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8화 77층
뜨끈한 용암이 흘러넘치는 곳.
저번과 달리 이번에는 다 같이 같은 대기실로 떨어졌다.
마지막 시나리오 전에는 하나의 대기실만 쓰는 건지, 내가 모르는 다른 대기실이 있는지는 확실치 않지만.
위치를 말했기 때문일까 멤버들이 모이는 건 오래지 않았다.
“와! 와! 사람이에요!”
“와아, 대단하네요. 사람이 다 나타나고.”
자칭 마그마 요정. 본명 엘로이즈가 능선을 타고 내려오는 멤버들을 보며 팔짝 뛴다.
적당히 맞장구쳐 주며 녀석들이 오기를 기다렸고.
“오오오오! 상위 헌터다!”
“사람이야, 사람!”
“우리 말고 있을 줄은 알았지만 여기서 볼 줄 몰랐네.”
멤버들도 크게 다르지 않은 반응을 보였다.
나야 헨다잉 키친 모임에서 상위 헌터를 먼저 봤었지만 얘들은 이번이 처음이니까.
신기하다면 신기한 광경이다. 심지어 그 사람이라는 게…….
-뚝, 뚜욱
-치이이이익
갑옷에서 용암을 흘리고 있는 중이라면.
“아니. 용암에서 나왔는데 왜 자꾸 나오는 거예요, 그거?”
“오랜만에 사람들을 만나서 저도 모르게 긴장했나 봐요.”
긴장하면 용암이 나오는 체질인가, 그것참 위험하네.
됐다. 탑이 이 꼴인데 이곳에 있는 사람들도 멀쩡할 리가 있나.
그동안 겪어온바, 귀납적 추론으로 제정신이 아닌 사람일수록 위로 잘 올라간다는 결론이 났다.
탈모맨, 핥짝이, 냥펀만 봐도 알 수 있는 대목이지.
나도 무한 코인이 없었다면 정상인이라 여기까지 오르지 못했을 거다.
“그에에.”
“밥을 덜 먹였나. 왜 자꾸 그런 눈으로 보냐.”
주인에 대한 존경심은 없어도 벌레 보듯 보는 건 너무한 거 아닌가. 잘 때 코 찔러야지.
내 생각을 읽은 덕춘이가 작은 주먹을 옹골차게 말아 쥐었고.
“하하, 사탕 먹을래?”
자연스레 보물 주머니에서 덕춘이 전용 사탕을 꺼내 물려 줬다.
최근 덕춘이한테 덜 맞아서 긴장감을 놓고 있었네. 이래서 사람이 익숙해지는 걸 경계해야 해.
아무튼.
“연합에 대해 알고 있다면 대충 눈치챘을 테지만 다들 쁘찡 연합 소속이죠. 몇 명은 알아볼지도 모르겠네요.”
자연스레 사이에 껴서 멤버들을 가리켰다.
웃으며 먼저 인사를 건네는 탈모맨.
“탈모맨이라고 불러 줘요, 하하!”
“저런, 젊은 나이에.”
“아, 진짜 탈모는 아니니까 신경 안 써도 됩니, 악!”
탈모맨의 발등을 짓밟은 핥짝이도 손을 내밀었으니.
“핥짝이라 불러. 정수리가 예쁘네.”
“와, 엄청 크시네요. 저도 작은 키는 아닌데.”
실제로 엘로이스는 나보다 살짝 작은 정도. 아마 170 중반은 될 거다.
핥짝이 키가 워낙 커서 작아 보이는 것일 뿐.
그 증거는 옆에 있는 냥펀을 보면 된다.
흥미를 보이면서도 핥짝이 뒤에 붙어 나서지 않는 중.
커뮤니티에서 사진도 올리고 닉네임을 밝힌 핥짝이와 탈모맨과 달리, 아직도 냥펀은 대중에게 정체를 공개하지 않았다.
“난 냥펀!”
녀석이 손을 흔들었고.
다만 지금 와서는 대부분 냥펀의 정체를 눈치챈 거 같다. 아이돌 출신인 건 모르는 거 같지만.
본인도 그걸 아는지 별 거리낌 없이 닉네임을 말한다.
마그마 요정이 있다고 말은 했으나 진짜 사람이 있을 줄은 몰랐는지 가면을 벗고 있기도 했고.
“오오, 반짝반짝! 귀여워!”
“에극! 용암 묻어!”
엘로이즈가 냥펀이 마음에 들었는지 안으려 했지만 잽싸게 도망간다.
일단은 경계심이 큰 녀석이라. 이번에야 아티팩트에 용암 떨어질까 봐 피한 거 같지만.
어디 보자. 멤버들 소개는 대충 끝났으니.
턱으로 엘로이즈를 가리켰다.
“이쪽은 마그마…….”
“엘로이즈 베흐나흐예요. 프랑스 출신이고요. 다들 한국분이시죠? 한번 가 보고 싶은 곳이었는데!”
