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탑에 갇혀 고인물-406화 (405/740)

406화 대공의 아들

중앙부. 나를 비롯한 무지개단은 중앙 안쪽으로 들어가는 계획을 짜고 있었다.

지금에 이르러서는 갓 산맥에서 넘어온 초보라고는 보기 힘든 상황. 그 계기가 된 것은 백터와의 전투였다.

신성을 꺾었다는 것만으로도 핵심 인물로 구분되기 충분했으니까.

천마대전 참전 출신들을 토대로 중앙부의 대략적인 지도를 제작. 대표되는 세력들의 영역을 표시하고 있던 때 루나르가 다가왔다.

“저… 이블아이 님, 왜 그냥 백터를 돌려보내신 겁니까?”

“음?”

“아니, 그렇잖습니까. 저도 압니다. 저희도 빠르게 강해지고는 있지만 사실상 무지개단은 이블아이 님이 대부분의 전력을 차지하고 있다는 것을요.”

틀린 말은 아니다. 중앙에 진출할 정도의 실력은 충분하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특출나다고 보기 힘든 게 지금의 무지개단이니까.

어떻게 보면 당연하다. 한 달은커녕 몇 주 전까지만 해도 변방에서 힘을 키우던 놈들이니까.

단기간에 평범한 중앙 악마들과 싸워도 꿀리지 않을 정도로 성장한 것만 해도 대단한 일.

슬쩍 무지개단을 둘러봤다.

“너희도 잘하고 있구만 뭘.”

“에이, 잘하기는 하는데 아쉬워서 그렇죠. 백터면 최근 핫한 신성이고, 신성끼리의 서열에서도 중상위권은 됩니다. 기존에 있던 신성을 이겼으니 말이죠.”

“오, 걔가 중상위권이었어? 녀석 위에는 누가 있는데?”

“의견은 다양한데 적어도 2명은 서열은 확실하죠. 신성 서열 1위인 네그로랑 2위인 포라드.”

이건 나름 괜찮은 정보다. 상위권인 놈들은 더 강하다는 말이었고, 그 위의 악마 두 명은 신성과 비교해도 확연한 차이가 날 만큼 대단한 실력을 가지고 있을 게 뻔했으니까.

좋네. 심심하지는 않겠다.

“백터를 무리에 흡수했으면 전력이 보다 강화됐을 겁니다. 다른 놈들도 쉽게 덤비지 못했을 거고, 우리와 달리 이곳에 오래 있었으니 지리나 세력 간의 다툼에 대해서도 잘 알겠죠.”

“다 떠나서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할 수 있지 않습니까. 예로 들어 이블아이 님을 견제해서 신성들이 연합해 다구리를 칠 수도 있는 거고…….”

루나르에 이어 후렌까지 말을 거든다.

타당한 말이다. 뭐가 됐든 굴복시키고 무지개단으로 흡수했으면 도움이 됐겠지.

나도 그걸 생각하지 않은 건 아니다.

다만 몇 가지 이유가 있었으니.

“근데 걔 데리고 오면 너희들 감당되냐?”

“그, 그건.”

“으음, 그건 좀 힘들 거 같은데요.”

“나한테 복수하겠다고 뒤통수치면? 너희가 막을 수 있어?”

입을 다무는 녀석들.

“그냥 뒤통수만 치면 그나마 나은데 방해된다고 나 없는 사이 너희 싹 쓸어버리면 살아남을 수는 있고?”

“아마, 죽겠죠.”

“제 실력이면 2초 정도는 충분히 버팁니다.”

“그게 죽는 거지, 등신아.”

보기 드물게 시무룩해지는 후렌과 루나르.

저래 보여도 처음에는 연옥을 지배하겠다, 변방의 왕이 되어 중앙에 이름을 떨치겠다고 나대던 애들인데 현실을 맞닥트리니 기가 좀 죽은 거 같다.

벽을 느꼈다고 해야 하나.

너무 빠르게 환경이 바뀐 탓이기도 하다.

툭. 두 녀석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그러니까 빨리 강해지라고. 그래도 내가 시작할 때 데리고 온 게 너랑 후렌인데 굴러 들어온 돌에 나가떨어지면 안 되지.”

“이, 이블아이 님!”

“계속 성장해라. 밑에 놈들한테 뒤처지지 않게. 어디 가서 무시 안 당하게, 짜식들아.”

그 말을 남기고 발걸음을 옮겼다.

감격에 겨워 몸을 떠는 녀석.

