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4화 상위 헌터를 구하다
어두컴컴한 공간.
연옥계의 심층부는 가뜩이나 마물들이나 살아갈 정도로 거칠고 기괴한 식생을 가진 곳이었다.
다르게 말하면 그런 환경에서도 살아갈 수 있는 마물들이 몰려든 거라 봐도 됐고, 어떻게 보면 마계나 다를 바 없는 환경이 자리 잡고 있다고 봐도 좋았다.
어느 쪽이든 마경이나 마찬가지인 곳이 심층부. 그중에서도 마물의 영역은 특히나 그런 경향이 강했다.
밤이 되니 더욱 살벌한 풍경이 펼쳐졌으니.
“이거 나도 좀 쫄리네.”
“그에에.”
나라고 긴장을 안 할 수가 없었다.
단순 몬스터들만 있으면 이렇게까지 긴장을 하지는 않았겠지만 마물이라는 놈들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과는 결이 달랐으니까.
‘14급 이상만 안 나오면 좋겠다.’
실질적으로 마물들은 고대 몬스터 못지않은 강함을 자랑했다. 14급 정도면 에이션트 몬스터랑 비교해도 절대 꿇리지 않는다.
객관적으로 보면 더 강할 가능성도 있고.
처음 봤을 때는 10급만 돼도 에이션트급이라고 생각했는데 이곳에 오래 있다 보니 그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내가 겪었던 에이션트 몬스터가 정신 공격에 특화되어 있는 놈이라 쉽게 이긴 거지, 다른 사람이었다면 거의 공략 불가능할 정도로 강했으니까.
16급이면 마계의 대공들도 어지간하면 피해 가는 마물.
그 정도 되는 괴물이 여기 있을 거 같지는 않으니 높아 봐야 14급이 최고라고 생각하고 있다.
아니라면 숭배자들이 이곳에 자리를 잡는 건 불가능했을 테니까.
“이곳에 숭배자들이 진짜 자리를 잡았는지도 확실한 건 아니지만.”
어디까지나 가능성이다.
마물의 영역 경계에 있던 비어 있는 야영지.
이곳으로 들어간 보초들.
여러 상황을 고려했을 때 이곳에 놈들이 있을 가능성이 크다고 봤을 뿐이다.
다른 목적이 있거나 이마저도 가짜일 수도 있다는 것.
확실한 게 없는 만큼 직접 확인해 보는 게 가장 좋았다.
“근데 이건 아까부터 왜 이러냐.”
“그에.”
냥펀이 준 GPS 아티팩트를 살폈다.
가짜 본거지 근처에 박았을 때만 해도 제대로 작동하고 있었는데 이곳에 들어오고부터는 영 반응이 없다.
작동되고 있으면 중앙에 박힌 수정구에서 빛이 나와야 하는데 깜빡깜빡하더니 지금은 아예 꺼졌다.
망가진 건가.
특별히 충격이 가지는 않았을 텐데.
어쩌면 마물의 영역에 특수한 뭔가가 있어서 그런 걸지도 모르겠다. 나중에 때 되면 고쳐지겠지.
“궥.”
덕춘이가 내 어깨를 친다.
나도 느꼈다. 앞쪽에 인기척이 느껴지는걸.
빠르게 자세를 낮추는 찰나.
-띠링
커뮤니티 알람이 울렸다.
순간 가슴이 철렁거렸으나 이내 침착함을 되찾았다.
어차피 알림음은 내 귀에만 울리니까. 놈들에게 들릴 리 없다.
지금은 바쁘니 나중에 확인하도록 하고.
은신 스킬을 유지한 채 천천히 앞으로 나아갔다.
‘놈들이군.’
숭배자 순찰자다.
역시나 2명이 한 조를 이루어 움직이던 놈들이 다른 순찰자와 마주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특이 사항을 보고하는 거겠지. 짤막한 대화를 마치고 교대한다.
‘교대 포인트가 여러 개 있군.’
