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0화 심층부
[78층에 진입합니다.]
-우우우우우웅
빛과 함께 78층에 떨어졌다. 두 번째 챕터가 시작됐다는 뜻이었고, 가장 먼저 주변부터 확인했다.
뭐가 됐든 내가 있는 곳은 악마와 천사가 있는 곳이었으며 난 그들과 경쟁하는 처지였으니까.
“오오오오! 이블아이 님, 볼일은 다 보셨습니까?”
“시원하게 일 보셨군요. 축하드립니다!”
“뭘 또 부끄럽게 멀찍이 갔다 오십니까. 다 까고 다녀도 저희는 괜찮습니다요.”
“…잘은 모르겠지만 다들 닥치도록.”
“옙!”
“입 다물겠습니다!”
안전은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될 거 같다. 무지개단이 까불거리는 걸 보니까.
낯익은 얼굴들이 가득한데 모르는 얼굴도 꽤 많다.
아니, 느낌이 아니라 진짜 규모가 늘었는데?
‘이 정도면 거의 70명?’
2배 가까이 늘어났다. 처음 연옥계에서 활동할 때만 하더라도 40명도 안 되었던 거 같은데.
악마가 늘어서 그런가 북적거린다. 괴상하기도 하고.
안 그래도 개성 넘치는 모습이 많은 종족이 악마고 험악하게 생긴 놈들도 다수 있는데…….
“하하하! 보이십니까? 초록 반, 보라 반으로 염색했습죠.”
“저놈은 좌우로 나누었지만 전 위아래로 나눴습니다요. 빨강이랑 파랑이 제 피부색에 맞는 거 같아서.”
“어, 그래. 태극기 같고 좋네.”
“태극기가 뭡니까?”
“있어. 아주 좋은 거.”
험악한 얼굴과 살벌한 무기. 가시가 삐죽 튀어나온 방어구를 알록달록하게 염색한 놈들이 우글거리니 다른 의미로 무서웠다. 악몽에 나올 거 같아.
여기서 더욱 충격인 것은…….
“이블아이, 떠날 준비가 됐다.”
“도와주신 덕분에 저도 어느 정도 신성력을 가릴 수 있게 됐어요. 고마워요.”
“배, 백터? 헤나?”
나름 쿨하던 백터마저 무지개단 놈들에게 물들어 비슷한 몰골을 하고 있다는 것.
커플룩이라도 되는 건지 헤나도 비슷한 느낌이다.
내가 미안하다. 이상한 놈들 옆에 놔두면 안 되는 거였는데. 꽃도 쓰레기통에 넣으면 쓰레기 냄새가 나는 법.
자고로 좋은 것보다는 안 좋은 것이 잘 옮기 마련이었다.
왠지 모를 죄책감을 느끼던 찰나.
[과거의 기억이 생성됩니다.]
-파지직
두통과 함께 챕터가 넘어오면서 진행된 기억이 생겨났다.
머리가 따끔거렸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그저 어떤 식으로 일이 진행되었는지 체크할 뿐.
대기실에서 화면을 통해 대략적인 흐름은 확인했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
“대충 알겠군.”
어느 정도 기억을 정리한 후 백터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래. 백터, 헤나. 무운을 빌지. 다음에 볼 때는 좀 더 성장한 상태였으면 좋겠어.”
“그럴 생각이다. 어디까지나 목적이 맞아서 동맹을 맺었을 뿐, 내가 네놈의 부하라 생각하지는 말라고.”
“백터, 괜히 까칠하게 굴지 말아요.”
“그, 그랬나? 하하하! 다음에 웃으면서 보자!”
헤나의 핀잔에 바로 바보 같은 웃음을 흘리는 녀석. 캐릭터 확실하구만.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챕터가 넘어오면서 꽤 변화가 있었다. 그중 하나가 백터가 나와 함께 활동했다는 거였고, 지금에 와서는 분리되어 각자가 담당한 지역을 제패하려는 것이었다.
마치 나와 멤버들이 따로 흩어져 각 진영의 우두머리가 되려고 하는 것과 같은 느낌.
난 중앙부에서 위에 있는 놈들을 깨부수고, 백터는 주변을 돌며 확실하게 세력을 확보한다.
그 과정에서 다른 신성들을 만날 수도 있겠지만 걱정은 하지 않았다.
“백터 님! 가시죠!”
“두 분을 위해 꽃마차도 준비했습니다!”
이번에는 둘만 움직이는 게 아니라 무지개단도 함께하니까.
인원을 반으로 나눠 40명 정도는 백터와 함께 활동하라고 지시했다.
혹시 섞이지 못할까 걱정도 했지만.
“이게 왜 꽃마차냐.”
“식인식물도 꽃이 핍니, 아아! 왜 부숩니까!”
“이런 건 없는 게 세상에 이롭기 때문이지.”
다행히 잘 섞이고 있다. 이유는 모르겠는데 세력이라는 것도 성향이 비슷한 놈들을 끌어들이는 힘이 있어서 그런지 성격만 두고 본다면 다들 악마치고는 괜찮은 편이다.
