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탑에 갇혀 고인물-415화 (414/740)

415화 격돌과 격돌

그리가. 심층부에 들어온 만큼 마주치게 될 줄은 알았지만 이렇게 만날지는 몰랐다.

메피스토와 함께 가장 큰 세력을 일군 악마. 누군가는 연옥에서 가장 강한 악마 중 하나라고 말했지만 생각해 보면 그렇게 자유로운 위치는 아니었다.

‘메피스토가 있는 이상 마음대로 움직이기 부담스럽지.’

서로 견제하다 기회가 있다면 얼마든지 공격할 테니까.

게다가 본인들의 세력권 내에서라면 모를까 심층부 곳곳을 휘젓고 다닐 수는 없다.

다른 중립 세력과 탈모맨, 천족의 잔당과 탑 숭배자들이 심층부에 머무를 수 있는 이유.

“아무래도 두 악마가 손을 잡았다는 게 맞나 보네.”

“그렇다니까. 하하하하! 난 항상 진실만 말하지!”

“좋아할 때냐.”

땅굴 위로 보이는 놈을 바라봤다.

피를 칠한 듯이 붉은 피부에 아귀처럼 찢어진 입.

사람보다는 두꺼비나 메기와 더 닮은 얼굴. 악마 종류가 많다 보니 수인이나 다른 무언가와 섞인 듯한 놈들도 흔히 보였다.

“드디어 찾았다. 너희를 만나기 위해 심층부 곳곳을 뒤졌지!”

그리가가 소리친다.

환희에 물든 얼굴. 순순한 탐욕이 가득하다.

겉보기에는 만만해 보일지 몰랐으나 느껴지는 존재감은 남달랐다.

이곳에서 만난 그 어떤 악마보다도 짙은 마기. 말 한 마디, 손동작 한 번으로 바뀌는 분위기.

누군가는 말했다.

그리가는 머지않아 대공의 반열에 오를 것이며 어쩌면 이미 그 수준에 올랐을지 모른다고.

부풀려진 이야기라 생각할 수도 있었지만…….

‘이미 마계에서 자신의 영역을 구축한 메피스토랑 대등하게 싸우는 것만 봐도 신뢰도가 올라가지.’

메피스토 본인이 대공이라 칭하지는 않았지만, 악마들과 대공들이 우글거리는 곳에서 한 지역의 우두머리였다는 건 대공급에 다다랐다는 뜻.

물론 마계에서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지 못할 거 같아 연옥으로 들어온 놈인 만큼 대공급이라 해도 하위권에 머물게 분명했으나 위험한 건 맞았다.

“흐흐흐흐. 내가 찾던 이들이 한자리에 모였구나! 이런, 이번에 도망쳤던 듀발도 있었군.”

“저 짜증 나는 얼굴을 다시 보게 될 줄 몰랐소.”

얼굴을 구기는 듀발.

뭐, 그건 그렇다 치고.

“일단 올라갈까? 이미 위치가 들켰으니 도망가 봤자 의미 없을 거 같은데.”

난 위를 가리켰다.

그리가는 아직 공격적으로 나오고 있지 않다.

아니, 조금은 우호적인 느낌이 들 정도. 사실상은 놈의 욕심 때문에 그러는 거겠지만 최악의 상황은 아니다.

무엇보다…….

‘그리가 급의 마기는 느껴지질 않아.’

탈모맨은 예외. 같은 편이니까.

내가 찾고 있는 건 하나. 메피스토의 기운.

그리가가 여기까지 찾아올 수 있었던 것은 메피스토와 임시 평화 협정을 맺었기 때문.

그렇다면 근처에도 메피스토가 있어야 정상인데 느껴지는 게 없다.

놈의 전령이라 불리는 킨, 틴, 핀 삼 형제도 보이지 않고.

서로 얼굴을 살핀 무지개단과 탈모맨이 이끄는 통칭 그린파가 위로 뛰어올랐다.