가짜 본거지와 진짜 본거지의 거리가 있다 보니 중간중간 교대 포인트를 만들어 둔 거 같다.
내 옆으로 지나가는 놈들 또한 브론즈 등급.
확실히 이상하다.
마물의 영역에 들어선 지도 제법 됐다. 물론 규모를 생각하면 이곳도 초입에 불과하겠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마물이 너무 없는 거 아닌가.
당장 브론즈 등급 2명이 순찰을 도는 것도 이해가 안 된다.
브론즈 등급이면 11급 마물만 나타나도 쓸려 나갈지 모른다. 11급이 뭐야, 10급만 돼도 사투를 벌일 텐데.
아무래도 이 근처에 있던 마물들을 정리한 거 같다. 그거 아니면 납득하기 힘드니까.
-푹
일단 GPS 아티팩트를 땅에 박아 넣었다.
지금은 작동이 안 되지만 나중에 다시 될지 모르니까.
어디까지 들어가야 할지 모르는 지금 내가 움직인 경로를 남겨 두는 편이 좋았다.
조심스럽고 옆으로 돌아 움직였다.
안으로 들어갈수록 순찰을 도는 놈들이 많아진다.
여기부터는 놈들의 순찰로를 벗어나 이동할 생각.
아무리 은신을 했다고는 하나 놈들 중에 은신을 알아내는 스킬을 가지고 있는 놈들이 있을지도 모른다.
거기다가…….
‘마물을 정리했을 테니 제약도 많이 없지.’
물론 마물들이야 언제 어떤 식으로 나타날지 모른다.
그건 그것대로 나쁘지 않다.
드물게라도 놈들이 돌아다닌다면 놈들이 이곳에 경계 트랩을 설치를 적극적으로 하지 않을 테니까.
마물들 때문에 수시로 경보가 울린다면 그건 그것대로 피곤하지 않겠는가.
좀 더 속도를 내도 좋을 거 같다.
난 그렇게 판단했고.
-파바박!
안쪽 깊숙이 1시간가량 이동했을까.
“허, 이건 또 뭐람.”
사람 한 명을 볼 수 있었다.
외딴곳, 바닥에 엎어져 있는 사람을.
악마도 천사도 아닌 사람, 다르게 말하면…….
“상위 헌터를 여기서 다 만나네.”
79층에 고여 있는 사람 중 한 명이었다.
정신을 잃었는지 꼼짝도 하지 않고 엎어져 있다. 혹시나 함정인가 싶었으나 그건 아닌 거 같고.
슬쩍 발로 밀어 돌려 눕히자 로브에 가려졌던 모습이 드러났다.
창백한 얼굴의 여인. 입에 거품을 물고 있었고 목에서 푸른 핏줄이 올라오고 있었다.
이건…….
“중독인데?”
빠르게 주변을 탐색했다. 쓰러진 사람의 손에 쥐어진 건 고기.
물어뜯은 흔적이 있다. 나름 구워 먹은 거 같기는 하다만.
‘마물 고기잖아. 잘못 먹었군.’
몬스터가 가지고 있는 독성은 굽는 것 정도로는 사라지지 않는다.
독 내성 스킬이 있어도 독성이 줄어들 뿐이지 미량은 남아 계속해서 몸에 도는 게 몬스터의 독성이다.
그렇게 천천히 쌓이다 보면 헌터라 한들 결국에는 중독되어 죽는 거고.
작지만 숨을 쉬는 걸 보니 아직 죽지는 않았다. 놔두면 죽겠지만.
[SS급 권능, 별을 주시하는 눈이 발휘됩니다.]
-츠즈즈즈즈
권능을 통해 정보가 드러난다.
호오.
찬찬히 정보를 살핀 난 눈썹을 올렸다.
일단 숭배자는 아니다. 그리고…….
“한국인이네.”
당장 해외에 나가서 만나도 반가운 게 같은 나라 사람.
악마와 천사, 괴물들이 득실거리는 탑에서 만난 한국인이라고 다를까.
