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5화 살려 주십쇼!
백터의 등장.
마주치게 된다면 가장 먼저 마주치지 않을까 생각했었다.
산맥을 넘어온 후 흔적을 발견하기도 했으니 어쩌면 아직도 근방에서 활동하고 있을지 모른다고 예상했었으니까.
‘이렇게 바로 만날 줄은 몰랐지만.’
세력 없이 움직인다는 게 사실인지 놈의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한 가지 더 눈여겨볼 부분이 있다면…….
“너희가 말하던 것보다 훨씬 강해 보이는데?”
“…어, 그러게요. 평소 소문이 워낙 구려서 평가가 낮기는 했는데.”
“이번에 다른 신성을 잡아먹으면서 강해진 게 아닐까요?”
후렌 키아노의 말대로 신성과의 전투에서 승리하면서 강해졌을 수도 있다.
그걸 감안하더라도 예상치를 벗어난 건 마찬가지였고…….
‘분명 직접적인 싸움을 피한다지 않았었나?’
근처에서 기회를 노리고 있다가 전투가 끝나면 냅다 달려와 막타를 치는 놈이라 들었는데.
어딜 봐서 그렇다는 걸까.
백터가 패도적인 기세를 뿜어 대며 이쪽으로 달려온다.
덩치는 그리 크지 않았으나 존재감은 남달랐고, 무지개단 녀석들도 침을 삼키며 긴장했다.
사실 마기로만 따지면 얘네들이 나보다 높아서 더 선명하게 느끼고 있을 거다.
그동안 일부러 비굴한 모습을 보여 실력을 숨긴 건가, 아니면 충분히 강해졌다고 판단하여 호전적으로 나서기 시작한 걸까.
급하게 방향을 돌려 내게 돌아온 루나르 역시 식은땀을 닦아 냈다.
“이블아이 님, 어떻게 하실 겁니까? 지금 맞붙기에는 아직 우리 세력이 그리 강하지 않습니다요.”
“머릿수야 우리가 많지만 격차가 심하면 숫자는 의미가 없어요. 쓱싹 날아가 버리니까요.”
나도 안다.
급속도로 성장하고 있다고는 하나 객관적으로 보면 무지개단은 산맥에서 넘어온 지 얼마 안 된 초보. 중앙부 전체를 놓고 비교하면 약자에 해당하니까.
어디까지나 겉으로 드러난 정보만 보자면 말이지.
“너희는 뒤로 빠져.”
“이, 이블아이 님! 혼자 상대하는 건 위험합니다!”
“맞아요. 죽더라도 우리도 함께하겠습니다!”
결연한 눈빛으로 말하는 후렌과 루나르였지만 몸은 이미 저만치 빠져 있다.
이런 한결같은 새끼들.
말을 잘 듣는다고 해야 하나, 얄밉다고 해야 하나.
그래도 괜히 옆에 알짱거리는 것보다는 낫다. 전투에 휘말려서 죽어도 챙길 여력이 있을지 장담을 못 하니까.
두근.
심장이 뛴다. 긴장감과 함께 느껴지는 즐거움.
“여기 와서 그냥 그런 애들만 상대하기는 했지.”
결국에는 부딪치게 될 놈이었다.
궁금하기도 했다. 신성이라 불리는 놈들은 얼마나 강한지.
그들보다 강하다고 일컬어지는 메피스토와 그리가는 어느 수준인지.
저놈을 잡으면 대충이나마 기준이 생기겠지.
“네가 백터냐?”
“맞다!”
인사를 나누기가 무섭게 놈이 검을 내리친다.
검게 물든 검. 물질 자체가 검은색인지 놈의 영향 때문에 검은 건지는 모르겠다만.
-카아아아앙!
꽤 묵직하다.
두웅! 공기가 울리는 소리와 함께 땅이 눌려 터진다.
손목이 뻐근할 지경.
일 합에 날 베어 내지 못했기 때문일까 놈의 눈이 슬며시 커진다.
애매한 놈들이라면 받아 내지 못했을 테니까, 받더라도 검이 부러졌을 거고.
물론 혼돈검에는 해당 사항이 없다.
“호전적인 놈은 아니라고 들었는데 꼭 그렇지만도 않은 거 같군.”
“뭐든 선입견이 있기 마련이지.”
선입견이라.
맞는 말이다. 소문도 나름 도움이 되지만 직접 겪어 본 것만 못하니까.