“강해지겠습니다! 이블아이 님의 이름에 먹칠하지 않게! 믿음에 보답할 수 있게! 훨씬 강해지겠습니다!”

“꼭 강해져서 이블아이 님의 뒤통수를 칠 놈들 다 조지고 제가 직접 치겠습니다!”

“어, 그래. 파이팅 해라.”

결국 통수는 치겠다는 거잖아, 자식아.

됐다. 원래 마계라는 곳이 그런 구조니까. 음흉하게 속으로만 웅얼거리는 것보다는 차라리 저렇게 대놓고 말하는 게 낫지.

놈들에게 한 말이 빈말은 아니다. 정도 좀 들었고 실제로 많은 도움이 되고 있으니까.

알아서 보초 서고 훈련하고 식사 준비하고. 의외로 유대감이 있어 서로 잘 끌어 준다.

나 말고 무지개단에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놈이 있으면 지금과 같은 분위기가 이어지지는 않겠지.

백터는 충분히 그럴 능력이 있는 놈이고.

‘그게 아니더라도 몰래 기습하면 좀 아프긴 할 거 같단 말이야.’

끝에 가서 비굴하게 나오기는 했지만 실력은 진짜다. 자고 있을 때, 혹은 부상을 입었을 때 놈이 기습한다면 상당히 골치 아플 터.

물론 제압은 할 수 있겠지만 괜히 위험을 안고 가고 싶지는 않았다.

게다가 놈은 단독으로 활동하던 녀석. 무리 생활을 제대로 할지도 의문이었고.

‘계속 혼자 움직이고 싶다고 주장을 했었지.’

살려 달라고 빌 때는 언제고 살려 주니 단독 활동을 하게 해 달라고 매달렸다.

이유는 정확히 모르겠다. 맹목적인 무언가가 느껴지기는 했는데 자세한 사항은 알 수 없었고, 결과적으로 그렇게 하도록 허락했다.

물론 그냥 보낸 건 아니고.

“잘하고 있으려나.”

놈에게 몇 가지 조건을 내걸었다.

나에 대한 소문을 낼 것. 강한 마기를 가지고 있지만 무리는 별 볼 일 없다는 내용으로.

반쯤은 사실이니 그럴듯한 소문이 될 거다.

게다가 백터는 세력이 없는 떠돌이. 연옥계 곳곳을 돌아다니며 전장을 찾아다니는 스케빈져인 만큼 소문을 내기 좋겠지.

쭈욱. 기지개를 켰다.

“으으으. 언제 이 넓은 곳을 다 돌아다니냐. 직접 찾아오게 만들어야지.”

적당히 여유를 부리고 있던 찰나.

“이블아이 님, 지도가 완성됐습니다.”

“그래? 봐 보자.”

열심히 지도를 만들고 있던 악마 한 명이 내게 천 쪼가리를 건넸다.

나름 공들여 만든 지도. 생각은 하고 있었지만 연옥계의 규모는 대단했다.

그나마 변방을 제외한 중앙부에 놈들이 몰려 있어서 다행.

놈들의 표식이 적혀 있었는데 몇 가지 걸리는 부분이 있었다.

“이쪽 표시된 곳은 뭐야?”

“천족의 잔당이 있는 곳들입니다. 요즘 이쪽에서도 말이 많다고들 하더라고요.”

“아! 저도 그 이야기 들었습니다. 최근 놈들이 영역을 넓히고 있다더군요.”

“우리 쪽이랑 가깝네?”

“예. 아무래도 다른 곳은 자리를 잡은 놈들이 있어서요.”

다른 신성과 메피스토, 그리가의 영역을 피했다는 거구만.

어쩐지 천족 무리가 나타났다 했더니만 이런 이유가 있었군.

잠깐만…….

“그럼 백터도 놈들을 마주쳤을 거 아닌가?”

“그에에.”

높은 확률로 그럴 가능성이 있다.

생각해 보면 백터도 성물을 가지고 있었다. 천족과 싸워 뺏었다고 보는 게 맞지 않을까?

그쪽이 타당해 보이는데 그럼 한 가지 문제가 생긴다.

‘우리가 천족과 싸우고 있을 때 나타났단 말이지.’

여기까지는 괜찮다. 상대가 약해져 있을 때 덤비는 건 당연한 일이니까.

나라도 그럴 거다. 기회가 있으면 잡아야지.

중요한 건 상황 그 자체.