일단 살려 보자. 어차피 정보도 좀 얻어야 한다.
연옥계와 숭배자에 대한 정보도 그렇고 상위 헌터에 대한 것도 그렇고.
마그마 요정이 루키 그룹의 김조균과 연락을 한다고는 했지만 나도 커넥션 하나 정도 만들어 둬서 나쁠 거 없지.
그건 그거고.
“구해 줄 때는 구해 줘도 어느 정도 대비는 해 둬야겠지.”
어떤 사람인지는 알 수 없는 거니까 안전장치는 만들어둘 생각이다.
* * *
“으음?”
미약한 신음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려보니 나무에 꽁꽁 묶인 여인, 김선혜가 정신을 차렸다.
“움직이지 마.”
내 말에 누군가 있다는 걸 눈치챈 녀석이 순간 멈칫했다.
그제야 자신의 상태를 확인한다.
프램버그 산 특수 체인으로 온몸을 묶고, 성물 ‘수호자의 의지’로 주변에 보호막을 쳐 놨다.
딱히 외부에서 들어오려는 적으로부터 지키기 위해서 그런 건 아니고.
“잘못 움직이면 터질 거야.”
그녀를 포함해 보호막 내부를 시한폭탄으로 가득 채워 놨다.
몇 개를 설치했더라. 100개까지 세다가 귀찮아서 관뒀다.
마력을 움직이자 폭발 마법진이 살벌한 붉은빛을 띤다. 보호막 내부가 빨갛게 물들 정도로.
저거 다 터지면 나도 아플 거 같아서 충격을 줄이려고 보호막을 쳐 둔 거였다.
물론 잘못 움직이면 터진다는 건 거짓말이었지만. 시한폭탄은 내가 신호를 줘야 터진다.
일부러 강하게 나가 봤다. 중독 상태에 빠지기는 했지만 상대는 상위 헌터.
어떤 사람인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는 상태에서 무작정 호의적으로 나갈 수는 없었다.
“…이게 뭐 하는 거죠?”
“살려 주고 있는데?”
“네?”
뭔 개소리냐는 표정으로 날 바라본다.
음, 살려 주고 있는 게 맞긴 하다. 상황이 좀 그럴 뿐이지.
“몬스터 고기 먹었지? 왜 먹었어. 당장 주린 배를 채울 수 있을지 몰라도 끝이 안 좋다는 건 알고 있을 텐데.”
“사람이 계속 굶으면 죽는다는 것도 알 텐데요?”
그것도 맞지.
다르게 말하면.
“몬스터를 먹을 정도로 궁지에 몰렸다는 거군. 다른 상위 헌터들도 그런가?”
“처음 보는 얼굴이네요. 새로 들어왔나 보죠?”
“어, 신입이야. 반갑지?”
보호막 근처로 다가가 싱긋 웃었다.
“심지어 같은 한국 사람이잖아. 아, 그렇게 반갑지는 않을 수도 있겠다. 안에 걔도 있을 거 아니야. 루키 그룹, 김조균.”
난 너희에 대해 알고 있다. 내부적인 것까지도.
대충 그런 뉘앙스를 풍겼고.
“당신 누구야?”
그녀의 경계심이 올라갔다.
좋다. 그러라고 하는 말이었으니까.
처음 보는 사이. 80층을 목전에 두고 있는 만큼 조심해야 한다.
심지어 숭배자들과의 전쟁을 앞두고 있는 상황이라면.
친밀함을 만드는 것도 좋지만 신뢰를 쌓기에는 시간이 촉박하다.
그렇다면 차라리 적당한 경계와 긴장감을 가진 관계가 좋겠지.
멤버들이나 새롭게 합류한 마그마 요정까지는 그렇다 치더라도 상위 헌터는 또 다르니까.
‘우리보다 79층에 고인 상위 헌터들과 더 오랜 시간을 보냈잖아.’
문제가 터졌을 경우 우리가 아닌 그들의 편을 들 가능성이 컸다.