주변 평가가 어떻든 그 사람이 평가 절하당하는 건지 과평가당하는 건지 알 수 없는 것처럼.
나도 쁘띠공듀로 활동하면서 그 느낌 잘 안다. 못된 놈들의 온갖 음해에 시달리며 정신적인 고통을 받았지.
“그에?”
“쉿, 덕춘아. 싸우는 중이잖아.”
자연스럽게 덕춘이를 무시하고 검을 돌렸다.
무게가 기울면서 백터의 검이 밀려 났고 망설임 없이 파이어 밤.
-콰아아아아앙!
홍염이 놈을 뒤덮었다.
뜨겁게 치솟는 열기에 열풍이 불어닥친다.
시야를 불게 물들이는 폭발 속에 보이는 한 줄기 검격.
빛마저 빨아먹은 듯한 검은 선이 이어졌고.
“흡!”
기합과 함께 폭발을 뚫은 놈이 검을 찔러 넣었다.
단순한 검격이 아니다.
[귀령검鬼靈劍 (S) Lv.10]
놈의 검에 일렁이는 어둠이 살아 있는 것처럼 요동쳤다.
순식간에 퍼져 나가며 나를 잡아먹으려 꿈틀거리는 기운.
본능적으로 몸을 뒤로 뺐다. 스산한 느낌. 감각적으로 알 수 있었다, 이거…….
‘영혼에 타격을 입히는 공격이야.’
내가 사용하는 영혼 찢기와 비슷한 종류.
권능을 발휘했다.
[귀령검 (S) Lv.10]
-상대방의 영혼 일부를 흡수합니다.
-흡수한 영혼을 연료로 불태웁니다.
흡수하고 불태우는 스킬이라.
보아하니 영혼 찢기처럼 완전히 절단해 버리는 건 아닌 것 같다만…….
“순순히 당해 줄 수는 없겠군.”
이제야 느낌이 좀 오네.
이놈이 왜 막타를 그리 치나 했는데 저 스킬을 위해서 한 것도 있을 거다.
이렇게 나온다면 나 역시 그에 걸맞은 대우를 해 줘야지.
[검강]
-파하아아아아앗!
검에 신성력을 불어넣었다. 선명하게 빛나는 검.
게다가.
[영혼 찢기 (S) Lv.10]
[절삭 (S) Lv.10]
-서걱!
순식간에 늘어난 빛의 검이 놈을 스친다.
빠르다. 당황할 법도 한데 놈이 변화를 눈치채고 몸을 비틀었다.
옷깃만 찢고 지나간 검격.
“너, 너! 신성력을!”
“어, 내가 좀 성스러워.”
거짓말이 아니라 진짜로. 이래 보여도 부활한 교단의 성자 칭호도 가지고 있다.
쿵!
땅을 박차고 놈에게 달려들었다.
좌에서 우로. 사선 베기.
[프로즌 브레이크 (S) Lv.10]
놈의 뒤에 얼음벽을 세워 퇴로를 봉인하는 동시에.
[일렉트릭 쇼크 (S) Lv.10]
-콰지지지지지직!
그대로 전격을 쏟아 냈다.
얼음벽과의 시너지로 사방으로 전격이 몰아치고, 놈의 몸이 굼떠지는 순간 다시 한번 검을 휘둘렀으나.
[바이트 (S) Lv.10]
“이건 또 뭐야!”
놈 또한 가만히 있지 않았다.
허공에서 시커먼 입이 생성되더니 날 물어뜯으려 한다.
이름 그대로의 능력. 단발적인 공격인가, 한차례 입을 다문 스킬이 사라졌지만…….
-콰악!
-카아악!
연달아 스킬을 사용하며 압박해 온다.
입이 생성되는 위치는 불규칙했으며 징조 또한 없다.
게다가…….
-까드드드득!
위력도 보통이 아니다.
종아리 뒤에 나타난 입이 갑옷을 물어뜯었다.
갑옷이 순간적으로 찌그러졌다 수복됐다. 맨몸이었다면 뼈째로 뜯겨 나갔을 터.
스텝을 밟으며 놈의 공격을 피하자 백터가 몰아붙이기 시작했다.
바이트를 사용해 움직임을 유도하더니 검은 사슬이 나타나 내 몸을 붙잡는다.
[마법 무효화 (S) Lv.10]
[마법 무효화에 성공합니다!]
