한지 몸을 풀더니 바로 사인한다. 반쯤은 장난이었는데 이걸 해 주네.
[조건 충족 시 계약이 활성화됩니다.]
시스템의 공인도 있으니 효과는 확실할 거다.
오랜만에 퀘스트 하는 거 같고 좋네.
진솔한 대화를 통해 약간의 신뢰가 생겼는지 공격적인 반응도 안 보이고.
“사람을 묶어 두는 건 악취미야, 기억해 두라고.”
“대충 생각은 해 두지. 말 다 했으면 가자. 일단 급한 것부터 끝내야겠어.”
생각을 마쳤으면 움직여야 하는 법.
안내하라며 턱짓하자 고개를 끄덕인다.
-파앗!
상위 헌터라 그런지 움직임이 빠르다. 발목 잡힐 걱정은 없을 거 같고.
“무리에서 벗어난 지 좀 됐다고 했지?”
“대략 2주일 정도? 있어 봤자 먹을 것도 없고, 다들 신경이 날카로워서 나왔어.”
“최근 상황은 잘 모른다는 거군.”
“크게 달라진 게 있을까?”
“있지, 나랑 다른 녀석들이 이곳에 왔으니.”
마물의 영역에 있어서 그런지 이곳 정세를 잘 모르는 거 같다.
하기야 알았으면 우리 쪽으로 합류했겠지. 굳이 이곳에 있을 이유가 없으니.
‘잠깐만.’
그러네, 왜 이들은 마물의 영역에 있는가. 좀 더 편한 곳이라면 얼마든지 있을 텐데.
“하나만 물어보자. 너희는 왜 이곳에 있지? 상황도 좋지 않은데.”
“아, 우리는 챕터를 다 끝냈어. 조건이 안 돼서 여기 남아 있는 거지. 시스템이 이쪽으로 넣어 뒀다고 해야 하나.”
“그럼 영역 밖으로는 못 나오는 건가?”
“그건 아닌데 제약이 있지. 안쪽에 마물을 통제하는 수정이 있어서 해당 구역이 오히려 안전해.”
수정이라, 그런 것도 있었나.
“근데 일정 인원이 주어진 구역을 벗어나면 통제가 안 돼. 그때부터는 마물들이 날뛰는 거지.”
“사실상 안에만 있으라는 거군.”
“그치.”
망할 탑 아니랄까 봐 이런 장치를 해 둔 건가.
예상외의 변수가 있기는 하지만 할 일은 똑같다.
현재 상위 헌터들의 가장 큰 문제는 식량.
오랫동안 이곳에 있던 만큼 가지고 있던 포인트를 전부 써 버린 거다.
가만히 있어도 배는 고프고, 등반가는 상점창으로 식량을 수급하니 당연한 결과였다.
그나마 상위 그룹에 속해 있는 이들이 지원을 받아 식량을 나누어 주고 있다고는 하다만, 그 수가 현저히 적어서…….
“지금 식량을 공급하고 있는 게 김조균이라 했지? 루키 그룹.”
“맞아, 그 사람 아니었으면 몇 명은 진작 나갔을걸. 그마저도 충분하지는 않지만.”
시스템적인 개입이 있던 건지 뭔지는 몰라도 상위 그룹에서 지원해 주는 것도 제한이 있었다.
그동안 겪어 온 탑이라면 그러고도 남는다.
탑 입장에서는 진작 탈락했어야 할 이들이 지원을 받아 버티는 중이니까.
‘생각보다 간단하게 클리어할지도 모르겠는데?’
식량이야 내가 풀면 되는 거고, 그걸 기회 삼아 상위 헌터들의 협력을 요구한다.
마그마 요정과 커넥션이 있는 김조균도 있으니 좀 더 협조적으로 나오겠지.
당장은 영양결핍과 컨디션 저조로 큰 도움이 되지는 않겠지만 조금만 시간을 들여 회복시키면 우리에게 큰 전력이 될 거다.
그래, 그동안 고생했는데 조금은 쉽게 갈 때가 됐지.
“흐흐흐흐.”
나도 모르게 웃음이 흘러나온다.
“와, 너 되게 악당처럼 웃는다.”
“시끄러.”
* * *
심층부, 마물의 영역.
강력한 마물들이 밀도 높게 자리 잡은 만큼 악마와 천사 모두 진입하지 않는 곳이었으나 지금은 달랐다.
“숭배자 놈들이 왜 여기에!”
“이놈들이 여기까지 온 적이 있던가?”
“없어, 없다고!”
상위 헌터들이 모여 있는 곳. 마물을 통제할 수 있는 붉은 수정이 있는 곳이었으며 유일하게 마물의 영역에서 안전한 곳이었으나, 그건 어디까지나 마물을 대상으로 했을 때의 이야기였다.
숭배자들은 붉은 수정의 영향을 받지 않는다. 그런 놈들이 작정하고 진입했다.
“후우. 더 싸울 겁니까, 등반가들?”
그들의 공격에 당한 상위 헌터만 8명이다.
다짜고짜 들어오는 이들을 맞서 호기롭게 덤빈 이들이었으나 결과는 좋지 않았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아직까지 숨이 붙어 있다는 것 정도.
으득. 상위 헌터들이 이를 악물었다.
실버 등급. 그중에서도 최상위권의 서열을 가진 이들이 세 명에 그 수하가 대략 100여 명.
반면 상위 헌터는 26명이 전부였다.
그래도 괜찮았다. 힘들지언정 아예 불가능하지는 않았으니까.
어디까지나 정상 컨디션이라는 가정하에.
