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탑에 갇혀 고인물-402화 (401/740)

402화 중앙으로 향할 이유

루나르를 제압한 후 흐름에 맞춰 고위 악마임을 천명했다.

당연히 거짓말이었으나 마계 진영으로 활동할 거면 이런 식으로 콘셉트를 잡는 게 좋을 거 같아서.

천계와 마찬가지로 마계 역시 서열이 존재한다. 그렇다고 천계처럼 신분이 나뉘는 건 아니고.

‘누가 더 강한 악마인지 순위를 매긴 거랑 비슷하지.’

보다 더 강한 악마가 더 많은 권력을 지녔다.

힘의 논리로 흘러가는 곳.

한 가지 특이점이 있다면…….

‘얼마든지 본인 능력에 따라 위로 올라갈 수 있어.’

강해질 시스템은 준비되어 있다.

다른 악마를 죽이거나 복종시키면 대상의 마기 일부를 흡수할 수 있으니까.

만약 전투에 패배한 악마가 복종하지 않는다면? 그때는 뭐 죽여서 흡수하는 거고.

강할수록 더 강한 악마와 싸울 수 있고, 얻을 수 있는 것이 많아지는 구조다.

악마들이 전투를 좋아하는 것도 이 때문이었고, 그 성향은 마계에 국한되지 않았다.

전투를 통해 상대의 힘을 흡수하는 종족 특성상, 천마대전이니 중간계 침습이니 온갖 사건 사고를 일으키는 동네였으니까.

“오오! 이블아이.”

“근데 이블아이는 최하급 마물 아닌가?”

“어허! 스스로를 낮춰 상대방의 방심을 유도하는 참으로 간악하고 악마다운 전법임을 몰라보고!”

“역시 고위 악마, 치졸함에 온몸이 떨리는군!”

한번 고위 악마로 각인을 시켜 주자 별것도 아닌 걸 좋을 대로 해석한다.

욕인지 칭찬인지는 모르겠지만 나야 좋지.

강한 악마는 위험하기는 하지만 선망의 대상이라고 하니까.

“나 루나르, 이블아이의 심복이 되고 싶습니다!”

죽기 싫어서인지 아니면 내 편에 붙고 싶은 건지 루나르가 한쪽 무릎을 꿇었다.

후렌도 그렇고 이 녀석도 그렇고 일단 불리하다 싶으면 심복을 자처하는 거 같은데.

당연한 결과일지도 몰랐다. 복종하지 않는 악마는 죽는다고 보면 되니까.

녀석을 받아들이는 건 괜찮은 선택이라 본다.

우선 놈이 다시 덤비더라도 충분히 제압할 자신도 있고…….

‘아직 난 이곳에 대한 정보가 부족하단 말이지.’

루나르 역시 근방에서는 가장 강하다고 일컬어지는 악마.

다른 악마들과 교류가 있을 가능성이 있었다.

“좋다, 널 내 무리로 받아 주지.”

“오오오오!”

“저희도 받아 주시는 겁니까!”

“치사하고 옹졸하게 루나르만 받으시는 건 아니겠지요?”

“이 멍청아! 설마 고위 악마라는 자가 무리를 키우는 걸 무서워해 꼬리를 말거라 생각하냐!”

“과, 과연 그렇군! 무리로 받아 주셔서 감사합니다!”

묘하게 선이 없는 악마 놈들.

왜 낯선 악마들한테서 익숙한 쁘찡 연합의 냄새가 느껴지는 걸까.

막연한 불안함이 드는 것도 잠시.

“하하하! 너희 다 내 후배다. 왜냐, 이 몸 후렌 키아노는 진작 이블아이 님을 모시며 무려 내비게이션의 직책을 받았기 때문이지!”

내 옆에서 당당히 팔짱을 낀 후렌이 놈들 앞에 나섰다.

단순 전투력만 따지면 루나르보다 약한 녀석.

대충 루나르의 무리를 훑어봐도 후렌보다 강한 놈들이 수두룩하다.

이 중에서 순위를 매기면 한 16위 정도 되려나.

찌릿. 몇 놈들이 매서운 눈길을 보냈지만…….

“눈 깔지 못해! 이 자식들, 이블아이 님의 총애를 받는 내게 눈을 부라리다니. 이블아이 님의 징벌이 무섭지도 않느냐!”

나사가 여럿 빠져 있는 후렌 키아노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나 잘했지? 하면서 내게 눈빛을 보내는 녀석.

알아서 하라고 손을 내저었다. 이런 놈이 하나 있으면 편하지. 알아서 무리를 관리해 주니까.

다른 악마들의 반응이 더 가관이다.

“크, 크흑!”

“이런 기생충 같은 녀석을 봤나. 제법 악마답구나.”

“내비게이션의 직책이라. 뭔지는 몰라도 대단한 게 분명해.”

“혹시 몰라 힘을 숨긴 걸지도. 이블아이 님도 느껴지는 마기는 약했다고.”