아무튼…….
“잘 가라.”
“그에에.”
이제는 한 무리를 책임져야 하는 놈에게 손을 흔들어 줬다.
무리를 이끌고 앞으로 나아가던 녀석이 내게로 고개를 돌렸다.
“이블아이, 심층부에 진입하면 지금까지 겪었던 놈들과는 차원이 다를 거다. 신성이니 뭐니 말은 하지만 심층부에 들어갈 만한 가능성이 있어서 붙여 준 시답잖은 이름에 불과하니까.”
“걱정 마시지. 그놈들도 다 잡으려고 가는 거니까.”
“무리하지 말라는 말은 못 하겠군. 이쪽은 내가 맡을 테니 그쪽은 네가 알아서 해. 때가 되면 합류하마.”
그 말을 끝으로 백터 무리가 자리를 떴다.
내게 남은 건 30명의 무지개단뿐. 후렌과 루나르는 당연히 남았다. 나랑 같이 움직이기로 한 놈들 대부분이 익숙한 애들이다.
손발이 맞는 것도 있지만…….
‘초반부터 같이 성장해서 그런지 이놈들이 가장 강해.’
두 번째 챕터. 현시점은 첫 번째 챕터가 마무리가 되고 대략 7개월가량이 흐른 상태다.
내가 직접 하지는 않았지만, 시스템의 설정상 내가 지금까지 했던 것을 되짚어 본 결과 내 곁에 남은 이놈들 수준은 신성급에 다다라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중앙에 있는 악마들은 거의 다 때려 부숴서 마기를 잔뜩 흡수했으니까.
현재 내 마기 스텟은 자그마치 700대. 100단위로 성장이 힘들어지는 마기의 특성을 고려했을 때 고속을 넘어 초고속 성장을 했다고 봐야 했고, 이놈들 또한 나만큼은 아닐지라도 꽤 많은 마기를 손에 넣었을 거다.
애초에 마기만 따지면 나보다 많았던 놈들이니 못해도 800대 이상이지 않을까?
하루가 멀다 하고 전투를 해 댔으니 전투 경험 역시 상당했으며, 죽을 위기에서 수차례 살아남은 놈들은 역전의 전사나 다를 바 없었다.
전투 능력이 올라가기는 했으나 본성은 안 바뀐다고 성격은 그대로다.
“심층부라… 벌써부터 등골이 짜릿하네요.”
“이블아이 님이 아니었다면 변방에서 왕 노릇을 하며 들 따습고 배부르게 살았을 텐데 너무 감사드립니다.”
“유서를 미리 써 두긴 했는데 마계로 가는 길이 막혀서 보낼 수가 없네요. 이게 다 이블아이 님 덕분 아니겠습니까!”
“하하하! 죽으면 악령이 되어 저주할 겁니다요.”
말은 저렇게 하지만 백터를 따라 떠나지 않고 남은 놈들이다.
-따악!
“아흑!”
“그래, 죽으면 원망 많이 해라. 죽기 싫으면 어떻게든 살아남고.”
가장 가까이에 있던 후렌의 뒤통수를 치며 말했다.
우리는 심층부로 간다.
이미 신성은 모두 꺾은 상태. 몇몇 놈은 도주해서 복수의 칼날을 갈고 있겠지만 그건 백터가 정리해 줄 거다.
꿀꺽. 침을 삼켰다.
-사아아아아아아
연옥계의 중심부. 그곳 깊숙한 곳에 위치한 게 심층부였으며, 그 경계를 가르는 것이 눈앞에 보이는 어둠의 숲이었다.
거대한 가시 달린 덩굴이 아무렇게나 자라 있는 곳.
어중간한 악마는 한 번에 씹어 삼킬 몬스터가 득실거리는 곳이자, 연옥의 주인에 가장 가깝다고 여겨지는 두 악마, 메피스토와 그리가가 있는 곳이기도 했다.
또 한 가지…….
‘천족의 잔당들이 숨어 있는 곳이라고도 했지.’
잔당이라고 다 같은 잔당이 아니다. 그동안 마주쳤던 놈들은 잔당 중에서도 심층부에 들어가지 못한 놈들이니까.
백터가 말한 대로 심층부는 괴물들이 모인 곳. 동시에 연옥을 차지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들어가야 하는 곳이다.
‘숭배자들도 안에 있을 거야.’
중앙부 곳곳을 돌아다니며 수많은 전투를 치렀지만 숭배자들의 근거지는 찾을 수 없었다.
점조직처럼 본부를 두지 않고 따로 움직일 가능성도 있었으나, 다른 곳과 달리 무리를 지어 다닌다는 점과 그 인원이 상당한 걸 봐서는 근거지가 있을 가능성이 컸다.
뚜둑. 몸을 풀었다. 챙길 건 다 챙겼고.
“드가자.”
“예히, 이블아이 님 행차하신다! 길을 비켜라!”
“신병 받아라, 심층부야!”
“어둠 속 무지개가 필지어니 다들 긴장해야 할 것이다!”
