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7화 마기가 쭉쭉 오른다
나와 탈모맨의 연계. 그동안 탑을 오르며 함께 협공한 적도 많았고 서로의 성향도 잘 알고 있다.
사용하는 스킬과 전투 스타일 또한 익숙하니 공방의 교체는 물 흐르듯 자연스러웠고.
“크으으으읍!”
아무리 그리가가 발버둥 친다 하더라도 이겨 낼 수 없었다.
느껴본바 놈은 나보다 강하다. 객관적인 수치만 봤을 때는.
그렇다고 결코 꺾을 수 없는 수준이냐.
‘그건 아니지.’
상황만 주어진다면 아스트랄 레인보우와 안개 질주, 구사일생을 이용해 이길 수도 있을 거 같다. 무조건 이긴다는 보장은 없지만.
한 가지 대단한 게 있다면.
-치이이이이익
놈이 가지고 있는 내구도.
수없이 많은 공격을 허용했음에도 쓰러지지 않고 있다.
듀발이 말했었나, 끈질긴 놈이라고.
단순히 성격만 그러한 것이 아니라 그리가라는 악마 자체가 그런 존재였다.
집요하며 포기하지 않는 탐욕의 악마.
“비틀린 크리쳐를 보는 거 같기도 하고.”
“몸뚱이 하난 엄청 튼튼하네.”
히든 가든에서 마주했던 크리쳐랑 싸울 때도 이런 기분은 아니었던 거 같은데.
방어 능력에 회복력, 쓰러져도 다시 일어나는 끈기.
-꾸르르륵
뭔가가 녹아 없어지는 소리와 함께 비틀거리던 그리가가 다시 몸을 세웠다.
두꺼비처럼 옆으로 퍼져 있던 체형이 다시금 줄어들었다.
살이 빠졌다고 해야 하나.
놈의 권능인지 뭔지 부상을 당하면 체내 성분을 분해해 회복한다.
지금에 와서는 날렵하게 빠진 체형까지 다다랐다.
동시에.
-슈아아아아!
“흡!”
속도가 빨라졌다.
무게가 줄어든 만큼 육중한 맛은 덜했지만 그딴 소소한 부분은 의미 없을 정도의 쾌속한 움직임.
속도에 비례해 공격 또한 매서웠으니…….
“이렇게까지 몰린 건 정말 오랜만이군!”
“공공아이! 계속 잡아 두기 힘들어!”
탈모맨이 놈의 퇴로를 차단하는 것 역시 버거워졌다.
잠시 묶어 두는 듯하면 어느새 다른 쪽으로 빠져나가거나 나한테 덤벼들었으니까.
지금처럼.
-콰앙!
놈이 내지른 폴암을 검으로 쳐 냈다.
손목이 욱신거린다. 어째 점점 세지는 거 같다. 사실 이쪽이 본래의 힘에 가까운 건가.
“눈치챈 모양이군. 지금이 내 최고 컨디션이야!”
“다이어트가 효과가 좋네!”
연달아 폴암을 휘두르는 녀석.
찌르는 척 창대를 비틀어 옆구리를 노리고, 곧장 무기를 회수했다가 예상치 못한 각도로 베어 낸다.
기묘한 스텝으로 사이드로 빠지며 발목과 종아리를 노리는 변칙 공격.
게다가.
[인력구引力球(S) Lv.10]
-꽈드드드득
마력으로 이루어진 구체가 나를 끌어당긴다.
몸 전체. 혹은 신체 일부만 국소적으로 영향을 미쳐 움직임을 방해하거나 차단한다.
단순히 육체뿐이냐.
[파이어 밤(S) Lv.10]
-콰아아아앙!
내가 사용하는 스킬에도 영향을 줬다.
파이어 밤이 인력구의 끌어당김으로 인해 엉뚱한 곳으로 사출됐다.
폭발 범위에서 벗어난 그리가가 폴암을 크게 휘두른다.
[쪼개기(S) Lv.MAX]
“이런!”
[중력 팔찌(C)]
[디그(AA) Lv.2]
MAX 레벨의 스킬!
반사적으로 무게를 늘리며 땅을 파내었다.