-차앙!
패시브 덕에 막아 냈지만 놈 또한 한 번에 날 구속할 거라는 생각은 없었는지 손을 내뻗었고.
[그래비티 (S) Lv.10]
-쿠구구구구구궁!
내 주변의 중력을 강화시켰다.
온몸을 짓누르는 무게감. 순간적으로 무릎이 꺾일 정도의 위력.
굳이 버티려 하지 않았다.
[땅굴 이동 (S) Lv.1]
그대로 밑으로 들어가 버렸으니까.
땅속을 누비며 위치를 숨겼고, 중간중간마다 진동이 느껴지는 곳을 향해 오로라 빔을 쏘아 올렸다.
뻥 뚫리는 천장.
그때마다 백터 역시 땅 아래로 공격을 퍼부었으나 난 이미 이동한 후였고, 땅 밑을 충분히 헤집었다고 판단한 순간.
[파이어 밤 (S) Lv.10]
-콰르르르르릉!
폭발을 일으켜 일대를 무너트렸다.
뛰어도 빠져나갈 수 없을 정도의 규모.
그대로 밖으로 빠져나오며 땅굴 이동 중에 설치한 시한폭탄을 터트렸으니.
-콰과과과과광!
-쿠아아아아앙!
화산이 폭발하듯 대지가 터져 나갔다.
위로 솟구치는 불길과 돌의 파편. 거대한 크레모아를 하늘을 향해 터트리면 이런 느낌일까.
이미 지형은 부서지고 깨져 나간 지 오래.
“이, 이게 무슨 싸움이야.”
“이블아이 님의 힘을 보았느냐, 이놈아!”
“더 뒤로 빠져! 괜히 휘말리지 말고!”
본인들이 끼어들 전투가 아닌 걸 확신한 무지개단이 거리를 벌리며 물러선다.
폭발의 연속으로 박살 난 공간, 충격을 입은 백터가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켜 세운다.
망설임 없이 놈을 향해 몸을 던졌다.
그동안 싸웠던 악마들과는 확연히 다른 수준.
아직 보여 주지 않은 뭔가가 있을 가능성이 높았고, 언제 어떤 적이 나타날지 모르는 연옥인 만큼 기회가 주어졌을 때 처리하는 게 맞았다.
[러브 앤 피스 (S) Lv.10]
[검강]
[칭호, 부활한 교단의 성자가 빛납니다!]
[SS급 권능, 굴하지 않는 검귀가 번뜩입니다!]
-차아아아아앙!
혼돈검이 폭발하듯 빛난다.
신성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검.
돌진하는 속도 그대로 높게 쳐들었던 검을 내리쳤다.
-구구구구구궁!
파괴적인 힘에 공기가 찢어지고 바람이 휘몰아친다.
하늘까지 베어 버릴 기세의 검격은 하나의 기둥이 되어 놈을 향해 떨어졌다.
그 순간.
[빛의 결실 (SS)]
-콰아아아아앙!
놈을 감싸는 무언가.
검과 맞부딪친 장막이 내 공격을 막아 냈다.
정확히 말하면 상당한 대미지를 받아 냈다.
금이 가는 것과 동시에 깨져 버렸지만 목숨은 지켜 낼 수 있었으며.
“…신성력?”
난 백터를 보호한 것의 정체를 눈치챘다.
신성력, 정확히는 성물.
그것도 일반적인 성물이 아니다. 무려 SS급에 달하는 성물이지.
나도 저 정도 등급의 성물은 가지고 있지 않다. 천사의 날개도 성물로 치면 있다고 볼 수도 있지만 그거야 아이템에 가까우니까.
“쿨럭.”
공격을 막아 내기는 했지만 충격은 남아 있다.
놈이 피를 한 움큼 뱉어 낸다. 여전히 검은 놓지 않은 상태.
어떻게든 한번 막아 낸 것은 대단하다만, 숨겨 둔 게 더 있더라도 지금 몸 상태로는 제대로 된 실력을 보이지 못할 터.
그에 반해 나는…….
‘아직 남은 것들이 많으니까.’
칭호 효과, 펠라인 세트 스킬, 갖가지 포션들.
하다못해 버프도 두르지 않았다. 천사의 날개도 착용하지 않았고.
만약 이 녀석을 상대로 그 모든 것을 사용해야 했다면.