그야 실제로 마기가 많이 없으니까.

이놈들이랑 있다가는 나도 멍청이가 되지 않을까.

모르겠다. 애들이 멍청하면 나라도 똑똑해야지.

이상한 책임감을 느끼며 루나르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좋다. 너희를 내 무리로 받아 주고, 네게는 부하A의 직책을 내리겠다.”

“오오오! 충성을 적당히 다 하겠습니다!”

“충성을 적당히 다 하겠습니다!”

일제히 무릎을 꿇으며 외치는 녀석들.

악마 놈들, 쓸데없이 솔직한 부분이 있어. 차라리 이게 낫다. 충성을 다 한다 말하더라도 안 믿었을 거니까. 언제 봤다고 충성을 다 해.

피식 웃음을 흘릴 때.

[루나르의 무리를 흡수합니다.]

[무리의 마기 일부를 흡수합니다.]

-사아아아아!

부복한 악마들에게서 마기가 흘러나와 내게 들어왔다.

개개인에서 나온 마기의 양은 그리 많지 않았으나 전부 다 합치니.

“괜찮은데?”

70가량의 마기 스텟이 상승했다.

후렌한테 받은 것까지 합치면 대략 80점 정도.

단순 계산하면 이 정도 규모의 무리 9개만 더 먹으면 999스텟까지 올라간다는 말이니까.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지.’

스텟이라는 게 그렇게 올리기 쉬운 거였다면 악마라는 종족은 모든 차원에서 최강이었을 거다.

내가 모르는 조건이 있을 게 분명하다는 말.

당장 일반적으로 주어지는 스텟도 점수가 높아질수록 성장 속도가 더뎌지니까.

게다가 이건 일반적인 스텟이 아닌 마기. 어떤 고유 설정이 있을지 알 수 없었다.

뭐가 됐든 스타트가 좋다.

아직 발생하지 않은 문제를 벌써부터 걱정할 필요도 없고.

어찌 됐든 집단을 움직이게 됐으니 주의 사항은 말해 줘야지.

“너희들, 내 밑에 있는 동안 지켜야 할 규칙이 있다. 첫 번째, 여기 덕춘 님의 서열이 제일 높으므로 까불지 말 것.”

“그에에.”

어깨에 올라탄 덕춘이를 들어 놈들 앞에 보였다.

위엄 어린 울음과 함께 주먹을 쥐어 기선 제압을 하는 덕춘이.

몇몇 악마가 수군거렸지만 내버려 뒀다. 저러다 까불면 목 돌아가는 거지. 그것까지 막을 생각은 없다.

“다음으로 천족은 건들지 않는다. 피치 못한 사정으로 싸우게 되더라도 죽이지는 말 것.”

“그게 말이 됩니까!”

“천족놈들 눈에 보이는 족족 조져야 하는 거 아닌지요?”

반발이 있을 줄 알았다.

뭐가 됐든 천마대전이 일어난 세계관. 두 종족 간의 이미지는 섬멸해야 하는 적으로 굳어져 있을 테니까.

이해는 하지만 안 된다. 놈들의 생각이 어떻든 난 이번 시나리오를 무사히 클리어하는 것이 목표라서.

“불만이 있는 자는 나가도 좋다.”

“그럼 난 나가겠소!”

“대신 나가면 나한테 죽는다.”

“사실 난 천족이 좋소!”

행동력 좋은 악마가 행동력만큼이나 빠른 태세 변환으로 소중한 목숨을 지켰다.

놈들 입장에서는 이해할 수 없는 규칙이었으나 대충 고위 악마의 위대한 계략이라 얼버무렸다.

싫으면 나가면 되고, 나가면 마기가 되어 나와 함께할 테니 운명 공동체임에는 바뀌지 않는다.

암, 그렇고말고.

이렇게 끈끈한 연대 의식을 갖추는 타이밍.

“자! 이 자식들, 나를 따라 이블아이 님을 따르게 된 걸 축하한다. 무지개단의 일원으로 부끄럼 없이 행동하도록!”

“와아아아아아!”

“무지개! 무지개!”

“연옥을 무지개로 물들이자!”

과도한 충성심에 돌아버린 후렌 키아노가 멋대로 무리 이름을 지어 버렸다.

엄지를 세우며 나 잘했지? 하는 눈빛을 보내는 녀석.

물론 소속감을 위해서라도 집단 이름을 짓는 건 중요하다. 무지개만큼 나와 직관적인 이미지도 없고.

하나가 되어 무지개를 연호하는 놈들을 보니 나름 통하기는 한 거 같은데 왜 화가 날까.

“후렌 키아노.”

“예! 이블아이 님!”

“머리 박고 서 실시.”

“시, 실시!”

콰앙!

망설임 없이 땅에 머리를 박고 차렷 자세를 하는 녀석.

예상치 못한 상황에 악마들이 눈을 깜빡이고.