여기서 갑자기 정상적으로 나온다고?
어이가 없어 투구도 벗고 그녀를 바라봤고.
“왜요?”
새침하게 날 올려다본다.
뭐지, 왜 억울하지?
“프랑스 출신인 마그마 요…….”
“오랜만에 사람을 만나서 기뻐요. 다들 올라오느라 고생 많았죠? 서 있지 말고 일로 와요. 여기 오래 있어서 꾸민 곳이 있어요.”
맞네, 일부러 피하는 거네.
본인도 마그마 요정이라 말하는 게 부끄럽긴 한 모양.
1대1이면 모를까 여러 사람한테 말하는 건 좀 그렇지. 알고 싶지는 않았지만 내가 그 마음 안다.
그녀의 안내에 따라간 곳은 시커먼 굴.
“용암 터널이에요. 제법 크고 복잡한데 저만 따라오면 큰 문제는 없을 거예요.”
일대가 전부 화산이라 그런가 사이즈가 상당하다.
동굴 같은 것이 현자가 있던 곳이랑 비슷한 느낌.
그때보다 훨씬 뜨겁기는 하지만, 그러고 보니…….
‘현자는 잘 만들고 있으려나.’
제2 천계에서 만났던 에이션트 몬스터. 에이션트 나이트 메어 파무스.
그 녀석의 영혼을 담아 보냈는데, 성공적으로 호문쿨루스로 만들었을까.
원대한 부활 사업의 소중한 실험체였는데.
마지막 시나리오를 끝내면 80층이니 릴카한테 물어보면 되겠지.
-우우우웅
용암 터널 안으로 들어갈 때마다 조명이 밝아진다.
발광석인가. 대기실에 혼자 있어서 심심했는지 터널 곳곳에 꾸민 티가 난다.
등반할 때야 몬스터니 뭐니 해서 정신이 없지만 막상 쉴 때면 할 게 없는 게 탑이라.
스윽. 터널 벽을 손가락으로 훑었다.
매끄럽다. 자연 생성된 것이었다면 표면이 거칠 텐데, 전부 다듬은 건가?
약간의 호기심이 생겨 권능을 사용했고.
“허.”
[인조 용암 터널 벽]
-인위적으로 만든 용암 터널의 벽입니다.
-공들여 매끈하게 만들었죠!
정체를 알 수 있었다.
우리가 걷고 있는 용암 터널. 엘로이즈가 직접 만든 거다.
괜히 여기까지 올라온 게 아니라는 거겠지.
그녀를 따라 들어간 공간. 투박하지만 깔끔한 의자와 테이블. 직접 만든 것으로 보이는 침대.
원룸 비슷한 공간에 들어가 앉았고.
“이 정도로 인원이 모였으니 위로 올라가는 것도 금방이겠네요.”
“아마도 그렇겠죠?”
“이것도 인연인데 말 편히 할까요?”
엘로이즈가 제안했고 받아들였다. 이미 핥짝이와 냥펀은 말을 놓고 있다.
“겪어 봐서 알겠지만 70층대가 단순 클리어하기는 어렵지 않지만 성과를 내기에는 어렵죠.”
“그건 맞지.”
나도 인정한다. 우리들도 적극적으로 일에 가담해서 그렇지 단순히 클리어를 노렸다면 고생할 필요도 없었다.
히든 가든 때도 그냥 숲 어딘가에 박혀 있던가, 밖으로 나와 적당한 곳에 터를 잡아 시간을 보냈어도 저절로 사건이 흘러갔을 테니까.
다만 그럴 경우 혼돈 수치를 제대로 얻지 못한다는 단점이 있지만.
‘100층이 아니더라도 혼돈의 파편을 상대하려면 혼돈 수치가 있어야 돼.’
일정 수준에 이르지 않으면 놈들에게 상처를 입히는 것조차 불가능하니까.
아직까지는 맞닥뜨리지 않았지만 앞으로도 그럴 거라는 보장이 없다.
“70층 마지막 시나리오는 더 심할 거야. 상위 헌터들도 꽤 묶여 있을걸?”
“엥? 그걸 어떻게 알아?”
냥펀이 관심을 보인다.
“나도 팀이 있어서, 요정 클럽이라고. 정보를 들은 게 있지.”
“오오오오!”
“그런 정보를 왜 주는 거야? 단순 호의?”
감탄하는 탈모맨과 살짝 의심을 하는 핥짝이.
정보는 곧 힘. 쁘찡 연합이야 밑바탕 자체가 대형 길드가 뿌린 거짓 튜토리얼 공략에 대한 반감이 섞여 있어 정보를 공개하지만 보통은 아니다.
따지고 보면 오늘 처음 만난 사이. 사람 자체가 좋은 걸 수도 있으나 다른 의도가 깔려 있지 말란 법도 없었다.