백터는 이미 이전부터 이쪽에 있었고, 다른 신성을 잡았다.

그런 곳에서 천족들이 활동을 했다?

무슨 수로? 악마들만큼이나 신성의 움직임에 관심을 가지고 있을 놈들이 천족인데.

기억을 되짚었다.

‘기습에 실패한 천족들이 달아나던 중에 백터가 나타났다. 내가 천족이었다면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어쩌긴 어째. 바로 방향 틀고 다른 쪽으로 도망치든, 양쪽에 포위됐다 느끼고 결사 항전을 치르든 했겠지.

하지만 천족의 반응은?

‘백터 쪽은 신경도 안 쓰고 도망쳤어.’

심지어 놈들을 쫓던 루나르보다 백터가 천족들과 더 가까웠다.

다르게 말하면 우리보다 천족들이 먼저 백터를 발견했을 거라는 뜻.

그런데도 그대로 도주했다?

“말이 안 되는데?”

심지어 백터는 시체 처리반이라고는 하지만 천마대전에 참전했던 악마 아닌가.

지금도 연옥계에 남아 있는 녀석이고.

천족들이라고 놈의 얼굴을 모를 리가 없다.

앞뒤가 맞지 않는다.

한번 생긴 의문은 의심을 낳았고, 모든 상황에서 미묘하게 틀어진 점들이 눈에 들어왔다.

직접적인 전투에 참여하지 않던 놈이 갑작스레 다른 신성을 잡은 것.

거기에 멈추지 않고 천족과 싸우는 타이밍에 우리 앞에 나타난 것.

신성이라는 자존심을 버리고 목숨을 구걸한 것.

놈이 가지고 있던 성물과 백터의 무리라고 주장하던 놈이 가지고 있던 망가진 성물.

홀로 움직이는 신성은 다른 기회주의자에게 있어서는 최고의 먹잇감이다. 얻을 수 있는 마기는 많은데 위험도는 떨어지니까.

녀석도 그 사실을 알겠지.

왜 굳이 무리를 만들지 않을까. 만들지 않은 것일까 만들 수 없는 것일까.

본인 상황을 알면서도 왜 표식이 그려진 천 조각을 남기고 다니는 걸까.

여러 상황의 수가 머리에 떠올랐고…….

“후렌, 백터가 잡은 녀석이 부상을 입고 산맥으로 넘어가려고 했다고 했지?”

“예. 제가 보기로는 그랬습니다.”

“누구한테 당한 상처인지도 알아봤어?”

“그것까지는 잘 모르겠는데 아마 백터가 아닐까요? 관통상이 있었는데요. 구멍이 깔끔한게 커다란 송곳에 뚫린 느낌?”

아니다.

백터가 아니다.

놈과 직접 싸워 봐서 안다. 놈이 사용하는 무기는 검이었고, 사용한 스킬은 허공에 나타나는 입이다.

물어 뜯겼거나 찢어졌거나 베인 흔적이라면 모를까 깔끔한 관통상을 만들 건 없다.

놈에게 다른 종류의 스킬과 권능이 있을지는 알 수 없으나 적어도 나와 싸웠을 때는 못 봤다.

다른 누구도 아닌 신성에게 그만한 상처를 입힐 수 있는 존재가 누가 있을까.

또 다른 신성? 절대 아니다. 그랬다면 백터가 모습을 보일 리 없다. 홀로 움직이는 만큼 다음 타깃이 될 확률이 높으니.

애초에 그랬다면 후렌이 사이코메트리를 썼을 때 백터 외의 무리를 봤어야 정상이다.

“루나르, 하나만 묻자. 백터의 평소 움직임 패턴이 어떻지? 다른 신성들은 백터를 잡으려 하지 않나?”

“으음, 보통 한 자리에 모습을 드러내면 다른 쪽으로 이동하죠? 아무래도 혼자라서 노리고 있는 놈들이 많거든요.”

“어떻게 쫓지?”

“그야 뭐, 소문이나 목격자의 증언. 백터가 놔둔 표식이 있던 곳 위주로 움직인다고 들었습니다.”

표식.

“하! 이제야 알겠군.”

얼굴을 쓸어내렸다.

궁금했다. 왜 굳이 말 같지도 않은 이유로 표식을 남겨 위치를 드러냈을까.

그 어떤 악마보다 위치를 숨기는 게 유리한 놈인데.

이유는 하나.

‘다른 놈들의 움직임을 유도하고 있어.’

