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탑에 갇혀 고인물-404화 (403/740)

404화 백터

내비게이션이 가지고 온 물건은 천 조각이었다.

딱히 특별해 보이지는 않았으나 녀석의 표정은 진지했고, 무슨 일인가 싶어 기웃거리던 루나르 역시 얼굴을 구겼다.

“이건 백터의 표식이잖아?”

“맞아, 9신성 중 한 명이지.”

9신성? 연옥계에 있는 강자 중 투톱을 달리고 있는 게 메피스토와 그리가라는 악마라고 했다.

그 밑에 빠르게 성장하고 있는 악마가 9신성이고.

중앙부에 진입한 이상 놈들과 마주칠 건 예상하고 있었다. 설마 산맥을 넘자마자 그 흔적을 발견할 줄은 몰랐지만.

“백터라는 놈은 어떤 놈이냐.”

“저번에 말했던 시체 처리반 출신 중 한 명입니다. 좀 특이한 놈이긴 하죠. 세력을 딱히 안 만들거든요. 영역도 없고요.”

“콘셉트를 제대로 잡았다고 해야 하나. 지금도 시체 처리반처럼 사는 놈이라 전투가 벌어지는 곳을 둘러보면 어딘가 숨어 있다고들 하죠. 별명도 스케빈져예요.”

대충 어떤 느낌인지 알 거 같다.

스케빈져.

이런 놈들은 우리 세계에도 있었으니까. 물론 놈은 마기가 목적이겠지만.

‘남의 물건 탐내는 건 비슷하지.’

대격변의 날에는 수많은 사람이 죽었고, 물자가 부족했기에 몬스터에게 당한 시신에서 쓸 만한 물건을 빼내는 경우가 더러 있었다.

현대 사회를 살아가던 이들도 환경이 바뀌면 적응하기 마련. 당시에는 어쩔 수 없었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그 습관이 게이트에서도 이어지는 놈들이 있었지.’

대격변의 여파가 어느 정도 수습되고 헌터가 나타난 후에도 그런 짓을 하는 놈들이 있었다.

단순히 죽은 이들의 물건을 훔치는 거로 끝나면 다행이련만 일부러 죽게 놔두거나 유도하는 쓰레기들.

당장 탑에도 있지 않았던가.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고 후렌 키아노가 쥐고 있는 천을 받아 확인했다.

이놈은 어떤 놈일까.

붉은색 천. 뿔 2개가 교차되어 있는 문양.

“이게 놈의 표식인가?”

“예. 종종 본인이 흡수한 애들 위에 던져 두고 갑니다. 만족스러운 식사에 대한 나름의 팁이라고 하는데 개소리죠.”

“중요한 건 그겁니다. 뭐가 됐든 신성 중 하나. 놈이 기분 좋게 흡수할 정도의 악마라면 꽤 강한 놈이었다는 거거든요.”

루나르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후렌이 산맥을 가리킨다.

“이쪽은 이제 막 넘어온 놈들이 모이는 곳이라 백터가 굳이 올 이유가 없습니다. 쩌리들은 흡수해 봤자 마기가 안 오르니까요.”

“상태를 보니 그리 오래된 거 같지는 않습니다.”

“흐음.”

놈들의 말에 미간을 찌푸렸다.

백터, 뭐가 됐든 신성에 들 정도의 강자가 왜 이곳에 왔을까.

놈이 만족스러울 정도로 강한 놈은 또 왜 여기 있던 거고.

잘은 모르겠지만.

‘놈들의 서열에 문제가 생긴 건 분명해 보이는군.’

신성이라 불리는 강자, 혹은 그에 준하는 이들이 싸웠다는 거였으니까.

이후 텅 비어 버린 곳에 내가 잡은 무리들이 터를 잡은 거고.

주변을 훑었다. 처음 온 곳이라 별 생각 없었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지형이 바뀌었어.”

“그에에.”

전투에 의해 땅이 파이고 바위가 터진 흔적이 보인다.

후렌 키아노 역시 뭔가를 느꼈는지 탐색에 나섰고.

[AAA급 권능, 소문 수집가를 발휘합니다.]

[사이코메트리 (S) Lv.10]

-지이이이이잉

권능과 스킬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과연 내비게이션. 정보 수집에 특화된 녀석이다. 사이코메트리는 꽤 귀한 스킬인데.