몇십 미터의 깊이였으나 이곳에서 이 정도도 못 올라오는 이는 없었다.

도망치지 않고 올라오는 것이 마음에 들었는지 그리가와 그의 수하들도 거리를 벌린다.

-쿠르르르릉

바닥을 굴려 구덩이를 메꾸었다.

언제 전투가 벌어질지 모르는 상황, 구덩이가 파여 있으면 귀찮으니까.

‘대략 40명.’

그리가를 따라 움직인 악마들의 숫자다.

생김새는 제각각이었으나 풍기는 느낌은 비슷하다.

욕심 그득한 얼굴에 집요함이 느껴지는 눈빛.

인원만 보면 크게 차이 나지 않는다. 오히려 우리가 조금 더 많은 수준.

듀발과 탈모맨의 무리가 합쳐져서 50명 좀 안 됐으니까.

그리가의 무리가 우리를 감싸고 있는 형태. 우리 또한 원형진을 구축했고, 대표 격인 나와 탈모맨이 앞으로 나섰다.

놈도 마찬가지. 2미터 정도의 키였으나 옆으로 퍼져 있는 신체 구조라 더 커 보인다.

녀석이 물갈퀴가 달린 손을 비비며 우리를 훑어본다.

세로로 찢어진 눈동자에서 사이한 기운이 흘러나온다. 스킬은 아닌 거 같고 종족 특성인 거 같은데, 별다른 효과는 없는 거 같고 꺼림칙한 정도다.

뭐랄까, 눈초리가 싸가지 없달까.

“으으, 으으으.”

“심장 멎는 줄 알았네.”

“정신 똑바로 안 차리면 기절하겠다.”

반응을 보아하니 다른 악마들은 아닌 거 같다만.

뱀 앞에 선 쥐처럼 몸이 굳거나 식은땀을 흘리는 놈들이 몇 명 있다.

내색하지 않지만 후렌과 루나르 역시 무기를 움켜잡는 것이 보였다.

“역시! 내 눈은 틀리지 않았어. 눈만 마주쳐도 벌벌 떠는 애송이들에는 관심 없거든!”

“저런, 나도 너한테 별로 관심이 없는데.”

갑작스럽게 놈을 만나 짜증이 났지만 좋게 생각하기로 했다.

늦든 빠르든 결국에는 마주했어야 하는 게 그리가다.

차라리 탈모맨과 합류한 지금 꺾는 편이 나을 수 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메피스토도 안 보이고. 혼자였다면 또 모르겠지만 탈모맨이 있는 이상 우리가 승리할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

탈모맨 역시 같은 생각인지 몸을 푼다.

놈의 부하들은 무지개단이랑 그린파한테 맡기면 되겠지.

우리의 반응을 본 그리가가 손가락을 흔든다.

“둘이 덤비려는 것이냐.”

“어, 정정당당하게.”

악마식으로는 이게 정정당당한 게 맞다.

“그럴 수는 없지! 내가 왜 메피스토를 무시하고 이곳에 왔는데!”

메피스토를 무시했다? 단독으로 움직였다는 뜻인가.

이거 상황이 점점 마음에 든다.

“놈은 말했지. 너희 둘이 합쳐지면 예상할 수 없는 괴물이 만들어질 거라고. 흐흐흐. 어리석은 놈. 그것만큼 멋진 일이 어디 있을까!”

뭔 소리야. 내가 탈모맨이랑 어떻게 합체를 해.

변신 로봇은 초등학생 때도 안 건드렸다.

잠깐만, 그러고 보니 이놈들도 무지개의 완성이니 뭐니 헛소리를 했던 거 같은데.

“난 메피스토와 다르다. 녀석은 겁쟁이일 뿐이야. 새로운 힘의 등장을 견제하는 늙은이. 새로운 세상에는 새로운 힘이 필요한 법이지.”

놈이 손을 내민다.

“본래의 힘을 되찾아라! 완전체가 되어 나와 함께하자! 어서!”