-꾸르륵
누구에게랄 것 없이 배곯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제대로 된 식사를 하지 못해 전반적인 컨디션이 떨어졌으며, 마물을 상대할 일이 없던 만큼 전투 능력 또한 저하됐다.
강한 체력을 지닌 헌터라한들 굶는 걸 밥 먹듯이 하면 영양실조에 걸리기 마련이었다.
그뿐일까. 어떻게든 포인트를 벌기 위해 가지고 있던 아이템까지 팔아 버려 무장 상태도 빈약했다.
방어구조차 없이 무기 하나만 들고 있는 사람이 절반.
상위 헌터의 중앙에 서 있던 김조균이 얼굴을 찌푸렸다.
‘주변에 있는 마물을 모조리 정리하고 들어왔다는 건 정예들만 데리고 왔다는 건데. 하이고, 돌겠네.’
평소 가벼운 성격인 그였으나 지금만큼은 진지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제대로 싸울 수 있는 인력이라고는 자신을 포함해 3명 정도가 전부. 나머지는 기껏해야 버티는 게 전부다.
‘이제 좀 살 만해지나 싶었는데 하필 이 타이밍에.’
으득. 이가 갈린다.
마그마 요정과 연락이 닿았건만 갑작스레 놈들이 쳐들어와 연락이 끊겼다.
간신히 붉은 수정이라는 말을 하기는 했지만 알아들었을 가능성은 미지수.
이곳에 고여 있는 이들은 누구나 아는 정보였지만, 곧바로 80층에 올라가거나 이제 막 올라온 이들은 붉은 수정이 뭔지도 모를 가능성이 높았다.
불확실한 희망을 가지고 버텨야 하는가. 고민이 깊어지는 찰나.
“붉은 수정을 가지고 있는 게 누구인가?”
악마들을 이끄는 데하일이 상위 헌터를 훑으며 물었다.
“우리가 그걸 줄 거 같냐, 숭배자 놈들아?”
“줘야지요. 안 그러면 죽을 테니까요.”
김조균의 말에 천사 무리를 이끄는 수장, 펠이 피식 웃었다.
명백한 적의.
누가 뭐라 해도 이곳에 모인 이들은 스스로의 힘으로 79층까지 오른 강자들이었다.
싸워야 한다면 싸우는 이들.
볼이 홀쭉하게 들어갔으나 눈빛은 매서웠으며 앙상해진 몸임에도 자세는 굳건했다.
‘갈 때는 가더라도 최대한 죽이고 간다.’
‘내가 여태까지 어떻게 버텼는데! 두고 봐, 개새끼들!’
‘저쪽 대가리라도 데려가야지. 억울해서라도 그냥 당할 수는 없어.’
생존에 대한 집착은 이미 신념과도 같았다.
피어오르는 살기에 숭배자 몇 놈들이 뒷걸음질 칠 정도.
“아, 물론 그냥 달라는 건 아니야. 오해하지 마. 서로 좋자고 이러는 거니까.”
연옥계 출신의 대표, 트라할이 앞으로 나섰다.
“개소리 마시지. 공격해 놓고 할 소리는 아닌 거 같은데.”
“이번에 새로 온 놈들이 영 껄끄러워서 말이야. 붉은 수정을 넘기고 우리와 합류해라. 위로 올라갈 수 있게 해 주지.”
“숭배자가 되라는 말인가?”
상위 헌터들 역시 숭배자에 대해 알고 있다. 직간접적으로 방해를 받아 왔으니까.
당연히 인식이 나쁠 수밖에 없었으나.
“그럼 언제까지 이곳에서 썩을 거지? 숭배자가 돼라. 음식은 물론이고 지원도 아끼지 않으마. 80층? 그 너머로 올라가는 것도 가능하다.”
짝짝.
트라할이 박수를 치자 뒤에서 대기 중이던 악마들이 테이블을 들고나온다.
테이블에는 음식이 가득 쌓여 있었으며, 이어 온갖 장비와 아티팩트가 담긴 커다란 상자를 든 행렬이 이어졌다.
그야말로 보물들. 번쩍이는 아이템과 식욕을 돋우는 음식 냄새.
상위 헌터들은 의지와 상관없이 침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촤압
트라할이 큼지막한 고기를 뜯어 씹어 삼킨다.
사람들의 시선이 그의 입으로 향한다.
“고민할 게 있나? 제안을 받아들이면 식량과 장비, 더 높은 곳에 오를 수 있는 힘을 얻는다. 이후 탑에서 영생을 살 수도 있지. 반면 거절하면?”
-콰직
그가 들고 있던 단검이 테이블에 꽂힌다.
“죽음뿐이다.”
양자택일.
한계에 몰린 상위 헌터들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길면 14년. 79층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던 이들.
굶주림. 등반. 자유.
단 한 번의 선택으로 해결할 수 있다.
“다, 다들 정신 차려! 우리를 도와줄 사람들이 있어! 곧 이곳으로 올 거라고!”
상황이 여의치 않은 걸 파악한 김조균이 소리쳤다.
본인도 확신할 수 없었지만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다들 잘못된 선택을 할 거 같았다.
트라할이 가소로운지 피식 웃었다.
“저 말을 믿나? 난 알아. 놈들은 이곳에 너희가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니…….”
-바스락
소음.
그리고 음식 냄새에 트라할이 말을 멈췄다.
정적 속 모두의 시선이 한곳으로 향했고.
“아, 여기 다 있었군. 뭘 좋아할지 몰라서 일단 다 가져왔는데… 웬 숭배자들 새끼들이 있네? 밥상머리에 재수 없게.”
음식이 담긴 커다란 바구니를 짊어진 이블아이와 입이 빵빵해지게 고기를 우물거리고 있는 김선혜가 모습을 드러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