무엇을 보고 있는 것일까. 침음을 삼키며 눈을 찌푸린 녀석이 입을 딱 벌린다.

“자, 잡았습니다. 잡았어요!”

“뭘 잡아.”

“백터가 또 다른 신성을 잡았다고요.”

“그 스케빈져가? 누굴 잡았는데.”

“다밀락. 신성중에서 하위급이라고는 하지만 설마 백터가 직접 싸움을 걸 줄이야. 상황을 봤을 때 부상을 입은 다밀락이 경쟁을 포기하고 산맥을 넘으려 했던 거 같습니다.”

“백터가 그 전에 먼저 죽인 거고 말이지.”

다밀락이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신성 중 한 명이라는 건 알 수 있었다.

스케빈져라는 불명예스러운 별명을 얻어 가며 숨죽여 있던 놈이 직접 나섰다는 건 고무적인 일이었다.

“이걸로 신성은 8명으로 줄었군요. 큰 변화가 생길 겁니다, 이블아이 님.”

“한쪽을 잡아먹었다는 건 다른 한쪽이 앞서나간다는 것과 마찬가지니까요. 다른 신성들도 뒤처지지 않게 움직이기 시작할 겁니다.”

투톱 9신성으로 굳었던 세력 구도에 변화가 생겼다.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이번 변화가 첫 번째 챕터에 직접적인 영향을 줄 것이라는 걸.

한 가지 걸리는 점이 있다면…….

‘첫 번째 챕터의 제목은 잔당이야.’

잔당이 뜻하는 바는 하나, 천족의 잔존 세력.

아직까지 마주친 적 없는 세력이다. 그들과 백터. 다른 신성과 연옥의 왕이 될 거라 예상되는 두 강자. 그 사이에 무슨 연관이 있을까.

“뭐든 상관없어. 나 혼자 하는 것도 아니잖아.”

천족 진영에는 핥짝이와 냥펀이 있다. 마계에는 탈모맨이 있고.

우선 내가 할 수 있는 것에 집중하자. 결국에 해야 할 일은 정해져 있으니까.

일단은 휴식.

놈과 달리 난 무리를 지어 움직이고 있다. 나뿐만 아니라 무지개단 녀석들의 컨디션도 챙겨야 한다는 것.

‘이놈들도 조금씩 강해지고 있어.’

다른 무리를 잡으며 마기를 흡수한 건 놈들도 마찬가지니까.

길게 숨을 내쉬며 전방을 바라봤다.

중앙에 들어섰다는 것이 실감 나기 시작했다.

* * *

연옥의 중심부.

본격적인 경쟁에 참전한 지 대략 일주일이 흐른 타이밍.

산맥을 벗어나 안쪽으로 향했다. 중간에 마주친 무리도 있었지만 별다른 문제 없이 처리할 수 있었고.

“이야아! 이번 놈들은 좀 빡셌습니다?”

“그래 봤자 이블아이 님께는 하찮은 놈들이지만요.”

승리를 자축하며 아부를 하는 후렌과 루나르.

전투에서의 승리, 그로 인해 강해지는 건 좋은 소식이었다만…….

“아까 마지막에 있던 놈이 하는 말 들었지?”

“예, 확실히 변화가 생겼더군요.”

이번에 잡은 놈들은 백터의 산하임을 자청했다.

대장으로 보이던 녀석 역시 백터의 표식을 얼굴에 새기고 있었고.

정작 본인은 없었던 만큼 거짓말일 가능성도 있다.

신성의 가호를 받고 있다고 하면 어중간한 놈들은 건들길 꺼릴 테니까.

전략적으로 거짓말을 했을 가능성도 있다는 말.

그럴 가능성도 있기는 한데.

‘진짜 같았단 말이지.’

없애 버리기 전에 대화를 조금 나눌 수 있었고, 생각보다 구체적인 백터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묘하게 충성심이 있는 것도 같았고.

한 가지 더 특이한 점이 있다면.

‘미약하게나마 신성력이 느껴졌어.’

정확히 말하면 악마 주제에 성물을 가지고 있었다.

손에 들린 작은 토템 하나. 장난감 혹은 상징적인 무언가를 표현한 물건인 듯했는데.