“하이고.”

이마를 짚었다.

뭔가 단단히 오해하고 있는 거 같다.

대체 어디서부터 꼬인 건지는 모르겠지만.

“제발 다 꺼져 주라, 좀!”

이런 생산성 없고 말 같지도 않은 대화에 어울려 줄 생각은 없었다.

무지개의 초록? 완성체가 되기 위한 과정?

악마 놈들 정신 나간 건 알고 있었지만 그것도 정도가 있는 법이었다.

-콰앙!

발을 박찼다.

놈들이 어떤 오해를 했든 난 내 할 일을 한다.

마계 진영을 집어삼키는 것. 핥짝이와 냥펀과 합류해 평화 협정을 맺는 것.

계획은 정해져 있고 놈은 그러기 위해 거쳐 가야 할 장애물 중 하나일 뿐이다.

“메피스토가 없을 때가 기회야. 지금 정리하고 가자.”

“좋지! 안 그래도 스토커 녀석 언제 손봐 줄까 고민하고 있었다고.”

탈모맨 역시 놈에 대해 좋은 감정은 없는 거 같다. 녀석을 따르는 그린파 악마들도 마찬가지.

기본적으로 독립적으로 활동하는 걸 좋아하는 이들이었고, 집요하게 따라붙는 그리가는 눈엣가시였으니까.

내가 이끄는 무지개단은…….

“이블아이 님은 못 준다!”

“그리가를 잡고 연옥계의 왕관을 차지하자고!”

“까짓것 그리가만 먹으면 메피스토는 상대하기 쉽지!”

애초부터 나와 함께 연옥계의 정상에 서려는 놈들이다.

내 판단에 의심 없이 움직이는 놈들.

“나 듀발 또한 그때의 치욕을 갚겠소.”

“우리고 가만히 있을 수는 없지! 가자!”

“지금 정리해야 앞으로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을 게야.”

듀발을 비롯한 그린파의 악마들도 놈들에게 달려들었다.

인원은 비등한 상황. 메피스토의 눈을 피하기 위해 전력의 일부만 데리고 온 그리가. 그리가의 단독 행동을 모르는 메피스토.

의도치는 않았으나 절호의 기회임을 부정할 수 없다.

동시에.

“가능한 빠르게 끝내야 돼. 소란이 일면 메피스토가 참전할 거야.”

“인정. 끝낼 수 있을 때 확실히 끝내야지. 으하하하! 덤벼라, 넓적 얼굴아!”

다른 변수가 끼어들기 전에 속전속결로 해결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앞을 막아서는 악마들을 쳐 내며 그리가를 향해 달려가는 상황, 놈이 웃음을 흘렸다.

“그래. 아직 완전체로 돌아가기에는 자극이 없다 이거겠지. 일종의 시험이군. 흐흐흐흐.”

쿵!

놈이 쥐고 있던 폴암을 땅에 찍었다.

가시가 삐죽 튀어나온 개조 무기. 가뜩이나 험상궂은 놈이 무기까지 험악하니 과연 악마다웠다.

“와라! 탐욕의 악마 그리가가 너희의 시험에 응해 주겠다!”

그 말을 끝으로 놈의 기세가 달라졌다.

폭주하듯 뿜어져 나오는 마기. 실체를 갖고 몸을 찔러 들어오는 마기에 공기 가득 미세한 바늘이 흩뿌려진 착각이 들었다.

번뜩. 고개를 숙였던 놈이 안광을 번뜩이며 폴암을 휘둘렀다.

“부디 죽지 마라.”

-콰아아아아아아앙!

* * *

폭음.

온갖 괴물이 사는 곳답게 심층부에서 폭음이 들리는 건 그리 대단한 일이 아니었다.

괴물의 울부짖음. 땅이 무너지는 소리. 갑작스럽게 증발하는 숲. 심층부에서는 일상이었으니까.

평소였다면 눈길조차 주지 않았겠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랐다.