혼자 돌아다니는 먹잇감이 여기 있으니 잡으러 오라고.

대체 왜?

어떤 이득을 취하기 위해?

놈이 얻는 이득은 없다. 이득을 얻는 사람이 있다면…….

‘백터를 잡기 위해 다른 세력이 움직일 때 생기는 빈틈.’

정확히 말하면.

‘다른 악마들의 움직임에 따라 도망치며 싸워야 하는 천사들.’

그러면 모든 것이 설명된다.

놈이 나타난 타이밍. 성물을 가지고 있는 이유. 무리를 짓지 않고 홀로 다니는 것까지.

세력을 만들 수 없겠지, 천사와 한통속인데.

어디까지나 가능성이고 추측에 불과하다.

그럼 이제 남은 건 하나.

“확인해 보는 것뿐.”

무지개단을 불러 모았다.

연속된 전투에 힘이 빠졌겠지만 지금은 움직여 줘야겠다.

“백터를 찾아. 부상당한 게 있으니 멀리 떠나지는 못했을 거다.”

“알겠습니다!”

“굼벵이들아! 아프고 힘들고 쉬지도 못해서 죽겠지만 저 악독하고 악마다운 이블아이 님의 말을 들어 고된 몸을 움직여라!”

“뛰어! 쉬고 싶으면 그냥 죽어! 죽어서 평생 자!”

나의 명령에 바쁘게 움직이는 녀석들.

이동 준비를 마친 무지개단이 백터가 이동한 방향을 통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 * *

붉은 암석 지대.

치료에 집중하고 있던 백터가 몸을 일으켜 세웠다.

“조금만 더 쉬어요.”

“안 돼. 이미 내가 이쪽에 있다는 소식을 들은 놈들이 있을 거야. 여기 있다가는 너도 위험해져.”

“하지만 지금 몸 상태가!”

백터 옆에 있던 여인, 헤나가 뭐라 하기도 전에 자리에서 일어선 그가 짐을 챙겼다.

온몸에 두른 붕대. 악마라는 종족 특성상 천사의 치유를 받을 수 없었고, 그는 회복 관련 스킬과 권능이 없었다.

그저 악마의 강인한 생명력과 재생력으로 천천히 상처를 회복하는 중.

“부축만 좀 해 줘. 다른 놈들은 이미 자리 피했지?”

“예. 동쪽으로 이동했다는 소식을 들었어요.”

“잘됐네.”

그가 날뛰는 곳은 다른 신성과 위로 올라가기 위한 야망 있는 악마들이 모인다.

이번에 그와 같은 신성인 다밀락을 잡았다는 소문이 퍼지면 더 그럴 것이다.

그때 역시 다밀락을 기습한 천족들이 빠져나갈 수 있게 몸을 던졌던 백터였다.

헤나의 부축을 받은 백터가 발걸음을 옮겼다. 서둘러야 했다.

부상을 입은 탓에 시간이 지체됐다.

앞으로 걸을 때마다 느껴지는 통증에 몸이 뻣뻣해질 지경이었으나 내색하지 않고 웃어 보였다.

“내가 연옥의 왕이 되면 아무도 천족을 건들지 못하게 할게. 이제 천계든 마계든 못 가잖아. 결국 우린 다 갇힌 거야.”

연옥계에 남은 몇몇 악마와 천사만 아는 사실.

다른 악마들은 마계에서 이주자를 제한하기 위해 임시로 연결을 끊었다고 알고 있었지만 사실은 달랐다.

잠시 입을 다문 헤나가 가볍게 백터의 옆구리를 찔렀다.

“몸부터 사려요. 그러다 진짜 죽어요.”

“알았어, 알았어. 안 죽지. 죽으면 이렇게 못 있는데.”

헤실거리며 헤나에게 몸을 기대는 백터.

그것도 잠시.

-차앙!

헤나를 뒤로 물린 백터가 검을 뽑아 들며 앞으로 나섰다.

등 뒤로 올라오는 소름. 목이 갑갑해질 정도의 긴장감.

“오호, 이거 재밌는 광경을 보는군. 천하의 백터가 천족과 놀아나고 있다라. 네놈도 잔당이었구나?”

우뚝 솟은 암석 위로 드리우는 수많은 그림자.

그 중심에 선 남자.

백터도 알고 있는 얼굴이었다.

“…포라드.”

신성 서열 2위.

제7 마계의 대공, 지옥의 기사 포라스의 아들.

그가 등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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