[망가진 선명한 바람의 토템 (AA)]

-치유의 힘이 담긴 바람을 불러일으킵니다.

-아군과 적군을 가리지 않습니다.

-망가져 제대로 된 성능을 발휘할 수 없습니다.

치유 옵션을 가진 성물.

층에 오르면서 눈이 높아져서 그렇지 AA급 아이템도 상당히 좋은 물건이다.

게다가 광역 치유 효과는 꽤 귀한 능력이고.

다만 망가져서 그다지 쓸모는 없을 거 같다. 지금은 그저 신성력이 담긴 물건 정도의 가치를 지녔다고 해야 하나.

이걸 놈들이 왜 가지고 있었을까.

단순히 생각하면 천족과의 전투에서 승리한 기념품이나 노획한 물건이라 보는 게 맞다.

아니면 전쟁 중에 유실된 물건을 주운 걸 수도 있고.

이상한 부분은…….

“너희, 신성력이 있는 물건 가지고 다니냐?”

“그런 걸 왜 들고 다닙니까. 가지고 있는 것만으로도 힘 빠지는데.”

“가지고 있으려면 그럴 수는 있는데 굳이요?”

마기와 신성력은 상반되는 능력. 그 자체로 대미지를 줄 수 있다.

특별히 성능이 좋은 물건이 아니라면 굳이 가지고 있을 필요가 없다는 뜻.

일단은 챙겨 두자. 망가지기는 했지만 신성력이 담긴 물체는 구하기 힘든 편이었고, 나중에 장비 만들 때 재료로 사용할 수도 있으니까.

“오늘 다들 고생이 많았으니 내일까지는 푹 쉬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요?”

“맞습니다. 진짜 죽다 살아났어요. 보이십니까? 당 떨어져서 손이 덜덜 떨리는 거.”

손 떠는 시늉을 하는 후렌 키아노.

누가 보면 진짜 그런 줄 알겠다.

뭐, 고생한 건 사실이라 뭐라 할 말은 없지만.

“하여간 엄살은… 좀 쉬어라. 그래야 또 구르지.”

“흑흑. 바퀴도 아니고 맨날 구르기만…….”

“진짜 굴려 줘? 말만 해.”

“사실 전 이렇게 땀 흘리며 하루를 알차게 살아가는 게 꿈이었습죠!”

차렷하며 경례를 하는 녀석. 이래서 악마 놈들이란.

이제는 각자 역할이 정해져 누가 말할 것도 없이 경계를 설 놈들은 경계를 서고, 식사 당번은 식사를 준비한다. 나머지는 개인 정비.

무리가 꽤 늘었다. 지금은 대략 40명에 가까운 인원이었으며…….

“어이! 어디 신참이 건방지게 무지개를 몸에 둘러. 콱 씨!”

“염색약 남았냐? 나도 오른쪽 다리 주황색으로 바꿀까 생각 중인데.”

“이왕 할 거면 이블아이 님이랑 다른 느낌으로 해야지. 봐라, 파란색 투구가 얼마나 멋져!”

무지개단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점점 장비가 알록달록해지고 있었다.

이 무슨 해괴한 광경인가 싶기는 했지만.

‘내가 저 꼬라지라 할 말이 없네.’

한 소리 하기에는 양심에 찔려서 못 하고 있다.

다들 고생하는 듯하니 오늘은 나도 실력 발휘를 해야겠다.

“오랜만에 내가 요리를 해 주마.”

“오오오오! 이블아이 님의 요리! 저희야 감사할 따름이지요.”

“저번에 먹었던 게 잊히질 않습니다. 하하하하!”

“그럼 그럼, 나도 먹다 죽는 줄 알았다니까?”

헬다잉 키친와 파트너십을 체결한 만큼 틈틈이 요리를 하고 있다. 새로운 식재료도 찾아보고.

연옥계 역시 식생이 특이한 만큼 평소에는 볼 수 없던 것들이 많아 레시피를 개발하는 맛이 있었다.

커다란 냄비에 정체불명의 재료를 넣고 끓였다. 먹을 수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거야 뭐 악마들한테 먹여 보면 알 수 있는 거니까.

악마라 그런지 위장이 튼튼하더라고.

그렇게 요리를 하는 타이밍.

“저, 적 발견! 기습입니다!”