-쿠구구구구구궁!

멀리서 들려오는 굉음과 땅울림.

그것만으로도 꽤 격렬한 전투가 벌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현재 이곳에서 저 정도의 전투를 벌일 수 있는 건 그리가뿐이고.

-콰가가가가각!

자신을 향해 찔러 들어오는 창을 걷어 낸 메피스토가 얼굴을 구겼다.

미스터 그린, 탈모맨과 새롭게 심층부로 진입한 이블아이를 잡기 위해 영역을 벗어난 것이 문제였다.

임시로 협력 관계를 구축하기는 했으나 그리가와 메피스토는 경쟁 상대.

만약의 상황을 대비해 본진을 비우지 않고 병력 일부만 데리고 수색에 나섰다.

비교적 전력이 약해진 상황이라 볼 수 있었으며, 수색이 목적인 만큼 하나로 뭉쳐 돌아다니지 않고 팀을 나누기까지 했다.

그때를 노리고 들어온 놈들이 있었으니.

“더러운 천족을 이렇게 만날 줄은 몰랐군.”

“난 만날 날만 기대하고 있었는데, 메피스토.”

심층부 안으로 들어와 있는 천족의 잔당들.

한동안 잠잠하기는 했다. 영역 밖으로 나온 적이 없으니 마주칠 일도 없었다.

그저 이따금씩 심층부 깊은 곳까지 들어갔던 부하 중에 천사에게 당한 놈이 있다는 소식을 들었을 뿐.

‘이거 너무 얕봤어.’

그래서 천사들을 무시하고 있던 걸지도 모른다. 위험 목록에서 후순위로 두었던 것이 실책.

사실상 숨어 사는 놈들이라 생각해 얕잡아 본 걸지도 몰랐다.

그리가와 달리 메피스토는 천마대전에 참전한 악마가 아니었다. 이후 거의 모든 것이 정리되었을 때야 연옥계로 출발한 후발주자.

그전까지는 마계에서 자신의 영역을 지키는 것만 해도 바빴다. 그마저도 더 이상의 확장이 불가능하다 판단되어 연옥계로 넘어왔지만.

천사와의 전투 경험이 비교적 부족한 것이 사실. 심층부에 들어오며 잔당을 몇 번 상대한 것이 전부였다.

“아주 작정하고 왔군. 내부에 배신자가 있었나. 잘도 타이밍 좋게 덤벼 왔어.”

“신념이 있는 자는 기회를 노리는 법이지. 때가 되었다고 판단했을 뿐이다.”

“재밌는 소리야. 쥐새끼처럼 숨어서 눈알만 굴렸겠지.”

여유롭게 대화를 하면서도 메피스토는 주변을 확인했다.

기습적으로 덤벼 온 천족이 30명가량. 함께 움직이던 악마 열댓 명이 당했다.

다른 수색대도 공격받았을 가능성이 컸고, 폭음을 들었을 때 그리가 또한 천족의 공격을 받고 있을 게 뻔했다.

어떤 식으로든 좋다고 볼 수 없는 상황. 메피스토가 눈썹을 모았다.

‘제대로 걸렸군. 게다가 내가 알고 있던 것보다 규모가 커. 하나로 뭉친 건가.’

기본적으로 게릴라전으로 펼치던 것이 천족이였건만.

후우. 메피스토가 작게 숨을 내쉬었다.

뭐가 됐든 기습을 받았고 병력 일부가 당했다. 본진에 있는 병력을 데려올 상황도 아니다.

발버둥 쳐야 한다면 친다. 그게 그의 방식이었고.

“킨, 틴, 핀.”

“네! 메피스토 님!”

“결합을 허가한다.”

“알겠습니다!”

“오오오! 합체!”

“기대를 저버리지 않겠습니다!”

평소라면 절대 합체시키지 않는 킨, 틴, 핀 삼 형제의 결합을 허용했다.

“난장판이 되겠군.”

메피스토가 작게 혀를 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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