급격히 늘어난 무게에 몸을 맡겨 주저앉듯이 구덩이에 떨어졌고.
-쿠과과과과광!
일대가 폭발하며 파편이 솟구쳤다.
거대한 크레이터가 만들어지고, 압력에 밀린 땅이 삐죽 대가리를 올렸다.
그 중앙에 있는 건 나.
“80층에 오른 놈이었잖아, 제기랄.”
“난 탑에 오른 적이 없어!”
“그렇게 말하겠지!”
NPC가 되면서 기억을 잃었을 테니까.
어쩐지 세더라니. 80층대에 올랐던 건가.
다른 스킬은 MAX 레벨이 없는 것으로 봐서 80층에 오르자마자 나왔거나 81층쯤에서 나온 게 아닐까 싶다.
혹은 NPC가 되면서 스킬의 제약이 생긴 걸 수도 있고.
어디까지나 이곳은 탑의 의지로 인위적으로 재현한 가짜 세계에 불과하다.
진짜 그때의 연옥계를 가져온 게 아니라는 뜻.
-타악!
삐걱거리는 몸을 튕겨 뒤로 빠져나왔다.
과연 70층대 후반이라 이건지 괴물 같은 놈을 준비해 뒀다.
‘70층대와 80층대에는 좁힐 수 없는 격차가 있어.’
현자도 말하지 않았던가. 70층은 상위층의 기준이 되는 곳이고, 80층은 진정한 초인의 기준이 되는 곳이라고.
스킬과 권능의 한계를 올릴 수 있는 곳. 최소 모든 스텟이 999점을 찍은 괴물들만 올라갈 수 있는 곳.
단순 피지컬만 따지면 나보다 강한 탈모맨이 놈에게 밀린 것도 이제야 이해가 됐다.
그래도 괜찮다. 놈이 몰린 건 확실했고 특수한 능력을 통해 회복했다고는 하나 대미지가 쌓인 상태.
겉으로 보기에는 멀쩡할지 모르겠지만 놈은 지쳐 있다. 조금씩이지만 움직임이 느려지고 있는 것이 그것을 증명했고.
“덕춘아!”
“그에에엑!”
나와 탈모맨이 놈을 압박하는 동안 기회를 엿보고 있던 덕춘이가 폴짝 뛰어 놈에게 달라붙었다.
“이건 또 뭔!”
“뭐긴 뭐야, 킹갓 영물님이지.”
등에 달라붙은 덕춘이를 떼어내기 위해 팔을 휘저었지만 그 정도에 떨어져 나갈 덕춘이가 아니다.
“크아, 퉤!”
“으헉? 으아아아아!”
산성과 독이 섞여 있는 침에 놈의 피부가 녹아내린다.
치명상은 아닐지 몰라도 통증만큼은 어마어마할 터.
거듭된 회복으로 방호력이 내려간 만큼 놈의 단단한 피부도 물러졌을 거다.
독으로 지속적인 대미지를 입는 동시에 통증으로 놈의 신경이 분산된 상황.
“끝낼 때가 됐군.”
부러질 거 같은 몸을 이끌며 놈에게 달렸다.
쓸 수 있는 수를 전부 썼다면 좀 더 일찍 끝낼 수 있었을 텐데, 저 멀리 있을 메피스토를 생각하면 또 그럴 수는 없고.
이미 저쪽은 상황이 끝났는지 소음이 잦아들었다.
높은 확률로 이쪽으로 찾아올 가능성이 크다는 말.
핥짝이와 냥펀이라면 다행이지만 메피스토나 다른 세력이 찾아온다면 그리 좋지는 않을 거다.
강한 일격. 놈을 무너트릴 수 있는 한 방이 필요했고 나 역시 숨겨둔 패 하나는 써야 한다는 결론이 나왔다.
-콰아아아아앙!
-콰르르르릉!
파이어 밤과 일렉트릭 쇼크.
놈이 움직이는 경로로 오로라 빔.
“어딜!”
적극적인 공세에 놈의 손이 바빠진다.
그동안 보여 준 전투 양상을 바꾸었다.