경계를 서던 놈들이 소리를 질러 댔다.

기습? 이미 일대에 있던 놈들은 거의 다 정리했을 텐데.

다른 곳에서 넘어온 놈들인가? 가뜩이나 전투가 끝나고 얼마 되지 않은 상황. 악마들의 컨디션이 좋을 리가 없다.

일부러 이 타이밍을 노리고 들어왔다고밖에 생각할 수 없는 상황. 곧장 검을 빼 들었고.

“…천사?”

우리를 향해 덤벼드는 놈들의 정체를 확인할 수 있었다.

그동안 마주친 적 없는 세력, 천족.

신성력을 뿜으며 덤벼드는 놈들에 대항해 악마들 역시 마기를 끌어 올리며 무기를 쥐었고.

“이놈들아! 다들 무지개단의 규율은 기억하고 있겠지!”

“적당히 혼쭐내 주자고!”

천족 무리와 격돌하기 시작했다.

무지개단의 규율. 천족을 죽이지 말 것.

상당히 까다로운 요구기는 하다. 상대는 나를 죽이려 하는데 자신은 그럴 수 없으니까.

실력이 월등히 뛰어나지 않으면 힘든 일이었으나.

“겁도 없이 이 인원으로 덤빈 거냐!”

“무지개단의 무시무시함을 보여 주마!”

이쪽이 훨씬 인원이 많았다.

기껏해야 천족들은 20명 가량.

그나마 무장 상태가 좋기는 했지만 전체적인 전력 차를 뒤집을 수는 없었다.

-카아아아앙!

“크윽! 중앙으로 넘어온 지 얼마 안 된 놈들이라 하지 않았나!”

“방금 전투를 치른 걸로 아는데 어째서!”

나름 절호의 기회라 생각하고 덤빈 거 같은데 상대를 잘못 골랐다.

날아오는 검을 가볍게 쳐낸 후.

“그렇게 함부로 덤비면 안 되지, 이것들아.”

-파앙!

“끼햐오옥!”

힘차게 놈의 엉덩이를 걷어차 줬다.

괴상한 비명과 함께 날아가는 녀석. 역시 천사라 그런가 잘 날아가네.

내 기준에는 아직 부족하지만 무지개단 또한 빠르게 강해지고 있는 상황.

별다른 사상자 없이 천족들을 몰아붙였고.

“제, 젠장! 후퇴다!”

“여길 무슨 수로 빠져나갑니까!”

“빌어먹을, 어떻게서든 살아남아!”

수세에 몰린 놈들이 악을 쓰며 발버둥 쳤다.

못 빠져나가기는 뭘 못 빠져나가. 알아서 도망치라고 퇴로까지 열어 뒀구만.

정작 본인들은 진지하게 목숨을 건 사투를 벌이고 있다만.

적어도 겉으로 보기에는 절체절명의 순간으로 보이기는 했다. 수많은 악마에 둘러싸인 채 사투를 벌이고 있었으니.

언제 전멸해도 이상할 게 없는 모양새.

놈들이 죽음을 각오하고 자리에서 이탈하기 시작한다. 슬쩍 달 도망치라고 길까지 열어 주는 악마들.

“적당히 뒤쫓는 척하다가 돌아와라.”

“예! 제가 또 그런 걸 잘합니다!”

뭐가 됐든 놈들이 또다시 덤벼들면 귀찮으니 겁을 줄 생각.

내 명에 따라 루나르가 악마들을 데리고 놈들을 추격했다. 위협용 공격도 적당히 던지면서.

몇몇 눈먼 공격에 맞은 천사들이 바닥을 구르기까지 한다. 살상력은 딱히 없어 바로 일어나 도망쳤지만.

이 정도면 됐다 생각했는지 루나르와 부하들이 추격을 멈추려는 시점.

-콰아아아아앙!

“으아아아악!”

“뭐, 뭐야!”

가공할 만한 위력의 공격이 떨어졌다.

내가 보기에도 범상치 않은 위력.

긴장감을 가지며 공격이 날아온 곳을 바라봤다.

언덕을 타고 홀로 걸어오는 놈이 하나.

거리가 제법 있는데도 느껴지는 강력한 마기.

“배, 백터입니다. 이블아이 님!”

신성 중 한 명이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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