‘투톱을 달리고 있는 악마들은 이기기 힘들다고 봐야지.’
내게는 좋은 소식이다. 그 두 놈들도 내가 이길 수 있을 가능성이 있다는 거였으니까.
뭐, 신성이라 불리는 악마들도 얕볼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리게 되기는 했지만.
그건 그거고.
마무리는 제대로 해야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가능하면 깔끔하게.
-우우우우우웅
검을 들어 올렸다. 이미 신성력은 900대에 접어든 상태.
여전히 사용할 수 있는 신성력은 충분했다.
주변에 있던 악마들 역시 침을 삼키며 우리를 바라봤다.
신성. 그것도 다른 신성을 잡아 내며 더욱 높은 위치에 오른 악마.
세간의 평가는 어떨지 몰라도 스스로는 세력조차 만들지 않은 고고한 존재.
그 악마의 최후를 기다리는 것이었고, 내가 검을 휘두르는 타이밍.
“아이고! 제가 무례를 저질렀습니다! 이 미천한 자의 어리석음을 한번만 눈감아 주십시오!”
놈이 내 다리에 매달렸다.
“엥?”
“헤헤, 제가 사실 별다른 세력도 없고 그렇습니다. 죽이셔 봤자 흡수할 무리도 없고 별로 영양가도 없어요. 제가 스케빈져잖습니까? 아무 쓰레기나 주워먹는 똥개!”
급 비굴하게 들어오는 녀석.
아니, 이쪽 동네 악마들이 태세 변화가 빠르긴 해도 이건 좀 심하지 않나?
“항복, 항복합니다. 살려만 주시면 다시는 눈앞에 나타나지 않겠습니다! 마음에 안 드는 놈이 있으면 제가 먼저 가서 정리해 놓겠습니다!”
어이가 없어 뒤로 다리를 빼자 어떻게든 기어 와 다리를 붙잡는다.
“이블아이 님이라고 하는 걸 들었습니다. 원하신다면 얼굴에 이블아이 님의 표식이라도 박겠습니다! 다른 악마들에게 경고가 될 수 있겠죠. 쓸모가 있지 않겠습니까!”
“아, 좀 떨어져 봐.”
“죽이지 마십쇼. 살려 주십쇼!”
“알았으니까 좀 떨어지라고!”
부담스럽게.
말로만 해서는 믿을 수 없다는 걸까.
[백터를 상대로 승리했습니다.]
[마기 일부를 흡수합니다.]
내가 놈의 패배를 받아들이고 마기를 흡수하고 나서야 다리에서 떨어진다.
적어도 마계의 율법으로는 상대의 마기를 흡수하는 것으로 모든 게 끝나니까.
“가, 감사합니다!”
땅에 머리를 박으며 소리를 지르는 녀석.
이마를 긁적였다. 이놈도 정상은 아닌 거 같다.
* * *
백터와의 전투가 끝난 후.
이블아이에게서 벗어난 백터가 부상을 입은 몸을 이끌고 언덕을 올랐다.
황량한 공간. 생명체라고는 볼 수 없는 곳.
전쟁의 여파가 남아 있는 장소였으며, 그 특유의 거친 환경에 악마들도 머물지 않는 곳.
붉은 암석이 가득한 돌산, 그 사이 생성된 동굴로 백터가 들어갔다.
피를 많이 흘려 창백해진 얼굴.
“왜, 왜 그래요? 괜찮아요?”
그를 반기는 존재가 있었다.
쓰러질 듯 기우는 백터를 받아 드는 여인.
백터가 그녀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괜찮아, 잘 끝났어.”
“잘 끝나기는요! 지금 몸 상태가 이런데! 어떻게 된 거예요!”
“어떻게 되긴, 싸워서 이겼지. 졌으면 살아 왔겠어? 말했잖아. 나만 믿으라고.”
애써 팔을 들어 근육을 뽐낸 백터가 흘러내리는 코피를 훔친다.
“걔네들은 잘 도망쳤겠지?”
“무사히 빠져나가는 거 봤어요.”
“다신 놈들 근처에 가지 말라 그래. 이블아이라고 했나, 그 녀석 엄청 강하니까.”
그 말을 끝으로 백터가 자리에 누웠고.
“나 좀만 쉴게. 옆에 있어 줘.”
“알았어요.”
백터의 옆, 그의 손을 잡은 천사가 부드럽게 백터의 머리를 쓰다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