지금까지 탈모맨이 놈을 잡아 두는 사이에 내가 공격을 가했다면 이번에는 내가 달라붙는 것으로.
신기에 가까운 실력으로 위험한 일격을 파훼한 녀석이 지척까지 다가온 내게 손을 내뻗는다.
[인력구(S) Lv.10]
-구구구구구!
강력한 인력이 나를 잡아당긴다.
어디로 움직여도 끌려갈 정도의 강한 힘.
놈 또한 둘 중 하나를 잡아야 전투가 끝날 거라는 걸 알고 있는 거다. 그러니 위험을 감수하고도 날 처리하려는 거고.
그리가가 등 뒤를 탈모맨한테 내준다. 그리고…….
[쪼개기(S) Lv.MAX]
쪼갠다.
수직으로 내려꽂히는 폴암.
인력에 의해 피할 곳은 없다.
안개 질주를 사용할까도 싶었으나 그건 해결책이 아니다.
내가 원하는 건 마무리였으니까.
[데몬 스피어(S) Lv.10]
-콰드드드드득!
놈의 공격에 어둠의 창을 정면으로 내질렀다.
같은 등급이라도 레벨의 격차는 확실했고, 오래지 않아 데몬 스피어가 사라졌지만 그걸로 족한다.
쪼개기의 위력을 약간이라도 줄일 수 있으면 됐으니까.
다리에 힘을 더해 속도를 높여 최대한 놈에게 붙었고.
[강철의 의지(S) Lv.10]
[강체强體(S) Lv.10]
[물리 공격 내성(S) Lv.10]
[어둠 내성(AAA) Lv.8]
사용할 수 있는 보호 스킬을 모두 발휘한 채 몸으로 공격을 받아 냈다.
-콰가가가가가가각!
왼쪽 어깨로 들어오는 일격.
보호 스킬이 깨지고 갑옷이 우그러든다.
내부까지 침투한 충격에 피가 울컥 올라오고 어깨부터 척추까지 비틀려 당장이라도 부러질 거 같다.
신경이 날뛰어 온몸의 핏줄이 누전된 전선처럼 튀겨지는 기분이었으나.
“탈모매애애앤! 같이 뚫어!”
온몸이 두 동강 나기 전에 놈을 끌어안는 데 성공했고.
“지, 진짜 뚫는다? 으아아아! 이블아이의 복수다아아!”
나의 외침을 들은 탈모맨이 전력으로 놈의 등을 향해 주먹을 내질렀다.
-빠그그극!
한 번의 일격.
그 안에 들어 있는 권능과 칭호, 수많은 스킬들을 확인할 틈도 없이 화끈한 통증이 복부에서 느껴졌다.
이미 그리가의 쪼개기를 맞아 엉망진창이었던 몸 상태로는 받아 낼 수 없는 일격.
애초에 그럴 생각이 없었다.
“이건, 몰랐군.”
나와 사이좋게 배가 뚫려 버린 그리가가 떠듬거리며 말을 잇더니 옆으로 쓰러진다.
나도 마찬가지. 더럽게 아팠지만 상관없다.
[구사일생(S) Lv.10]
적어도 한 번은 무조건 버티니까.
통째로 날아갔던 척추가 다시 자라나고, 망가진 뼈와 근육이 제자리를 되찾는다.
바닥에 쏟아진 피를 대신해 새로운 피가 온몸을 누비며 활력이 돌아온다.
완전히 회복한 건 아니기에 컨디션은 좋지 않았으나 이 정도면 나름 싸게 먹힌 거지.
[탐욕의 악마, 그리가를 상대로 승리했습니다!]
[마기 일부를 흡수합니다!]
-우우우우우웅!
그리가로부터 흘러나온 마기가 나와 탈모맨에게 흡수됐다.
지금까지 싸웠던 어떤 악마보다 짙은 마력이 몸에 깃든다.
“확실히 보통 놈은 아니었네.”
700대에 머물고 있던 마기 스텟이 단번에 800대로 넘어갔다.
이 정도면 상위 악마와 비견되는 수치가 아닐까.
전신에서 느껴지는 막강한 힘에 정신이 팔렸던 것도 잠시.
“쿨럭!”