힘차게 넝쿨 안으로 진입했다.
* * *
사람보다 두꺼운 가시넝쿨을 베자 액체가 튀어나온다.
-치이이익
독성 물질로 이루어져 있는 건가. 갑옷을 좀먹으며 증발하는 걸 봐서는 독 내성이 약한 놈은 바로 죽을 거 같다.
나한테는 별다른 영향을 주지 못하지만.
악마들이 앞으로 나서 칼질을 한다. 조금씩 트이는 길.
가시넝쿨로 이루어진 외곽은 어디까지나 입구에 불과하다.
험난한 심층부의 생태계를 알려 주는 것이기도 하고.
-꾸드드드드
우리가 뚫고 들어온 곳이 다른 덩굴로 채워진다.
빽빽하게 들어찬 공간. 빛이 사라지고 어둠이 찾아왔다.
어둠의 숲이라는 이름이 잘 어울리는 곳이었고.
-서걱서걱
-뚜두두둑
우리는 한동안 입을 열지 않고 기계적으로 칼을 휘두르며 앞으로 나아갔다.
놈들이 긴장한 것이 느껴졌다. 장난스럽게 행동하는 놈들이지만 그렇다고 바보는 아니다.
밖에서야 우리가 포식자의 위치였을지 모르지만 심층부에서는 그렇지 못하다는 걸 알고 있으니까.
이곳에서의 위치를 파악하기 전까지는 조심스럽게 행동할 거다.
“이블아이 님, 저쪽에서 빛이 납니다.”
“마기도 짙어지는군요. 덩굴 숲도 끝난 거 같습니다.”
저쪽으로 나가면 본격적으로 심층부에 진입한다는 건가.
“내가 먼저 나가지. 너희는 뒤따라와라.”
“그 말만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제가 또 등 바라보는 걸 잘합니다.”
하여간 말은, 그래도 첫 진입인 만큼 무지개단의 수장인 내가 앞장서는 게 맞지.
함정 같은 게 있을 수도 있고. 괜히 애들 먼저 보냈다가 송장 치우는 것보다는 이게 낫다.
‘나도 그렇지만 다른 애들도 심층부로 향했을 거야.’
두 번째 챕터의 시기를 봤을 때 그럴 가능성이 크다.
당장 내 기억 속에서도 멤버들이나 마그마 요정을 마주친 적은 없었으니.
어쩌면 내가 가장 늦게 진입한 걸지도 모르겠다. 천족이야 그러려니 넘어갈 수 있지만 같은 마계 진영으로 분류된 탈모맨은 마주쳤어야 정상이니까.
나보다 빠르게 이쪽으로 왔을 게 거의 확실시 되는 상황. 혹시 몰라 무지개단에도 물어봤지만…….
‘탈모맨을 봤다는 놈은 거의 없었지.’
설마 이 자식 시나리오 시작하자마자 심층부로 들어가 버린 건 아니겠지? 아무리 그래도 그럴 리가 있나.
어떤 멍청이가 가장 위험한 곳으로 돌진 먼저 하고 봐.
조금만 이성적으로 생각해도 정보를 모으며 세력을 키우는 게 정석인데. 정석은 맞는데…….
‘탈모맨이라서 확신을 못 하겠네.’
그놈이라면 충분히 하고도 남아서.
아무튼…….
뭐가 됐든 여기서 다 마주치게 될 거다.
-저벅
슬슬 넝쿨 외의 식물도 모습을 드러낸다. 손으로 이파리를 넘기며 앞으로 나아갔다.
어두컴컴한 공간이 사라지며 비교적 밝은 공간이 나를 반겼다.
“여기도 정상은 아니군. 위험한 건 없어 보이니 다들 들어와.”
혹시 몰라 권능을 통해 함정이나 매복한 놈들이 있는지 살폈지만 아무것도 없었다.
심층부쯤 돼서 그런가 새로 들어온 이들의 등을 쳐먹는 놈이 없다.
중앙부는 산맥 넘어오자마자 공격받았는데.
“이야, 이거 살벌한데요? 저거 마계에서도 악명 높은 식인식물이거든요.”
“저기 죽어 있는 거 그거 아닙니까? 7급 마물? 어지간한 악마들도 정면으로 싸우는 거 꺼리는 놈인데.”
심층부. 온갖 마물이 뒤엉킨 공간.
초대형종으로 보이는 몬스터의 시체가 압도적인 존재감을 드러냈다.
괴상하게 생긴 식물과 생물들이 가득해 이곳이 완전히 다른 세계라는 것을 새삼 다시 느꼈다.
악마인 무지개단도 넋 놓고 광경을 바라보고 있었으니 말 다 했다.
-쿠구구구구구궁
그런 우리를 반기는 걸까.
“크네, 커.”
눈앞의 몬스터 사체를 만든 범인으로 보이는 거대한 괴물이 모습을 드러냈다.
“전투 준비!”
“움직여, 굼벵이들아!”
명령할 것도 없이 공격 대형으로 움직이는 놈들.
심층부에서의 첫 전투가 시작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