뭐, 혼자 이곳에 떨어져 있는 걸 봐서는 아닌 거 같기도 했지만.
좋다. 긴장감은 이 정도면 충분하니 이제는 우호적인 부분을 보여 줘야 할 때.
“미리 말하지만 난 그리 수상한 사람이 아니야.”
“…지랄. 네 꼴을 보고도 그런 말이 나와?”
슥슥, 내 위아래를 살핀 녀석이 중얼거린다.
아, 갑옷 안 벗고 있었지.
“흠흠. 겉모습으로 사람을 판단하는 건 좋지 못한 습관.”
“네가 정신 차리고 묶여 있었어도 그런 말이 나올 거 같아?”
“오, 좋은 지적이야. 묶여 있는데 그렇게 공격적으로 나와도 돼?”
성깔 있네.
하지만 괜찮다. 난 이미 핥짝이의 폭언에도 꿋꿋하게 살아온 몸!
이 정도 나불거림은 아무렇지도 않다.
그래도 괘씸하니.
-찰랑
“뭐, 뭐야!”
“뭐긴 뭐야. 해독해야지. 몸에 활력을 돋는 생명수에 인챈트로 내 소화 스킬과 독 내성 스킬을 넣은 특제 물약이지. 이거 덕분에 아직 살아 있는 거라고.”
보호막 안으로 들어가 강제로 입을 열고 부었다.
“좋은 약은 입에 쓴 법. 감수하고 먹도록.”
“뭔 개소, 으읍! 욱!”
특별히 맛없어 포션을 섞은 생명수를.
감탄이 절로 나오는 맛에 발버둥 쳐 봤자 이미 포박된 상태.
생각보다 입맛에 맞는지 눈물을 주르륵 흘린다. 아님 말고.
아무튼.
“어때? 꽤 괜찮지?”
“괜찮긴 뭐가 괜찮아, 또라이 같… 엇?”
욕설을 뱉으려던 김선혜가 입을 다문다.
느끼고 있을 거다. 몸에 쌓인 독 기운이 조금씩 밀려나는 것이.
어디까지나 임시방편에 불가하다. 여전히 내부에 독 기운은 남아 있었고 그동안 누적된 양이 적지는 않았으니까.
“나 없으면 다시 중독될걸. 죽어도 진짜 죽는 게 아니라 탑 밖으로 나갈 뿐이지만. 코인이 있다면 70층으로 돌아갈 거고. 뭐, 지금까지 버틴 걸 보면 남은 코인이 없다는 거겠지.”
완치할 방법이 있기는 하다.
덕춘이가 가지고 있는 고유 능력, 폭식을 사용하면 내부에 남아 있는 독을 빨아먹는 게 가능하다.
어디까지나 덕춘이가 협조해 준다면이지만. 부탁하면 해 주기는 할 거다.
당장 해 줄 생각은 없지만.
왜냐…….
“그런데 아깝지 않겠어? 기껏 버텼는데. 자자. 다시 한번 몸에 집중해 봐. 독 기운만 줄어들었을까? 신성력이 좀 늘어난 거 같지 않아? 보니까 신성력이 있더라고. 천족 진영이라는 거겠지.”
적어도 79층을 클리어하기 전까지는 도움을 받아야 해서.
“어, 어떻게?”
몸 상태를 확인한 김선혜가 놀란다.
“신성력이 부족해서 아직까지 이곳에 있는 거잖아. 내가 좀 도와줄 수 있을 거 같은데.”
빙글 빈 포션병을 돌렸다.
꿀꺽. 침을 삼킨 녀석이 날 올려본다.
생명수는 기본적으로 신성력을 기반으로 해서 만든 포션.
성스럽고 성스러운 성자인 내가 직접 제조했으니 효과는 발군이다.
목숨을 위해서도 신성력을 위해서라도 나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말.
씨익, 입꼬리를 올렸다.
“어때. 이제 좀 건설적인 이야기를 할 기분이 들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