“야야야! 얘 눕혀! 죽으면 안 돼!”
탈모맨과 함께 그리가를 바르게 눕혔다.
원체 끈질긴 놈이라 그런지 명도 길다. 다행인 일이었다. 비록 싸우기는 했으나 앞으로의 일을 위해서라도 죽으면 곤란해서.
“그에에.”
탈모맨이 마기를 운용해 흐트러지는 놈의 마기를 다잡아주고, 덕춘이가 핥아 상처를 회복시킨다.
나 역시 회복 포션을 들이붓다시피 그리가의 상처에 뿌렸다.
마음 같아서는 생명수도 쓰고 싶은데 악마 특성상 그건 안 될 거 같아서 다른 걸 사용했다.
백터의 경우를 떠올려 만든 새로운 포션.
[타락한 정수]
-마기에 오염된 신성한 성수.
-상처에 뿌리면 경상도 치명상!
-천사에게는 극독!
-하지만 악마한테는 훌륭한 영양제의자 회복 포션입니다.
악마 전용 포션이라 보면 된다.
다른 종족에게 쓰면 독극물로도 쓸 수 있고.
그냥 만든 게 아니다. 히든 가든에서 얻은 약초와 희귀 재료, 영약 등의 레시피를 토대로 만든 거지.
다양하게 조합한 포션의 시너지가 발휘된 덕일까 눈에 띄게 상처가 낫는다.
그리가가 쓰러진 시점에서 전투는 종료.
치고받던 악마들이 무기를 내리고 그리가에게 집중했고.
“커헉! 쿨럭! 아. 죽을 거 같군.”
그리가가 정신을 차렸다.
“오오오오! 그리가 님이 살아났다!”
“이블아이, 잔혹하고 야비하고 쓰레기인 줄 알았는데 자비로움이 있구나!”
“승패가 명확한 시점 정도를 아는 게 중요하지. 내가 인정하마!”
그리가의 생존에 환호하는 그리가의 악마들.
내가 이래서 이놈을 안 죽였다. 그리가의 무리는 서로에 대해 집착이 심하다. 그리가가 죽었으니 내 밑으로 들어오라 한들 반발할 게 뻔히 보여서.
차라리 살려 두고 같이 흡수하거나 우호 관계를 맺는 게 편하다.
가뜩이나 체력이 소모돼서 남은 놈들이랑 싸우기도 힘들다.
‘굳이 죽이고 싶지도 않고. 살아 있으면 전력이 되잖아.’
싸워 보니 그리 나쁜 놈 같지는 않아서.
아직 세 번째 챕터가 남아 있는 만큼 내 편이 되어 줄 강자가 있는 편이 좋았다.
어느 정도 전력이 맞아야 이후 천족 진영과 평화 협정을 맺을 때도 유리하고.
한쪽이 명백하게 약하면 다른 한쪽이 딴생각을 품을 가능성이 크니까.
“이거 고맙군. 점점 마음에 들어.”
손을 내밀자 그리가가 맞잡고 자리에서 일어선다.
내상이 심할 텐데 내색 한번 안 한다. 애가 튼튼하긴 해.
“패배를 인정하지. 진 마당에 나와 함께하자 할 수는 없는 노릇이고. 어쩔 수 없지. 함께하고 싶으면 내가 들어가는 수밖에.”
순순히 패배를 인정한 녀석이 자신의 무리를 돌아봤고.
“너희는 너희의 판단에 맡기마. 나와 함께 들어갈 이들은 들어가고 아닌 자들은 이블아이와 탈모맨의 자비를 바라거라.”
“저희도 함께 들어가겠습니다!”
“이미 함께한 몸 같이 가야죠.”
“미스터 그린이나 이블아이도 마음에 듭니다!”
[그리가의 세력이 흡수됩니다.]
[마기 일부를 흡수합니다.]
별 탈 없이 세력을 흡수할 수 있게 되었다.
그의 무리로부터 빠져나온 마기가 또다시 마기 스텟을 올려 줬다.
흡족한 마음에 절로 입꼬리가 올라가는 타이밍.
“도와, 주시오. 그리, 가.”
수풀 너머에서 다 죽어 가는 악마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