“부하A, 이쪽으로.”

“아, 예.”

“후렌이 말하길 연옥에서 가장 큰 세력을 가진 애들이 메피스토랑 그리가라는 악마라고 하던데, 맞아?”

“맞습니다. 메피스토는 마계에서도 유명한 놈이었고, 그리가는 천마대전 때 급부상한 악마죠.”

“그 외에 신성이라 불리는 놈들도 있다던데.”

“대충은 압니다. 저도 이쪽을 완전히 먹고 중앙부로 진출하려 했어서 모아 둔 정보가 있거든요.”

잘됐다. 안 그래도 놈들에게 관심이 있던 터라.

자잘하게 먹을 필요 있나. 큼지막한 것들로 씹어 먹으면 되지.

가뜩이나 챕터가 언제 어떤 식으로 끝날지 알 수 없어 가능한 빠르게 움직이는 편이 좋았다.

“어떤 놈들이지?”

“대부분 이주해 오면서 큰 놈들이라 알려진 게 많지는 않은데 몇몇은 특이한 점이 좀 있죠. 대공의 자식도 있고, 시체 처리반이었던 놈도 있고.”

“시체 처리반?”

“예. 천마대전 때 전장에서 죽기 직전인 애들 잡아가면서 급격히 강해진 놈들인데, 워낙 양아치기도 하고 가진 힘에 비해 실력이 그리 좋지 않다는 평이 많아요.”

막타만 치고 다녔다는 거군.

뭐가 됐든 죽인 건 죽인 거니까 마기를 흡수했을 거고.

정했다. 그놈들부터 잡아야겠다. 뽑아 먹을 게 많을 거 같아서 말이지.

“평가가 어떻든 간에 천마대전에 참가했고 살아남았으며, 막대한 마기를 흡수하게 된 것 역시 사실이라 쉽게 볼 놈들은 아닙니다.”

“그렇겠지. 방심할 생각은 없어.”

“방심하더라도 이블아이 님이라면 걱정 없겠죠. 헤헤헤.”

바로 아부 모드로 들어가는 녀석.

반은 흘려들었다. 빈말이 아니라 진짜 방심할 생각은 없다.

놈도 방금 말하지 않았던가. 이곳 일대를 먹은 후에 중앙에 진출할 생각이었다고.

이쪽은 변방. 신성이니 뭐니 하는 놈들이 있는 곳에 나가려면 최소 변방의 왕은 되어야 한다는 뜻이었다.

“그런데 신성에 대해 물으시니 이주한 지 얼마 안 되셨나 봅니다?”

“나름 사정이 있어서 말이지.”

“천마대전이 끝나고 잠시 휴식을 취하셨겠죠. 그럼요 그럼요.”

신성력을 가지고 있는 고위 악마 콘셉트인지라 그런지 알아서 납득한다.

고위 악마 중에서도 신성력을 지닌 이들은 천마대전에서 활약한 이들 뿐이니까.

잠시 눈치를 살피던 놈이 슬쩍 다가온다.

“그럼 이것도 모르시겠군요.”

“어떤 거.”

“아시다시피 천마대전이 끝나고 빠르게 철수하지 않았습니까?”

그렇다고 들었다. 기껏 전쟁에서 승리하고 천계를 제대로 흡수하지 못한 이유도 그 때문이고.

“그때 유실되거나 두고 간 물건들이 제법 된다더군요. 나중에 올 때를 대비해 숨겨 둔 것들도 있고요.”

“그 말은?”

“소문에 의하면 중앙에 그런 곳이 많다고 합니다. 어차피 진출할 거 보물도 챙겨 가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훌륭하다, 부하A!”

급하게 철수하며 숨겨 둔 보물들이라.

중앙으로 나아가야 할 이유가 하나 더 늘었다.

* * *

조현수가 변방에서 세력을 키우는 시점.

천계 진영에서도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자자, 하나에 정신을.”

“정신을!”

“둘에 차리자.”

“차리자!”

“하나.”

“정신을!”

“둘.”

“차리자아아아!”

팔굽혀 펴기를 하며 얼차려를 받는 천족들.

그쪽에는 다리를 꼰 채 그들을 내려보는 이가 있었으니.

“전쟁터에서는 신분이고 뭐고 없다. 군인일 때는 신분이 아니라 직급이 깡패고, 상급자가 명령을 하면 하급자는 따르는 게 이치지. 맞아?”

“맞습니다!”

제2 천계에서 입대를 당한 핥짝이가 그때의 경험을 살려 천족의 잔당을 교육하고 있었다.

그녀의 어깨에는 훈장이 달린 군복이 걸쳐져 있었으니.

“꼬우면 덤비고, 계급장 걸고 한판 해.”

“으흐흐흑! 천계로 돌아갈래. 여긴 또라이가 너무 많아.”

원래 군복의 주인이었던 천족은 구석에서 처량하게 떨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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