이 정도 의심은 당연하다고 생각하는지 엘로이즈도 투구를 벗으며 눈을 찡긋했다.
어떻게 생겼나 했더니만 갈색 생머리의 여인. 주근깨가 있었지만 오히려 매력적인 인상을 풍겼다.
활동적인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뭐어, 쁘띠공듀한테 관심이 있어서 알아보니 쁘찡 연합도 나쁘지 않아 보이더라고? 괜찮은 거 같으면 우호적인 관계를 가져도 좋을 거 같아서. 일종의 투자이자 호의지.”
루키 그룹에 이어 요정 클럽. 이 외에도 상위 헌터들이 모여 만든 집단이 더 있을 거다.
서로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믿을 만한 세력이면 좋은 사이로 지내는 편이 낫다. 괜한 마찰을 일으킬 필요는 없으니까.
“시나리오에서 보면 서로 도와주자고. 너희도 여럿이지만 나도 도움을 주기로 한 사람이 있거든.”
“도움을 줄 사람?”
“응, 루키 그룹 일원. 아! 너희도 알지도 모르겠다. 한국 대형 길드 출신이라고 했으니까.”
그렇겠지. 루키 그룹이 애초에 대형 길드 루키들이 모인 곳이니까.
“산군 길드의 김조균이라고 아직 80층에 못 올라갔다고 했으니 시나리오 안에 있을 거야.”
“산군이면 거기네.”
“거기 오징혁 있던 곳 아냐?”
“맞아. 아직 밖으로 나가지 않은 루키가 있다더니.”
김조균이라, 이름 특이하네.
오징혁한테 연락해 볼까. 그 녀석도 루키 길드에서 접근해 왔다고 했다.
뭐가 됐든 그놈도 대형 길드 출신이기는 하니까. 준루키 취급을 받고 있기도 했고.
지금이야 산군과 척을 졌지만.
이놈도 70층대에 올라왔으니 나중에 만날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그건 그거고.
적당히 휴식을 취하는 타이밍.
[적정 인원이 모였습니다.]
[다음 시나리오로 전송됩니다.]
메시지가 떠올랐다.
사람이 이 정도 모였으면 충분히 그럴 만하지.
좀 일찍 가는 게 아닌가 싶기도 했지만 그거야 우리 입장이고.
“드디어 간다! 내가 여기서 혼자 몇 달을 있었는데!”
엘로이즈 입장에서는 그게 아니라서.
오래 있다는 말은 들었지만 몇 달일 줄은 몰랐네.
-파아아아앗!
빛이 터져 나온다. 77층으로 이동되는 상황.
“아! 너희 가능하면 영약이나 그런 거 모아! 그래야……!”
엘로이즈가 사라지기 직전, 뭐라 소리쳤고.
[77층에 진입합니다.]
[77-79층 시나리오-천마대전天魔大戰]
[당신의 유형과 스텟 등을 종합 평가해 진영을 결정합니다.]
* * *
회색의 공간. 이번 시나리오의 이름이 떠올랐다.
천마대전!
“이거 내가 아는 그 천마대전인가?”
“그에에.”
천계와 마계의 전투.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그것이었고.
[당신의 유형은 새로운 길의 선구자입니다.]
[신성력 스텟을 보유 중입니다.]
[당신의 진영이 천계로 설정…….]
-치직, 치지지지지직!
진영이 결정되려는 순간. 스파크가 튀어 올랐다.
놀라지는 않았다. 나타날 줄 알고 있었으니까.
다른 건 몰라도 진영을 정하는 거라면 내게는 선택지가 주어진다.
버그 메시지가 떠올랐다.
[당신의 유형은 정의할 수 없는 혼란입니다.]
[혼돈 수치를 지니고 있습니다.]
[진영을 선택할 수 있습니다.]
눈앞에 있는 선택지는 두 개.
천계天界.
그리고.
마계魔界.
제2 천계에서처럼 어느 쪽도 고르지 않는 방법도 있다.
소속이 없는 만큼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었으나.
“그건 아니야.”
동시에 어정쩡한 위치에 놓인다.
같은 이유로 제2 천계에 있을 때도 결국은 하얀 나무에 들어가지 않았던가.
특히나 천마대전은 전쟁이 배경일 가능성이 높다. 여기서 소속이 없다? 탈영병 아니면 적의 첩자로 치부되기 딱 좋지.
팔짱을 낀 채 생각에 잠겼다.
멤버들이 떠오른다. 멤버들이 각각 어떤 유형을 지니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어떤 스텟을 가지고 있는지는 알지.”
씨익, 입꼬리를 올렸다.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될지는 모르겠지만 순탄하게 진행된다면 이번 시나리오는 무사히 끝날 거다.
어쩌면 예정된 것보다 빠르게.
“선택한다.”
내가 속할 진영을 정했다.